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 의 상 논 란
우주31(2024)년 12월 하순은 유난히 추웠다. 사무실 창밖에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도로가의 등불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있었다. 나는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콤퓨터앞에 앉아 결재서류를 넘기고있었는데, 창틈으로 스며드는 랭기가 손끝을 시리게 하였다. 사무실 라지에터에서는 낮은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였고, 콤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그 소리에 섞이여 겨울아침의 고요를 채우고있었다.
그해 세밑은 류달리 바빴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신의상 발표가 줄줄이 예정되여있었고, 성원들은 저마다 새해를 앞두고 새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 채비를 서두르고있었다. 나는 사장으로서 그 채비의 마지막 문을 지키는 사람이였다. 도안이 내 손을 거쳐 세상에 나가기까지, 나는 늘 그 문지기 노릇을 스스로 맡아왔다.
나는 원래 이 검수라는 일을 누구에게도 선뜻 넘기지 않았다. 회사가 몇명 안되는 성원으로 시작하던 그 옛날부터 옷 한벌, 그림 한장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보는것은 늘 내 몫이였다. 성원이 하나둘 늘어나고 회사가 제법 커진 뒤에도 나는 그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 그것이 자랑이였는지 고집이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얼마전 이 회고록에도 적어두었듯이, 그해에는 칸나동지가 첫 딸로서 새 길을 밝히였고 유니동지의 단독무대에서는 리제동지가 처음으로 립체모습을 세상에 내놓았다. 기쁜 일들 사이사이로 아픈 일들도 섞여드는것이 한 집안의 살림이라면, 이제 적으려는 이 일도 그 살림의 한자락이였다. 나는 이 일을 이 장에 놓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군한다.
그 가운데서도 리제동지의 신의상은 회사안에서 특별히 공을 들인 기획이였다. 얼마전 유니동지의 단독무대에서 리제동지가 처음으로 립체모습을 선보인 뒤로, 그 여운을 이어갈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것이 우리들 사이의 공통된 생각이였다. 그래서 마련한것이 세밑을 맞아 공개할 한복 신의상이였다. 담당 성원들은 몇주에 걸쳐 그 도안을 다듬었다.
리제동지는 우리 회사 3기생 가운데서도 유난히 제 목소리를 뚜렷이 내는 성원이였다. 무엇을 하든 스스로 정한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신의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리제동지는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히군하였다. 나는 그런 리제동지의 성정을 진작부터 눈여겨보고있었다.
한복이라는 소재를 고른것부터가 쉬운 결정은 아니였다. 우리 나라 고유의 옷매무새를 가상 인물에게 입힌다는것은 자칫 방정맞게 다루면 웃음거리가 되기 쉽고, 너무 근엄하게 다루면 또 재미가 없어지는 법이였다. 담당 성원들은 저고리깃과 치마주름의 각도를 두고 밤늦도록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였다. 나 역시 그 회의에 몇번이고 불려가 의견을 보태였다.
이 대목을 말하자면 그보다 며칠 앞선 어느 밤부터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신의상 하나가 세상에 나가기까지는 여러 손을 거친다. 그림쟁이가 밑그림을 그리면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립체로 옮기고, 마지막에는 내가 앉은 이 책상우에서 전체 그림을 한장 한장 넘겨보아야 비로소 공개할수 있었다. 이 마지막 관문을 우리는 그냥 검수라 불렀다.
가상 인물의 신의상이라는것은 늘 아슬아슬한 저울우에 놓여있는 물건이다. 너무 얌전하면 볼거리가 없다고 나무람을 듣고, 조금이라도 대담하면 도를 넘었다고 나무람을 듣는다. 나는 그 저울의 눈금을 맞추는 일이 검수자의 가장 큰 몫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일만은 저울의 눈금을 맞추기도 전에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고말았다.
그해 세밑에는 그 검수라는 일이 유난히 벅찼다. 신의상 발표가 겹치는 시기라 하루에도 몇벌씩 도안이 내 앞으로 넘어왔고, 나는 밤 열두시를 넘겨서까지 화면을 들여다보며 옷깃 하나, 매듭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이 침침해지면 랭수를 한잔 마시고 다시 화면앞에 앉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렇게 넘긴 도안이 그해에만도 수십벌이였다.
