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잦 아 진 왕 래
우주32(2025)년 팔월 초, 사무실 창밖으로 매미울음이 한창이였다. 냉방기가 밤낮없이 돌아가는 소리와 콤퓨터 팬 소리가 뒤섞여 방안은 늘 나직한 웅웅거림으로 채워져있었다. 대화창 알림신호만이 이따금 그 웅웅거림을 끊고 반짝였다.
책상우에는 결재해야 할 서류뭉치와 마시다만 랭수 한잔이 놓여있었다. 창밖 은행나무는 아직 짙은 록색을 벗지 못한채 뙤약볕 아래 그림자만 짧게 드리우고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콤퓨터를 켰다.
칠월 스무아흐렛날, 리코동지와 《배그》 듀오를 하다가 블루동지를 불러들인 그날 이후로 나는 무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한번의 합방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날을 기점으로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만남이 자꾸만 되풀이되였다.
블루동지의 부캐가 우리 성원들이 모여있는 《CUTE》 클랜에 이름을 올린 뒤로 생긴 변화였다. 클랜에 든다는것은 별것 아닌듯 보이지만, 막상 겪어보니 그것은 자동으로 서로의 반경안에 들어와있게 되는 일과 같았다. 매칭창을 열면 심심찮게 블루동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클랜원 명단을 새삼 들여다보니 낯익은 얼굴들 사이에 블루동지의 부캐 이름이 나란히 올라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짐짓 력사적인 조약이라도 맺은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국경을 맞댄 두 나라의 조약이 아니라 게임안의 소소한 소속 변경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사소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만 여기였다. 팔월 초 어느 저녁, 나는 혼자 랭크전을 돌리다가 로비화면에 낯익은 아이디가 뜨는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또 마주쳤네.》 나는 마이크를 켜고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누나, 우연이 세번이면 우연이 아니라던데.》 블루동지가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받아쳤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웃어넘기였다. 대화창은 그 짧은 주고받음 하나에도 곧바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장작이 알아서 탄다》는 말이 그무렵부터 대화창에 자주 오르내렸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우리 두 사람이 굳이 무엇을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화제가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였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보았을 때 낯이 뜨거워졌으나, 곧 그것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잦아진 만남을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의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우결》이 한창이던 그 시절에는 우리의 모든 만남이 정해진 각본안에서 이루어졌다. 촬영 날짜가 잡히고 대사가 어느 정도 미리 오가고, 카메라 각도까지 신경써야 하였던 시절이였다.
그때는 만남 하나하나가 하나의 사변이였다. 방영될 영상의 제목부터 먼저 정해놓고 그에 맞추어 그날의 분위기를 잡아나가던 나날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만나는 순간조차 온전히 우리 몫이 아니였던 셈이다.
그러나 팔월의 이 만남들에는 그런 각본이 없었다. 그저 매칭창이 우리를 한자리에 앉혀놓았을뿐이고, 우리는 그 우연을 딱히 마다하지 않았을뿐이다. 각본 없는 만남이 오히려 더 편안하다는것을 나는 그해 여름 새삼 깨달았다.
한번은 지인 강수에게서 오랜만에 문자가 왔다. 《매형은 요즘도 잘 지내나》하는 그 오랜 농담 섞인 물음에 나는 픽 웃음이 났다. 《우결》 시절 우스개로 붙은 그 호칭이 오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불쑥불쑥 튀여나온다는것이 새삼 신기하였다.
어느 날은 블루동지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왓구홍길동, 더미노스, 신곰과 함께 촬영을 하다가 잠깐 짬이 났다며 내 방송에 들러 몇마디를 보태고 갔다. 《누나 요즘 《배그》 자주 하시네요.》 하는 그 한마디에 나는 《네가 자꾸 눈에 띄니까 그렇지》 하고 웃으며 답하였다.
그런 짧은 마주침이 한번 두번 쌓여가더니 어느새 팔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아예 자연스러운 일과처럼 되여있었다. 방송을 켜면 으례 대화창에서 《오늘도 블루아버지 나오나요》 하는 물음이 올라왔고, 나는 그 물음에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채 방송을 이어갔다.
회사안에서도 이 소식이 조용히 퍼져나갔다. 타비동지와 히나동지는 예전부터 블루동지를 《아빠》라 불러온 터라, 요즘 부쩍 잦아진 아버지의 등장을 두고 저희끼리 한참을 떠들어댄 모양이였다.
