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몰 랐 던 인 연

 

그해 늦여름은 유난히 밤이 길었다. 우주25(2018)년, 아직 가을이라 부르기엔 이른 어느 밤, 나는 방문을 닫아걸고 콤퓨터앞에 앉아있었다. 창밖에서는 매미소리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고 선풍기 날개가 도는 소리와 콤퓨터 본체의 랭각기소리가 뒤섞여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화면의 푸른 빛만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대화창은 쉼없이우로 흘러올라갔다. 책상위에는 마시다 만 랭수 한잔이 놓여있었고,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날은 포트나이트 합방이 있던 날이였다. 상대는 블루라는 사람이였다.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으나 얼굴을 마주하고 마이크를 나누어본것은 그날이 처음이였다. 서로 방송을 시작한지는 이미 몇해가 지난 뒤였으나 판이 다르다보니 정작 마주칠 기회는 없었던것이다.

방송을 마치고 머리수화기를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을 때, 나는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하였다. 례의바르게 인사를 나누고 오락을 하고 또 례의바르게 헤여진, 그렇고 그런 합방의 하나로만 여기였을뿐이다. 방송이 끝나면 으례 그러하듯 나는 곧바로 대화창을 닫고 다음날 올릴 영상의 미리보기 그림을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날 밤 나는 블루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방송을 끄고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사람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날의 진실이며, 후날 이 페지를 쓰게 될 나 자신조차 그날의 무심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나는 원래 낯을 몹시 가리는 성미였다. 지금이야 방송을 오래 한 덕에 낯선 사람앞에서도 곧잘 말문을 여는 편이 되였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과 마이크를 마주하면 오히려 말수가 줄어들고 딱딱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나을가 하였으나 나는 원래 술이 약하여 소주 서너잔이면 이미 얼굴이 붉어지는 처지이니, 그런 잔꾀조차 부릴수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한때 강형이라 불릴만큼 거친 말투를 썼다는것을 잘 안다. 어릴 적에는 성미가 급하고 말이 험하여 방송중에 폭풍같은 욕설을 쏟아낸다는 소리까지 들었더랬다. 그러나 그 거침은 익숙한 사람들앞에서나 나오는것이지, 처음 만나는 사람앞에서는 오히려 입이 굳어버리는것이 나의 진짜 성격이였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일수록 도리여 가까운 사이에서 말이 헤퍼지는 법이라고, 후날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일러준 일이 있다.

블루동지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날 오락을 하는 내내 그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화면속에서 적을 쏘고 건물을 짓고 락하산을 펴며 시간을 보냈을뿐이다. 대화창에서는 시청자들이 우리 둘의 침묵을 놀리듯 《둘다 말이 없네요》하는 글을 올렸으나, 그마저도 우리는 웃어넘길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날 오간 말이라야 몇마디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락 도중 위험을 알리는 짧은 경고, 그리고 방송을 마칠 때의 《수고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거의 전부였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시간 남짓한 방송에서 두사람이 주고받은 문장을 다 모아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으니, 낯가림이라는것이 얼마나 무서운 벽인지 새삼 실감하였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안부를 묻는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서로의 방송을 구독한다거나, 다음에 또 하자는 언질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만큼 그날의 상봉은 심상하고 밋밋한것이였다. 나는 그날 저녁 다른 일정이 또 잡혀있었으므로, 방송을 끄자마자 곧바로 다음 준비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그때 이미 블루라는 이름을 오래전부터 들어왔었다. 직접 만나기 훨씬 전부터, 방송판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스쳐지나가는것을 들었던것이다. 사람이란 얼굴을 모르고도 소문만으로 먼저 친숙해지는 법이 있는데, 나에게 블루라는 이름이 꼭 그러하였다.

블루동지는 서든어택이라는 오락의 클랜에서 활동하다가 방송을 시작한 사람이라고들 하였다. 그 이름부터가 사연이 있었다. 클랜의 만화영화 인물 색깔과 자신이 좋아하는 파란색을 합하여 처음에는 레인블루라 지었다가, 그것이 줄고 다듬어져 지금의 블루가 되였다는것이다. 이름 하나에도나름의 래력이 있다는것을 알고 나니 어쩐지 그 사람이 조금 더 뚜렷하게 그려지는듯하였다.

