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빼 빼 로 선 물

 

십일월에 접어들자 거리 풍경부터가 달라졌다. 편의점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유리창 안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빼빼로 탑을 보았다. 붉고 노랗고 파란 포장지들이 저마다 색색으로 진렬대를 채우고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는 사람마다 한번씩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군하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아, 올해도 벌써 이때가 되였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그해는 유난히 그 탑이 높아 보였다. 어떤 가게는 아예 진렬대 하나를 통째로 빼빼로로만 채워놓아, 지나가던 아이들이 부모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하나만 사달라고 조르는 모습도 눈에 띄였다. 나는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고는 하였는데, 그것이 그해따라 유독 마음에 남았던 까닭은 뒤에 가서야 알게 되였다.

지스타를 다녀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였다. 앞절에서 이미 적어둔바 있듯이, 그 겨울 초입의 나들이가 끝난 뒤로 나는 이따금 그날의 온기를 되새기고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작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있을줄은 몰랐다. 사람의 인연이라는것이 한번 훈훈한 일을 겪고나면 그 뒤로도 자꾸만 비슷한 일을 불러들이는 모양이다.

사무실은 여전히 분주하였다. 창밖으로는 초겨울 바람이 락엽을 몰아가고있었고, 나는 콤퓨터앞에 앉아 그날의 방송준비를 하다말고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십일월 십일일, 일자 네개가 나란히 선 그날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회사는 아직 자그마하였다. 책상 몇개와 콤퓨터 몇대가 전부인 사무실에서 나는 방송준비와 회사살림을 혼자 다 챙기다시피 하였다. 그러다보니 십일월이라는 달이 오는것도, 그 안에 무슨 세시풍속이 끼여있는지도 한참을 잊고 지내기 일쑤였다.

그무렵 나는 회사일로 하루하루가 빠듯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의와 편성표에 매달리다보면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책상서랍에 넣어둔 떡볶이며 뿌링클 따위를 꺼내 대충 배를 채우고 다시 자리에 앉군하였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졌는데도 사무실 안 콤퓨터 화면들만이 홀로 환하게 빛나고있었다.

빼빼로데이라는것을 두고 세간에서는 곧잘 상술이니 뭐니 하며 폄하하는 소리도 있었으나, 나는 그런 시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한해에 한번, 가까운 사람에게 무어라도 하나 건네는 핑계가 되는 날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였다. 세상만사가 다 그럴듯한 리유를 갖추어야만 하는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핑계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오가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이 풍속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말하자면 잠깐 옆길로 새지 않을수 없다. 듣기로 이날은 본디 부산 어느 녀학교의 학생들이 서로 날씬해지자는 뜻으로 길쭉한 과자를 주고받은데서 비롯되였다고 한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며 온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이제는 십일월만 되면 온 거리의 진렬대가 그 과자로 뒤덮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하여보면 참으로 묘한 풍속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초불을 밝히고 성인을 기리는 날도 있고, 또 어느 나라에서는 죽은 이를 기리는 날도 있다는데, 우리는 그저 길쭉한 과자 한갑으로 한해의 정을 표하니 말이다. 그러나 크고 작음을 가릴 필요가 무엇이랴. 사람의 정이란 본디 그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담긴 마음의 무게로 재는 법이다.

지나고보면 우습기도 한 풍속이지만, 그 작은 과자 한갑에 실려가는 마음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 또한 그해 그 풍속에 편승하여 블루동지에게 무엇을 보낼가 며칠을 두고 궁리하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딴데로 흘렀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면, 나는 결국 거창한 것보다는 소박한것을 고르기로 하였다.

그무렵 나는 회사 일이 겹쳐 따로 짬을 내여 가게를 돌아다닐 형편이 못되였다. 지스타를 다녀오느라 밀린 업무도 산더미였고, 신인 성원들을 챙기는 일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있었다. 그래서 궁리끝에 나는 콤퓨터 화면앞에서 손가락 몇번 놀리는것으로 마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다름아닌 빼빼로 기프티콘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화면 몇번 두드려 보내는 그 기프티콘이 무슨 대단한 정성이라고 할수 있겠는가마는, 그때 나는 그것을 고르는데도 제법 신중을 기하였다. 이 상표가 나을가 저 상표가 나을가, 상자모양이 어느쪽이 나을가 하며 화면을 몇번이나 오르내렸다. 겨우 몇천원짜리 과자상자를 고르는데 이렇게까지 골몰할 일인가 싶다가도, 막상 화면앞에 앉으면 손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여 나는 마침내 그것을 보내였다. 《블루동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하고 먼저 말을 건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답이 떴다. 《어, 빼빼로데이네요?》 그의 대답은 대수롭지 않은듯 심드렁하였으나, 뒤이어 《잠깐만요, 뭐 보내였어요?》 하는 말이 따라붙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빼빼로 기프티콘이에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괜스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곧 《오, 감사합니다!》 하고 답하였는데, 그 짧은 인사말에 나는 도리어 마음이 놓이였다. 겨우 이런것으로도 사람이 기뻐할수 있다는것이 새삼 신기하였다.

