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첫 팬 미 팅

 

그해도 저물어 십이월 하순에 접어들었다. 세밑추위란것이 원래 매서운 법이지만 그해따라 유난히 살을 에이는듯하였다. 방송실 창문에는 성에가 뽀얗게 앉았고, 나는 두꺼운 겉옷을 걸친채로 콤퓨터앞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화면에는 신청자 명단을 정리한 표 하나가 띄워져있었는데, 그 표의 마지막 줄에 적힌 수자를 나는 몇번이고 다시 헤아려보았다.

창밖으로는 밤늦도록 인적이 끊긴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가로등 불빛아래로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본체의 랭각기소리와 벽시계 초침소리만이 방안을 채우고있었는데, 그 단조로운 소리조차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수자는 다름아닌 애호가모임 신청자수였다. 우주25(2018)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그때, 그해 가을 이래로 《우결》이라는 이름의 방송놀음이 뜻밖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내 방송을 찾아오는 얼굴들도 부쩍 늘어나있었다. 그전까지는 상상도 못하던 규모의 관심이였다.

년말을 맞아 그동안 응원해준 이들에게 자그마한 답례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것은 순전히 나 개인의 마음에서였다. 회사도 아니요 소속사도 없던 시절이니,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오롯이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몫이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였으므로 이런 자리를 왜 벌써부터 벌이느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나는 한해가 저물기전에 꼭 한번은 얼굴을 마주하고싶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신청 창구를 열어놓고 나서 처음 며칠은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갔다. 몇백명쯤이나 신청할가, 그정도만 되여도 감지덕지라고 나는 속으로 짐작하고있었다. 그런데 신청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그 수자는 내 짐작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신청서를 낸 사람은 어림잡아 팔천삼백명에 이르렀다. 나는 그 수자를 처음 보았을 때 잘못 본것이 아닌가 하여 표를 몇번이나 새로고침하였다. 자리는 겨우 백서른자리 뿐인데, 신청자는 그 예순배가 넘는 셈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몇해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처음 방송을 시작하였을무렵 나는 오전 열한시니 오후 여섯시니 하는 들쭉날쭉한 시간에 홀로 마이크를 켜고 앉아있었다. 그때는 대화창에 사람 이름 몇개가 떠있는것만 보아도 반가와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시절 나를 부르던 별명이 《15강지》였다. 시청자 수가 워낙 적어 방안이 조용한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였고, 어떤날은 아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혼자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꼴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애써 태연한척 오락화면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는 대화창에 새 이름 하나가 뜨는것만으로도 온종일 기분이 들떴다. 어쩌다 시청자가 열명을 넘기는 날이면 나는 속으로 오늘은 대박이라며 혼자 흥분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열명이라는 수자가 얼마나 소박한 기쁨이였는지 새삼 우습다. 방안에 혼자 앉아 빈 대화창을 새로고침하던 그 겨울들이 지금도 손에 잡힐듯 선명하다.

그런 나날을 지나온 처지에서, 이제는 신청자 팔천삼백명 가운데서 겨우 백서른명을 추려내야 하는 형편에 놓였으니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릴데가 없었다. 나는 그 표를 들여다보며 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의 팔자란 참으로 몇해 사이에도 이렇게 뒤집히는 모양이다.

추첨은 신청 순서와 무관하게 무작위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공정을 기하자는 뜻이였으나, 막상 추첨 프로그람을 돌리는 그 순간에는 나 스스로도 손끝이 떨리였다. 화면에 당첨자 이름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소리내여 읽어보았다.

예순대 일이라는 그 경쟁률을 두고 나는 짐짓 력사의 옛 과거시험이라도 되는 양 스스로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물론 이것은 급제와 락방을 가르는 나라의 큰 시험도 아니요, 겨우 두시간짜리 자리에 앉을 사람을 뽑는 자그마한 추첨일뿐이였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나 혼자 시관이라도 된듯 자못 진지하게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추첨이 끝난 뒤에는 장소를 구하는 일이 또 한 고비였다. 큰 회사도 아니고 혼자서 움직이는 처지라, 서울 시내에서 백서른명을 수용할만한 자리를 구하는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몇군데를 알아본 끝에 겨우 자리를 마련하였을 때는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소를 정하고 나서도 걱정은 끝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데 행여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나는 몇번이고 안전수칙을 다시 점검하였다. 출입구는 몇군데인지, 자리 사이 간격은 넉넉한지, 혹시라도 몸이 불편해지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 그런 자잘한 대목들까지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행사 진행순서를 짜는 일도 온전히 내 몫이였다. 인사말은 어떻게 할지, 어떤 놀이를 넣을지, 질문은 몇개나 받을지, 나는 밤늦도록 종이에 이런저런 순서를 적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하였다. 이런 일을 남에게 맡길 처지가 아니였으니 서투른 손으로나마 하나하나 직접 짜맞추어나갔다.

