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배 신 이 라 는 말

 

우주26(2019)년의 섣달도 어느덧 스무날을 넘기고있었다. 밤사이 내린 눈이 골목을 하얗게 덮었고, 창틀에는 성에가 두껍게 앉아 손끝으로 문지르지 않고는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문을 닫아걸고 콤퓨터앞에 앉아 그해의 마지막 편성표를 들여다보고있었다. 본체의 랭각기소리만이 고요한 방안을 채웠고, 화면 옆에 놓아둔 랭수 한잔은 어느새 식어 김이 나지 않았다.

책상우에는 그해 내내 써온 편성수첩과 마이크, 그리고 며칠째 정리하지 못한 영수증 뭉치가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나는 그 수첩을 뒤적이며 정월부터 섣달까지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정월의 신수풀이로 시작해 사월의 귀엽다는 말놀이를 지나, 여름을 건너 시월에 이르기까지, 그 페지마다 웃음과 다툼이 번갈아 적혀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일이 많았다. 낮에는 회사 아닌 회사 살림을 챙기고 밤이면 방송을 켜야 하였으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채 열흘 스무날이 훌쩍 넘어가군 하였다. 그 와중에도 대화창 한구석에서는 시월부터 이어져온 어떤 술렁임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술렁임이란것이 참으로 사소한 자리에서 시작된 일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자면 그보다 두달 앞선 시월 어느 저녁으로 먼저 거슬러올라가지 않을수 없다.

시월 하순, 나와 블루동지 사이에는 이미 한차례 위기라는 말이 오간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이 그토록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는지, 지금 곰곰이 되짚어보아도 나는 그 발단을 뚜렷하게 짚어내지 못한다. 다만 그때 우리 둘 다 《우결》이라는것을 계속할 뜻이 있는지 없는지를 서로에게 물어야 하였던 저녁이 있었다는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날 저녁 나는 블루동지에게 이렇게 물었던것 같다. 《블루 님, 이거 계속 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고, 블루동지는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그럼요, 저는 계속 하고싶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한마디로 그날의 위기는 일단 봉합이 되였으나, 봉합이라는것은 흔적을 아주 지우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무렵 대화창에서도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쁠몬들이 저마다 걱정하는 말을 남기였다. 《둘이 진짜 끝나는것 아니냐》하는 말부터 《에이 또 저러다 화해하겠지》하는 말까지, 시청자들의 반응도 갈피를 잡지 못하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말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나누는 다툼 하나하나가 이제는 나와 블루동지 둘만의 일이 아니라는것을 새삼 느끼였다.

그로부터 두달이 채 못되어, 동지달 열나흘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달포 만에 마주앉은 서로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는 방송을 올린 날이였다. 나는 그날 화면속의 블루동지를 보면서, 분명 늘 보던 얼굴인데도 어딘지 다른 사람을 대하는듯한 서먹함을 느끼였다. 블루동지도 나에게 내가 소홀하였던것 같다고 몇번이나 되물었다.

사람의 사이라는것이 참으로 묘하여서, 매일 얼굴을 맞대던 시절에는 몰랐던 서먹함이 달포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서야 비로소 눈에 뜨이는 모양이였다. 나는 그 방송을 마치고 홀로 앉아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처음 이 내용물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갈줄은 서로 몰랐을것이다, 그런데 오래 가다보니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틈이 벌어지는구나 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블루동지와 통화를 할 때마다 어딘가 조심스러워졌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던졌을 농담도 한번 더 생각하고 꺼내게 되였고, 블루동지 쪽에서도 비슷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서로를 더 서먹하게 만드는 악순환이라는것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시월의 위기와 동지달의 서먹함이 겹겹이 쌓인 채로 그해의 마지막 열흘을 맞이하였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저녁 여덟시가 넘어 《배그》 방송을 켜기로 되어있었다. 편성표에는 그저 평범하게 《년말 《배그》 합방》이라고만 적혀있었을뿐,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블루동지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방송을 켜기 앞서 나는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블루 님, 오늘 몇시쯤 들어오실수 있으십니까.》 블루동지는 《여덟시 반쯤엔 접속할수 있을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목소리에 별다른 기색은 없었으나, 나는 그 평온함속에 시월의 앙금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는것을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날 밤 합방에는 블루동지 말고도 왓구홍길동동지가 함께하기로 되어있었다. 평소에도 나와 친남매 같은 사이라 불리던 그였기에, 그가 낀 자리에서는 시청자들도 유독 《우결》다운 분위기에 몰입하기 마련이였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 방송을 시작하였다.