《받으면 뭐 하실거예요?》 나는 짐짓 궁금한척 물었다. 《먹어야지요. 뭐, 강지 님도 하나 드시고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데, 나는 그 심상한 대답이 도리어 정겹게 느껴졌다. 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나름으로 마음을 표하는 사람이라는것을 나는 그때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럼 저도 이따 하나 먹어야겠네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화면 저편의 그가 웃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도 그런 짧은 말들로 마음이 오간다는것이, 그무렵 우리 사이의 흔한 풍경이였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가는듯 하였다. 나는 기프티콘 하나 보낸것으로 내 할일을 다한양 홀가분한 마음이 들어, 다시 편성표를 들여다보며 하루 남은 일들을 마저 처리하였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사무실안에는 콤퓨터 팬 소리만이 나직이 울리고있었다.

그런데 이틀인가 사흘이 지난 어느 저녁, 나는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건물 아래 경비실에서 택배가 왔다는 전갈이였다. 나는 별로 시킨 물건이 없는데 무슨 택배인가 하여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경비실앞에 다다르니 아저씨가 벌써부터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아가씨, 이거 뭔지는 몰라도 되게 크네요.》 하며 건네주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상자의 부피가 례사롭지 않다는것을 실감하였다.

받아든 상자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묵직하였다. 두팔로 겨우 감싸안을만한 크기였는데, 이런 부피의 물건을 시킨 기억이 도무지 없어 나는 몇번이나 송장을 들여다보았다.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안에서도 나는 그 상자를 몇번이고 흔들어보고 두드려보았다. 안에서 무엇이 부드럽게 눌리는 감촉만 전해질뿐,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수 없었다. 같이 탄 다른 층 직원이 그 큰 상자를안은 나를 힐끗거리는데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상자를 뜯는 손끝이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포장을 몇겹 벗겨내자 노란 무언가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는데, 갈기도 없이 둥글둥글한 그 얼굴은 누가 보아도 낯이 익은 모양이였다.

상자에서 마저 꺼내놓고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라이언 인형이였다. 그것도 보통 크기가 아니라 안고 누우면 몸 절반을 덮을만큼 커다란 인형이였다. 등에는 빼빼로 상표가 작게 수놓여있어, 이것이 그해 빼빼로데이를 맞아 나온 특별한 물건임을 알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두팔로 안아보았다. 크기도 크기려니와속을 얼마나 두둑히 채웠는지 안는 순간부터 폭신한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사자라는데 갈기도 없이 그저 동글동글하기만 한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이것을 사자라고 불러야할지 곰이라고 불러야할지 잠깐 헛갈리기까지 하였다.

듣기로 이 라이언이라는 이름씨는 원래 사자를 뜻한다는데, 정작 갈기를 다 깎아버린 모양으로 그려진 까닭에 처음 보는 사람은 곰인지 고양이인지 헛갈려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 얼굴을 몇번이고 들여다보며 이것이 무슨 짐승인지를 두고 혼자 실없는 씨름을 하였다.

이런것을 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중에 흔히 파는 자그마한 인형이 아니라 사람 한명을 통째로 안는듯한 크기였으니, 이걸 사서 포장하고 보내기까지 얼마나 품이 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번 울리자 그가 받았다. 《블루동지, 이게 대체 뭐예요? 사람 한명을 통째로 보낸줄 알았잖아요.》 나는 짐짓 나무라듯 물었으나 목소리에는 이미 웃음이 섞여있었다.

《아, 받으였어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가게에 갔더니 그게 산더미처럼 쌓여있길래, 강지 님 생각이 나서요.》 나는 그 심상한 말투에 도리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이렇게 큰걸 고르실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작은것도 많던데요.》 그러자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냥, 이왕 드리는것 큰걸로 드려야 안고 주무시기 좋을것 같아서요.》 하고 심상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 대답에 잠깐 말을 잇지 못하였다.