사람들은 또 그가 경상도 출신이라고 하였다. 서울말을 능숙히 구사하지만 당황하면 《~카는데》 하는 말투가 저도 모르게 튀여나온다는 소문이였다. 나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궁금해하였다. 대체 어떤 순간에 그 말투가 튀여나오는것일가, 방송에서는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배그》나 서든어택 방송에서 그가 적을 처치하고 나서 하는 말이 유명하다는것도 들어알고있었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며 웃는다는것이다. 평소에는 감정 기복이 적고 느긋한 사람인데, 그 순간만은 톤이 확 올라간다고 하였다. 나는 그 대사를 직접 들어본 일이 없었으므로 그저 소문으로만 짐작할뿐이였으며, 속으로는 대체 얼마나 무자비하게 적을 몰아붙이길래 저런 별명이 붙었을가 웃어넘기였다.

그의 애호가들을 블루몬이라 부른다는것도, 그가 그들을 향해 《쁠몬들 안녕》하고 인사한다는것도 들었다. 방송을 소개하는 말도 어디선가 옮겨들었는데, 자신의 영상을 볼 때만이라도 쁠몬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뜻이 담긴 말이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담백하고 진심어린 사람이겠거니 짐작하였다. 화려한 언변보다 소박한 진심을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그때 벌써 어렴풋이 자리를 잡았다.

매운것도 단것도 잘 못먹는다는 이야기, 애창곡이 저 장범준의 정류장이라는 이야기도 뒤늦게 들려왔다.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쌓일수록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많은것을 알아가고있었다. 그러나 그 앎은 어디까지나 남의 입을 거친 앎이였지, 내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앎은 아니였다.

이런것들은 모두 남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지 내가 직접 겪은것은 하나도 없었다. 방송판이라는 곳이 원래 그러하다. 얼굴 한번 마주하지 않고도 서로의 소문만으로 그 사람의 윤곽을 대강 그려보게 되는 곳이다. 그런 소문의 조각들을 아무리 모아붙여도 실제로 마이크를 맞대고 겪어보는것과는 또 다른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날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합방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나는 새삼스러울것이 없었다. 소문으로 알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 오락 한판 하는것뿐이라고, 그렇게 심상하게 여기였다. 그무렵 나는 이런저런 합방 제의를 하루에도 몇건씩 받는 처지였으므로, 그중 하나로만 여기고 넘기였다.

방송 당일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준비를 하였다. 마이크 상태를 점검하고 대화창을 띄우고 화면구성을 확인하였다. 상대가 누구이든 방송 준비의 순서는 늘 같았다. 다만 그날따라 조금 더 신경써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던것은, 처음 함께하는 사람이니 실수라도 하면 부끄럽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였다.

막상 화면속에서 마주하니 소문으로 듣던것과 실물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차분하였고 말투에는 여유가 있었다. 다만 낯을 가리는 기색이 역력하여 먼저 살갑게 말을 붙이는 사람은 아니라는것을 곧 알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낯가림 두사람이 만났다는 표현이 그보다 더 알맞을수 없었다.

오락이 시작되자 우리는 각자 할일에만 몰두하였다. 락하산을 펴고 무기를 줍고 건물을 지으며 적을 경계하는 사이 대화는 자연히 뜸해졌다. 대화창에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빠르게 올라왔지만, 정작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화면 너머로는 총소리와 발자국소리만 요란하였고, 정작 사람의 목소리는 인색하리만치 드물었다.

