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 결 의 첫 날
우주25(2018)년 초가을, 아직 늦더위가 덜 가신 구월 스무이레였다. 낮에는 볕이 따가웠으나 저녁이 되자 바람끝이 제법 선선해져서, 창문을 열어두면 방 안 공기가 금세 식었다. 나는 그무렵 방송자리를 《트위치》라는 새 마당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여러가지가 손에 설었다. 콤퓨터 본체는 여전히 뜨거운 숨을 내쉬며 웅웅거렸고, 그 소리 사이로 창밖에서는 늦매미 울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방은 예전 자취방보다 조금 넓어졌으나 살림은 크게 달라진것이 없었다. 책상 하나에 화면 두대, 그 사이를 비집고 선 마이크와 웹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다. 벽에는 이런저런 종이쪽지가 붙어있었는데, 그날그날 방송에서 다룰 이야기거리를 적어둔것들이였다. 그 저녁도 나는 그 쪽지들 가운데 하나를 들여다보며 오늘은 무엇을 할가 잠깐 궁리하였다.
대화창을 미리 열어두고 방송 켤 채비를 하는 사이, 나는 손에 익은 오락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배그》였다. 그무렵 나는 블루동지와 이 오락의 듀오를 부쩍 자주 하고있었다. 그때는 이 하루가 후날 어떤 수자로 남게 될줄,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는 방송을 켜기 전에 블루동지에게 귀속말을 넣어두었다. 《오늘 시간 되시면 듀오 한판 하실래요?》 하고 물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좋아요. 이따 방송 켜지면 말할게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짧은 몇마디를 주고받는데도 나는 괜히 손끝이 간지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나는 그저 오늘 오락이 잘 풀리기를, 시청자들이 많이 들어와주기를 바랐을뿐이다. 력사라는 거창한 말을 붙일 계제가 아니였다. 그러나 사람의 하루라는것은 언제나 그런 얼굴을 하고 조용히 찾아오는 법이다.
방송을 켜자 대화창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강지 님 오늘도 배그예요?》 하는 물음이 먼저 올라왔고, 나는 웃으며 《네, 오늘은 듀오 좀 돌려볼가 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목소리를 굳이 다듬지 않고 하고싶은 말을 그대로 뱉어내는 편이였다.
얼마 뒤 블루동지가 자기 방송을 켰다는 소식이 대화창을 타고 돌았다. 시청자 하나가 《블루님도 켰대요.》 하고 알려주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파티 초대를 보냈다. 화면 한귀퉁이에 대기 신호가 뜨는 짧은 순간이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파티가 이어지자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어왔다. 《강지 님,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에 나는 《블루님, 오랜만이에요.》 하고 답하였다. 그 인사 한마디가 오간것뿐인데 대화창은 벌써부터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ㅁㅇㅁㅇ?!》 하는 초성이 대화창에 우수수 올라왔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으나, 시청자들이 무언가 재미있어한다는것만은 눈치챌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초성 몇글자가 후날 붙을 긴 이름의 첫 예고편이였던 셈이다.
오락이 시작되자 나와 블루동지는 각자 화면 너머로 총소리와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블루동지는 평소처럼 흥이 낮고 느긋한 목소리로 《저쪽에 사람 있는것 같은데요.》 하고 알려주었다. 나는 반대로 조금만 위태로워도 목소리가 커지는 편이여서, 둘의 대비가 대화창에서는 늘 우스개거리가 되였다.
얼마 못가 나는 상대에게 어이없이 걸려 쓰러졌다. 순간 옛 버릇대로 거친 말이 튀여나오려는것을 나는 황급히 삼켰다. 《아, 진짜… 이거 왜 이래요.》 정도로 말끝을 흐리는것이 그날 내가 낼수 있는 최대치의 화였다.
대화창은 그 어중간한 화풀이를 놓치지 않았다. 《강지 님 참았다 ㅋㅋㅋ》, 《블루님앞이라 그런가》 하는 말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나는 그 말들을 애써 못 본체하며 다음 판을 준비하였다.
블루동지는 그런 나를 보고 짧게 웃을뿐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마음이 놓이군하였다.