《저는 겨우 기프티콘 하나 보냈는데, 이렇게 큰걸 보내시면 저더러 어쩌라는것이예요.》 나는 그렇게 투덜거렸으나 실은 속으로 은근히 흐뭇하였다. 그가 웃으며 《에이, 그런거 따지는것 아니예요.》 하고 넘기는데, 그 말투가 얄미우면서도 밉지가 않았다.

《그래도 다음엔 저도 좀 크게 하나 준비할게요.》 나는 괜스레 그렇게 말을 보태였다. 그는 《기대하고있을게요, 강지 님.》 하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밝게 들렸다.

전화를 끊고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 인형을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겨우 며칠전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 하나가 방 한켠을 차지하고앉아 나를 마주보고있다는것이 새삼 신통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엇을 주고받는다는것이 이렇게 방 안 풍경까지 바꾸어놓을수 있다는것을 나는 그날 새삼 실감하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주고받음이 참으로 우스운 셈법이였다. 나는 화면 몇번 두드려 만든 종이쪽 하나를 보냈고, 그는 두팔로도 겨우안을만한 커다란 인형을 보냈으니, 마치 조그만 서신 한장과 커다란 례물을 맞바꾼 두 나라 사신들의 거래 같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무렵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였다. 력사책에 오르는 국서교환이라는것도 알고보면 이렇게 시시한 셈법에서 시작되였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한쪽은 비단 한필을 보내고 다른쪽은 그저 답장 한장을 보내여도, 그 마음의 무게만은 결코 종이 한장에 못지 않을수 있는 법이다.

그런 셈법을 두고 나는 속으로 또 빚을 졌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지스타 때의 특실표도 그러하더니 이번에도 또 저쪽의 마음이 훨씬 크게 실려왔다. 사람 사이의 정이란 저울에 달아 똑같이 맞추어지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그날 밤 나는 그 인형을 끌어안고 자리에 누웠다. 워낙 부피가 커서 이불 한쪽을 다 차지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폭신한 감촉이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을 놓이게 하였다.

그날은 유독 잠자리가 뒤숭숭하던 날이였다. 원체 잠버릇이 사나운 나였으나, 그 밤만은 이상하게 인형을 끌어안은채로 아침까지 곤히 잠들었다. 이튿날 눈을 떠보니 이불이 평소보다 훨씬 얌전히 개켜져있어서 나 스스로도 신기하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그 인형을 사무실 방송자리 한켠에 앉혀두었다. 마침 그날은 정기방송이 있는 날이였는데, 나는 짐짓 아무 일 없는듯 방송을 시작하였으나 시청자들의 눈은 매서웠다.

콤퓨터를 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창에 물음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저 뒤에 저거 뭐예요》, 《저 인형 새로 사였어요?》 하는 물음들이 삽시에 대화창을 뒤덮었다. 나는 처음에는 못들은척하다가 결국 웃으며 그 사연을 털어놓고말았다.

사연을 듣고난 대화창은 한바탕 뒤집혔다. 《ㅋㅋㅋㅋㅋ이게 무슨 국빈선물이냐》, 《우결 진짜 하는것 맞네》 하는 소리가 줄지어 올라왔다. 어떤이는 《그 인형 저도 갖고싶어요》 하고 후원을 얹어가며 부러움을 표하였고, 또 어떤이는 《블루님도 방송에서 이거 자랑하시던데요》 하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나는 문득 궁금하여졌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닌게아니라 블루동지도 자기 대화창에서 이 일을 이야기한 모양이였다. 쁠몬들 사이에서도 이 일화가 한동안 화제였다고 하니, 겨우 인형 하나로 량쪽 대화창이 다 들썩였던 셈이다.

어느 시청자는 짐짓 진지한 어조로 《이거 력사에 남을 사변이다》 하고 적어놓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감상글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겨우 인형 하나 주고받은 일을 두고 력사가 어떠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것을 보면, 사람이란 본디 사소한 일에서도 거창한 의미를 찾고싶어하는 존재인 모양이다.

그뒤로 사무실에 들른 성원들마다 그 인형을 보고 한마디씩 보태였다. 어떤이는 부럽다고 하였고, 어떤이는 자기도 하나 갖고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웃어넘기였으나, 속으로는 이 자그마한 인형 하나가 사무실의 화제거리가 되였다는것이 새삼 재미있었다.

