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인생을 돌이켜보면 지나온 자리마다 이미 끝났다고 여기였던 일들이 어느 순간 다시 밝은 데로 끌려나오는 때가 있다. 아홉권의 글을 적어오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순간들을 여러번 겪었지만, 이 열번째 권을 쓰면서 그것을 더욱 새삼 절감하였다. 한번 지나간 일은 그것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누군가 등불을 다시 켜들면 언제든 그 자리에 그대로 되비치는 법이다.
실상 나는 이 대목을 다시 붓끝에 올릴 생각이 별로 없었다. 여섯번째 권에서 《안녕, 우결》이라는 제목아래 그 시절과 작별하는 글을 이미 적어두었기때문이다. 한번 매듭지은 이야기를 다시 풀어헤치는것은 구차한 일이라고 여기였던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나 혼자 매듭짓는다고 그대로 매듭지어지는것이 아니여서, 뜻하지 않은 데서 그 매듭이 도로 풀리는 광경을 나는 이번에 겪게 되였다.
스텔라이브를 차리고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뒤로 나에게는 방송보다 결재서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게 되였다. 그러나 하루를 마감할 때면 습관처럼 대화창을 열어보는 버릇만은 고쳐지지 않았으니, 화면 너머의 사람들이 남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방송하던 시절과 다름이 없었다. 이 권에 담긴 소동도 실은 그런 늦은 밤 사무실 한구석에서 비롯된것이다.
후배 성원 하나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온 팬 커뮤니티에 불을 놓았고,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채 엉뚱한 자리로 옮겨붙어 옛 영상들을 다시 불러세웠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한때의 우스개소리로 여기고 지나칠 생각이였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예상을 비껴가는 법이여서, 잊었노라 믿었던 오년의 세월이 어느 밤 《배그》 로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블루동지와 나를 도로 마주앉혀놓았다.
그날 내 입에서 나온 말 몇마디가 그토록 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줄은 나 자신도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압축된 말은 편리하지만 그 편리함이 정작 무엇을 눌러버렸는지는 압축한 사람 자신도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나는 이 권을 쓰며 그 한마디속에 눌려있던 지난 시간들을 다시 하나씩 펴보려 애썼다.
돌이켜보면 나의 한생에서 《우결》이라는 길은 이미 오래전에 마감한 장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사람도 인연도 한번 맺으면 그리 간단히 마감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나는 이무렵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배우게 되였다. 어머니 소개까지 마쳤노라, 깔끔히 끝냈노라 스스로 정리해두었던 그 말들이 정작 남들의 눈물속에서는 조금도 깔끔하지 않은채로 살아있었던것이다.
물론 이 권에 담긴것이 옛일의 되풀이만은 아니다. 그 소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뜻밖에 새로 트인 인연 하나를 조용히 키워가고있었으니, 후배 하나와 저녁마다 별다른 약속도 없이 서로를 찾는 사이가 되여있었던것이다. 옛일이 다시 불붙는 자리 바로 곁에서 새 인연이 조용히 자라고있었다는것, 그것이 이 권을 쓰며 내가 가장 마음에 새긴 대목이다.
《재조명》이라는 이름을 이 권에 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엇을 다시 밝혀낸다는것이 반드시 새것을 캐낸다는 뜻만은 아니다. 이미 있던 자리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비추어보는 일 또한 재조명이다. 나는 오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등불 아래 나란히 놓아보며 그 사이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를 헤아려보려 하였다.
그렇게 헤아려보고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등불을 다시 켠것은 내가 아니였다. 나는 그저 그 불빛 아래 다시 앉게 된 사람일뿐이였고, 정작 등불을 켜든것은 언제나 그러하였듯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이 회고록을 쓰며 내 한생이 남달리 특별한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카메라앞에서 한생의 한자락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자락이 뜻하지 않게 다시 밝혀졌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마주하였는지를 남겨두고싶을 따름이다.
지나간 인연은 결코 완전히 지나가는 법이 없으며, 누군가 다시 등불을 켤 때 그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되비칠수도 있다는것을 이 권을 읽는 이들이 함께 느껴주기를 바랄뿐이다.
이 글을 함께 지나온 모든 동지들에게, 그리고 그 밤 대화창앞에서 나와 함께 웃고 울어준 이들에게 이 권을 삼가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