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 만 구 독 자
우주24(2017)년의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더웠다. 나는 그해에도 밤을 낮삼아 방송을 하였는데, 창을 열어놓아도 바람 한점 들지 않는 밤이면 콤퓨터의 랭각기 소리만 방 안 가득 웅웅거리였다. 대화창의 글자들이 화면우로 쉼없이 흘러올라가는것을 보고있노라면, 나는 이 조그마한 방 하나가 세상의 전부인듯한 착각에 빠지군하였다.
방송을 마치고 나면 새벽이였다. 헤드쎗을 벗어놓고 화면의 불빛만 남은 방에 앉아있노라면, 오늘 죽인 사람 수와 오늘 죽은 방식을 헤아리는것 말고는 딱히 할일이 없는 밤들이였다. 책상우에는 식은 떡볶이 그릇과 뿌링클 봉지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옆으로 마우스와 건반가 밤새 두들겨맞은 흔적처럼 반질반질하였다.
술을 즐기지 못하는 나는 그런 밤이면 대신 랭수 한잔을 들이켜고 자리에 다시 앉군하였다. 저혈압 탓에 아침이면 유난히 몸이 무거웠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젊음의 한 증세쯤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였다. 그런 밤에도 나는 몰랐다, 이 화면 저편 어딘가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궤도를 그리며 자라나고있는 청년이 하나 있다는것을.
그 청년의 이름은 블루였다. 《배그》를 방송하는 사람치고 그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이는 드물었으나, 나는 그때까지 그와 마주친 일이 없었다. 인천 어느 구석의 좁은 자취방에서 그가 밤마다 무엇을 하고있었는지는, 후날 하나둘 전해듣고서야 알게 되였다.
그가 본디 대구에서 나고 자라 어떤 사연으로 인천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였는지는, 나로서도 자세히 전해들은바가 없다. 다만 그가 인천에서 방을 얻어 홀로 지내며 화면 하나로 세상과 이어지고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 장에 〈인천 소년의 화면〉이라는 이름을 붙인것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나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마인크래프트》로 화면에 서고 《배그》로 중심을 옮기던 나날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적었으니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만 그 전환이 있은 뒤로부터 그의 구독자수가 그리는 곡선이 례사롭지 않게 가팔라졌다는 사실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주22(2015)년 6월 9일, 그는 10만이라는 수자를 처음으로 넘기였다. 이듬해 5월 30일에는 20만을, 그 이듬해인 우주24(2017)년 5월 11일에는 30만을 채웠다. 한해에 10만씩, 마치 미리 시간표를 짜놓은듯한 걸음이였다.
그보다 앞서 우주22(2015)년, 그는 텔레비죤 프로그람에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고 한다. 서든어택을 주제로 한 자리였는데, 소감을 묻는 말에 그는 《너무 재미있었고 떨리지 않았다》고 짧게 답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얼굴을 감춘채 마이크만으로 사람을 만나오던 이가 처음 세상에 얼굴을 비춘 자리치고는, 어처구니없이 담담한 소감이였던 셈이다.
그무렵 《배그》라는 오락 하나로 이름을 얻으려던 방송원이 어디 그 한사람뿐이였겠는가. 마치 새로 열린 넓은 벌판에 너도나도 깃발을 꽂으러 몰려드는 형국이였다고,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지금도 회고한다. 그 벌판에서 남보다 한걸음 앞서 자리를 잡은것이 바로 이 인천의 청년이였다.
그 시절 그의 곁을 지킨것은 더미노스, 미르다요, 권총빌런 같은 이들이였다고 한다. 이들은 《배그》의 조력자라기보다는 차라리 한솥밥을 먹는 전우에 가까웠다고, 후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같은 인천에 살던 눈쟁이라는 이와는 멀리 시드니까지 건너가 《배그》 대회에서 듀오로 우승을 거두기까지 하였다니, 그 시절 그의 손끝이 얼마나 여물어가고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합방을 할 때면 그는 적을 눕히고 나서 늘 같은 말을 웃음 섞어 내뱉었다고 한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해맑았던지, 옆에서 함께 하던 더미노스가 《형, 그러다 벌받는다》하고 놀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면 그는 대꾸도 없이 다음 적을 찾아 조준경을 들었다고 한다. 미르다요가 곁에서 《아이고 무자비하다, 무자비해》하며 혀를 찼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권총빌런은 그 옆에서 그저 웃기만 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어이없이 죽어나가군 하였다고 하니, 그 판이 그때 얼마나 왁자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평소에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 흥이 차분하고 느긋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도 판이 잘 풀려 치킨을 손에 넣는 순간이면 《개꿀!》 한마디에 목소리 톤이 대번에 올라갔다는 증언이 여럿이다. 하나의 치킨을 위해 밤을 새우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니, 그 시절 《배그》 방송가의 사람들에게 치킨 한마리는 마치 고지 하나를 점령하는것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치킨을 놓친 판이면 그 억울함을 못 이겨 다음 판에 곱절로 덤벼들었다고도 한다. 승부에 진 자리에서 곧바로 설욕을 벼르는 그 오기가, 오늘의 그를 만든 밑거름의 하나였을것이다. 사람이 백만이라는 고지에 오르는 데는 이런 자잘한 오기들이 수백번 쌓여야 하는 법이다.