다음 판에서는 반대로 블루동지가 상대를 여럿 쓰러뜨렸다. 그는 평소의 차분함과는 다르게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고 소리높여 웃었는데, 그 급변하는 흥에 나는 매번 놀라면서도 따라 웃게 되였다. 대화창에는 《저 웃음소리 무섭다》는 말과 《저게 갭이지》 하는 말이 한데 섞여 올라왔다.
나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블루님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눕혀놓고 웃음이 나와요?》 블루동지는 잠깐 멋쩍은듯 하다가 《그러게요…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순순히 인정하였다. 그 대답이 우습고도 솔직해서 나는 한참을 웃었고, 대화창도 덩달아 웃음 표시로 도배되였다.
대수롭지 않은 대화 한토막이였지만, 그런 사소한 주고받음이 그날 방송을 채운 대부분이였다. 오락 사이사이 시청자들은 저마다 궁금한것을 물어왔다. 《두분 원래 아는 사이세요?》 하는 물음에 나는 《네, 예전에 다른 게임에서 본 적 있어요.》 하고 짧게 답하였다. 자세한 사정을 다 풀어놓기에는, 그때로서는 나도 블루동지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블루동지와 내가 처음 마주친것은 이보다 훨씬 전, 다른 오락의 합방 자리에서였다. 그때는 서로 인사만 겨우 나누고는 각자 화면만 들여다보았을뿐, 이렇다할 말 한마디 오가지 못하였다.
그뒤로도 한동안 서로 소원하게 지냈다. 낯가림이 심한 두 사람이 다시 가까와지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하였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것이 다름아닌 이 《배그》였다.
여럿이 팀을 짜서 살아남는 이 오락은 혼자 하는 오락보다 자연히 말을 섞을 일이 많았다. 몇번 합방을 거듭하는 사이 나와 블루동지 사이의 서먹함은 조금씩 옅어졌다. 그 사연은 앞서 다른 자리에서 이미 적어두었으니 여기서는 짧게만 짚고 넘어가려 한다.
다시 그 저녁의 방송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그렇게 쌓인 익숙함우에서 그 밤의 듀오를 이어가고있었다. 몇판을 거듭하는 사이 손발도 제법 맞아들어갔다. 상대를 먼저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는 요령도, 위험한 자리를 피해가는 눈치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판에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순위권에 들었다. 화면에 등수가 뜨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블루동지도 마이크 너머로 짧은 환호를 보태였다. 대화창은 그 몇초 사이에 도배가 되다시피 하였다.
《오늘 케미 미쳤다》, 《듀오 계속 하세요》 하는 말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 말들을 읽으며 그저 웃어넘기였을뿐, 그것이 후날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짧은 감상글 몇줄이 이미 후날의 조짐을 담고있었던셈이다.
방송 중간에는 시청자 하나가 《블루님 팬은 뭐라고 불러요?》 하고 물었다. 블루동지는 익숙한듯 《저희 팬들은 쁠몬이라고 해요. 몬스터라고도 부르고요.》 하고 답하였다. 방송을 마칠 때면 늘 하던 말버릇대로 그는 《사랑해요 블루몬들, 찡긋!》 하고 인사를 얹었는데, 그 능청스러움에 나는 또 한번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 옆에서 그저 웃으며 팬 이야기를 몇마디 더 보탰을뿐이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후날 나를 《엄마》라 부르는 딸들이 여럿 생기리라고는, 또 그 딸들이 나와 블루동지의 이 인연을 두고두고 회자할줄은 알지 못하였다. 사람의 앞일이란 이렇게 매양 감쪽같이 숨어있다가 뒤늦게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오락 사이 쉬는 시간에는 대수롭지 않은 잡담도 오갔다. 블루동지가 문득 사투리 섞인 말투로 《아까 그거 와 그런지 모르겠다카는데예.》 하고 중얼거린 일이 있었는데, 당황하면 튀여나온다는 그 대구 말씨였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어? 방금 사투리 나왔어요.》 하고 짚어냈다.