《엄마, 아빠 요즘 너무 자주 오시는것 아니예요?》 하루는 히나동지가 합방 중 짐짓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그 물음에 헛기침을 하며 《회사 대표가 누구를 만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받아쳤으나, 그 말투에서부터 이미 웃음기가 새여나오고있었다.
짐짓 력사적으로 말해보자면, 이 시기의 잦은 왕래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슬며시 회복되여가는 정황과도 같았다. 물론 우리 사이에 국경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단교를 선언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그저 우스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만큼 그 시절의 분위기가 자못 진중하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성원들 가운데 리제동지는 예전부터 내 퍼스널컬러가 블루동지라고 짐짓 놀려대던 터였는데, 이무렵 들어 그 롱담이 더욱 자주 나왔다. 시부키동지와 리코동지도 합방 중 은근히 《우결》 이야기를 흘리며 눈치를 보는 기색이였다. 나는 그런 눈치들을 모르는척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블루동지와 유난히 가까운 꽃핀 언니도 이무렵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였다. 《둘이 또 붙어다닌다며》하고 넌지시 묻는 언니의 말투에는 오랜 정이 묻어있었다. 나는 그 물음에 딱히 숨길 리유가 없어 그렇다고 순순히 답하였고, 언니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팔월 어느 늦은 밤, 방송을 마치고 나는 블루동지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였다. 《누나 오늘 저녁 뭐 드였어요?》 하는 짧은 물음이였다. 나는 뿌링클을 시켜먹었다고 답하였고, 블루동지는 자기는 틈새라면을 먹었는데 역시 두입마다 쉬어가며 먹어야 하였다고 답장하였다.
그런 사소한 문자들이 오가는 일도 그무렵 부쩍 늘었다. 예전 《우결》 시절에는 그런 문자 하나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간에서 갖은 추측을 내놓았으나, 지금은 그저 오래된 친구 사이의 안부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편안함이 새삼 고마웠다.
팬 모임터 한켠에서는 예전 《우결》 시절 영상 제목들을 다시 끌어와 요즘 상황에 빗대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 같은 옛 제목 한줄을 캡처해 붙여놓고 《이거 지금 얘기 아니냐》며 놀리는 감상글도 붙었다. 나는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세월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의 기억력이 참으로 좋다고 생각하였다.
이 대목에서 감블러의 이야기를 잠깐 하지 않을수 없다. 나와 감블러는 한때 서로를 감자님, 낑깡님이라 부르던 사이였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말을 트고 《붕어야, 누나》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정해진 관계의 틀이 사라진 뒤에도 정만은 그대로 남는다는것을, 나는 감블러를 통해 이미 배운 바가 있었다.
블루동지와 나 사이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걷고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무렵 자주 들었다. 《우결》이라는 형식은 오년 전에 이미 막을 내렸으나, 그 형식이 남기고 간 편안함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 사이의 정이란 이렇게 형식보다 오래 남는 모양이다.
팔월 중순의 어느 저녁, 나는 랭크전 로비에서 또 한번 블루동지와 마주쳤다. 그날은 마침 스쿼드 인원이 비어 자연스럽게 한팀으로 묶이게 되였다. 《또 우리네.》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블루동지는 특유의 웃음소리로 답하였다. 《아하하하핳, 이러다 진짜 매칭이 저희를 알아보겠어요.》
그날의 방송에서 블루동지는 여느때처럼 적을 마주칠 때마다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하며 웃어댔고, 나는 그 옆에서 물자를 그러모으며 오랜만의 손발맞음을 새삼 반가워하였다. 대화창은 두 사람의 재회를 놓치지 않고 후원 문구로 도배하였다. 《오늘도 강블 출근》이라는 말이 그 밤 대화창을 한참 오르내렸다.
오락이 끝난 뒤 블루동지는 문득 옛일을 꺼냈다. 《누나, 그때 《우결》 끝나고 나서 우리 이렇게 자주 볼줄 알았어요?》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솔직하게 답하였다. 《몰랐지. 오히려 서먹해질까봐 걱정하였었어.》
《저도요.》 블루동지가 짧게 대꾸하였다. 그 짧은 대답안에 그동안의 세월이 다 담겨있는듯하여,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화면속에서는 다음 판을 알리는 카운트가 조용히 흘러가고있었다.