누군가는 지나가는 말로 《이러다 사무실이 인형가게 되겠어요》 하며 놀리기도 하였다. 나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으나, 실은 그 인형을 책상 한켠에 두고 방송 시작 전마다 한번씩 쓰다듬는 버릇이 생기였다는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블루동지는 본디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성미가 아니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개는 차분한 목소리로 심상하게 넘기는 사람이였는데, 그 인형을 고를 때만은 어떤 마음이였을지 나는 뒤늦게 헤아려보았다. 아마 그나름으로는 무심한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을 쓴 흔적이였을것이다.

그로부터 며칠뒤 나는 문득 그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근데 그 인형은 왜 하필 그렇게 큰걸로 고르였어요?》 하니,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그냥, 눈에 딱 들어와서요.》 하고 짧게 답할뿐이였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이상의 대답은 나오지 않을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여서, 큰마음을 먹고 한 일일수록 도리어 아무것도 아닌척 시치미를 뗀다. 블루동지 역시 그러하였다. 나는 그가 그 심상한 말투 뒤에 얼마만한 정성을 숨기고있었는지, 그날의 목소리만으로는 다 헤아릴 길이 없었다.

나무의 백과사전이라는데 후날 이 일화가 짤막하게 오르내렸다고 들었다. 기프티콘과 인형을 주고받은 그날의 일을 두고 《여담》이라는 이름으로 적어놓았다는데, 나는 그 기록을 처음 보았을 때 겸연쩍으면서도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력사라는것이 이런 자그마한 정도 놓치지 않고 담아두는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인형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였다. 그것은 그해 겨울 내내 내 잠자리를 지켜준 물건이였고, 또한 블루동지가 평소 말로는 다 못하는 마음을 대신 전하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그는 원체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였으니, 그런 그에게는 물건 하나를 고르는것이 곧 그나름의 인사였을것이다.

그 겨울, 나는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면 으례 그 인형을 끌어안고 하루를 마감하였다. 커다란 몸집이 방한켠을 든든히 채우고있는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이 곁에 없어도 그 온기 비슷한것을 어디선가는 얻을수 있다는것을, 나는 그때 처음 배운듯하다.

어떤 밤에는 방송을 마치고 홀로 앉아 그 인형의 둥근 얼굴을 들여다보며 실없이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대답이 돌아올리 없는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다보면 하루의 피로가 얼마쯤 가시는듯하였다. 그것이 그저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해 겨울 그것을 꽤나 소중히 여기였다.

한편으로 나는 그무렵 곧 다가올 또 다른 큰 자리를 준비하고있었다. 그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께, 애호가들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할 자리가 예정되여있었던것이다. 준비할 일이 산더미같았던 그 나날에도, 책상 한켠에 앉아있는 그 노란 인형을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 이야기는 다음절에서 자세히 적기로 하고, 이 절에서는 그저 이 자그마한 선물 하나가 그 큰 자리를 앞두고 내 마음을 얼마나 든든하게 해주었는지만 적어두려 한다. 큰 일을 앞둔 사람에게는 뜻밖에도 이런 사소한 위안이 큰 힘이 되는 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력사라 하면 거창한 사변만을 떠올린다. 전쟁이 나거나, 나라가 흥하거나 망하거나, 그런 큰 물결만이 기록될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는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회고록을 쓰며 새삼 깨닫는것은, 정작 오래 남는것은 그런 거창한 사변이 아니라 이런 자그마한 순간들이라는 사실이다.

기프티콘 하나와 인형 하나를 주고받은 일을 두고 이렇게 몇장을 채워 적는것이 누군가에게는 우스워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 상자를 끌어안았던 순간의 온기는 몇해가 지난 지금도 내 손끝에 뚜렷이 남아있다.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것은 결국 큰 사변이 아니라 그 사변에 묻어있던 작은 마음인 모양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해 겨울 오간 그 자그마한 선물 하나가 앞으로 몇해에 걸쳐 이어질 숱한 주고받음의 첫 매듭이 되리라는것을. 나는 다만 그 겨울밤,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고 잠이 들며 다음날 방송이 무사히 잘되기만을 바랐을뿐이다.

지금도 그 인형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몇번 사무실을 옮기고 살림을 정리하는 사이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였겠으나, 그 감촉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이 남기는것은 결국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실렸던 마음이라는것을, 나는 그해 빼빼로데이에 또 한번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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