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만 남
우주25(2018)년, 구월에 접어들무렵의 날씨는 아직 여름의 미련을 다 떨치지 못하고있었다. 낮에는 볕이 따가웠고 밤이 되여서야 창틈으로 겨우 선선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무렵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방문을 닫아걸고 콤퓨터앞에 앉아 하루의 태반을 보내고있었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랭수 한잔이 놓여있었고, 화면의 푸른 빛만이 어두운 방을 채우고있었다.
책상 옆에는 며칠 전 시켜먹고 남은 뿌링클 봉지와 떡볶이 그릇이 아직 치워지지 않은채 놓여있었다. 마우스와 건반는 밤마다 두드려맞은 흔적처럼 반질반질하였고, 그우로 콤퓨터의 랭각기 소리가 나직이 웅웅거리였다. 창밖으로는 저녁무렵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있었으나, 방안에 앉은 나는 그런 풍경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날도 나는 방송을 마치고 대화창을 내린 뒤, 다음 내용물는 무엇으로 할가 궁리하고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앞서 어느 자리에서 한가지 제의가 나에게 전해졌다. 요즘 방송판에서 다들 즐긴다는 《포트나이트》로 합방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것이였다. 상대는 《배그》 방송가에서 이름을 익히 들어본 블루라는 이였다.
정확히 누가 먼저 그런 제안을 꺼냈는지는 나도 이제 와서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방송판이라는 곳이 원래 그러하다. 이런 자리는 대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슬그머니 성사되는 법이여서,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시작점을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려운것이다. 다만 그 제의가 나에게 전해진 순간, 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응락하였다는것만은 뚜렷이 기억한다.
그 시절 《포트나이트》는 국내 방송가에 새로 상륙한 낯선 손님이나 다름없었다. 총싸움 방송으로 이름을 얻은 사람들도 하나둘 이 새로운 오락에 발을 들이며 서로 손을 맞잡고 합방을 청하던무렵이였다. 방송원들 사이에서는 누구와 누가 합방을 하였다더라 하는 소식이 마치 이웃마을 혼담 오가듯 빠르게 돌았다. 나 또한 이 새로운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니, 제의를 받고도 딱히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하였다.
이 합방 소식은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양쪽 대화창을 술렁이게 하였다. 나의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오늘 그 블루랑 하는것 맞아요》하는 물음이 여러번 오갔고, 블루쪽에서도 비슷한 기대가 오갔으리라 짐작한다. 서로의 애호가들이 낯선 조합을 두고 저마다 기대와 궁금증을 앞세우는 사이, 정작 당사자인 우리 둘은 그 기대에 부응할 재간이 없었다. 시청자들의 기대와 실제 방송의 온도차가 이렇게 컸던 자리도 흔치 않을것이다.
그무렵 나는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그루빠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뒤로하고 개인 방송에 힘을 쏟고있었다. 블루 또한 더미노스, 미르다요, 권총빌런 같은 《배그》 동료들과 어울려 자기만의 판을 다져가고있었다. 우리 둘의 교우관계는 이렇듯 서로 다른 갈래로 뻗어있었으니, 어느 쪽에서도 상대의 이름이 자연스레 섞여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니 이번 합방은 두 갈래의 물줄기가 처음으로 살짝 스치는 자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제의를 받고서 나는 은근히 마음이 무거웠다. 처음 마이크를 나누는 사람앞에서는 유난히 말이 굳어지는것이 나의 오래된 버릇이였기때문이다. 방송에서야 시청자들과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는 사람으로 알려져있었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 서로 낯을 익힌 사이에서나 통하는 재간이였다. 낯선 사람앞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였다.
이 대목에서 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하나 바로잡고 넘어가야겠다. 사람들은 한때 나를 강형이라 부르며 거칠고 억센 사람으로 여기였다. 그뒤로 15강지, 감자, 강공지주 따위의 별명이 줄줄이 뒤를 이였으니,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부르는 이름도 참 여러가지로 바뀌였던 셈이다. 그러나 어느 별명으로 불리든 낯선 자리에서 말수가 줄어든다는 본바탕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화창의 사람들은 내가 폭풍같은 욕설도 서슴지 않던 시절의 나를 기억하겠지만, 그 거침은 익숙한 판에서나 나오는것이였다. 낯선 사람과 단둘이 마이크를 마주하는 자리에서는 도리여 입이 붙어버리는것이 나의 진짜 성미였다. 나이를 먹으며 말투가 한결 유해졌다는 평도 들었으나, 낯가림이라는 본바탕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니 블루라는 낯선 이름앞에서 내가 은근히 긴장하였던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재미있는것은 우리 둘 다 밖에서 보기에는 결코 낯을 가리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한때 거친 말투로 이름을 알렸고, 블루는 적을 눕히며 호탕하게 웃는 사람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그 호기로운 겉모습 뒤에는, 낯선 사람앞에서 한없이 조심스러워지는 또 하나의 얼굴이 저마다 숨어있었던것이다. 사람이란 이렇듯 여러겹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가보다.
