3. 배 그 가 부 른 인 연
우주25(2018)년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장마가 끝난 뒤에도 무더위는 가실줄 모르고 방구석 콤퓨터의 랭각기는 밤낮으로 윙윙거리며 돌아갔다. 창밖으로는 매미소리가 한창이였고 나는 창가림을 반쯤 걷은채 화면앞에 앉아 그날 방송을 준비하고있었다.
책상우에는 마이크와 머리수화기, 그리고 다 식은 커피잔이 놓여있었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이면 늘 하던대로 나는 대화창을 먼저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지난 합방때 올라온 클립 이야기가 아직도 오가고있었다.
책상 옆 작은 선반에는 그동안 애호가들이 보내온 인형 몇개와 후원 알림신호를 낮춰둔 고성기가 놓여있었다. 나는 방송을 켜기 전이면 늘 마우스를 몇번 딸깍거려 화면 배치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아서 카메라 각도를 맞추고 대화창 폰트 크기를 한번 더 키워보았다. 별것 아닌 그 손버릇 하나에도 그날따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그 클립이란 다름아닌 포트나이트 합방에서 나와 블루님이 나란히 앉아 오락만 하고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 장면이였다. 낯가림이 심한 두 사람이 한 화면에 붙어있으니 그것 자체가 구경거리가 된 셈이였다. 시청자들은 그 침묵의 시간을 짤막하게 잘라 편집하여 웃음거리로 삼았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대화창에 《또 합방 안하나요》, 《낯가림 두 사람 시즌2 가자》 하는 말들이 자꾸 올라오는것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어차피 한번 어색하였던 사이라면 두번째는 덜 어색하지 않겠는가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어색한 침묵의 클립 하나가 후날 어떤 일의 서막이 될줄은. 후날 이 여름을 돌이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적을것이다, 력사는 가끔 침묵속에서 싹튼다고.
그 시절 《배틀그라운드》는 비단 우리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였다. 웬만한 방송에서는 하루에 한번쯤 《치킨》이라는 말이 오르내렸고 피시방마다 그 오락의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짐짓 력사가처럼 말하자면 그해 여름은 온 나라의 방송가가 하나의 벌판에 모여 락하산을 펴던 시절이였다고도 할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의 합방도 그 큰 물결 가운데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배틀그라운드》는 그무렵 방송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오락이였다. 스쿼드를 짜서 비행기에서 뛰여내리고 자기장을 피해 달리고 마지막 한명이 남을 때까지 버티는 이 오락은 유난히 목소리를 많이 쓰게 만들었다. 파밍을 하다가도 적이 보이면 소리를 질러야 하였고 누가 쓰러지면 부축하러 뛰여가야 하였다.
매니저측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니면 내 쪽에서 먼저 응하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날 일정표에 《블루 《배그》 듀오》라는 글자가 적혀있는것을 보고 나는 한참을 그 글자만 들여다보았다. 포트나이트때의 그 서먹함이 되살아나는것 같아 손끝이 조금 저렸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원래 사람을 가리는 성미가 아니였다. 오히려 한창때는 방송에서 걸쭉한 말도 서슴없이 뱉어 《강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화면 저쪽의 얼굴모를 시청자들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였다. 마이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방송원과 단둘이 오락을 하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자리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 내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를 의식하면 말문이 먼저 막혔다.
후날 내 오랜 친구 악녀는 《우결》이 한창일 때 나를 두고 우스개소리를 하나 하였다. 《너 블루앞에서는 말을 왜 그렇게 순하게 하냐, 나한테도 그렇게 좀 해봐라》 하는 말이였다. 그때는 그 말을 듣고 그냥 웃어넘기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한 말투의 뿌리는 이미 이 여름, 높임말로 서로를 부르던 그 《배그》 합방에서부터 자라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말투가 언제부터 달라지는지는 본인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 성미를 잘 아는 몇몇 지인들은 나를 두고 《마이크앞에서는 세고 사람앞에서는 약하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부정할수 없는 말이였다. 나는 그날도 듀오 일정을 앞두고 몇번이나 머리수화기줄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다잡아야 하였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나는 음성통로에 먼저 들어가 앉았다. 잠시뒤 《강지 님, 접속하였습니다》 하는 블루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높임말이 오가는 그 목소리는 낮고 담담하였다.
《네, 블루님.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하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 한마디를 하는데도 괜히 목이 메였다. 화면 한쪽에서는 이미 대화창이 《ㅁㅇㅁㅇ》라는 초성으로 도배되고있었다.
