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리 코 와 배 그

 

《우결의 GOAT》라는 우스운 칭호를 얻고 지내던 그 여름, 나는 정작 다른 즐거움 하나를 조용히 키워가고있었다. 유월 스무나흗날의 그 사변 이후로 《배그》를 켜는 밤이 부쩍 잦아진 것이다. 옛일을 두고 세상이 뭐라 부르든, 나로서는 그저 눈앞의 오락 한판이 더 반가웠다.

방송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벽 한쪽에 나란히 걸린 화면 세대와 그 아래 가지런히 놓인 마이크,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낮게 돌아가는 본체 랭각기소리까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창밖으로 스며드는 볕의 각도만이 오월과는 사뭇 달라, 늦게까지 남은 그 볕이 방안을 후끈하게 데워놓군 하였다. 나는 그 열기속에서 머리수화기를 고쳐쓰며 하루의 방송을 준비하였다. 벽시계 바늘이 저녁 아홉점을 가리킬무렵이면 나는 어김없이 《배그》 로비를 열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버릇이 새로 생기였다.

그 여름 나와 자주 짝패를 이루던 상대는 3기생 리코동지였다. 유월의 그 사변 이후로 《배그》를 다시 손에 잡은 나를, 3기생 가운데서도 유독 리코동지가 반겨주었다. 나이차가 제법 나는데도 게임판앞에서는 그런것이 조금도 문제되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마다 별다른 약속도 없이 서로를 부르는 사이가 되여있었다.

리코동지는 이세계에서 마왕을 처치하였다는 설정을 짊어진 용사였으나, 정작 게임속에서는 걸핏하면 지형을 잘못 디뎌 체력을 깎아먹는 통에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용암을 사랑하는 용사》라는 우스운 별명을 얻고있었다. 성원들은 짓궂게도 그를 두고 《양배추용사》니 《바보협회 회장》이니 하는 별명을 덧붙였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놀림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신이 나서 응수하는 성격이였다.

리코동지의 흥은 낮을 때는 한없이 낮았다가 오를 때는 한없이 올랐다. 한번 흥이 오르면 마이크 저쪽에서 발악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튀여나온다 하여, 본인 스스로도 《발악귀》라는 별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있었다. 나는 그 격한 기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곁에서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끼군 하였다.

스텔라이브의 공식 설정으로는 리코동지의 나이가 열여덟에서 영영 멈추여있다고 하며, 오시마크로 쌍검과 네잎클로버를 달고 다닌다고 들었다. 애호가들은 그를 두고 설치류 모양 망토를 두른 《치코》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설정과는 달리 게임판에서의 리코동지는 그저 웃음 많고 정 많은 딸애 하나였을뿐이다.

칠월 스무아흐레날, 그날도 나는 여느때처럼 리코동지를 불러 짝패를 이루었다. 저녁 늦게 접속한 자리였는데, 마이크를 손보는 동안에도 대화창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하나둘 들어와있었다. 리코동지의 인사부터 남달랐다. 《엄마! 오늘도 왔어요!》하는 그 한마디에 대화창은 곧바로 웃음소리로 뒤덮이였다.

나는 그 부름에 못이기는척 대답하였다. 《그래 딸아, 오늘은 어디 내려앉아볼가.》 서로 딸이니 엄마니 하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였다. 한때는 이 호칭을 질색하며 마다하던 나였으나, 그 여름에 이르러서는 구태여 마다하지 않게 되였다.

락하지점을 고르는 동안 리코동지는 여느때처럼 재잘거렸다. 《저기 물건 많을것 같아요! 저기 내려요!》하며 손끝을 재촉하는 그 목소리에는 벌써부터 흥이 잔뜩 올라있었다. 나는 웃으며 그 성화에 못이겨 함께 락하하였다.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총소리보다 리코동지의 웃음소리가 먼저 귀에 꽂히였다.

파밍은 순조로왔다. 리코동지는 좋은 총 한자루를 주웠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는 그 옆에서 곽밥이며 구급낭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리코동지가 늪지대에 잘못 발을 디뎌 체력이 뭉텅 깎여나갔다. 대화창에서는 대뜸 《또 용암 찾았네》하는 말이 올라왔다. 《배그》판에 용암이 있을리 없건만, 리코동지의 그 오랜 별명은 이런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자기장이 좁아들 때마다 리코동지는 어디로 뛰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나는 그 곁에서 방향을 일러주며 마치 딸을 인도하는 어미새가 된듯한 기분을 느끼였다. 《엄마만 따라와》하는 농담에 리코동지는 순순히 내 뒤를 쫓아왔다. 그렇게 자기장 끝자락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우리는 몇번의 교전을 치르며 등수를 끌어올렸다.