그는 대구에서 나고 자라 상경한 뒤로 서울말을 제법 능숙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당황하는 순간이면 《~카는데》 하는 경상도 특유의 어법이 저도 모르게 튀여나왔다는것이다. 방송을 오래 지켜본 이들은 오히려 그런 순간을 반가와하였다니, 사람이란 꾸민 모습보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모습에 더 정이 붙는 법인가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주24(2017)년 9월, 그는 〈블루의 인생 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화면 저편의 사람들은 그 몇마디 말에서 그가 나온 학교며 자란 동네를 이러쿵저러쿵 짐작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본명만은 끝내 입에 담지 않았다. 《이름이 특이해서 공개하면 위험해질수 있다》는것이 그의 변이였다. 오래 함께한 동료들도 몰랐고, 오직 그의 어머니만이 그 이름을 부를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나 또한 강지라는 이름 뒤에 다른 얼굴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이였기때문이다. 화면앞의 사람들에게는 그 시절, 이름 하나와 목소리 하나면 족한 세월이였다.
사람들은 그 몇마디 사연을 두고 마치 력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학자들처럼 여러날을 두고 갑론을박하였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고향이 정말 어디인지를 두고 대화창에서 벌어진 론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투리 한마디를 근거로 삼았고, 누군가는 지나가듯 나온 지명 하나를 붙들고 밤새 지도를 뒤졌다고 한다.
후날 그의 신상 몇줄이 이곳저곳에 정리되여 오르기까지는, 이런 애호가들의 끈질긴 추적이 적지 않은 몫을 하였을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날이면 또 태연히 방송을 켜고 사람을 눕혔다고 한다. 감추어야 할것과 보여주어도 좋을것을 가르는 그나름의 저울이, 그때 이미 그의안에 자리를 잡고있었던것이다.
게임판 밖의 이야기도 그무렵부터 조금씩 화면에 곁들여졌다. PC방에 들러 눈쟁이와 나란히 앉아 라면을 먹는 브이로그성 영상도 이따금 올라왔다고 한다. 총을 쏘는 화면 사이사이에 그런 일상의 조각을 끼워넣는 재주 또한,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백만을 향해 걸어가던 걸음의 일부였던 셈이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새였다. 다시 구독자수의 걸음으로 돌아가야겠다. 우주25(201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걸음은 걷는것이 아니라 뛰는것에 가까와졌다.
4월 27일에 50만을 넘긴것이 그 뜀박질의 시작이였다. 그무렵 사격이 서투르던 시절의 버릇을 못 버려 빅헤드라는 선배에게 어깨너머로 자세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었다. 《팔부터 흔들지 말라니까》하고 핀잔을 주면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조준경을 들었다고 하니, 그 배우는 태도 하나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구를 쥐는 법 하나부터 발판을 딛는 법 하나까지 하나하나 몸에 새기듯 익혔다고 하니, 그렇게 붙은 손감각이 후날 그를 《배틀그라운드》 정식파트너 자리에까지 올려놓을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을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가는 사이, 그의 방 창밖 풍경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방안의 하루만은 늘 같은 순서로 돌아갔다고 한다. 눈을 뜨면 콤퓨터를 켜고, 대화창을 확인하고, 그날의 오락을 준비하는 순서였다.
6월 8일에는 60만을, 그로부터 보름 남짓 지나 6월 25일에는 70만을 넘기였다. 한달 사이에 두 고비를 넘은 셈이니, 후날 력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수자놀음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의 《배그》 방송가에서 이것은 결코 작은 사변이 아니였다.