블루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그무렵 소문으로만 그 됨됨이를 짐작하고있었다. 평소에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 흥이 차분하고 느긋한 사람이라 하였고, 크게 웃거나 무언가에 신이 나면 목소리가 확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서울말을 능숙히 구사한다지만, 정말로 당황하면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여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낯선 사람앞에서 먼저 말을 붙이는 성격은 아니라는것도 그때 이미 들어알고있었다.
그의 애호가들이 그를 부르는 말도 나는 익히 들어알고있었다. 처음엔 블루몬이라 부르다가 얼마전부터 줄여서 쁠몬이라 부른다는것, 그가 방송을 마칠 때마다 《사랑해요 블루몬들》하고 인사한다는것도 그런 소문의 하나였다. 화려한 언변보다 소박한 진심을 앞세우는 사람이겠거니, 나는 얼굴도 모르는채 그런 인상을 어렴풋이 그려보고있었다. 그러나 소문으로 그려본 인상과 실제로 마주한 사람은 늘 어딘가 다른 법이다.
그런 소문들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낯을 가리는 사람과 낯을 가리는 사람이 마이크를 나누어 든다니, 이보다 더 심심한 조합이 어디 있겠는가 싶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미 합방은 정해진 일이였고, 나로서도 이제 와서 물릴 처지는 아니였다. 나는 그저 오락이나 열심히 하고 례의바르게 인사나 나누고 헤여지면 그만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나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 시절 나는 이미 몇건의 합방 제의를 슬며시 미루어온 일이 있었다. 낯선 상대와 마이크를 나누는 일이 못내 부담스러워 짐짓 일정을 핑계삼은 자리가 한둘이 아니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어쩐지 물러설 명분을 찾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배그》 방송가에서 익히 들어온 그 이름의 무게 탓이였을것이다.
나는 그 며칠 방송 준비를 하면서도 이 낯선 합방을 어떻게 치를가 하는 걱정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였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일수록 도리여 이런 사소한 걱정에는 유난스러워지는 법인가보다. 마이크 성능을 몇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인사말을 속으로 몇번이나 되뇌여보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무슨 말을 더 건네야 할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된 날이 다가오자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부터 방송 채비를 서둘렀다. 화면 구성도 여느 때보다 꼼꼼히 매만졌고, 헤드쎗의 줄이 엉키지는 않았는지도 새삼 살펴보았다. 실수라도 하면 부끄럽겠다는 소박한 걱정이 그 채비의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앞에서 실수를 보이고싶지 않다는 마음은, 낯가림 심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있는 본능인듯하다.
그날도 나는 저혈압 탓에 방송 시작 전까지 몸이 다소 무거웠다. 그러나 마이크앞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그런 무거움은 잠시 잊혀지는 법이였다. 다만 낯선 사람과 마주할 긴장까지 겹치니, 몸의 무거움과 마음의 긴장이 한데 뒤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기분을 애써 누르며 방송 시작 단추를 눌렀다.
마침내 화면속에 블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드쎗 너머로 전해지는 그 목소리는 소문대로 차분하였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 한마디에 나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답하였다. 그것이 우리 둘 사이에 오간 첫마디였다.
《배그》에 익숙한 나에게 《포트나이트》라는 오락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몸을 숨기고 엎드려 적을 살피는 《배그》식 버릇이 몸에 밴 탓에, 서서 건물을 쌓아올리는 이 새로운 방식은 좀처럼 손에 붙지 않았다. 블루는 이미 이 오락에 익숙한듯 능숙하게 벽을 세우고 계단을 놓았으나, 그것을 두고 나에게 무어라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 자기 몫의 오락을 하는것으로 그 시간을 채워나갔을뿐이다.
오락이 곧바로 시작되였으므로 우리는 인사를 나눈지 얼마 되지 않아 각자의 인물를 조작하기에 바빴다. 비행선에서 뛰여내려 락하산도 없이 떨어지는 그 낯선 방식에 나는 적잖이 서툴렀다. 건물을 짓고 부수는 손놀림도 서투르기는 매한가지여서, 화면속의 내 인물는 몇번이고 어색하게 벽에 부딪히군하였다.
