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 고 없 던 방 문
우주28(2021)년 시월 아흐렛날, 해가 부쩍 짧아진 늦가을 저녁이였다. 창밖으로는 이미 어스름이 짙게 내려앉아 이웃집 창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있었고, 바람은 창틀 틈으로 스며들어 방안의 온기를 야금야금 앗아가고있었다. 나는 두꺼운 겉옷을 걸친채 방송실 콤퓨터앞에 앉아 화면 한구석의 시계를 흘끗거리고있었다.
방안은 늘 그렇듯 조용하였다. 본체 팬 돌아가는 나직한 소리와, 이따금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말고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마이크는 이미 켜두었으나 나는 그 앞에 앉은채로 어쩐지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는것을 느끼고있었다.
책상우에는 그날 낮에 미기가 챙겨준 서류뭉치가 그대로 쌓여있었고, 화면 옆에 세워둔 작은 등불만이 방안을 은은하게 밝히고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일정에 몸이 지쳐있었다는것을 그때는 나 스스로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날은 저녁무렵에 블루동지와 온라인으로 합방을 하기로 오래전부터 잡아둔 날이였다. 《우결》이 공식으로 막을 내린지도 벌써 한해 남짓 지났지만, 그렇다고 우리 둘 사이의 방송인연까지 끊어진것은 아니였다. 종영 두 달만에 올라온 《이미 우린 끝났잖아.. 누나》며, 그 이듬해 봄에 올라온 《이젠 어색해진 우리 사이》며, 그런 내용물들이 오히려 우리 관계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것을 증명해주고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저녁, 나는 그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정확히 무엇때문이였는지는 이 페지를 쓰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 시달려 몸이 유난히 무거웠다는것과, 방송 준비를 하다말고 잠깐 눈을 붙인다는것이 그만 소리소문없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는것만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있다.
블루동지는 그 시각 자기 방송실에서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머리수화기를 목에 걸치고 화면 저편에 앉아, 처음에는 그저 접속이 좀 늦나보다 하고 대화창의 벗들과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한다. 십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블루동지가 보낸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만 길게 울리다가 저 혼자 끊어질뿐이였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후날 밝혔는데, 아마 방송준비가 늦어지는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던 모양이다.
한시간이 지났다. 대화창에서는 슬슬 《오늘 방송 취소인가요》하는 물음이 올라오기 시작하였고, 블루동지는 그저 웃으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감자님 늦잠자나보다》하고 대꾸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그것이 그저 웃자고 하는 말인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두시간이 지났다.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은 화를 낼법도 한데, 블루동지는 평소 성정이 느긋한 사람이라 화를 내는 대신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력사라는것은 이렇게 사소하고 조용한 침묵속에서 뜻밖의 사변을 잉태하는 법이다.
대화창의 벗들도 그즈음에는 사뭇 진지해져서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였다. 《강도단 여러분 괜찮으신가요》, 《감자님 집에 무슨 일 생긴거 아니예요》하는 걱정 섞인 말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하였고, 블루동지도 겉으로는 웃어보였지만 속으로는 그 말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세시간째에 접어들자 블루동지는 더는 화면앞에 앉아서 기다릴수만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전화도 문자도 통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긴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던것이다. 그는 대화창에다 《잠깐만 기다려봐라, 내가 좀 확인하고 온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이 방문을 이야기하자면 그보다 한해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주27(2020)년 유월 엿샛날, 우리는 손을 맞잡기까지 꼬박 육백일이 걸렸다는 그 첫 현실합방을 치른적이 있었다. 그날의 방송은 전 세계 《트위치》 시청자수 2위까지 찍었던, 그야말로 전설이라 불릴만한 사변이였다.
화면 이쪽저쪽으로만 마주보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방에 마주앉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화창은 뒤집어졌었다. 그때는 미리 날짜를 맞추고, 만날 장소를 정하고, 서로 무슨 옷을 입을지까지 며칠 전부터 상의한 끝에 나선 걸음이였다.