대화창은 방송을 켜자마자 금세 들썩이였다. 《오늘도 둘이 같이 하네ㅋㅋ》 《ㅁㅇㅁㅇ 오랜만》 《저번에 위기라더니 화해하였나보다》 하는 말들이 화면을 타고 흘러갔다. 나는 그 반응들을 곁눈으로 훑으며 마이크 볼륨을 매만졌다. 시청자들은 우리 두 사람의 굴곡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하고있었다.

그날 밤 오락은 사인 스쿼드였다. 나와 블루동지가 한조가 되고, 왓구홍길동동지와 또 한 사람이 나머지 자리를 채웠다. 락하산을 펴고 내려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있었다. 오랜만에 블루동지와 나란히 화면속을 뛰여다닌다는것만으로도 그해의 앙금이 조금은 녹는듯한 기분이였다.

왓구홍길동동지는 착지하자마자 특유의 능청스러운 말투로 《오늘은 둘이 사이좋게 다니십니까》하고 놀렸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오늘은 그럴 생각입니다》하고 대꾸하였는데, 그 말이 얼마 가지 않아 무색해질줄은 그때는 몰랐다.

전세가 위태로워진것은 마지막 자기장이 좁혀들던무렵이였다. 나는 적의 총에 맞아 그자리에 주저앉았고, 화면에는 《다운》이라는 표시가 크게 떠올랐다.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블루 님, 저 다운되였습니다, 빨리 좀 와주십시오!》

그런데 블루동지는 곧장 나에게 오지 않았다. 화면 저편에서 그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잠깐만요, 여기 상자가 하나 있는데 이게 좀 좋은겁니다.》 나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하였다.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는 마당에 상자라니.

《블루 님,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저 죽습니다!》 내가 소리를 높이자 블루동지는 그제야 당황한듯 사투리가 튀여나왔다. 《아이, 이게 진짜 좋은 총이라카는데, 아 예, 예, 갑니다, 가요!》 그러나 그가 상자를 마저 열고 총을 챙겨든 다음 나에게 도착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나는 끝내 화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왓구홍길동동지는 그 광경을 옆에서 다 지켜보고있었던 모양으로, 곧바로 마이크에 대고 웃음을 터트리였다. 《아니 블루 님, 지금 저거 완전 배신 아닙니까》하고 부채질을 하니, 대화창은 그 한마디에 기다렸다는듯 더욱 들끓었다.

대화창은 그야말로 폭발하였다. 《방금 뭐임ㅋㅋㅋㅋㅋ》 《블루님이 상자를 골랐다ㅋㅋㅋㅋ》 《이게 바로 배신 아니냐ㅋㅋㅋ》 하는 말들이 순식간에 화면을 뒤덮었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짐짓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이거 보았습니까, 블루 님이 나를 배신해...!》

그 한마디가 그날 밤 온 대화창을 사로잡았다. 누군가는 《블루님이 나를 배신해...?! 이거 제목이다》하고 적었고, 또 누군가는 《상자 하나에 몇달 우정이 무너지는 순간》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속으로 웃음이 났으나, 겉으로는 계속 분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블루동지는 뒤늦게 나에게 달려와 부활 아이템을 써주면서도 억울하다는듯 항변하였다. 《아니, 강지 님, 그 상자가 정말 희귀한 총이 나오는 상자라카서요, 그거 챙기고 바로 갈라켔는데.》 나는 화면속에서 되살아나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꾸하였다. 《되였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그 짧은 몇초 동안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 오늘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그 말투가 어찌나 짐짓 비장하였던지, 대화창에서는 《무슨 력사적 사변 다루듯이 말한다ㅋㅋㅋ》 《총알 하나로 나라가 망하는것도 아니고》 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나 역시 그 말들을 읽으며 나 스스로도 우습다는 생각을 하였다. 상자 하나때문에 세상이 끝난것처럼 구는 내 모습이, 지나고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진지하였다.