돌이켜보면 《우결》이 끝난 직후의 우리는 서로를 향한 마음보다 세간의 시선을 더 의식하였던것 같다. 종영 영상 하나로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여기였으나, 정작 마침표는 우리 두 사람이 아니라 화면 밖 사람들의 몫이였던 셈이다. 우리 사이의 정은 애초에 마침표로 끊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였다.
그해 팔월,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다시 확인하고있었다. 다섯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매칭창 하나에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예전의 호흡이 되살아난다는것이, 나로서는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사람 사이의 합이라는것은 세월이 지운다고 지워지는것이 아닌 모양이다.
강도단쪽에서도 이 잦은 왕래를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내 개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요즘 부쩍 《장작감》이 늘었다며 즐거워하는 글이 여럿 올라왔다고 나중에 전해들었다. 블루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던 모양인지, 블루동지는 한번 방송 중 《쁠몬들이 요즘 나보고 어디 다녀오냐고 자꾸 물어본다》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새삼 웃음이 나왔다. 다섯해 전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결국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오래도록 한결같을수 있는것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감탄하였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도 《강블 또 떴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왔다고 들었다. 나는 그런 글까지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으나, 미기가 가끔 웃으며 캡처를 보여줄 때마다 새삼 민망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민망함조차 정겹게 느껴지는 시절이였다.
구월에 접어들며 매미소리는 차츰 잦아들고 대신 저녁마다 귀뚜라미 울음이 창틈으로 새여들었다. 계절이 넘어가는 그 짧은 틈에도 우리의 만남은 신통하게 이어졌다. 방송 일정이 서로 다르니 매번 정해놓고 만나는것도 아니였으나, 이상하게도 한주에 한두번은 꼭 어디선가 마주치게 되였다.
한번은 성원들이 다같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유니동지가 불쑥 물었다. 《엄마, 아빠랑 요즘 진짜 자주 만나요?》 나는 뭐라 답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러게, 요즘 자주 보긴 하네.》 그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마시로동지는 그 웃음속에서도 짐짓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를 보태였다. 《엄마 아빠 이러다 재결합하는것 아니예요?》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얘, 우결은 오년 전에 이미 끝났어.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조금 우스웠다. 이 회사안에서 나는 엄마 소리를 듣고 블루동지는 아빠 소리를 듣는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라는것이 참으로 묘하게도 뻗어나간 셈이다.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그저 오래된 친구 사이일뿐인데, 주변에서 붙이는 이름들은 늘 한걸음 앞서나갔다.
회사 일과 개인의 나날이 이렇게 나란히 흘러가는 사이, 사무실 다른 한켠에서는 또 다른 준비가 조용히 진행되고있었다. 시부키동지와 린동지, 나나동지와 리코동지가 새로 갈아입을 옷들을 두고 마지막 손질에 한창이였다. 나는 그 소식을 결재판 너머로 전해들으며 새삼 계절이 바뀌고있음을 실감하였다.
돌이켜보면 그해 여름은 유독 여러 갈래의 일들이 한꺼번에 무르익어가던 시절이였다. 딸들의 새 옷이 준비되는 사이, 나와 블루동지의 오랜 인연도 다시 한번 조용히 무르익어가고있었다. 두 흐름이 한 계절안에 나란히 놓여있었다는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새삼 신기하게 여긴다.
어머니에게서도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블루는 요즘도 잘 만나니》하고 넌지시 묻는 말투에서 예전 《사위감으로는 백점》이라던 그 발언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음을 느꼈다. 나는 웃으며 그냥 친구로 잘 지낸다고만 답하였고, 어머니는 더 캐묻지 않고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무렵 나는 문득 이 잦은 왕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졌다. 《우결》이라는 형식이 끝난 뒤에도 이렇게 자연스레 이어지는 인연을 보면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란 결국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였다. 그것은 방송의 편성표보다, 회사의 사업계획보다 훨씬 질긴것이였다.
어느 저녁에는 블루동지가 자기 방송에서 나를 잠깐 언급한 일도 있었다. 《요즘 강지누나랑 자주 붙어다니는데, 뭐 별건 없고 그냥 옛날 생각나서 좋다》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고 전해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을 몇번이고 곱씹었다. 별것 아닌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꽤 오래 남았다.