블루동지는 그날 문앞에서 몇번이나 서성이다 겨우 초인종을 눌렀노라고 그날의 소감을 밝힌 일이 있다. 낯설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문턱을 넘던 그 기억이, 세시간째 응답없는 오늘의 상황과 겹쳐 떠올랐을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미리 약조하고 채비를 갖추어 나선 길이였지만, 이번에는 아무 예고도 없이, 그저 걱정 하나만 앞세우고 나서는 길이였다. 같은 문턱을 넘는 일이라도 그 마음가짐은 이렇게나 다를수 있는 법이다.
다시 그 시월의 저녁으로 돌아가보자. 블루동지는 겉옷을 챙겨입고 차를 몰아 내가 사는 동네로 향하였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며, 그는 몇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여전히 신호만 길게 울릴뿐이였다.
그는 후날 그 차안에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가 하고.》 평소에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는 그가 그날만은 신호등마다 애가 탔다고 한다.
차창밖으로는 늦가을 나무잎들이 가로수마다 누렇게 물들어 바람에 흩날리고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무슨 노래가 흘러나오고있었는지 그는 도무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아마 그만큼 마음이 다른 데 가있었기때문일것이다.
그가 내 집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저녁 여덟시가 다 되여있었다. 세시간이 넘는 침묵 끝에 도착한 문앞에서, 그는 잠깐 숨을 고르고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고, 이번에는 문을 가볍게 두드리기까지 하였다. 문 너머로 귀를 기울여보아도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니, 그의속은 점점 더 타들어갔을것이다.
그제서야안에서 부스스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그때 무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였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눈을 떴는지 지금도 정확히 가려낼수가 없다. 다만 문을 열었을 때 문밖에 서있던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블루동지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때 내 몰골이 어떠하였는지는 이 페지에 굳이 자세히 적지 않으련다. 다만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은 반쯤 감긴채였으니, 방금 잠자리에서 굴러나온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고만 해두겠다. 그런 모습을 하고 문을 열어 마주친 사람이 하필 블루동지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우스운 이야기거리가 되였다.
《누나...》
문이 열리자 블루동지는 그 한마디만 하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걱정과안도가 뒤섞인 얼굴이였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하였다.
나는 놀란 나머지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바이비... 니가... 여길 어떻게...》 목소리가 잠에서 덜 깬 탓인지 갈라져나왔다.
《세시간째 련락이 안되니까 걱정돼서 왔지. 무슨 일 있는줄 알았잖아.》 그의 목소리에는 나무라는 기색보다안도하는 기색이 훨씬 짙게 묻어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미안, 미안... 나 진짜 깜빡 잠들었나봐. 완전 큰일났다.》 나는 연신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문앞에 선 채로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러다 블루동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근데 누나, 나 여기까지 왔는데... 이거 그냥 찍을까?》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사람치고는 뜻밖에도 태연한 물음이였다.
그 말에 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세시간이나 사람 애를 태워놓고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 상황을 그냥 내용물로 만들어버리자는 그 말이 우습고도 고마웠다. 방송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다운 순발력이였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거 그냥 하자. 대신 나 세수는 좀 하고 나올게.》 나는 서둘러 집안을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자다 깬 몰골 그대로 방송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라 얼굴이라도 씻고 나오겠다며 급히 위생실로 뛰여들어갔다.
블루동지는 그사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전화를 세워놓고 화면 각도를 맞추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라는듯, 그리고 이 집 구조를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듯 손놀림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도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 그 태연함이 새삼 우습기도 하였다.
잠시후 나는 대충이나마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와 자리에 앉았다. 화면 너머로 방송이 시작되였다는 신호가 뜨자마자 대화창은 즉시 폭발하듯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미처 예고 한마디 없이 시작된 방송치고는 시작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이게 실화냐》, 《블루가 진짜 강지 집에 갔다고?》, 《예고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야》하는 물음들이 화면우로 정신없이 쏟아졌다. 그 사이사이로 《설마 그 노쇼가 그 노쇼냐》하는 짐작들도 뒤섞여 올라왔다.