리제동지의 한복도안을 마지막으로 넘겨보던 그 밤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저고리와 치마, 노리개까지는 나무랄데 없이 곱게 자리를 잡고있었다. 그런데 화면을 몇번이고 넘기는 사이에 나는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잠깐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곧바로 짚어내지 못하였다.
다시 들여다보니 속옷을 나타내는 밑선이 도안 어디에도 그려져있지 않았다. 나는 그 대목에서 마우스를 멈추고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있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넘겨야 할 도안이 아직 여러벌 남아있었다. 손을 대자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할 문제였고, 발표일정은 이미 굳어져 더 미룰수 없는 형편이였다.
책상우의 차잔은 이미 오래전에 식어있었고, 벽시계의 초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나는 마우스를 쥔 손을 몇번이나 옮기였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그 짧은 몇분 사이에 내 머리속에는 여러 생각이 오갔다.
나는 그 순간 이것을 지적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넘겨야 하는가를 잠깐 저울질하였다. 결국 나는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발표를 먼저 마치고 그다음에 손을 보아도 늦지 않으리라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저울질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이였으나,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큰 일이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12월 26일, 리제동지의 한복 신의상이 방송을 통해 세상에 나갔다. 대화창은 곱다는 말로 가득찼다. 노리개가 흔들리는 모양이 어여쁘다는 말, 치마빛이 곱다는 말들이 줄지어 올라왔고, 나는 사무실에서 그 반응을 지켜보며 마음을 놓았다. 그렇게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듯싶었다.
그러나 안심도 잠시였다. 방송이 끝난지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 게시판 여기저기서 다른 말들이 돌기 시작하였다. 신의상을 자세히 뜯어본 몇몇 시청자들이 속옷 표현이 통째로 빠져있다는 사실을 짚어낸것이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듯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말들이 점점 커졌다.
실수로 빠뜨린것 아니냐는 물음이 나오는가 하면, 검수를 대체 어떻게 한것이냐는 나무람도 섞여나왔다. 짐짓 근엄한 말투로 《이것이야말로 력사에 남을 대사변이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시청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기 섞인 말들밑에는 진짜 궁금해하는 마음도 함께 깔려있었다. 대화창을 지켜보던 나는 그때까지도 이 일이 그렇게 크게 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 소식은 삽시에 사무실안에 퍼졌다. 지나가던 성원들이 슬쩍슬쩍 화면을 곁눈질하며 저희끼리 무어라 소곤거렸고, 회의실앞을 지나던 미기의 발걸음도 부쩍 빨라져있었다. 나는 그 낌새를 느끼면서도 아직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미기가 그 소식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온것은 다음날 아침이였다. 평소같으면 우스개 한마디를 앞세우고 들어올 미기였으나 그날만은 표정부터가 달랐다. 미기는 콤퓨터화면을 내 앞으로 조용히 돌려놓았다. 화면에는 신의상을 확대하여 붙여놓은 페지가 떠있었고, 그 아래로 감상글이 길게 이어지고있었다.
《이거 설마 검수도 안한거 아니냐》, 《실수치고는 너무 티가 난다》는 말들 사이로 《스텔라이브 검수팀 뭐하냐》는 말까지 섞여있었다. 나는 그 대목에서 며칠전 자정 넘은 시간에 내가 마우스를 멈추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도 넘긴 일이였다.
미기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사장님, 이거 어떻게 할거예요.》 나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도안이 실수로 빠진것인지, 리제동지가 처음부터 뜻을 두고 그린것인지조차 그 자리에서는 확신하지 못하였다.
검수자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벅찬 일정에 쫓기며 세부까지 하나하나 리제동지에게 캐물을 겨를이 없었던것이 그간의 사정이였다. 나는 미기에게 리제동지를 사무실로 불러달라고 하였다. 미기는 나가면서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한마디를 덧붙이였다. 《사장님, 이건 뭐 거의 국정감사 수준인데요.》 나는 그 너스레에 픽 웃음이 나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문을 열고 들어온 리제동지는 뜻밖에도 담담한 얼굴이였다. 소동이 벌어졌다는것을 이미 알고있는 눈치였으나 당황하는 기색은 크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권하고 마주앉아 리제동지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있었다.