한번은 내가 위험을 알리려고 다급하게 소리쳤는데, 블루동지가 짧게 《네》하고 대답한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장면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그와 나눈 대화의 절정이였다. 시청자들은 그 짧은 문답을 두고 《둘이 진짜 할말 없나봐요》하는 채팅을 남기였는데,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방송이 끝나갈무렵 서로 수고하였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 인사에도 특별한 온기는 없었다. 다음에 또 하자는 말도, 잘 지내라는 덕담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방송원들 사이에 으례 오가는 형식적인 인사였을뿐이다. 나는 그 순간에도 이 사람과 다시 마이크를 나눌 일이 있을가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방송을 끄고 나서 나는 곧바로 다음 일정을 확인하였다. 그날 저녁에도 따로 준비할 내용물가 있었고,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한 궁리도 해야 하였다. 블루라는 이름은 그 바쁜 하루의 한 귀퉁이에 잠깐 스쳐지나갔을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일정표에 그와의 합방을 한줄로 적어넣고는 그대로 다음칸으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며칠, 다시 몇주가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내 방송을 붙들고 씨름하였다. 얼마전 겨우 백만이라는 수자를 넘긴 참이였으니, 그다음 단계를 어떻게 열어갈것인가 하는 고민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편집을 하다 잠버릇 심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야 이불속으로 기여들어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방송을 준비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일상은 늘 같은 모양으로 되풀이되였다. 아침에 일어나 기획을 짜고 오후에 카메라앞에 앉고 밤늦게까지 콤퓨터앞에서 편집을 하는 나날이였다. 그사이 블루라는 이름은 한번도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저혈압 탓에 아침잠에서 깨어나는것조차 힘겨운 날이 많았으니, 낯선 사람 하나를 마음에 담아둘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블루동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후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짐작하게 되였다. 그도 그나름의 방송통로를 꾸리며 《배그》와 서든어택 방송을 이어갔고, 늘어가는 쁠몬들과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그 역시 그 하루의 합방을 대수롭지 않은 일과의 하나로 여기고 지나쳤으리라는것을 지금은 넉넉히 짐작할수 있다.

가끔 다른 합방이나 다른 방송원의 대화창에서 그의 이름이 스쳐지나가는 일은 있었다. 《오늘 블루님이랑 같이 안하세요》 하는 채팅이 올라오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군하였다. 마치 먼 마을에 사는 지인의 소식을 얻어듣는것처럼, 그 이름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이 남의 입을 통해 이따금 오갈뿐, 우리 둘 사이에 직접 련락이 오가는 일은 없었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 둘이서 먼저 말을 붙이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였다. 메신저 대화창을 열어놓고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닫아버리는 성미가 우리 둘 다에게 있었던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안부인사 한마디 남기는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 몇달을 그렇게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거리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것은 마음만으로 좁혀지지 않는 법이며, 때로는 다시 마주칠 계기가 따로 있어야 하는것이다.

방송판이라는 곳은 원래 그런 곳이다. 오늘 합방을 한 사람과 래일 다시 마주칠수도 있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저 내용물를 위해 잠깐 만나고 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나 역시 블루동지와의 그 하루를 그런 숱한 만남중의 하나로만 여기였다.

만일 그때 누군가 나에게 이 사람과 몇해에 걸친 인연을 맺게 될것이라고 일러주었다면, 나는 아마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았을것이다. 력사라는것이 원래 이렇듯 소리없이 문을 두드리는 법이라는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가 몰랐던것들을 여기 한번 꼽아보고싶다. 이 회고를 쓰는 지금에서야 웃으며 되짚어볼수 있는 일들이다. 하나하나 꼽다보면 그 몰랐던 두사람이 얼마나 순진하였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우리는 그때 서로를 누나라 부르고 바이비라 부르게 될줄 몰랐다. 그 호칭이 방송 제목에 오르내리며 시청자들의 화제가 될줄은 더더욱 몰랐다. 높임말로 몇마디 주고받는 사이가 반말로 넘어가기까지 또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이야기에 《우결》이라는 이름이 붙고, 그것이 몇해에 걸쳐 이어질 하나의 커다란 내용물로 자라날줄 몰랐다. 후날 시청자들이 그것을 두고 장작이 알아서 탄다는 둥 우스개를 할것도, 그때로서는 상상밖의 일이였다.