나 역시 내 방송에서 비슷한 말을 흘린 적이 있다. 누군가 대화창에서 《요즘 블루동지랑 왜 이렇게 자주 만나세요》하고 물었을 때, 나는 딱히 거창한 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그러게, 나도 신기하네》하고 웃어넘기였다. 사람 사이의 일이란 때로 그렇게 리유를 굳이 캐묻지 않아도 되는 법이다.
구월 중순에 이르러 나는 오랜만에 옛 영상 몇편을 다시 열어보았다. 화면 속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로 서로를 향해 웃고있었다. 그 웃음이 지금의 웃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이 잦은 만남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시 시작된 인연이 아니라, 잠시 뜸해졌던 인연이 제 속도를 되찾은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 사이의 흐름이란 원래 그런것이다. 바쁜 나날에 잠시 소원해졌다가도, 계기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예전의 물길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그 물길을 되돌린 계기가 다름아닌 리코동지와의 《배그》 한판이였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못내 흐뭇하였다. 딸의 오락 한판이 아버지를 다시 불러들이고, 그 아버지가 다시 잦은 걸음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것도 따지고보면 한 가정이 자연스레 다시 모여앉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것을 진짜 가정사에 견주는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그 시절 우리 회사 안팎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는, 이 잦은 왕래가 마치 오래 떨어져있던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는듯한 훈훈함으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나 역시 그 훈훈함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구월이 다 가도록 우리의 만남은 뜸해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일정을 슬쩍 확인하고 짬을 맞추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번주는 언제 시간 되세요》하는 문자가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는것이, 나로서는 새삼스럽고도 반가운 변화였다.
어느 늦은 밤, 방송을 마치고 홀로 사무실에 남아있던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그해 여름을 되짚어보았다. 칠월 말의 그 우연한 호출 한번이 이렇게까지 잦은 나날로 이어질줄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작은 계기 하나로도 큰 물줄기를 이루는 모양이다.
나는 그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나 자신을 딱히 막을 생각이 없었다. 회사의 대표로서 응당 여러 일들을 챙겨야 하였지만, 이 시기의 잦은 만남만큼은 온전히 나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물길 하나쯤은 지녀야 하는 법이다.
그 사이 회사는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고있었다. 사무실 곳곳에서 오가는 낮은 목소리들, 평소보다 잦아진 회의들이 무언가 큰 일이 다가오고있음을 어렴풋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 낌새를 느끼면서도 당장은 자세한 내막을 다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돌이켜보면 그해 팔구월은 개인의 인연과 회사의 앞날이 동시에 무르익어가던, 참으로 겹겹의 계절이였다. 딸들은 새 옷을 준비하고, 나는 오랜 벗과의 걸음을 다시 맞추고, 회사는 또 어딘가로 뻗어나갈 채비를 하고있었다. 그 모든 흐름이 한 계절안에서 조용히 몸을 불려가고있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새로운 별들이 문득 생겨나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별들 사이의 거리가 새롭게 이어져 그려지는것이라고 한다. 그해 팔구월의 우리 회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 인연들의 거리가 다시 좁혀지고 새 옷을 입을 채비가 갖추어지는 사이, 우리는 저마다도 모르는 새 더 큰 별자리 하나를 함께 그려나가고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그 잦은 만남들이 그저 우연의 련속이 아니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결》이라는 오랜 인연이 남긴 뿌리가 깊었기에,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 다시 가지를 뻗을 준비가 되여있었던것이다. 리코동지의 《배그》 한판은 그 가지에 처음 물을 준 셈이였다.
그 물줄기가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 또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그때의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수 있었다. 블루동지와 나 사이의 이 오랜 인연은, 어떤 형식으로 불리든 좀처럼 끊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였다.
그 사실 하나를 확인한것만으로도 그해 여름은 나에게 충분히 값진 계절이였다. 잦아진 걸음, 잦아진 문자, 잦아진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모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다리를 놓고있었다는것을, 나는 후날에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그렇게 우주32(2025)년의 여름은 저물어갔다. 매미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귀뚜라미가 채우듯, 《우결》이라는 옛 형식이 사라진 자리를 이 잦은 왕래가 조용히 채워주고있었다. 나는 그 채움을 고맙게 여기며 다가올 계절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