등수가 오를수록 리코동지의 목소리도 따라 높아졌다. 상대 하나를 쓰러뜨릴 때마다 화면 한켠에 뜨는 킬로그를 보며 《저 이기였어요! 엄마 저 이기였어요!》하고 소리치는 통에, 나는 조준경을 들여다보다가도 웃음이 터져 자세가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대화창에서는 그런 우리를 두고 《오늘도 딸내미 육아중》이라는 우스개가 오갔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판이 무르익어가던 어느 참에 나는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이런 밤에는 으례 블루동지가 있어야 자리가 온전히 찬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마이크를 고쳐쥐며 넌지시 물었다. 《딸아, 아빠 한번 불러볼가?》

리코동지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되물었다. 《아, 아빠요?》 스텔라이브 성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블루동지를 두고 《아빠》라 부르는 장난이 퍼져있었으니, 리코동지도 그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 아빠를 직접 눈앞의 게임판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불러주세요, 저 완전 궁금해요!》하고 리코동지가 냉큼 성화를 부렸다. 나는 그 성화에 웃으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신호음이 몇번 울리도록 리코동지는 옆에서 숨죽인채 기다리고있었다.

짐짓 력사적으로 말해보자면, 이때 내가 누른 그 통화단추 하나는 이를테면 한 성원에게 내리는 작은 동원령과 다름없었다. 물론 이것은 웃자고 하는 말이지, 실제 군대의 소집령에 견줄바는 못된다. 그러나 그 순간 리코동지의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을 보노라면, 이것이야말로 무슨 대사변의 서막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시각 블루동지가 무엇을 하고있었는지를 말하자면, 이 이야기를 잠시 뒤로 물려야 한다. 그날 블루동지는 나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었다.

왓구홍길동동지, 더미노스동지, 신곰동지와 더불어 무슨 촬영을 하는 중이였다고 한다. 이들은 블루동지가 오래전부터 어울려온 무리로서,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버러지특공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이였다. 왓구홍길동동지는 나와도 《배그》 스쿼드를 자주 이루는 사이로, 나와는 친남매 같은 궁합로 알려져있었으나 그날은 블루동지 쪽 촬영에 불려간 모양이였다.

더미노스동지는 블루동지의 《배그》 내용물에서 오래전부터 핵심 협력자로 함께해온 사람이였다. 신곰동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이번 이야기에서 자세히 옮기지 못하나, 블루동지의 오랜 촬영 동료라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얽혀 만들어내는 잡다한 내용물들이 블루동지의 하루하루를 채우고있었다.

블루동지가 이런 무리와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회사를 차리고 사장이 된 뒤로 나에게는 그렇게 격없이 어울려 실없는 촬영을 함께 할 무리가 마땅히 없었기때문이다. 대표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는 늘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나를 조금씩 갈라놓았다.

그날의 촬영이 정확히 무엇이였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카메라앞에서 저마다 익살을 떨며 한창 흥이 오른 참이였으리라는 것만은 짐작할수 있다. 그런 자리에 불쑥 전화를 건다는 것이 례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된 사이란 그런것이다. 상대가 무슨 일을 하고있든 일단 부르고보는 뻔뻔함이 허락되는 사이 말이다. 나는 개의치 않고 신호를 보냈다.

신호음이 몇번 울리더니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촬영장의 소란한 웃음소리가 뒤에서 뒤섞여있었다. 《누구야, 지금?》하는 말에 나는 짧게 대답하였다. 《나다, 《배그》 한판 하자.》

블루동지는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지금 촬영중인데.》하면서도 그 말끝에는 이미 이쪽으로 넘어올 기색이 다분하였다. 나는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양해 구하고 빨리 와, 딸내미가 기다린다.》

옆에서 촬영을 함께 하던 왓구홍길동동지·더미노스동지·신곰동지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 자세히 옮길수 없다. 다만 후날 들으니 다들 대수롭지않게 웃어넘기며 블루동지를 선선히 놓아주었다고 한다. 이런 너그러움이야말로 오래 어울린 이들 사이에서만 나올수 있는것이다.