열흘이 멀다 하고 구독자 몇만이 새로 늘었다는 소식이 돌았고, 방송원들끼리는 서로의 수자를 마치 전선의 전황처럼 주고받았다고 한다. 오늘은 블루가 몇만을 더 벌었다더라, 오늘은 누구네 방송이 그를 바싹 뒤쫓고있다더라 하는 말들이 대화창과 모임터를 오갔다. 남의 진군소식에 이렇게 다들 촉각을 세우던 시절도 흔치 않았을것이다.
7월 26일에는 80만을 넘기였다. 같은 날짜 즈음, 그는 눈쟁이와 함께 시드니 대회의 우승 소식을 다시 한번 우려먹으며 방송에서 자축하였다고 한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회를 뛰던 그 발걸음이, 이무렵의 상승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것이다.
8월 5일에는 유투브가 아닌 《트위치》 쪽에서도 팔로워 10만이라는 고지에 올랐다. 두 개의 화면에서 나란히 사람이 몰려드는 모양새였으니, 그무렵의 그는 아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지냈을것이다. 방송을 마치면 다음 방송을 준비하고, 그 방송이 끝나면 또 다음 방송거리를 궁리하는 나날이였다고 전해진다.
8월 18일에는 유투브 구독자가 90만을 채웠다. 백만이라는 수자가 이제 코앞에 다가온 셈이였다. 그의 방송 소개문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블루입니다. 제 영상을 볼 때만큼은 우리 쁠몬들이 항상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청자를 부르는 이 말에도 그 사이나름의 력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블루몬이라 부르다가, 우주24(2017)년 7월 어느 인생 썰 영상 말미에 스스로 줄여 쁠몬이라 부르기 시작한것이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블루몬들 안녕?》하던 인사가 어느새 《사랑해요 블루몬들! 찡긋!》을 거쳐, 쁠몬이라는 짧은 애칭으로 굳어진것이다.
별명이라면 그것 하나만이 아니였다. 방송 이름앞에는 한동안 〈악동〉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스무살 뒤반을 넘기고 나서야 그는 이 수식어를 스스로 떼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90만을 향해 달리던 그 시절의 그는 아직 스스로를 악동이라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던 청년이였던 셈이다.
좋아하는 수자가 3과 7, 그리고 그 둘을 합친 37이라는것도 그무렵의 그를 아는 사람이면 다들 아는 사실이였다고 한다. 아이디 끝에 37을 붙이는 버릇이 어디서 비롯되였는지는 그 자신도 자세히 밝힌바 없다. 그러나 90만에서 백만으로 건너가던 그 나날에, 그가 유독 그 수자들을 붙들고 무언가 소원을 빌었으리라 상상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9월 11일, 그의 유투브 구독자는 백만을 넘어섰다. 10만을 처음 넘긴 우주22(2015)년 6월로부터 꼭 3년하고도 석달이 지난 뒤였다. 앞의 90만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는 겨우 2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니, 그 진군의속도를 나는 지금도 마땅한 말로 형용하지 못하겠다.
누군가는 그무렵의 그를 두고 우스개소리로, 치킨을 백마리쯤 먹어치우고서야 백만에 이르렀을것이라 놀렸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몇마리의 치킨을 먹었는지 헤아려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농담이 오갈만큼, 그 백만이라는 수자에는 그가 밤마다 손에 넣은 자잘한 승리들이 촘촘히 쌓여있었던것만은 틀림없다.
백만이라는 수자앞에서 그가 무슨 대단한 연설을 한것은 아니였다고 한다. 그저 여느 때처럼 방송을 켜고, 여느 때처럼 사람을 눕히며 웃었을뿐이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은 본디 그런 법이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는데,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 하루에 금을 그어 기념일이라 부르는것이다.
후날 이 방송의 력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9월 11일이라는 날짜 옆에 특별한 각주를 하나 달아놓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각주가 붙기까지 그 뒤에 얼마나 많은 무명의 밤이 쌓여야 하였는지는, 각주 한줄만으로는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할것이다.
대화창은 그날 온통 축하의 말로 뒤덮였을것이 뻔하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그 밤의 대화창이 어떤 모양이였을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누군가는 초성으로 웃음을 도배하였을것이고, 누군가는 후원 문구에 진심을 담아 눌렀을것이다.