그런데 이 상자 소동을 말하자면, 그보다 한해 앞선 겨울의 어느 저녁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그때에도 우리는 같은 게임안에서 탄약 하나를 두고 온 대화창을 뒤흔든 일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두 사람은 유독 게임속의 사소한 물건 하나로 큰 소동을 일으키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총알로 프로포즈를 하는 사람들이니, 상자 하나로 배신을 저지르는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였을것이다.

그날 오락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곧바로 방송을 접지 않고 그 일을 두고 한참을 티격태격하였다. 블루동지는 《제가 그런 뜻이 아니였다는건 강지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하며 거듭 해명하였고, 나는 《압니다, 아는데 그 순간엔 정말 서운하였습니다》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웃음 섞인 다툼이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시월부터 쌓여온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얼마간 섞여있었다는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

왓구홍길동동지는 그 옆에서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오늘 방송은 두분 덕에 편하게 웃습니다》하고 거들었다. 나는 그 말에 짐짓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그가 있어 그 자리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사람 사이의 앙금이라는것도 곁에서 함께 웃어주는 이가 있으면 한결 쉬이 풀리는 법이다.

방송을 끄고 난 뒤 블루동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강지 님, 아까는 정말 죄송합니다. 상자 욕심에 잠깐 정신이 팔렸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압니다, 압니다. 그런데 오늘 그 소동 덕분에 오히려 마음이 후련합니다. 요 몇달 서로 서운하였던걸 이렇게라도 풀어낸것 같아서요.》

블루동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시월부터 뭔가 어색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크게 한번 웃고나니 그게 다 풀리는 기분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창밖의 눈 쌓인 골목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아래로 눈발이 성기게 흩날리고있었다.

《올해도 며칠 안남았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좀 더 잘해봅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루동지는 특유의 느긋한 웃음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강지 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짧은 인사말속에 그해의 모든 앙금이 눈 녹듯 스러지는것을 나는 느끼였다.

이튿날 대화창과 모임터 게시판에는 밤새 그 영상의 이야기가 돌아다녔다. 《블루님이 나를 배신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영상은 삽시간에 시청회수를 끌어모았고, 시청자들은 저마다 그 장면을 잘라 클립으로 만들어 돌려보았다. 어떤 이는 그 상자 장면만 따로 편집하여 《우결 사상 최대의 배신극》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런 클립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개중에는 그 몇초짜리 장면에 자막을 촘촘히 달아 마치 대하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꾸며놓은것도 있었다. 시청자들의 그 재간을 보고있자면, 우리 두 사람이 벌인 사소한 소동 하나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즐겁게 할수 있다는것이 새삼 놀라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소동은 그저 게임속 상자 하나를 둘러싼 우스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우스개가 그해 내내 이어져온 위기의 서사를 매듭짓는 자리가 되였다는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사람의 일이란 늘 큰 사변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우스운 자리에서 슬그머니 갈무리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나는 그 뒤로도 종종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난다. 상자 하나에 배신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무슨 대단한 다툼이라도 벌인줄 알겠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오래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 서운하였다가 다시 풀어지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자리였을뿐이다. 다만 그것이 카메라앞에서 벌어졌다는 점이 우리를 조금 더 요란하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그해 마지막 며칠 동안 나는 유난히 잠을 설치였다. 본디 잠버릇이 사나운 편이라 이불을 걷어차기 일쑤였는데, 그 며칠은 유독 뒤척임이 심하였다. 아마도 한해를 마무리짓는다는것이, 또 그 안에 담긴 크고작은 굴곡들을 정리한다는것이 마음 한구석을 자꾸 건드렸던 모양이다.

섣달 그믐날 저녁, 나는 홀로 방에 앉아 그해의 방송기록들을 훑어보았다. 시월의 위기, 동지달의 서먹함, 그리고 그믐께의 상자 소동까지, 그 세가지 일들이 마치 한편의 이야기처럼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결국 흔들렸다가 되찾는 일을 그해 내내 되풀이하였구나 하고.