블루동지는 그렇게 촬영장을 잠시 벗어나 접속하였다. 마이크에 잠깐 잡음이 섞여든 것으로 보아 아마 자리를 옮기며 이어폰을 고쳐 낀 모양이였다. 나는 본래 리코동지와 둘이 이루던 듀오판을 스쿼드로 바꾸어 블루동지를 끼워넣었다. 짐짓 말하자면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동맹 하나가 맺어지는 순간과도 같았다. 물론 이것도 웃자고 하는 말이지, 실제 조약을 체결한 것은 아니다.

《안녕하세요, 리코입니다!》하고 리코동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에 살짝 들뜬 기색이 섞여있었다. 익히 소문으로만 듣던 그 《우결》의 주인공을 게임속에서 마주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블루동지는 《아, 리코 누나 반갑습니다》하며 특유의 느긋한 어조로 답하였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그 평소 흥 그대로였다. 나는 옆에서 듣다가 끼여들었다. 《누나는 무슨, 아빠라고 불러야지.》

그 한마디에 리코동지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발악에 가까운 그 특유의 웃음이 마이크를 타고 터져나왔다. 《아빠아?!》하고 되묻는 목소리에는 당황과 재미가 반반씩 섞여있었다. 대화창도 곧바로 들썩였다.

블루동지는 평소에는 서울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였으나, 이렇게 당황할 때면 어릴적 대구 말씨가 슬며시 묻어나오군 하였다. 《아니 이거 뭐 이렇카는데》하고 얼버무리는 말투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오래 알고지낸 사이가 아니고서는 알아채기 힘든 그 작은 버릇을, 나는 용케 놓치지 않고 붙잡아냈다.

리코동지는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블루동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아빠 《배그》 잘해요? 몇년째 하신거예요?》하는 물음에 블루동지는 《그럭저럭》이라며 겸손을 떨었다. 그러나 그 겸손이 무색하게, 그는 곧이어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보였다.

오락이 다시 시작되자 블루동지는 례의 그 무자비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적을 하나 둘 쓰러뜨릴 때마다 특유의 말투로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하며 웃어대는 통에 대화창은 또 한번 들썩였다. 리코동지는 그럴 때마다 《아빠 무서워요!》하며 요란을 떨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절로 웃음이 났다.

딸과 아빠라는 말이 오갈 때마다 대화창은 뒤집어졌다. 시청자들 역시 오래전부터 이 밈에 익숙한 터라, 《장작이 알아서 탄다》는 말이 그 밤처럼 딱 들어맞은 적이 없었다. 후원 문구에도 온통 《아빠》와 《딸》 소리뿐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저 우스개로만 넘길수는 없다. 그 밤에는 후날 돌이켜볼수록 례사롭지 않은 일 하나가 함께 일어났기때문이다.

나는 늘 성원들과 더불어 《CUTE》라는 이름의 부캐 클랜을 꾸려오고있었다. 그 클랜에는 이미 몇몇 성원들의 부캐가 함께 이름을 올리고있었는데, 무슨 엄격한 규약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 맞는 이들끼리 서로를 불러들이는 소박한 모임이였을뿐이다. 《CUTE》라는 이름을 누가 처음 붙였는지는 나도 이제 와서는 가물가물하다. 다만 성원들의 부캐가 하나둘 늘어가며 자연스레 자리잡은 이름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밤 나는 블루동지에게 문득 이런 말을 건넸다. 《야, 너도 이 클랜 들어와라.》

블루동지는 대수롭지않게 받았다. 《어, 그럴가.》 그렇게 간단히, 마치 옆집에 마실 가듯 가벼운 말 몇마디로 블루동지의 부캐가 《CUTE》 클랜의 일원이 되였다. 짐짓 력사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이는 한 사람의 귀화나 다름없는 사변이였다. 물론 이것도 웃자고 하는 말이지, 실제 국적을 옮긴 것은 아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적으며 나는 짐짓 웃음이 난다. 력사에는 흔히 사소해 보이는 결정이 후날 큰 흐름의 물꼬가 되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그 밤 술 한잔 없이 오간 그 한마디가 바로 그러하였다.

《전남편 길드》니 뭐니 하던 우스개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그 전남편이 아예 처가 클랜에 이름을 올린 셈이 되였다. 나는 이 아이러니를 그때는 그저 웃어넘기였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기 전체를 요약하는 한 장면이 아니였던가 싶다.

