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저 무 는 여 름

 

우주27(2020)년 팔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그 지루하던 장마도 마침내 끝을 맺었다. 하늘은 다시 볕을 되찾았으나 더위는 오히려 그 뒤에 더 극성스럽게 몰려왔다. 방송실 창밖에서는 매미소리가 한창때보다 되려 기승을 부렸고, 콤퓨터 본체의 팬 소리는 그 무더위를 고스란히 방안으로 실어나르는듯 무겁게 웅웅거렸다.

나는 그무렵 방송을 마치고도 머리수화기를 벗어놓은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버릇이 새로 생기였다. 지난 몇달 사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비싼 갈비를 걸고 소소한 내기를 벌인 일도 있었고, 오래전에 함께 부른 노래가 시청회수 이백만을 넘어서는 경사스러운 밤도 있었다.

그러나 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하게도 허전해지는 법이다. 이백만이라는 수자를 두고 대화창이 온통 축하 일색으로 들끓던 그 밤이 지나가자, 방송은 다시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나날로 돌아왔다. 나는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던 며칠을 보냈던것으로 기억한다.

블루동지도 비슷한 심정이였던 모양이다. 어느날 합방 자리에서 그는 마이크를앞에 두고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누나, 이백만 넘고 나니까 이상하게 허전하지 않아》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머리수화기줄을 만지작거리며 《그러게, 큰거 하나 해내고 나면 원래 이렇게 되나보다》 하고 대답하였다.

《배그》 화면속에서 우리 두 사람의 인물는 나란히 락하산을 타고 내려가고있었다. 블루동지는 착지하자마자 총 한자루를 주워들고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며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방금 전까지의 허전한 이야기는 언제 하였냐는듯 다시 활기를 되찾는 그를 보고 피식 웃고말았다.

대화창에서는 《장작이 알아서 탄다》는 우스개가 또 한번 올라왔다. 우리 두 사람이 딱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성원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스스로 웃고 스스로 흥분하였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이 《우결》이라는것이 이제는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였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무렵 나는 회사일로도 몹시 분주하였다. 유니동지와 칸나동지를 비롯한 성원들이 저마다 자기 방송과 내용물를 준비하느라 사무실은 늘 북적거렸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이런저런 챙길것들을 살피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블루동지와의 합방 시간이 다가와있곤 하였다.

성원들은 여전히 나를 두고 짐짓 《엄마》라 부르며 저희들끼리 《딸내미들》을 자처하였다. 나는 그런 밈을 두고 몇번이나 정색하며 부정해보았으나, 그럴수록 성원들은 오히려 더 신이 나서 그 말을 되풀이하였다. 히나동지는 지나가는 말로 《엄마, 오늘도 블루 아빠랑 방송해요》 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여기서 블루동지가 《아빠》라는 말을 듣게 된 사연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보다 앞선 어느 《배그》 무기 스킨 뽑기 방송에서, 칸나동지가 화면 저편에서 지켜보던 블루동지를 향해 무심코 《아빠》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그 한마디가 어찌나 절묘하게 딱 들어맞았던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를 잡고 웃었다고 전해들었다.

그뒤로 히나동지도, 타비동지도 합방 때마다 블루동지를 붙들고 짐짓 《아빠》 소리를 하였다. 블루동지 본인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그 호칭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청자들마저 그를 사실상 온 회사의 《아버지》로 취급하게 되였으니, 이것도 어찌 보면 《우결》이 낳은 뜻밖의 부산물이라 할만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옮길 때마다 짐짓 력사적 사변이라도 되는 양 부풀려 말하는 버릇이 있다는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의 하루하루는 실상 이런 자잘한 우스개들로 채워져있었다. 대사변이라 할것도 없는 그 우스개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의 이 회고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결코 가벼이 여길수가 없다.