우리는 그때 나의 지인 강수가 후날 블루동지를 매형이라 부르게 될줄 몰랐고, 나의 어머니가 《배그》 합방중에 사위감으로 백점을 매길줄도 몰랐다. 극중의 설정 하나가 주변사람들의 호칭까지 바꾸어놓을만큼 커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때 상견례라는 이름으로 두 남자와 어머니를 한자리에 모시게 될줄 몰랐고, 비싸다고 소문난 갈비집을 걸고 내기를 벌이게 될줄도 몰랐다. 그런 장면들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리라는것도 물론 알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때 남산에 자물쇠를 걸러 갈 사람을 서로에게 묻게 될줄 몰랐고, 손을 잡는데 육백일이라는 긴 세월이 걸리게 될줄도 몰랐다. 그 육백일이라는 수자를 후날 시청자들이 일부러 세여가며 놀릴것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때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의 회사가 생기고, 그 회사의 성원들이 나를 엄마라 부르며 서로를 딸애라 부르게 될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때는 그런 회사가 생길지조차 알수 없었다. 처음엔 그 밈을 부인하고 다니던 내가 결국은 그 호칭에 무디여지리라는것도 상상밖의 일이였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인연이 언젠가 엄마와 딸애들 사이에서, 또 시청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하나의 전설처럼 이야기될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없이 소박한 시작이였다.

이렇게 늘어놓고보니 마치 그날의 포트나이트 합방이 무슨 력사적인 사변이라도 되는것처럼 들릴가 걱정스럽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날은 그저 평범한 게임 방송의 하루였을뿐이다. 다만 후날에 가서야 그 평범한 하루가 뜻깊은 하루로 다시 읽히게 되였을뿐이다.

사람의 인생이란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것이 아닌가 싶다. 커다란 전환점은 언제나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예감도 없이, 그저 그런 하루의 얼굴을 하고 슬그머니 찾아온다. 만경대의 백양나무도 심을 때는 그저 어린 나무 세그루에 지나지 않았듯이, 그날의 합방도 그저 흔한 게임 방송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저 백만이라는 수자를 넘긴 여세를 몰아 다음 내용물를 궁리하기에 바빴다. 블루동지 또한 자신의 쁠몬들과 함께 《배그》와 서든어택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기에 바빴을것이다. 우리 둘 다 서로가 서로의 앞날에 그토록 깊이 얽혀들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 몇달사이 나는 몇번이나 새로운 내용물를 시도하였고 몇번이나 실패도 맛보았다. 시청자수가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도 함께 오르내렸으며, 그런 부침속에서 블루라는 이름은 조용히 잊혀져갔다. 사람의 마음이란 눈앞의 급한 일에 쏠리기 마련이어서, 지나간 하루의 합방쯤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방송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블루의 근황을 전해준 일이 있었다. 나는 그저 《아, 그렇군요》하고 웃어넘기였을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 이름을 그저 여러 방송원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고있었던것이다.

그날 밤, 방송을 끄고 콤퓨터의 전원을 내리며 나는 방안의 불을 껐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매미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불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날 하루를 되짚어보았으나, 블루라는 이름은 그 되짚음속에 끼여들 자리조차 얻지 못하였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것은 래일 올릴 영상의 제목이였지, 낯선 사람과 나눈 서너마디의 인사가 아니였다. 이것이 그날 밤의 솔직한 풍경이다. 이불속에서 뒤척이던 잠버릇마저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면서 나는 가끔 그날의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보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보오, 그 사람 이름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해두시오, 하고 말이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은 그렇게 미리 귀띔해주는 법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그 뜻을 헤아리는 존재일뿐이다.

생각해보면 낯가림이라는것도 참으로 얄궂은 물건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쌓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는 조심스러움을 남기기도 한다. 그날 우리 두사람이 서로에게 무심하였던것도, 어쩌면 그 조심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였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블루동지와 마이크를 나눌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배틀그라운드》라는 오락이 우리를 다시 이어줄 참이였다. 두사람의 낯가림은 여전하였으되, 이번에는 그 낯가림을 뚫고 나올 무엇인가가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다음 페지에 마저 적기로 한다. 지금은 다만 그 무심하였던 여름밤의 풍경 하나만을 이 회고록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남겨두려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낯가림 심한 두 사람이 첫만남에서 몇마디 인사만 나누고 헤여진 그 심심한 하루야말로 후날의 그 길고 뜨거웠던 《우결》의 첫장이였다. 다만 그때의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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