블루는 그런 나를 보고도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건물을 짓고 총을 겨눌뿐이였다. 나 또한 그의 서투른 대목을 놀리거나 참견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 둘 다 상대의 실수를 웃어넘길만큼의 친분이 아직 없었던것이다.
한번은 내 마이크가 잠깐 말썽을 부려 목소리가 끊기는 일이 있었다. 블루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도 굳이 캐묻지 않은채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나 역시 마이크를 다시 만지작거리며 《아, 잠깐 이상하네요》하고 짧게 해명하였을뿐, 그 이상의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사소한 기술적 말썽 하나마저 서먹함을 깰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우습다.
게임안에서 상자를 함께 여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무기가 하나 나오면 서로 눈치껏 필요한 사람이 집어가는 식이였을뿐, 《이거 가지세요》 하는 인사치레조차 드물었다. 스톰이 좁혀들 때마다 나는 그저 짧게 《스톰 옵니다》하고 알렸고, 블루는 《네》하고 짧게 응하였다. 이런 실용적인 말들만 오가는 사이, 화면은 어느새 세번째 판을 향해 넘어가고있었다.
대화창에서는 시청자들이 두 사람의 조합을 신기해하며 이런저런 반응을 쏟아냈다. 《둘이 처음 하는것이지요》, 《분위기 왜 이렇게 조용해요》 하는 글들이 화면우로 빠르게 흘러올라갔다. 개중에는 《오늘은 그냥 순수 게임방송이네요》하며 우리의 심심한 궁합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채팅들을 흘낏거리면서도 굳이 반응하지 않고 오락에만 몰두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화창의 반응들이야말로 그날의 분위기를 가장 정확하게 담아낸 기록이였는지도 모른다. 시청자들은 우리 둘 사이의 침묵을 놀리듯 이런저런 말을 남기였으나, 정작 우리는 그마저도 웃어넘길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낯가림이라는것은 화면 저편의 시선까지 헤아릴 겨를조차 앗아가는 물건이였다. 그저 눈앞의 총과 건물에만 몰두하는것이, 그때 나로서는 가장 마음편한 도피처였다.
오락이 몇판 거듭되는 동안 우리 사이의 대화는 늘 비슷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위험을 알리는 짧은 경고, 아이템을 나누는 실용적인 말, 그리고 판이 끝날 때마다 되풀이되는 형식적인 인사가 전부였다. 서로의 사생활이나 취향을 묻는 말은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자리는 처음 만난 사업 상대끼리의 회담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사무적이였다.
후날 이 회고록을 쓰는 자리에서 나는 종종 그날의 합방을 웃으며 력사적 회담에 빗대여보군한다. 두 나라의 사절이 만나 통상조약이라도 맺는듯한 그 신중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를, 그때 우리는 어쩌면 그리도 잘 재현하였던지 모르겠다. 다만 그 회담에서 우리가 맺은것은 조약이 아니라 그저 어색한 침묵 하나뿐이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이 심심한 회담이 실은 얼마나 큰 사변의 서장이였는지를 알게 되였다.
한판이 끝나고 다음 판을 기다리는 짧은 사이, 나는 무언가 말을 붙여볼가 몇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다시 닫아버리기를 되풀이하였다. 블루쪽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 망설임이 화면 이편과 저편에서 동시에 벌어지고있었다는것을, 나는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오락만 거듭하는 사이 어느덧 방송을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판이 끝나고 결과 화면이 뜨자, 나는 이제 슬슬 인사를 나눌 때가 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한시간 남짓한 시간이 어쩐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낯선 자리에서 보내는 한시간은 익숙한 자리에서 보내는 한시간과는 전혀 다른속도로 흐르는 모양이다.
《수고하였습니다》하는 말 한마디에 블루도 《네, 수고하였습니다》하고 답하였다. 다음에 또 하자는 언질도, 서로의 방송을 구독하겠다는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방송원들 사이에 으례 오가는 형식적인 인사로 그 자리는 마무리되였다. 헤드쎗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나는 그제서야 어깨의 긴장이 풀리는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나, 그 순간 나는 큰 숙제 하나를 무사히 끝냈다는안도감부터 앞섰다. 낯선 사람과의 합방이라는 관문을 그럭저럭 별탈없이 넘기였다는것, 그것이 그날 저녁 내가 느낀 감정의 거의 전부였다. 블루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는, 그 순간의 나로서는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저 방송의 다음 순서로 넘어갈 준비를 하였을뿐이다.