락하산이 펼쳐지고 두 사람의 인물가 나란히 하늘을 갈랐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어디로 내릴지 물었고 블루님은 지도 한켠을 짚으며 《저기 창고쪽이 조용할것 같은데예》 하고 대구 사투리 억양을 슬쩍 흘렸다. 긴장하면 튀여나온다는 그 말투였다.
착지하자마자 우리는 서로 다른 집을 뒤지느라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파밍하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총소리만 고성기를 타고 오갔다. 침묵이 다시 찾아오는가 싶어 나는 속으로 조금 초조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블루님이 소리를 질렀다. 《강지 님, 뒤에! 뒤에 사람 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방아쇠를 당기였다.
총성이 몇번 울리고 상대편 인물가 그자리에 쓰러졌다. 화면 한쪽에 킬로그가 뜨는 순간 블루님이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는 그 웃음소리는 방송을 오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웃음이였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어깨의 힘이 풀리는것을 느꼈다. 평소 차분하다 못해 무덤덤하던 사람이 게임속에서만은 저렇게 홀가분하게 웃는다는것이 신기하였다. 낯가림이라는 공통점 뒤에 숨어있던 서로 다른 얼굴을 처음 본 셈이였다.
두 사람의 플레이 방식도 판을 거듭할수록 뚜렷이 갈렸다. 나는 급한 성미대로 일단 먼저 뛰여들고 보는 편이였고 블루님은 매사에 신중하여 건물 하나를 들어가도 구석구석을 살피고서야 발을 옮기였다. 좋은 무기를 주울 때면 그는 나직하게 《개꿀!》하고 짧게 감탄하였는데 평소의 낮은 말투와는 다르게 그 한마디만은 유독 톤이 튀여올랐다. 나는 그 순간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사람에게도 저런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구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날의 첫 판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른 스쿼드에게 자기장 끝에서 발각되여 허무하게 끝났다. 그러나 그 한판으로 방안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침묵보다 대화가 많아졌고 대화보다 웃음이 많아졌다.
두번째 판에서는 내가 쓰러졌다. 저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화면이 흐려지며 인물가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다급히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블루님, 저 죽어요, 빨리요!》
블루님은 하던 파밍을 내던지고 총소리 나는 방향으로 곧장 달려왔다. 《조금만 버티이소, 갑니다》 하는 그 사투리 섞인 한마디에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그는 나를 무사히 일으켜세웠다.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선 인물처럼, 그날 우리 사이의 서먹함도 조금씩 일으켜세워지고있었다. 게임속에서 서로를 지켜준다는 그 단순한 규칙이 실제 두 사람 사이에도 작은 신뢰를 심어놓았다. 나는 그것을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날 우리는 결국 순위권에도 들지 못하고 일찌감치 관전모드로 넘어갔다. 그러나 대화창의 반응은 그 어느 판보다 뜨거웠다. 《오늘 케미 미쳤다》, 《둘이 왜케 잘맞음》 하는 말들이 쉴새없이 올라왔다.
때로는 다른 방송원 몇이 함께 스쿼드를 짜서 넷이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대화창은 오히려 둘만 있을 때보다 우리 두 사람의 호흡에 더 집중하는 눈치였다. 《저 둘이 진형 짜는것 봐라》, 《나머지 둘은 뭐하냐 저 둘만 보임》 하는 농담이 오갈 때마다 나는 괜히 겸연쩍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싫지 않은 겸연쩍음이였다.
방송을 마친 뒤 나는 혼자 화면를 끄지 못하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매미소리 대신 풀벌레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웃음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있는것 같았다.
이튿날 매니저에게서 련락이 왔다. 《반응이 좋으니 이번주에 한번 더 잡자》는 내용이였다. 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그러자고 답하였다.
그렇게 《배틀그라운드》 듀오는 그해 여름의 정례일과처럼 되여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번이던 합방이 어느새 두번, 세번으로 늘어났다. 상대의 목소리가 익숙해질수록 높임말속에서도 장난기가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지금도 짐짓 웃으며 돌이켜본다. 마치 서먹하던 두 마을이 장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오가기 시작하듯이, 우리 두 사람도 오락 하나로 서서히 서로에게 문을 열어가고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 비유가 얼마나 과장된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고있었다.