나는 리제동지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앞에 놓아주며 잠시 말을 고르었다. 리제동지는 두손으로 차잔을 감싸쥔채 가만히 김이 오르는것을 바라보고있었다. 사무실안은 두 사람이 앉아있다는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조용하였다. 그 침묵이 오히려 다음 말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리제동지는 늘 그렇듯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있었다. 화가 나거나 당황하였을 때에도 좀처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것이 이 성원의 버릇이였다. 나는 그 꼿꼿한 자세를 보며 오히려 내가 먼저 자세를 고쳐앉게 되였다.
나는 리제동지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이거,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그린거야?》 리제동지는 잠시 나를 마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네, 사장님. 레퍼런스 그릴 때부터 아예 속옷선은 빼고 넘기였어요.》 리제동지의 말투는 흔들림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의상을 종종 낼 생각이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리제동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방송에서 다루는 수위는 지켜주었으면 해요. 저도, 그리고 보는 분들도요.》 그 한마디에 나는 리제동지가 이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자신의 뜻은 뜻대로 지키되, 공식 자리의 선은 선대로 지키자는것이 리제동지의 립장이였다.
나는 그 침착함앞에서 도리여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리제동지에게 검수과정에서있었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마지막 확인을 하던 그 밤, 내가 이미 그 대목을 보았으나 시간에 쫓겨 그대로 넘기였다는것을. 리제동지는 놀란 기색 없이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장님도 보고 그냥 넘기였다는것이예요?》 리제동지가 되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건 제 탓이 아니라 결국 사장님 탓이기도 하네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옳은 말이였다. 회사의 검수라는 일은 결국 마지막에 앉은 사람의 어깨우에 놓이는 짐이였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그날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우리는 그날 오래도록 마주앉아 이 일을 어떻게 매듭지을지 의논하였다. 리제동지는 자신이 직접 방송에서 그 사정을 밝히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뜻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나 역시 검수자로서있었던 사정을 함께 밝히겠다고 하였다.
의논을 마치고 리제동지가 사무실을 나설 때, 나는 문앞에서 리제동지를 불러세웠다. 《고맙다,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서.》 리제동지는 돌아보며 그저 웃었다. 《사장님도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저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12월 28일 저녁, 리제동지의 방송이 시작되였다. 나는 그날 사무실에서 화면 너머로 그 방송을 지켜보고있었다. 마이크앞에 앉은 리제동지의 표정은 이틀전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대로 담담하였다. 카메라의 붉은 불이 켜지자 대화창도 곧바로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였다.
대화창은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이 일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찼다. 리제동지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드릴게 있어요. 지난 신의상, 속옷 표현이 빠진건 실수가 아니예요.》 대화창이 잠시 물결치듯 출렁이였다.
리제동지는 말을 이였다. 《레퍼런스 단계에서부터 제가 일부러 그렇게 그려서 넘기였어요. 앞으로도 그런 의상을 가끔 낼 생각이구요.》 이어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어요. 공식 방송에서 다뤄지는 수위만은 지켜주었으면 해요. 저도 지킬테니, 보시는 분들도 함께 지켜주세요.》
대화창은 한동안 여러 말들로 뒤섞이였다. 놀랐다는 반응도 있었고, 솔직하게 밝혀줘서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는 반응도 있었다. 개중에는 짐짓 력사적 선언이라도 되는 양 《오늘부로 신의상의 새 시대가 열리였다》고 너스레를 떠는 시청자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보며 픽 웃고말았다.
리제동지의 해명이 끝난 뒤, 나도 화면 한켠에 마련된 자리로 들어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있었던 사정을 그대로 말하기로 진작 마음을 정하고있었다.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신의상 도안, 검수 과정에서 이미 그 부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수정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리유로 그냥 넘기였습니다.》 대화창이 다시 술렁이였다. 나는 말을 이였다. 《리제동지의 잘못이 아니라 검수를 맡은 제 책임입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인 절차를 더 철저히 하겠습니다.》
감상글난에는 이런 말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솔직하게 말해주니 오히려 믿음이 간다》, 《둘다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네》, 《이런 사장이면 나도 회사 하나 차리고싶다》. 실없는 농담들 사이에서도 진심이 묻어나는 말들이였다.