선물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백서른명 모두에게 무엇이든 손에 쥐여드리고싶었는데, 예산도 예산이려니와 무엇을 골라야 뜻이 제대로 전해질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결국 몇날며칠을 문구점과 잡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견주어본 끝에야 겨우 목록을 완성하였다. 포장지 색깔 하나를 놓고도 이게 좋을지 저게 좋을지 한참을 망설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고민이였다.

그무렵 블루동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요즘 준비로 잠도 제대로 못자는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강지 님, 처음 하시는 자리인데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블루동지의 목소리에는 짐짓 여유가 묻어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긴장을 안하려야 안할수가 있나요. 이런 자리는 저도 처음이라서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자기도 그 자리에 가서 응원해주고싶지만 날이 날인만큼 온전히 강지 님만의 자리로 남겨두는게 맞는것 같다고 하였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는 《우결》이 아니라 온전히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자리라는것을, 그도 나도 알고있었다. 다만 통화 끝에 블루동지는 행사 당일 아침에 문자 한통 보내겠다고 하였고, 나는 그러라고 웃으며 답하였다.

행사를 이틀 앞둔 밤에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인사말을 몇번이고 소리내여 련습하였다. 거울앞에 서서 첫마디를 뗄 때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서, 나는 몇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그렇게 밤늦도록 혼자 중얼거리다보니 옆방에서 무슨일이냐고 물어올 지경이였다.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도 미리 헤아려두려 하였으나, 어떤 질문이 나올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완벽한 대본을 마련하기를 포기하고, 그날의 순간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편이 오히려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었다.

드디여 행사날 아침이 밝았다. 십이월 스무아흐레,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하였고 거리에는 밤사이 내린 눈이 살짝 덮여있었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몇번이고 거울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손전화가 울린것은 그때였다. 블루동지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파이팅입니다. 강지 님이라면 잘 하실거예요.》 짧은 문장이였으나 나는 그 몇마디에 괜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집을 나설 때 나는 짐가방을 몇번이나 다시 열어보았다. 명단, 선물꾸러미, 진행순서를 적은 종이까지 빠짐없이 챙기였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다보니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스탭 몇사람이 나와 자리를 정돈하고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의자를 나란히 맞추고 현수막을 걸며 시간을 보냈다. 몸을 움직이니 오히려 긴장이 조금씩 가시는듯도 하였다. 빈 의자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 텅 빈 방을 둘러보며, 나는 몇시간 뒤 이 자리들이 사람으로 채워질 광경을 미리 그려보려 애를 썼으나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개장시간이 다가오자 문밖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나는 살며시 문틈으로 내다보았는데, 정말로 긴 렬을 지어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낯선 얼굴들이였지만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대화창에서 익히 보던 이름들을 실제 얼굴로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백서른개의 자리가 차례로 채워지는것을 나는 무대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손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나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지 헤아려보았다.

사회를 맡은 스탭이 나를 소개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무대우로 올라섰다. 마이크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였다. 《안녕하세요, 강지입니다.》 그 한마디를 하는데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나는 그 소리에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서있었다. 방안 가득 채운 그 반가움이 고스란히 나를 향해 밀려드는것 같았다.

인사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준비한 순서대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방송을 시작하게 된 사연이며, 그동안 지나온 우여곡절을 짧게 들려주었다. 객석에서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도 보였다. 몇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이 마주친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준비해온 원고를 슬며시 접어두고 마음가는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질문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첫 질문은 방송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였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기였다가, 지금 이 자리도 그 기억에 새로 더해질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두번째 질문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니 《우결은 언제까지 하실 계획이세요?》하고 물었다.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얼굴이 화끈해지는것을 느끼며 겨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얼버무렸다.