후날 알게 된바로는, 그는 그날도 특유의 그 차분한 흥을 크게 흩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방송 말미에 한마디, 여기까지 함께 와준 쁠몬들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였을뿐이라고 하였다. 더미노스와 미르다요, 권총빌런이 각자의 방송에서 축하 인사를 남기였다는 이야기도 후날 들었다. 큰소리보다 담담한 인사 한마디가 더 오래 남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같은 인천 하늘 아래 살던 눈쟁이도 그 소식을 듣고 축하를 건넸다고 한다. 시드니까지 함께 건너가 우승컵을 나누어 들었던 사이이니, 그 축하의 무게가 남달랐을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힘든 원정길도 함께 겪은 사람만이 알아줄수 있는 기쁨이라는것이 세상에는 분명 있는 법이다.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던가. 나 역시 같은 《배그》라는 판우에서 나의 화면을 붙들고있었지만, 우리 두 화면은 아직 서로를 비추지 않았다. 같은 오락을, 같은 계절을, 서로 모른채 나란히 흘려보내고있었던 셈이다.
그무렵의 나는 아직 강형이라 불리우던 시절을 지나고있었다. 말투가 지금보다 훨씬 거칠고 성마른 방송원이였다는 사실을 나는 구태여 숨기지 않으련다. 대화창에서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시절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무렵의 나와 그무렵의 그가 만났더라면 오히려 서로 서먹서먹하기만 하였을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가까운 판우에서 숨쉬고있었으면서도, 나는 그의 이름을 스치듯 들었을뿐 얼굴 한번 마주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람의 인연이라는것은 지도우의 거리로 재는것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의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저마다의 시간표를 따로 가지고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간표는 그렇게 백만이라는 고지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고있었다. 나의 시간표는 또 나대로, 별다른 사변 없이 하루하루를 채워가고있었다. 두 시간표가 겹칠 날이 머지 않았다는것을, 그때의 우리는 둘 다 알지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그 백만이라는 수자는 그저 유투브 화면 한귀퉁이에 뜨는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시 뒤에는 3년 남짓한 세월과, 새벽마다 켜졌다 꺼지던 콤퓨터 화면과, 더미노스와 미르다요와 권총빌런의 웃음소리와, 인천의 좁은 방 하나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나는 후날 이 모든것을 전해듣고서야 그 수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밤을 담고있는지 비로소 헤아리게 되였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 뒤, 나는 이 청년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포트나이트라는 또 다른 판우에서였다. 그러나 그날 오간 말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고,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있다.
그 만남이 얼마나 낯가림투성이였는지, 그리고 그 낯가림이 어떻게 풀려나갔는지는 다음 절에 미루어두는것이 옳겠다. 다만 여기서는 이 한가지만은 적어두고 싶다. 그가 백만이라는 고지에 오르기까지 걸어온 그 나날들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후날 함께 만들어낸 그 우스꽝스럽고도 다정한 《우결》이라는 대사변도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양이 되였을것이다.
화면 저편에서 묵묵히 쌓아올린 그 걸음들이 결국 나에게로 이어지는 길이 되였다는것을,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화면앞에서 자기의 력사를 써내려가고있을 뿐, 그 력사가 누구의 력사와 이어질지는 미리 알지 못하는 법이다. 블루의 백만이라는 고지도, 그렇게 조용히 나를 향해 뻗어오고있는 길목 하나였던 셈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의 그를 상상해본다. 좁은 방에서 혼자 마이크를 붙들고, 적을 눕히고는 특유의 그 웃음을 터뜨리던 한 청년의 모습을. 사투리가 슬쩍 새여나오면 겸연쩍게 웃어넘기고, 치킨을 손에 넣으면 개꿀을 웨치던 그 밤들을 말이다.
나 또한 그무렵의 나를 함께 떠올려본다. 같은 밤, 다른 방에서 같은 오락을 붙들고 앉아있던 젊은 나를. 그때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두 화면이 몇해 뒤에는 한 화면안에서 나란히 웃게 될줄, 그 누구도 미리 짐작하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 끝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이른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향해 걸어가고있는것이다. 백만이라는 수자는 그저 한 청년의 진군을 기록한 수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에게로 향하는 길의 리정표이기도 하였던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아직 그 화면을 본 일이 없었으나, 지금의 나는 그 화면 하나하나를 마치 내 것인양 그려볼수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듯 뒤늦게 찾아와서도 얼마든지 제 자리를 만들어내는 재간을 가진 모양이다.
백만이라는 고지우에 선 그 청년은, 아직 자신을 기다리는 다음 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두 개의 화면이 서서히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가고있었다는것만은, 지금에 와서 분명히 말할수 있다.
이 절을 여기서 맺으며, 나는 그 시절의 그와 그 시절의 나에게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건네고싶다. 너희가 각자의 방에서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회고록도 쓰여질 리유가 없었을것이라고. 그 말을 전할 길은 없으나, 이렇게 적어두는것으로 대신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