지금도 나는 그때의 위기라는것이 정확히 무엇때문에 그리 커졌는지를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시월의 서운함과 동지달의 낯섦과 그믐의 상자 사건이 서로 어떻게 얽혀있었는지, 그 인과의 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에는 너무 많은 감정과 너무 많은 방송분량이 뒤섞여있었다. 다만 그 모든 흔들림 끝에 우리가 다시 서로를 향해 웃을수 있게 되였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지자 창밖에서 멀리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콤퓨터를 끄지 않은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화면에는 아직 그날 방송의 채팅 기록이 떠있었고, 그 끝자락에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들이 줄지어 남아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시월부터 그믐까지 이어진 그 흔들림이 우리 《우결》이라는 내용물가 처음으로 겪은 진통이였으며, 그것을 넘김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오래갈수 있는 사이가 되였다는것을. 후날 사람들이 이 시기를 두고 《우결 중 처음 찾아온 위기》니 《배신》이니 하며 우스개삼아 이야기할 줄도, 그때의 나는 짐작조차 못하였다.

해가 바뀌는 자정무렵, 나는 문득 블루동지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올해 고생 많았습니다. 내년에도 잘해봅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강지 님도 고생 많았습니다. 새해에는 상자 안 뺏어먹겠습니다.》 나는 그 답을 보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속에서 그해의 모든 굴곡이 비로소 온전히 갈무리되는듯하였다.

돌이켜보면 그해 겨울의 그 소동은 참으로 사소한 일이였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라는것은 늘 그런 사소한 자리에서 시험받고, 또 그런 사소한 자리에서 회복되는 법이다. 력사라는 거창한 말을 쓰기에는 부끄러운 규모의 일이였지만, 적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한해를 매듭짓는나름의 사변이였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우주26(2019)년은 저물었다. 시월의 위기로 시작하여 동지달의 서먹함을 지나 그믐의 상자 소동으로 끝을 맺은 그해의 이야기는, 지나고보면 우리 두 사람이 처음으로 큰 굴곡을 함께 넘어선 한해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이 내용물가 이렇게 오래갈줄, 그리고 그 끝에 또 얼마나 많은 굴곡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을줄 알지 못하였다.

새해가 밝은 다음날, 대화창에는 벌써 《새해에도 이 커플 계속 갑니까》하는 말들이 올라오고있었다. 나는 그런 물음들을 보며, 시청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이미 한해로 끝날 자리가 아니라 계속 이어질 하나의 서사가 되어버렸다는것을 실감하였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를 그때의 나는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하고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상자 이야기를 꺼내며 블루동지를 놀리군 하였다. 《그때 그 상자, 그렇게 좋은 총이였습니까.》하고 물으면 블루동지는 늘 멋쩍게 웃으며 《그게, 지나고보니 그렇게 좋은것도 아니였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웃었고, 그 웃음속에서 그해의 앙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놀림감이 되어버린 상자 이야기는 오래도록 우리 둘만의 웃음거리로 남았다. 후날 어느 합방 자리에서 누군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블루동지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듯 말하였고, 나는 그럴 때마다 짐짓 근엄한 얼굴로 《두고봅시다》하고 대꾸하였다. 사람 사이의 오랜 앙금이 이렇게 웃음거리 하나로 남을수 있다는것이, 나는 지금도 고맙게 여겨진다.

새해가 밝아오는 아침, 나는 콤퓨터를 켜고 그해 첫 방송을 준비하며 지난해의 편성표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 페지 맨 끝자락에 적힌 《블루님이 나를 배신해...?!》라는 제목을 보며 나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번 흔들렸다가, 또 한번 서로를 되찾으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그해 겨울을 되짚어보면, 나는 그 상자 하나가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만약 그날 밤 그 소동이 없었더라면, 시월부터 쌓여온 그 서먹한 앙금이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나로서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때로는 이렇게 사소하고 우스운 일 하나가, 크고 무거운 감정의 매듭을 대신 풀어주는 법이다.

그해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결코 거창한것이 아니였다. 다만 오래 함께한 사이일수록 서운함도 쌓이고 서먹함도 찾아오되, 그것을 풀어내는 자리 또한 늘 뜻밖의 곳에서 마련된다는것, 그 한가지뿐이였다. 나는 그것을 그해 겨울의 상자 하나로 배웠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본 서적은 창작된 가상의 회고록입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단체의 립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