블루동지는 그 반응을 보며 껄껄 웃더니 사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누나가 세시간을 노쇼하였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와봤더니 자고있었다.》 그 말투에는 원망보다 다행스러움이 더 짙게 묻어있었다.
대화창은 그 한마디에 또 한번 뒤집어졌다. 《역시 감자 누나답다》는 반응과 《블루 진짜 다정하다》는 반응이 뒤섞여 화면우를 가득 채웠다. 개중에는 《전 세계 트위치 2위 찍은 그 콤비 아니냐》며 옛날 기록까지 들추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대화창 사이로 오랜 벗들의 이름도 이따금 오르내렸다. 《김박사가 이 방송 보면 섭섭해하겠다》하거나 《감블러도 어디서 보고있으려나》하는 우스개가 지나갔고, 나는 그런 옛 이름들을 눈으로 좇으며 혼자 피식 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고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근데 나만 잘못하였냐, 니가 문자를 좀 세게 보냈어야지.》 잠에서 덜 깬 탓인지 말투가 평소보다 더 늘어져나왔다.
《누나, 전화를 열번을 넘게 하였는데 그건 억울하지.》 블루동지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나는 할말이 없어 그저 웃고말았다. 이런 실없는 말다툼이야말로 예전 《우결》 시절 방송의 한 장면 같아서, 대화창에서도 그 기시감을 알아챈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설레는 개꿀이다, 저 텐션 봐라.》 대화창의 누군가가 블루동지 특유의 그 말투를 흉내내여 남긴 글에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화면 너머로도 방안 공기가 다 흔들리는 느낌이였다.
그날의 방송은 특별한 각본도 없이, 그저 늦은 저녁에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대충 남새를 썰어 라면을 끓여내왔고, 블루동지는 그것을 보고 오랜만에 집밥 같다며 반가워하였다.
《이거 완전 옛날 생각난다.》 블루동지가 젓가락을 들며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 말에 문득 우리가 함께 방송을 시작한지 벌써 몇해가 지났는지를 손꼽아 헤아려보게 되였다.
《그러게. 우리 이렇게 마주앉아 밥먹은지도 오래되였네.》 나의 대답에 블루동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 국물을 한술 떠먹었다. 화면 너머 대화창에서는 그 소박한 장면 하나에도 《이게 바로 그 시절 감성이다》하는 말들이 줄줄이 올라오고있었다.
방송이 한시간을 넘어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예전 이야기를 꺼내게 되였다. 높임말을 쓰던 시절부터, 어느 날 갑자기 반말을 트게 된 그 어름의 일이며, 서로 《강지 님》, 《블루님》하고 부르던 어색함까지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때 누나가 처음으로 나한테 오빠라고 불러줬던거 기억나?》 블루동지가 문득 그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이 그건 좀 놔둬라,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려 죽겠다.》
《생각해보면 우리 참 오래 하였다, 그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루동지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가끔 만나서 얘기하니까 좋다.》
그 말에는 억지스러운 미화도, 과장된 애틋함도 없었다. 그저 오랜 인연을 담담하게 짚어보는 사람의 말투였다. 대화창도 그 순간만은 소란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흘러가는듯하였다.
블루동지는 문득 라면을 뜨던 젓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참, 강맘은 요즘 잘 지내시나? 한번 인사드린지도 오래되였네.》 예전에 《배그》 합방 중 강맘이 그를 두고 사위감으로 백점이라 하였던 그 일을 떠올린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그 물음에 웃으며 대답하였다. 《잘 지내시지. 니 얘기 나오면 아직도 좋아하셔.》 그 말에 블루동지는 어쩐지 멋쩍은듯 뒤머리를 긁적이며 라면 국물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블루동지는 문득 사투리 섞인 말투로 돌아가 이렇게 물었다. 《근데 누나, 아까 진짜 왜 안깼는데, 뭔 일 있었나 그거.》 당황하거나 마음이 풀어지면 저도 모르게 튀여나온다는 그 경상도 말씨였다.