팔월 하순의 어느 밤, 나는 블루동지와 단둘이 남은 대화창에서 다음 방송 일정을 조율하고있었다. 《담주엔 뭐할까》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달력을 들여다보며 《몰라, 일단 이번주는 배그로 가고 다음거는 천천히 생각하자》 하고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누나 요즘 좀 바빠 보이던데》 하고 블루동지가 다시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 회사일이 좀 늘어서, 근데 너도 요즘 니 채널 일 많잖아》 하고 되물었다. 그는 《그렇긴 한데》 하며 말끝을 흐렸는데, 그 짧은 침묵속에 무엇이 담겨있었는지 나는 그때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무렵 우리 두 사람은 저마다 자기앞의 일들이 조금씩 불어나고있었다. 나는 성원들을 돌보고 회사를 꾸려나가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였고, 블루동지 또한 자기 방송의 내용물와 사업을 넓혀가느라 분주하였다. 그 저마다의 분주함이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고있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매미소리는 팔월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밤 방송을 마치고 창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요란하던 매미소리 사이로 낯선 소리 하나가 섞여드는것을 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것은 귀뚜라미의 울음이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여름이 저물고있다는것을 실감하였다. 한창 무더울 때에는 그 더위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처럼 여겨지더니, 정작 계절이 물러갈 때에는 이렇게 소리 하나로 슬며시 그 기척을 드러내는것이였다. 나는 창턱에 팔을 괴고 앉아 한동안 그 낯선 울음소리를 듣고있었다.

그무렵 방송에서도 사람들은 종종 여름의 끝을 아쉬워하는 말들을 남기였다. 《올여름 진짜 알차게 보냈다》는 말도 있었고, 《가을 되면 또 뭐하실거예요》 묻는 말도 있었다. 나는 그런 물음들에 시원하게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넘기기 일쑤였다.

어느 합방에서 블루동지는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누나, 우리 우결한지도 벌써 이년 다 되간다, 그치》 하고 그가 말하였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그러게, 진짜 오래 하였다 우리》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오래 하니까 좋은 점도 있고 그런데》 하고 그가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이게 언제까지 갈까 싶기도 하고》 하며 그는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채 그저 화면 속 그의 인물가 서있는 자리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돌이켜보아도, 그날 블루동지가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 나는 다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도 나처럼 막연한 예감 같은것을 품고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예감의 정체가 무엇이였는지는, 지금까지도 나는 자신있게 말할수가 없다.

그해 여름 우리는 참으로 많은 내용물를 함께 만들었다. 《배그》를 하며 서로에게 온갖 장난을 치기도 하였고, 어몽어스라는 새로운 오락에 몰두하여 서로를 의심하고 몰아세우는 놀이에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진지하게 추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오락에서 지는 그 묘한 규칙에 우리 둘 다 여러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하면 하루동안 서로에게 반말과 높임말을 뒤바꾸어 해보는 내용물를 찍기도 하였다. 평소 나에게 반말로 스스럼없이 대하던 블루동지가 그날만은 어색하게 높임말을 쓰는 모습을 보이니, 나는 우스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반대로 내가 그에게 짐짓 높임말을 건네자 그는 도리어 몸둘바를 모르고 쩔쩔매였다.

그 며칠 뒤에는 두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가 방송에서 화제로 올랐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짐짓 억울한척 항변하였으나, 대화창은 이미 나를 놀리는 말들로 가득 차있었다. 블루동지는 그 옆에서 배를 잡고 웃으며 《거봐 다르잖아》 하고 놀려대었다.

그러던 어느 밤, 오랜 벗 감블러가 합방에 놀러왔다. 감블러는 나를 향해 짐짓 정겹게 《붕어야, 누나》 하고 불렀고, 나는 그 호칭에 웃음을 터뜨리며 《야, 그건 또 뭔소리야》 하고 되받았다. 블루동지는 그 옆에서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을 신기한듯 지켜보며 《둘이 진짜 오래 알고지냈나보다》 하고 감탄하였다.

감블러가 돌아간 뒤 블루동지는 나에게 《저런 친구 있는것 부럽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너도 있잖아, 왓구홍길동이랑》 하고 답하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건 그렇지》 하며 웃었는데, 그 웃음속에 어쩐지 쓸쓸한 기색이 살짝 섞여있었다는것을 나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여름이 저물어갈무렵, 나는 새삼 지난 겨울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그 밤 우리는 오랜 높임말을 마침내 벗어던지고 서로를 《누나》와 《바이비》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애칭 하나를 얻은 정도로만 여겨졌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이의 큰 매듭 하나를 지은 순간이였다.