그 대답에 객석은 다시한번 웃음바다가 되였다. 누군가는 《블루님한테 안부 전해주세요》하고 소리쳤고, 나는 그 소리에 손사래를 치며 마이크를 내려놓을뻔하였다. 짐짓 엄중한 국정보고라도 하는양 진땀을 빼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세번째로 손을 든 참가자는 뜻밖에도 지방에서 새벽차를 타고 올라왔다고 하였다. 《몇시간이나 걸려서 왔어요?》 내가 되묻자 그는 겸연쩍은듯 웃으며 세시간 남짓 걸렸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그 먼 길을 와주어 정말 고맙다고 겨우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을 듣고나니 객석 여기저기서도 저마다 먼 길을 왔다는 말이 술렁술렁 새여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이 백서른개의 자리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새벽길과 기다림이 얹혀있었는지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되였다. 겨우 두시간짜리 자리를 위해 그런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다는것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그런 소란을 겪고나서야 나는 조금 긴장이 풀렸다. 사람이란 한바탕 웃고나면 마음의 문이 조금은 열리는 법인듯하였다. 그뒤로 이어진 질문들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넘길수 있었다.

간단한 놀이시간도 마련하였다. 몇몇 참가자를 무대우로 불러 오락 실력을 겨루어보는 순서였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제법 진지하게 승부욕을 불태웠다. 한판 지고나니 객석에서 놀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강지 님 오늘 컨디션이 안좋으신가봐요.》 누군가 그렇게 외치자 나는 억울하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이런 자그마한 실랑이 하나에도 방안 가득 웃음이 번지는것을 보며, 나는 이 자리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자리라는것을 새삼 느끼였다.

두번째 판에는 다른 참가자를 무대로 불러올렸다. 이번에는 내가 제법 손에 익은 종목이라 판세가 순조롭게 흘러갔는데, 막판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다잡았던 승기를 놓치고 말았다. 객석은 또한번 뒤집어질듯 웃음소리로 들썩였고, 나는 마이크에 대고 오늘은 아무래도 승부와는 인연이 없는 날인가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물을 나누어주는 순서에 이르러서는 한사람 한사람과 짧게나마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몇몇은 준비해온 편지를 손에 꼭 쥐여주었고, 또 몇몇은 손수 그린 그림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들며 몇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어떤 참가자는 편지를 건네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져서, 애써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기려 하였다. 방안에 흐르던 공기가 잠깐 숙연해졌다가 다시 따뜻하게 풀리였다.

또 어떤 무리는 셋이 나란히 신청하였다가 셋 모두 당첨되였다며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손수 접은 종이학 한줌을 내밀며, 이걸 접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고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그 자그마한 종이학들을 받아들고 한동안 손바닥에서 만지작거렸다.

사진을 찍는 순서도 있었다. 한사람씩 짧게나마 나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남기였는데, 그 짧은 몇초의 순간을 위해 다들 며칠전부터 옷차림을 고민하였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듣고 나는 새삼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백서른명 모두와 사진을 찍고나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두시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게 느껴질줄은 몰랐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며 목이 메여오는것을 억지로 눌러참았다. 시계를 힐끗 쳐다보니 예정된 시간이 벌써 다 되여있었는데, 마치 눈깜짝할 사이에 두시간이 통째로 증발해버린것만 같았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짧은 인사였지만 나는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모든 나날을 눌러담으려 애를 썼다. 객석에서는 다시한번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행사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이 걸려있었다. 나는 문앞에 서서 한사람씩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몇몇은 나가면서도 뒤돌아보며 다시한번 고개를 숙였다.

행사가 다 끝나고 텅 빈 객석을 홀로 둘러보았을 때, 나는 그제서야 다리에 힘이 풀리는것을 느끼였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온몸이 노곤해졌다.

스탭들이 뒤정리를 하는 사이 나는 손전화를 꺼내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번 울리자 그가 받았다. 《강지 님, 어떻게 되였어요?》

《잘 끝났어요. 별 사고없이, 무사히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블루동지는 그 말에 다행이라며,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고 하였다.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는데, 정신은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우결》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 진땀을 뺐다는 이야기에 블루동지는 전화기 너머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였다.

《저도 그런 질문 받으면 진땀 뺄것 같은데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도 따라 웃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날 하루의 무게가 어깨에서 조금 내려앉는것을 느끼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밤거리를 바라보며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팔천삼백명이라는 수자, 그중에서 뽑힌 백서른개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웃음들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이 대목을 쓰자니 우습다. 겨우 두시간짜리 자그마한 자리였을뿐인데, 그때는 마치 한 나라의 즉위식이라도 치르는양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력사에 남을 대사변을 치르는 사람처럼 밤잠을 설쳐가며 순서지를 고쳐쓰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 우스운 긴장 뒤에는 분명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혼자 콤퓨터앞에 앉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송을 하던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백서른개의 자리를 채운 그날의 광경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였다. 사람이 걸어온 길의 무게는 이렇듯 뜻밖의 자리에서 문득 실감나는 법이다.