나는 그 말투가 우스워서 한참을 웃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아니 진짜 별일 없었어, 그냥 너무 곤하였나봐. 미안하다니까.》 그 대화를 지켜보던 대화창에서는 《사투리 나왔다》는 반응이 또 한바탕 올라왔다.
방송은 그렇게 두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화면 밖에서 보기에는 대단할것 없는, 그저 라면 한그릇 나눠먹으며 옛말 하는 자리였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례사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후날 이 방송을 두고 사람들은 과거 《우결》 시절만큼이나 달달한 모습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그 평가를 들을 때마다 쓴웃음 반, 흐뭇함 반이 섞인 묘한 기분이 들군하였다. 예고도 없이 벌어진 소동 하나가 그렇게 오래도록 회자될줄은 그날 저녁에는 짐작조차 못하였다.
방송이 마무리될무렵, 대화창에서는 아쉬움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더 보고싶다》, 《이런 방송 또 없나요》하는 글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블루동지는 그런 반응을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음엔 누나가 노쇼 안하면 이런거 못보는것 아니야?》 그 말에 나는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야, 그게 자랑이냐.》 화면 이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대화창에서는 웃음 표시가 동시에 쏟아졌다.
방송을 끝낸 뒤 블루동지는 라면 그릇을 함께 치워주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앞까지 배웅을 나온 나에게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였다. 《그래도 다음엔 진짜 좀 일찍 일어나라, 누나.》
《알았어, 알았어. 오늘 진짜 고마웠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계단아래로 멀어질 때까지, 나는 문앞에 한동안 서서 그 소리를 듣고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집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식탁우에는 라면 그릇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창밖으로는 어느새 밤이 완전히 내려앉아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소동은 참으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것이였다. 잠깐 잠들었던것뿐인데, 그것이 이토록 커다란 사변이 되여 방송사에 한 페지를 남기게 될줄은 그때는 짐작조차 못하였다. 력사라는것은 참으로 예측할수 없는 데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다시 생각해보면, 그날의 그 예고 없던 방문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이 아직 화면 뒤의 사람으로, 방송원 대 방송원으로 마주앉을수 있었던 마지막 나날들 가운데 하나였다. 라면 냄새와 사투리 섞인 웃음소리로 채워진, 지극히 평범한 저녁이였다.
그무렵의 나는 아직 강형이니 15강지니 하는 옛 별명들을 벗지 못한, 그저 화면 하나로 밥벌이를 하는 평범한 방송원에 지나지 않았다. 감자라는 애칭 하나로 불리던 그 시절이 이렇게 빨리 저물어가리라고는, 라면 그릇을앞에 두고 앉아있던 그날 저녁에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이듬해부터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방송에 서게 될 참이였다. 그림으로 그려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성원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참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조금 뒤의 일이니, 여기서 미리 다 말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그날 밤, 라면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부엌에 홀로 앉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결》이라는 이름의 그 긴 려정이 공식으로는 이미 한해 전에 끝났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것은 그렇게 날짜 하나로 딱 잘라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였다.
방송이 끝나도, 내용물라는 이름이 붙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고 서로의 문을 두드릴수 있는 사이였다. 그것이야말로 그 긴 세월의 《우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 아니였을가 싶다.
나는 아직도 그날 내가 왜 그렇게 깊이 잠들어버렸는지, 그것이 그저 우연이였는지 아니면 몸이 보내는 어떤 신호였는지 다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우연한 실수 하나가 뜻밖에도 가장 따뜻한 저녁 하나를 우리에게 되돌려주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수가 없다.
세시간의 노쇼와 예고 없는 방문, 그리고 라면 한그릇으로 마무리된 그날의 소동을 두고 후날 누군가 력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지는 알수 없다. 다만 나는 이 페지에 그날의 일을 있는 그대로 옮겨적으며, 그것으로 이 장을 갈무리하려 한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이 장의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종영 이후로도 한동안 소소하게 이어졌다. 다음 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겠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놓기 앞서 나는 이 소박한 저녁 하나를 오래도록 붙잡아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