블루동지는 얼굴이 붉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서울말로 다시 고쳐 말하였다. 대화창은 《사투리 캐치 성공》이라며 즐거워하였다. 그 소소한 놀림 하나가 그 저녁 분위기를 한결 더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다. 오락을 몇판 더 돌리고, 대화창의 물음에 답하고, 서로의 방송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창유리에는 방 안 풍경만 고스란히 비치였다.
마지막 판을 끝으로 나는 오늘은 이만 방송을 접을가 한다고 말하였다. 블루동지도 《저도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강지 님, 오늘 재미있었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였다. 나는 《저도요, 블루님. 다음에 또 같이 해요.》 하고 답하였다.
그 인사말은 특별할것 없는 여느 방송의 끝맺음과 다를바 없었다. 나는 방송을 끄고 머리수화기를 벗으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생각만 하였을뿐, 다른 감상은 딱히 없었다. 그저 재미있는 합방이 하나 더 늘었다는 정도의 마음이였다.
나는 방송을 끈 뒤에도 습관처럼 채팅 기록을 다시 읽어보았다. 《오늘 좋았다》는 말들 사이에 《이거 계속 봐야겠다》는 감상글 하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나는 그 감상글을 보고 잠깐 웃었을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 방송을 딱히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의 방송을 마쳤고, 래일은 또 무엇을 할가 하는 생각이 더 앞섰다. 그날이 무엇의 첫날이라는 생각은 그때의 나에게는 조금도 스치지 않았다.
그런데 후날 《나무위키》라는 방대한 기록물이 이 하루를 콕 집어 어떤 표를 매기게 될줄, 그때의 나는 참으로 알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그 페지에 이날부터 세어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를 적어넣었다. 나는 그 수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남의 이야기를 읽는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
짐짓 력사적 사변을 서술하는 투로 말하자면, 우주25(2018)년 구월 스무이레는 《우결》이라는 긴 려정의 원년으로 후날 추존된 날이다. 그러나 정작 그 원년의 당사자인 나는 그날 밤 그저 오락 몇판을 돌리고 잠들었을뿐이다. 력사란 이렇게 가끔 당사자보다 구경꾼이 먼저 알아채는 모양이다.
그로부터 칠백사십일이 지난 어느 가을날에야 이 려정은 일단의 매듭을 짓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 한참 뒤의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다만 그 첫날의 소박함만을 적어두고싶다. 큰 사변은 대개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평범한 얼굴로 찾아오는 법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채팅 기록을 들추어본다. 화질도 평범하고 대화도 특별할것 없는, 그저 그런 《배그》 합방 하나였다. 그러나 그 평범함속에 후날 그렇게 오래 이어질 인연의 첫 씨앗이 이미 심어져있었던것이다.
그무렵 대화창에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 가운데는 후날까지 오래 남을 얼굴들도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강지 님, 블루님 하고 우리를 불러가며 오락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름 모를 얼굴들이야말로 이 려정의 가장 성실한 증인들이였다.
블루동지는 그날 방송에서도, 또 그뒤로도 한동안 크게 흥을 높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다가도 상대를 여럿 눕히거나 뜻밖의 순간을 만나면 어김없이 그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낙차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은 참 자기 감정에 솔직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로 말하자면 그무렵부터 이상하게도 블루동지앞에서는 평소보다 말투가 눅어지는것을 스스로도 느끼고있었다. 다른 합방에서라면 거침없이 나왔을 말들이 그 앞에서는 어쩐지 한번씩 걸러져 나왔다. 그때는 그저 상대가 낯을 가리니 나도 조심스러운가보다 여기였을뿐, 그 이상의 뜻을 두지는 않았다.
후날 친구 하나가 나에게 《너는 왜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블루한테는 그렇게 얌전해?》 하고 놀린 일이 있었는데, 그 물음을 받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 말투가 언제부터인가 달라져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시작이 정확히 어느 날부터였는지는 지금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 구월 스무이레의 저녁이 그 변화의 아주 이른 한 자락이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할뿐이다.
그날 밤 나눈 대화 어디에도 거창한 말은 없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해요》 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사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큰 일의 시작이란 대개 이렇게 평범한 인사말의 얼굴을 하고 오는듯하다.