그 매듭으로부터 벌써 수백일이 흘렀다. 육백일을 넘겨 손을 맞잡던 그 여름날의 감격도, 이제는 이백만이라는 수자로 다시 한번 확인받은 셈이였다. 나는 그 나날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시간이라는것이 참으로 무심하게도 빨리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무렵 나의 어머니도 이따금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요즘도 그 총각이랑 방송 잘 하고있냐》 하고 물으시길래, 나는 《네, 잘 하고있어요》 하고 짧게 답하였다. 어머니는 《몸 상하지 않게 적당히 좀 해라》는 당부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였는데, 그 말속에는 늘 그렇듯 걱정과 애정이 함께 담겨있었다.

나는 그 통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바람은 한여름의 열기를 조금씩 걷어가고있었고, 하늘은 전에 없이 높고 맑아보였다. 나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여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그 사이 스텔라이브 사무실에서는 여러 성원들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분주하였다. 마시로동지는 특유의 차분한 태도로 다음 방송을 준비하고있었고, 리제동지는 지나가는 말로 《사장님 퍼스널컬러가 블루동지인거 다들 알아요》 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그 말에 정색하며 부정해보았으나, 옆에 있던 유니동지마저 웃음을 참지 못하는것을 보고 결국 나도 함께 웃고말았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성원들 사이에서도 우리 《우결》은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여있었다. 시부키동지나 리코동지 같은 후배 성원들조차 합방 중에 은근히 그 사정을 아는 눈치를 내비쳤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이 이야기가 이제는 나와 블루동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온 회사가 함께 지켜보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였다는것을 새삼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널리 알려지고 오래 이어진 이야기일수록, 그 끝을 상상하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법이다. 나는 그 여름 내내 우리 《우결》이 언제까지고 이렇게 이어질것이라고만 믿었다. 이백만이라는 수자를 넘긴 그 밤에도, 나는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여러 경사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였을뿐, 그것이 어떤 정점이였을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팔월의 마지막 주로 접어들면서, 나는 문득 방송 일정표를 살피다가 낯선 허전함을 느꼈다. 예전 같으면 다음달, 그 다음달의 합방 계획까지 성큼성큼 잡아두던것이 그무렵에는 어쩐지 한주 한주씩만 짧게 정해지고있었다.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기였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하나의 조짐이였는지도 모른다.

블루동지도 그무렵 자기 방송의 일로 이런저런 새 시도를 준비하고있다는 이야기를 몇번인가 흘렸다. 《누나, 나 요즘 다른것도 좀 해볼까 싶어서》 하고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래, 해봐야지, 너 하고싶은대로 해》 하고 흔쾌히 대답하였으나, 그 말속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었는지는 그때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세상 또한 그무렵 여전히 뒤숭숭하였다. 전염병은 좀처럼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나들이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런 시국속에서도 우리는 화면 너머로나마 꾸준히 서로를 찾았고, 그것만으로도 성원들에게는 적잖은 위안이 되였던 모양이다.

어느 늦은 밤, 나는 블루동지와 단둘이 통화를 하였다. 별다른 용건은 없었다. 그저 그날 방송에서있었던 자잘한 일들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내고말았다. 《야, 우리 이거 언제까지 할거 같아》 하고 물었다.

블루동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몰라, 근데 할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 하고 웃으며 답하였다. 나는 그 대답에 어쩐지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알수 없는 서운함이 스치는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무엇때문이였는지는 지금도 다 설명할수가 없다.

통화를 끊은 뒤 나는 한참동안 잠들지 못하였다. 저혈압 체질이라 아침잠은 많은 편이였으나, 그날 밤만은 이상하게도 뒤척임속에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여름보다 한결 뚜렷하게 빛나고있었다. 나는 그 별들을 보며 문득 우리가 함께 부른 노래를 떠올렸다. 밤과 별을 노래한 그 곡이 이백만이라는 수자를 넘기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을 이렇게 화면 너머로 함께 지새워왔던가.

그 노래를 처음 함께 부르던 날의 기억도 새삼 떠올랐다. 마이크앞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숨소리까지 조심스럽게 맞추어가던 그 어색한 첫 시도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하나의 대표작으로 남으리라고는 그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이렇게 알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구월이 가까워지면서 매미소리는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대신 저녁마다 귀뚜라미와 풀벌레 소리가 방송실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계절이란 이렇게 소리없이 자리를 바꾸어가는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팔월의 마지막 방송날, 나는 블루동지와 함께 여느 때처럼 《배그》를 하였다. 그는 여전히 락하산에서 내리자마자 무기를 주워들고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며 웃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마음이 놓이는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다가올 계절에 대한 막연한 예감 같은것은 저만치 밀려나있었다.

