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인생의 나날을 돌이켜보면 유난히 오래 붙들려있게 되는 대목이 있다. 지나간 세월을 순서대로 짚어가다가도 유독 그 언저리에 이르면 걸음이 느려지고, 손끝의 건반마저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대목 말이다. 이 둘째 권을 쓰며 나는 바로 그런 대목앞에 다시 서게 되였다.
첫째 권에서 나는 마이크 하나를앞에 놓고 홀로 방송을 시작하던 나날을 적었다.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것이 전부였고, 그 하루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딱하게 여기지도, 그렇다고 대견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그 나날이 있었기에 이 둘째 권의 이야기가 가능하였다는것만은 분명히 해두고싶다.
우주25(2018)년 가을, 어느 평범한 저녁의 방송자리에서 일이 하나 벌어졌고, 그날 이후로 나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게 되였다. 이 권은 바로 그 문턱을 넘어서던 며칠, 몇달의 기록이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두고 이러저러하게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 있던 나에게는 그저 하루하루 이어지는 방송이며 대화였을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작이라는것이 참으로 소박하였다. 거창한 계획도 선언도 없이, 방송이 끝난 뒤에도 콤퓨터앞을 떠나지 못하던 어느 밤의 잡담 하나에서, 대화창에 스쳐지나간 물음 하나에서 모든것이 비롯되였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게 뒤에 가서야 그 무게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가보다. 그때 나는 그것이 후날 《우결》이라 불리며 그토록 오래 이야기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 권에는 블루동지와 내가 세상에 우리 사이를 알리던 나날, 서로 부르는 말과 별명이 하나둘 생겨나던 나날, 그리고 지스타 나들이며 빼빼로 선물이며 하는 자잘한 일들이 담겨있다. 큰 사건이라 할것도 없는 그런 소소한 일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뚜렷이 남아있는지, 나 스스로도 가끔 신기하게 여긴다. 아마 그것은 그 하나하나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준 걸음이였기때문일것이다.
세상에 알리는 일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같은 날 서로 다른 이야기가 겹쳐 오르내리고, 시청자들의 물음과 짐작이 대화창을 가득 채우던 밤도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방송을 끝내고도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채 화면만 들여다보군 하였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적으려니 우습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심경이 함께 밀려온다.
이 대목을 적으며 나는 짐짓 스스로를 무슨 대단한 예언자나 되는듯 부풀려 말하고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였다. 마치 그 시절부터 모든것을 내다보고 한걸음씩 내디딘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때 그저 하루하루의 방송을, 그리고 그 하루하루를 함께 나누는 사람 하나를 소중히 여기였을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저 혼자 만들어놓은것이다.
이 권을 쓰며 나는 몇번이고 그무렵의 대화창 기록과 영상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시청자들이 남겨놓은 말들,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 하나하나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는 몰랐던것을 지금은 알기때문일것이다. 다만 확실치 않은 일을 확실한듯 적지는 않으려 애썼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좋을대로 다듬어지는 법이여서, 나는 그 유혹을 경계하며 이 페지들을 채웠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에게는 우리만 알아듣는 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넉자로 줄인 이름이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붙여진 별명이며, 그런것들이 쌓여 우리만의 사전 한권이 되여갔다. 남들 눈에는 그저 우스개로 보였을지 몰라도,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가 이 권에서 전하고싶은것은 대단한 교훈이 아니다. 다만 시작이라는것이 얼마나 사소하게, 그러면서도 얼마나 돌이킬수 없게 찾아오는가 하는것, 그리고 그 시작을 함께 겪어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이다. 블루동지가 아니였다면 이 권의 이야기는 애초에 성립하지도 않았을것이다.
이제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