그 말을 마치고나니 어깨가 오히려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감추어두기보다는 있는대로 밝히는 편이 낫다는것을, 나는 그날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방송이 끝난 뒤 게시판의 분위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나무라던 사람들도 두 사람이 각기 제 몫의 사정을 솔직히 밝히자 더는 물고늘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깔끔하게 정리되였다》는 감상글이 상단에 자리를 잡았다. 소동은 그렇게 며칠사이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히나동지와 유니동지도 그 소식을 뒤늦게 전해듣고 사무실로 찾아왔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리제동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갔다고, 나중에 미기가 귀띔해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집안이 힘든 일앞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새삼 헤아려보았다.
그날 밤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그 소동을 곱씹었다. 회사를 맡아 몇해를 지내오며 크고작은 일들을 수없이 치렀지만, 이번처럼 나 스스로의 게으름이 빌미가 된 일은 흔치 않았다. 창밖의 눈은 그새 그쳐있었고 거리의 등불만이 고요히 빛나고있었다.
검수라는 자리는 원래 표가 나지 않는 자리다. 잘 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못되면 모든 눈길이 그리로 쏠린다.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으나, 이번 일을 겪고나서야 그 무게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였다.
사람들은 흔히 사장이라는 자리를 두고 큰 결정만 내리는 자리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루에도 몇벌씩 넘어오는 도안, 몇줄씩 늘어나는 대화창, 그 자잘한것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붙드는 일이야말로 경영자의 참모습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날 나는 그 평범한 리치를 아프게 되새기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 회사에서는 신의상 검수절차에 손을 대였다. 나 혼자 마지막 문을 지키던 자리에 한 사람을 더 세워, 두 사람의 눈이 함께 도안을 넘겨보도록 하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홀로 앉아 저울질을 하는 밤이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다짐에서였다. 미기는 그 자리에 스스로 손을 들고 나섰다.
리제동지는 그뒤로도 이따금 방송에서 그날의 일을 웃음삼아 꺼내군하였다. 《그때 사장님이 저 대신 혼나주였잖아요》하고 놀리면, 나는 《내가 검수를 대충 한 죗값이지》하고 마주 웃어넘기였다. 그럴 때마다 사무실 한켠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성원들도 함께 소리내여 웃군하였다.
성원들 사이에서도 이 일은 오래도록 짐짓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였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신의상대사변》이라 이름붙였는데, 물론 그것은 농담삼아 붙인 이름일뿐이였다. 실상은 도안 한장을 두고 벌어진 자그마한 소동에 지나지 않았다.
후날 어느 성원은 이 일을 두고 짐짓 엄숙한 얼굴로 《검수의 위기를 넘어선 사장》이라는 표현까지 가져다붙이였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스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우스개속에 반쯤은 진심이 섞여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 자그마한 소동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게으름이 다른 사람의 짐이 될수도 있다는것을, 나는 그날 뼈저리게 배웠다. 그것은 몇마디 사과로 쉽게 지워질 배움이 아니였다.
경영자라는 자리에 앉은 사람은 흔히 앞장서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사람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이후로 경영자란 오히려 뒤에 남아 실수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앞에 나서는 일보다 뒤에서 짐을 지는 일이 어쩌면 더 무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리제동지가 그날 보여준 그 담담함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것이다. 자신의 뜻은 굽히지 않으면서도 함께 지킬 선은 지키자던 그 립장, 그리고 내 잘못을 짚어내면서도 원망하는 기색 하나 없던 그 얼굴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떠올릴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두고 회고록에 옮겨적을만한 일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런 자그마한 일들이야말로 한 회사가, 한 집안이 자라나는 참모습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크고 화려한 일만으로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수 없는 법이다.
이 절을 적으며 나는 다시 한번 되새긴다. 검수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것을. 그리고 눈을 감았던 잘못은, 감춘다고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제 앞으로 되돌아온다는것을.
이 장의 이름을 후날 누군가 《가장 슬픈 장》이라 붙였다고 들었을 때, 나는 이 하루도 그 이름속에 들어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딸의 졸업도, 새 얼굴도, 그리고 이 자그마한 소동까지도, 돌이켜보면 다 자라나는 아픔의 한자락이였다. 그해 세밑의 그 자그마한 소동은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잊을수 없는 하루로 오래도록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