합방이 거듭되며 서로의 습성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블루님은 매운것도 단것도 잘 먹지 못한다면서도 방송 중간에는 꼭 무언가를 곽밥처럼 옆에 놓아두고 조금씩 집어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저래봬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나는 저혈압때문에 아침 방송이면 목소리가 잠긴채로 시작하는 날이 많았다. 블루님은 그런 나를 보고 《강지 님 오늘 목소리가 다르시네예》 하고 걱정 섞인 말을 건네군하였다. 사투리는 그가 방심할 때만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게임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자주 놓쳤다. 자기장이 좁아질수록 각자 살길을 찾다가 갈라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서로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방송 곳곳에서 들렸다. 《블루님 어디예요, 블루님!》, 《강지 님 저 여기 있어요!》 하는 외침이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웃음 포인트가 되였다.
어느 판에서는 마지막 두 팀만 남았는데 나와 블루님이 서로 다른 건물에 갇혀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저 못 나가겠어요, 무서워요》 하고 반쯤 장난으로 엄살을 부렸다. 블루님은 《제가 먼저 나갈테니 강지 님은 뒤에서 봐주이소》 하며 총을 들고 앞장서 문을 열었다.
그 판은 결국 우리가 이기였다. 화면 가득 《WINNER WINNER CHICKEN DINNER》라는 문구가 뜨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블루님도 평소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오예, 이기였다!》를 몇번이나 외쳤다.
첫 치킨을 함께 먹은 그날의 흥분을 나는 아직도 잊을수 없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서로 캡처화면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이야기하였다. 낯가림이 심하다던 두 사람이 어느새 방송이 끝나고도 따로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가 되여있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슬슬 이 조합을 부르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강블》이라는 줄임말이 대화창에 처음 등장한것도 그무렵이였던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 줄임말이 그저 스쳐가는 류행어인줄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력사책에 적히는 큰 사변들도 처음에는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후날에야 그 무게를 깨닫는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것을 큰 사변에 비길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블루님 두 사람의 방송 인생에 있어서만은, 그 여름의 《배그》 합방이 하나의 분수령이 되였다는 사실만은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짐짓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작은 《력사적 사변》이였던 셈이다.
합방이 잦아지자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우스운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저 둘이 저러다 진짜 사귀는것 아니냐》는 농담이 나왔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는 묘하게 싫지 않았던것도 사실이다.
어느 늦은 밤 합방을 마치고 음성통로에 둘만 남아있던 적이 있었다. 오락은 이미 끝났는데도 서로 마이크를 끄지 않은채 잡담을 이어갔다. 《블루님은 쉬는 날 뭐하세요》 하고 내가 먼저 물었던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집에 있어예, 딱히 뭐 안하는데》 하고 블루님이 대답하였다. 대단할것 없는 대화였지만 나는 그 시간이 이상하게 편안하였다. 낯가림이 심한 두 사람이 나눌수 있는 가장 큰 용기가 아마 그런 시시한 잡담이였을것이다.
그렇게 대화가 늘어갈수록 높임말 사이사이로 서로를 놀리는 말도 하나둘 섞여들었다. 내가 오락에서 서투른 조준을 할 때면 블루님은 웃으며 《강지 님 그거 총 맞나예》 하고 짓궂게 물었다. 나는 발끈하는 척하면서도 그 장난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였다.
대화창의 반응도 갈수록 뜨거워졌다. 《둘이 텐션 왜 이렇게 좋아짐》, 《저러다 나중에 무슨일 나는것 아니냐》 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말들을 그저 우스개소리로 흘려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청자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무언가를 짐작하고있었던것 같기도 하다. 마치 앞일을 앞서 내다보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대화창 한줄한줄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실마리를 이미 심어두고있었다. 나와 블루님만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을뿐이다.
어느 비 내리던 밤에는 판이 일찍 끝나 음성통로에 둘만 남아 비소리를 배경음삼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있은 적도 있었다. 그 침묵은 처음 만났던 포트나이트때의 침묵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니고있었다. 어색해서 견디기 힘든 침묵이 아니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침묵이였다. 나는 그 차이를 그때 어렴풋이 느꼈으나 말로 설명할줄은 몰랐다.
여름이 저물어갈무렵에는 《배그》 합방이 아예 정규 편성처럼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시기의 일정표를 지금도 가지고있는데, 거기에는 《블루 듀오》라는 글자가 거의 매주 반복해서 적혀있다. 처음 그 글자를 보고 손끝이 저렸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여있었다.