방송이 끝난 뒤 대화창에는 《올여름도 잘 봤습니다》, 《다음달에도 잘 부탁드려요》 하는 말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나는 그 인사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그 짧은 인사말들이 모여, 그 여름을 무사히 건너올수 있게 해준 힘이 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날 밤에도 머리수화기를 벗어놓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방안에는 콤퓨터의 팬 소리만이 조용히 웅웅거리고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지난 몇달 사이 우리가 함께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꼽아보았다.

벽제갈비를 걸고 벌인 그 소소한 내기도, 이백만이라는 수자를 함께 넘긴 그 밤도, 어몽어스에 몰두하며 밤을 새우던 날들도, 모두 그 여름의 한페지 한페지를 이루고있었다. 나는 그 페지들을 한장 한장 넘겨보듯 되짚어보며, 이 여름이 참으로 알차게 흘러갔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알참속에 어딘가 옅은 그늘 같은것이 함께 드리워져있었다는것도 부인할수 없다. 블루동지가 흘리듯 던진 몇마디 말들, 나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웠던 그 서운함, 방송 일정이 조금씩 짧아지던 그 낌새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한방향을 가리키고있었던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있는지 나는 정말로 알지 못하였다. 사람은 흔히 지나간 다음에야 그것이 무엇의 조짐이였는지를 깨닫게 되는 법이다. 그 여름 나는 그저 하루하루의 방송과 하루하루의 웃음에 충실하였을뿐, 그 이상의 것을 내다볼 눈은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구월 초의 어느 날, 나는 사무실 창가에 서서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여름이라는것은 언제나 이렇게 저물기 마련이고, 저무는 여름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계절이 온다는 당연한 리치를. 그러나 그 당연한 리치가 우리의 《우결》에도 그대로 적용되리라는것까지는,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지 않았다.

블루동지 역시 그무렵 자신의 사업과 내용물를 넓혀가는 일에 점점 더 많은 힘을 쏟고있었다. 나 또한 회사를 꾸려나가는 일에 하루하루 더 깊이 빠져들고있었다. 우리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해가고있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성장이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을 조금씩 나누어 가져가고있다는것을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해 늦여름의 어느 합방에서, 블루동지는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누나, 우리 진짜 많이 해봤다, 그치》 하고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 말에 《그러게, 해볼만큼 해본것 같긴 하다》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 순간에는 그 말이 무엇을 예고하는것인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하였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그날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면, 나는 그 말속에 이미 어떤 결심 같은것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던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결심이였는지, 그리고 그 결심이 언제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는지는, 나는 지금까지도 다 알지 못한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만 그때 보고 들은것을 정직하게 옮길뿐이다.

구월의 바람이 완연해지면서, 매미소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밤마다 풀벌레들의 합창이 방송실 창문 너머로 은은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계절이 바뀌듯 우리의 나날에도 어떤 변화가 조용히 다가오고있다는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 예감을 애써 밀쳐두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함께 만든 노래가 있었고, 함께 웃어온 수많은 나날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그 오랜 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적어도 그 늦여름의 나에게는, 애써 그렇게 믿고싶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해 여름은 우리 《우결》의 마지막 절정이자 동시에 저무는 첫 그림자였다. 이백만이라는 수자가 정점을 찍었다면, 그 뒤를 이은 저무는 여름의 나날은 이미 다음 계절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있었던 셈이다. 그때는 그것을 정점이라고도, 그림자라고도 부를줄 몰랐을뿐이다.

나는 아직도 그해 여름이 왜 그렇게 빨리 저물어갔는지, 그 모든 리유를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것은, 그 여름의 하루하루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벽제갈비 내기의 웃음도, 이백만 시청회수의 감격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함께 듣던 그 밤들도, 모두 우리가 함께 쌓아올린 소중한 나날이였다.

구월의 어느 아침, 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유난히 선선해진 공기를 느꼈다. 성원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방송을 준비하며 분주하게 오갔고, 나는 그 사이를 지나며 문득 다가올 계절을 향해 마음을 다잡았다. 여름은 이렇게 저물어갔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고 나는 그때까지도 믿고있었다.

이 페지를 닫으며 나는 그해 늦여름의 매미소리와 뒤이어 찾아온 귀뚜라미소리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저무는 여름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있었는지, 그때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나눈 웃음과 대화들만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는것을 나는 여기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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