나는 이 회고록을 쓰며 그날의 기록을 몇번이고 다시 들추어보았다. 정확히 몇시에 방송을 켰는지, 몇판을 돌렸는지 하는 세세한 사정은 이제 와서 다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그날 대화창에 남은 몇줄의 웃음과 몇줄의 물음표만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저녁은 나에게도 블루동지에게도 그저 여러 방송 가운데 하나였을뿐이다. 둘 다 그날을 딱히 특별하게 여기지 않은채 하루를 마감하였다. 그런데 후날 그 하루가 어느 사전의 한 항목이 되고, 또 이렇게 회고록의 한 절을 이루게 될줄은 그날의 우리 둘 다 짐작하지 못하였다.
력사라는것은 이렇게 언제나 당사자를 앞질러 저 혼자 자라나는 모양이다. 당사자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뿐인데,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하루하루를 주워모아 시작과 끝을 매기고 수자를 붙인다. 나는 그 수자앞에 설 때마다 조금은 겸연쩍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겸연쩍음과는 별개로, 나는 그 구월 스무이레의 저녁을 소중히 여긴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가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평범함속에서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와지고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소중하기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것은 흔히 그런 평범한 저녁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것이 아닌가 싶다.
그날 이후로도 나와 블루동지는 특별히 약속을 정해두지 않은채로 종종 듀오를 잡았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귀속말을 넣었고, 어느 날은 블루동지쪽에서 먼저 물어왔다. 그렇게 오간 귀속말들이 쌓여가면서 우리 둘의 합방은 차츰 정례처럼 되여갔다.
그 정례화의 이야기는 뒤에 가서 따로 적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그 시작점을 적어두는것으로 그친다. 모든 긴 려정에는 반드시 첫 걸음이 있는 법이고, 그 첫 걸음은 대개 걷는 사람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작고 조용하다. 우리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나는 이 절을 쓰면서 새삼 한가지를 깨닫는다. 사람이 어떤 인연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이 인연인줄을 잘 모른다는것이다. 그 인연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혹은 이렇게 뒤를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가늠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 구월 저녁, 나는 그저 오락 한판을 잘 마치고 시청자들과 웃고 떠들었다는 자잘한 만족만을 안고 잠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였다. 그 하루가 후날 칠백사십일이라는 긴 수자의 첫 페지가 되리라는것은,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이제 이 회고록을 쓰는 자리에서 돌이켜보면, 그 저녁의 사소한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새삼 다르게 읽힌다. 《오늘 재미있었어요》라는 그 인사말속에 이미 다음 만남을 기다리는 마음이 슬며시 담겨있었던것은 아닌가 싶은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뒤늦은 사람의 짐작일뿐, 그날의 우리 둘은 그저 인사말로 하루를 접었을따름이다.
나는 지금도 방송을 켤 때마다 그 구월의 저녁을 가끔 떠올린다. 콤퓨터 본체가 웅웅거리던 소리, 창밖의 늦매미 울음, 그리고 파티 초대 신호가 뜨던 그 짧고 긴 몇초. 그 자잘한 감각들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듯하다.
사람들은 후날 이 하루를 두고 이런저런 의미를 붙이겠지만, 나에게 남은것은 결국 그 자잘한 감각들뿐이다. 거창한 결심도, 예감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과 오락 한판을 더 하고싶다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만이 있었을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소박한 마음이야말로, 지금 와서 보면 가장 오래 남는것이였다.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일보다 아무 뜻 없이 시작한 일이 더 멀리까지 가는 경우를 나는 이 방송생활에서 여러번 보아왔다. 그 구월 스무이레의 저녁도 바로 그런 종류의 시작이였다.
이 절을 마치며 나는 다시 한번 그날의 채팅 기록 마지막 줄을 들여다본다. 《래일도 켜세요》 하는 짧은 한마디가 거기 남아있다. 그 한마디에 답하듯 나는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마이크를 켰고, 그렇게 이어진 나날들이 바로 이 회고록의 다음 절들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