후날 누군가 나에게 그날의 기록을 두고 농담삼아 물은적이 있다. 그렇게 말이 없었던 자리가 어떻게 몇해에 걸친 대사변의 시작이 될수 있었느냐고 말이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원래 큰 강도 그 시작은 이슬 한방울에서 비롯되는 법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하군한다. 다만 그 이슬 한방울이 얼마나 조용하였는지는,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둘만이 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은 우리 둘뿐이였으나, 나는 지금도 그 화면 저편의 블루를 뚜렷이 그려볼수 있다. 헤드쎗을 낀채 화면을 응시하며 묵묵히 손을 놀리던 그 모습, 가끔 웃음기가 새여나오다가도 이내 사그라들던 그 목소리를 말이다. 낯선 사람앞에서 먼저 말을 붙이지 못하는 성정은 나와 그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침묵을 딱히 불편해하지 않는듯 보였고, 나는 그 침묵을 못내 어색해하였다는 차이가 있었을뿐이다.
나 또한 그날의 나 자신을 떠올려본다. 마이크앞에서 할말을 고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오락에만 몰두하던 모습이였다. 시청자들에게는 여느 때처럼 능숙하게 방송을 이끄는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내 속은 처음 보는 사람앞에서 잔뜩 조심스러운 상태였다. 그런 겉과속의 어긋남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 시절 다른 방송원들의 합방 풍경도 잠깐 되짚어보아야겠다. 어떤 이들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마치 오래 알고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트고 웃음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 재간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심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 둘은 그런 재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였으니, 그날의 심심한 합방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 둘이 만나면 흔히 둘중 하나가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법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억지스러운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은채 그대로 시간이 흘러버렸던것이다. 이런 모습을 두고 후날 누군가는 낯가림 두사람의 만남치고는 지나치게 정직한 만남이였다고 평하였다.
그날 밤 나는 방송을 끄고 여느 때처럼 다음 일과로 넘어갔다. 그날 저녁에도 따로 준비할 내용물가 있었으므로, 나는 곧바로 그 준비에 매달렸다. 블루라는 이름은 그 바쁜 하루의 한 귀퉁이에 짧게 머물렀다가 자연스럽게 다음 일로 밀려났다. 그날의 자세한 뒤이야기는 뒤에 다시 적을 자리가 있을것이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나는 그날의 침묵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웃음이 새여나온다. 력사에 남을 사변치고 이보다 더 조용한 사변이 또 있을가 싶은것이다. 총소리와 발자국소리만 요란하던 그 화면안에서, 정작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인색하리만치 드물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인색함이, 지나고보니 이 회고록의 첫장을 여는 열쇠였던 셈이다.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만일 그날 우리 둘중 누구 하나라도 조금 더 살갑게 말을 붙였더라면, 우리의 이야기는 어떤 모양으로 흘러갔을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이런 가정을 아무리 해보아도 답을 내주지 않는 법이다. 다만 그 낯가림투성이의 첫만남이 있었기에, 뒤이어 찾아올 나날들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빚어졌다는것만은 분명하다.
방송판이라는 곳은 원래 그러하다. 오늘 합방을 한 사람과 래일 다시 마주칠수도 있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수도 있다. 실제로 그 시절 나는 이런 낯선 합방을 한번 치르고는 다시는 그 상대와 마이크를 나누지 않은 일도 여럿 있었다. 그러니 블루와의 이 만남도 그렇게 한번으로 끝날 숱한 인연중 하나로 여겨졌다 한들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었다.
나는 그날의 합방을 그저 숱한 만남중의 하나로만 여기고 다음 일로 넘어갔다. 그것이 후날 몇해에 걸친 인연의 첫장이 되리라고는, 그때로서는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낯가림이야말로 오히려 다행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만일 그날 우리가 처음부터 살갑게 굴었다면, 오히려 그 뒤의 나날들이 지금처럼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것은 때로 이렇게 서투르고 더딘 걸음에서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법인가보다. 낯가림 두사람이 나눈 그 몇마디 안되는 말들이, 지금 와서 보면 그 어느 화려한 언변보다도 진솔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큰 인연일수록 그 시작도 거창하리라 짐작하지만, 내가 겪어본바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지나간 심심한 하루가, 뒤에 가서 가장 커다란 뜻을 품은 하루로 되새겨지는 일이 흔하였다. 그날의 《포트나이트》 합방도 그러한 하루중 하나였다. 아무도 그날을 력사의 한페지로 기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이 절을 맺으며 나는 그 시절의 나 자신에게 한마디 건네고싶은 마음이 든다. 그 침묵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 침묵이야말로 두사람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은 그렇게 미리 귀띔해주는 법이 없으니, 그 말을 전할 길은 이제 이렇게 적어두는것으로 대신할수밖에 없다. 낯가림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첫장을 넘기였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