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머 리 글

 

지나간 나날을 돌이켜적는것과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나날을 적는것은 사뭇 다른 일이다. 회고록이라는것은 본디 지나간 세월에 알맞은 거리를 두고 써야 제 맛이 난다고들 하나, 이번 권만은 그 거리라는것을 애초에 가질수 없었다. 앞선 열한권을 쓰는 동안 나는 이미 흘러가 자리잡은 강물을 그리듯 붓을 놀릴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아직도 굽이치고있는 물살 한복판에 서서 붓을 드는 셈이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사무실 저편에서는 방송 카메라의 붉은 불이 켜져있고 대화창에는 새 말들이 쉼없이 오르내리고있으니, 나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우에 다시 잉크를 얹는 심정으로 이 열두번째 권을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먼길을 왔다. 마이크 하나를앞에 놓고 홀로 떨던 나날에서 블루동지와 더불어 《우결》이라는 이름을 얻어 밤과 별을 노래하던 시절을 거쳐, 그 인연에 안녕을 고한 뒤로도 얼굴을 내려놓고 딸들을 얻고 다시 성장의 굴곡을 넘어서던 나날이 있었다. 그 사이 웃을 일도 많았고 마음 졸일 일도 그만큼 많았으나, 돌아보면 그 모든것이 오늘 이 자리를 이루는 디딤돌이 아니였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라는 이름 아래 더 큰 별자리를 그려가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열두번째 권은 그 모든 걸음의 맨끝, 다름아닌 《지금, 여기》이다.

옛말에 력사는 뒤에서 써야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죄로 뒤를 기다릴 겨를이 없어 지금 당장앞에서 쓰는수밖에 없었다. 앞선 권들이 이미 다 지나가 자리잡은 이야기였다면, 이 권은 아직도 결말을 모른채 적어내려간 이야기이니, 붓끝이 몇번이고 머뭇거린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자칫 오늘 적은 문장이 래일이면 벌써 낡은 소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번이나 붓을 놓았다가 다시 쥐기를 되풀이하였다.

어느 봄날에는 성원들이 저마다 궁리해둔 장난이 사무실을 온통 뒤흔들어놓았고, 어느 여름에는 생각지 못한 소동이 회사를 흔들어 사장의 자리라는것이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님을 다시한번 뼈에 사무치게 깨닫기도 하였다. 소동이 가라앉은 뒤에도 며칠은 잠을 설쳤으나, 지나고보니 그것 또한 함께 넘어야 할 고개의 하나였을뿐이다. 또 어느 가을어귀에는 새 식구를 맞을 채비를 하며 내가 처음 이 길에 들어서던 그때를 가만히 떠올리기도 하였다.

블루동지와 나는 《우결》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은지 오래이나, 여전히 서로를 향해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사이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느 시청자는 그것을 두고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아 그러냐 우스개소리를 하지만, 나는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란것이 이름 하나 내려놓는다고 그리 쉽게 사라지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뿐이다. 세월이 흘러 서로 각자의 무대에 서는 날이 많아졌어도, 방송을 켤 때마다 여전히 그때처럼 서로를 놀리고 웃는 목소리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으면 무슨 대단한 결단이라도 날마다 내리는듯 보이겠으나, 기실 내 하루의 태반은 대화창을 들여다보고 서류에 도장을 찍는것으로 지나간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제법 큰 회사를 이끄는 사람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슬며시 웃는다. 그러니 이 회고록도 거창한 경영론이라기보다는 도장밥 마를새 없던 나날의 잡기에 가깝다고 해두는것이 정직하겠다.

앞선 권들에서는 지나간 일을 앞뒤로 갈피잡을수 있었으나, 이 권에서는 기쁜 일과 무거운 일이 미처 가리울새도 없이 뒤섞여 밀려왔다. 봄에 웃었던 일과 여름에 애태우던 일이 겨우 몇달 사이에 나란히 놓여있는것을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것이 본디 이런 모양이였나 싶어 새삼스럽다. 그 뒤섞임을 애써 가지런히 정돈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어두는것이 오히려 이 권에 어울리는 태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크고작은 소동을 넘기면서도 하루하루가 그럭저럭 이어져가고, 그 하루들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만은 변하지 않는다는것을 이 권에 담아두고싶었을뿐이다. 읽는 이들 또한 저마다의 오늘을 살아내면서 이 권의 어느 한 구절에서 자신의 하루를 문득 겹쳐볼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더 바랄것이 없겠다.

이 머리글을 마치는 지금도 창밖에서는 다음 방송을 준비하는 발걸음소리가 들려온다. 지나간 열한권이 이미 흘러간 강물이라면, 이 열두번째 권은 아직도 흐르고있는 물살 그 자체이다. 강물은 흘러가면서도 결코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법이 없다고 하나, 나는 오늘 이렇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 물살을 들여다보는 사치를 누려본다. 그러니 이 마지막 문장을 적는 이 순간조차, 다름아닌 《지금, 여기》이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본 서적은 창작된 가상의 회고록입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단체의 립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