오락 실력도 조금씩 늘었다. 우리는 서로의 움직임을 눈빛 대신 목소리만으로 읽어내는 요령을 익혔다. 《저 왼쪽이요》 한마디면 서로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사이가 되였다.
그러나 오락 실력보다 더 크게 는것은 서로를 향한 믿음이였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상대가 반드시 와줄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낯가림이라는 벽을 조금씩 허물어가고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때는 그저 오락 파트너에 대한 신뢰인줄로만 알았다.
방송 밖에서도 서로의 근황을 묻는 일이 늘었다. 내가 목이 잠긴 날이면 블루님은 잊지 않고 《오늘도 목 안좋아예》 하고 먼저 물어왔다. 나는 그런 사소한 물음 하나에도 마음이 놓였다.
한번은 합방 도중 회선이 끊겨 블루님의 목소리가 한참 들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나는 화면속 인물가 가만히 서있는것을 보며 괜히 마음을 졸였다. 몇분 뒤 다시 목소리가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저 사람이 없으면 이 오락이, 아니 이 합방 자체가 재미없어진다는것을. 낯가림때문에 시작조차 망설였던 사이가 어느새 없어서는 안될 사이로 바뀌여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대화창은 그저 신이 나서 온갖 롱담을 쏟아냈다. 《ㅁㅇㅁㅇ》라는 초성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못 본 척 넘기려 하였으나 속으로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블루님도 그런 채팅을 보며 대답 대신 헛기침만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여름의 《배그》 합방을 생각하면 창밖의 매미소리와 콤퓨터 랭각기 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시원한 랭수 한잔을 옆에 두고 밤늦도록 자기장을 피해 뛰여다니던 그 밤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소박한 오락 하나가 두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까지 깊게 엮어놓을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어떤 밤에는 방송을 끝내고도 머리수화기를 벗지 않은채 한참을 그대로 앉아 방금 지나간 판들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콤퓨터 랭각기 소리만 방안을 채우는 그 시간이 나는 싫지 않았다. 도리어 그 적막함속에서 오늘 하루의 웃음소리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는것이 작은 즐거움이 되였다. 그런 밤이 하루이틀 쌓여 어느새 한 계절을 이루고있었다.
물론 그 모든것이 순조롭기만 하였던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손발이 맞지 않아 서로에게 서운한 티를 내기도 하였고, 어떤 날은 침묵이 다시 길어져 예전의 서먹함이 살짝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부침조차 지금 와서 보면 정이 들어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였다고 생각한다.
가을이 가까워지면서 매니저측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쌓인 합방을 정식 내용물로 묶어보자는 제안이였다. 나는 그 제안을 듣고 문득 지난 여름의 그 어색하였던 첫 판을 떠올렸다.
낯을 가려 말 한마디 못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정식 내용물의 주인공으로 거론된다는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블루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였다. 그는 늘 그렇듯 담담하게 《그라입시다, 뭐》 하고 짧게 답하였을뿐이다.
그 짧은 한마디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그때는 두 사람 다 알지 못하였다. 다만 그해 여름 《배그》 합방을 거듭하며 쌓은 그 어색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일들도 없었으리라는것만은 지금 이 글을 쓰며 분명히 말할수 있다. 후날 이 대목을 읽는 이들은 아마 웃을것이다, 겨우 오락 한판 한판이 무슨 력사의 시작이냐고.
지금 이 페지를 적으며 그때의 일정표를 다시 펼쳐보니 낯익은 글자들 사이로 잊고있던 세세한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어느 날은 《듀오 19시》라고만 적혀있고 어느 날은 그 옆에 물음표 하나가 붙어있기도 하다. 아마 그 물음표는 그날 합방이 성사될지 어떨지 확신하지 못하였던 매니저의 조심스러운 마음이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표들은 여름이 끝날무렵에는 모두 느낌표로 바뀌여있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큰 강도 처음에는 산골짜기의 가늘디가는 샘물 한줄기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도 그 여름, 자기장을 피해 함께 뛰여다니던 그 소박한 밤들에서 이미 시작되고있었던것이다.
매미소리가 잦아들고 풀벌레소리가 짙어지던 그해 늦여름, 나는 아직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알지 못한채 그저 다음 합방 일정을 확인하며 머리수화기를 정리하고있었다.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 한줄기가 스쳐지나가고있었다. 가을이, 그리고 그 가을과 함께 올 어떤 날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