대화창은 그 소식을 놓치지 않았다. 《장인어른 오였다》느니 《사위 출근》이니 하는 말들이 줄을 이였다. 리코동지도 그 흐름에 끼여들어 《아빠 이제 우리 클랜이에요!》하고 신이 나서 외쳤다.

이 소식은 곧 다른 성원들에게도 전해졌다. 애초에 블루동지를 두고 《아빠》라 부르기 시작한 유니동지와 히나동지는 이 소식을 듣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아빠가 드디여 우리 식구가 되였네요》하는 말이 성원들 사이에서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야 전해들었다.

나는 그 우스개들을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우결》이 끝난 지 벌써 여러해가 지났건만 이 호칭놀음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이렇게 질긴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회사안에서 나는 늘 《엄마》로, 블루동지는 늘 《아빠》로 불려왔다. 그것이 《우결》이라는 옛 방송에서 비롯된 장난인지, 아니면 그저 나이든 두 사람을 놀리는 성원들의 짓궂음인지는 이제 와서 가려낼수 없다. 다만 그 두 이름이 이렇게 나란히 한 클랜안에 놓이게 된 것을 보며, 나는 《우결》이라는 것이 방송이 끝난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둘의 자리를 계속 정해주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오락이 끝나갈무렵 리코동지가 문득 물었다. 《근데 두분 진짜 그렇게 오래 하였어요, 《우결》?》하는 순진한 물음이였다. 나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짧게 답하였다. 《그래, 오래 하였지.》

블루동지는 그 물음에 별다른 대꾸없이 웃기만 하였다. 그 웃음속에 무엇이 담겨있었는지는 나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오래 묵은 것들은 굳이 말로 풀어내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무엇이 있는 법이다.

판이 끝나고 블루동지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또 부르십쇼, 누나》하는 말을 남기고서였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답하였다. 《그래, 딸내미랑 또 하자.》

접속을 끊고난 방안에는 다시 본체 팬 도는 소리만 남았다. 창밖에는 늦여름 밤벌레 우는 소리가 낮게 깔려있었다. 나는 잠시 화면를 바라보며 그날 있은 일을 되새겨보았다.

돌이켜보면 그 부름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였다. 그저 오랜 벗이 그리워 전화 한통 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소한 전화 한통이 《CUTE》라는 이름아래 두 사람을 다시 한자리에 세운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그날 내 손끝이 무엇을 눌렀는지 새삼 신기하게 여겨진다.

그 뒤로 블루동지는 《CUTE》 클랜의 이름을 달고 이따금 《배그》에 접속하였다. 리코동지를 비롯한 3기생들도 그 부캐를 반겨주었고, 오락 로비에 그 이름이 뜰 때마다 성원들 사이에서는 잔잔한 웃음이 오갔다. 내 개인 애호가들인 강도단 쪽에서도 이 소식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결국 사위가 아니라 클랜원으로 들어왔다》며 저희끼리 한참을 떠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리코동지는 그 뒤로도 종종 나에게 물어왔다. 《아빠 또 안불러요?》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음을 기약하고있었던 것 같다.

딸의 오락에 아버지가 불려들어온 이 작은 사변이, 실은 그뒤로 오래 이어질 잦은 만남의 첫 걸음이였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로 나와 블루동지는 예전보다 자주 《배그》판에서 마주치게 되였는데, 그 잦아진 만남을 하나하나 옮기자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니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여둔다.

나는 지금도 이날의 일을 두고 스스로 대단한 결단이라도 내린 것처럼 짐짓 부풀려 말하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력사를 쓰는 사람의 버릇이 다 그러한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심심한 밤, 오락 한판 더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부름이였을뿐이다.

다만 그 부름이 남긴 자국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리코동지와의 《배그》 한판이, 오래 뜸하였던 두 사람의 만남을 다시 그러모으는 계기가 되였으니 말이다.

이날을 두고 후날 무슨 기념일로 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달력 어디에도 적히지 않을 그저 그런 칠월의 여느 하루였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며 이날짜만은 뚜렷이 적어두고싶었다. 큰 사변은 언제나 이렇게 아무 표시도 없는 하루속에 조용히 숨어들어오는 법이다.

딸의 초대라 이름 붙일수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리코동지가 무심코 던진 호기심 하나와 내가 무심코 누른 통화단추 하나가 겹쳐, 오래 뜸하였던 두 사람의 발걸음을 다시 한자리로 이끌었다. 나는 그것을 못내 고맙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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