행사장 한켠에서는 스탭 한사람이 그날의 광경을 조촐하게 록화해두었다. 나는 며칠뒤 그 록화본을 홀로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돌려보았는데, 화면속의 내 목소리가 유난히 떨리고있는것을 보고 혼자 웃음이 터지였다. 그렇게 긴장하였던 티가 고스란히 화면에 남아있으리라고는 그날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날 받은 편지들을 나는 며칠에 걸쳐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았다. 저마다 다른 글씨체로 눌러쓴 그 사연들속에는 방송을 보며 힘든 시절을 견뎠다는 이야기도, 그저 웃겨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뒤섞여있었다. 나는 그 편지 무더기를 서랍 한칸에 고이 넣어두었다.

후날 이 일은 어느 백과사전 한귀퉁이에 《팬미팅》이라는 짧은 항목으로 남았다고 한다. 신청자 팔천삼백명 가운데 백서른명이 참석하였고, 별다른 사고없이 성료되였다는 몇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그 몇줄 뒤에 담긴 밤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나 하나뿐일것이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이 본디 그런 모양이다. 당사자에게는 뼈에 사무치도록 크게 다가오는 일도, 뒷사람의 기록에는 겨우 몇줄로 압축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 몇줄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기지 못한 무수한 순간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자리를 채운 백서른명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신청서를 냈을것이다. 어떤이는 그저 궁금해서, 어떤이는 오래 응원해온 마음을 전하고싶어서, 또 어떤이는 그저 심심풀이로 신청하였다가 얼결에 당첨되였을것이다. 리유야 무엇이든, 그날 그 방을 채워준 마음만은 한결같이 따뜻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나머지 팔천백칠십여명, 자리를 얻지 못한채 신청서만 내고 돌아선 이들의 얼굴은 끝내 보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마음 또한 그날 그 방안 어딘가에 함께 앉아있었으리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해 겨울 나는 그 자리를 통해 한가지를 다시금 배웠다. 방송이란 홀로 하는 일 같아도 결국은 그 반대편에 앉아있는 얼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라는것이다. 대화창의 글자들만 보아오던 나에게 그날의 백서른개 얼굴은 그 진리를 몸으로 깨닫게 해준 자리였다.

후날 여러 성원들을 거느리는 처지가 되고 나서야 나는 그날의 경험이 얼마나 값진 자산이였는지 더욱 실감하였다. 사람앞에 서는 일이 무엇인지, 그 앞에서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나는 그 백서른개의 얼굴에게서 처음으로 배운 셈이였다. 스승이랄것도 없이 그렇게 나는 그 겨울밤에 값진 가르침 하나를 얻었다.

행사가 끝나고 여러날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따금 그날의 광경을 떠올린다. 긴 줄을 지어 서있던 사람들, 문이 열리던 순간의 술렁임, 마이크를 쥔 손의 떨림까지 하나하나 뚜렷하다. 세월이 흘러도 이런 장면만은 좀처럼 낡지 않는 모양이다.

블루동지는 그뒤로도 종종 그날의 일을 화제로 삼았다. 《강지 님, 그날 진짜 《우결》 질문 나왔을 때 표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그가 그렇게 놀릴 때마다 나는 그저 웃어넘길뿐이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우스운 질문 하나때문에 며칠동안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질문마저도 그날의 자리를 더 따뜻하게 만들어준 한 조각이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듯 뜻밖의 순간에서 오히려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그해의 마지막 며칠은 그렇게 지나갔다. 애호가모임을 치르고 나니 어느새 한해가 다 저물어있었고, 거리에는 새해를 맞을 채비가 하나둘 들어서고있었다. 나는 서랍속 편지뭉치를 다시한번 들여다보며 다가올 새해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있을지 가만히 헤아려보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며칠 뒤로 다가올 새해가 또 어떤 우스운 사변들을 몰고올지, 그리고 그 사변들속에서 블루동지와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만 그해 세밑, 백서른개의 얼굴을 마주하고 돌아온 그 밤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온기로 내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본 서적은 창작된 가상의 회고록입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단체의 립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