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 배 그 》 듀 오

 

우주25(2018)년 시월 초, 밤바람이 제법 서늘해진무렵이였다. 낮에는 그런대로 볕이 들었으나 저녁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져 창문을 닫아걸어야 하였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좁은 방에서 콤퓨터 한대를앞에 놓고 살고있었다. 본체 팬 소리가 웅웅거리는 가운데 화면 불빛만이 방안을 밝히였다.

책상우에는 그새 새로 산 머리수화기와 마우스패드가 자리를 잡았고, 한쪽 구석에는 먹다 남은 곽밥 그릇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저녁을 그렇게 대충 때우고 방송을 켜는것이 그무렵 나의 하루 끝맺음이였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벌레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배경삼아 나는 매일 저녁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 며칠 전, 《트위치》 생방송에서 블루동지와 함께 얼결에 붙인 그 우스운 이름 하나가 대화창을 떠돌고있었다. 《우결》이라는 그 세 글자를 그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누가 장난삼아 지어부른 말이 이렇게까지 오래 불릴줄, 그때는 짐작조차 못하였다. 나는 그저 그 이름을 웃어넘기고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이 시월의 일을 말하자면 먼저 그무렵 방송가를 온통 휩쓸던 오락 하나를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배틀그라운드》, 줄여서 《배그》라 부르는 그 오락이였다. 백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행기에서 뛰여내려 외딴 섬에 흩어지고, 자기장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포위망이 시시각각 좁혀들어 마지막 한사람 혹은 한조만을 남기는 그런 오락이였다. 말하자면 매판마다 백명의 전사가 벌이는 작은 전쟁이였던 셈이다.

나는 이 오락을 그전부터 즐겨하고있었다. 총알 하나에 살고 죽는 그 살벌한 규칙이 묘하게 나의 승벽과 맞아떨어졌다. 이기면 화면에 《오늘 저녁은 치킨입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르는데, 그 우스운 문구 하나를 보자고 밤새 판을 돌리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였다.

블루동지도 그무렵 이 오락에 재미를 붙이고있었다. 며칠 전 《트위치》에서있었던 그 일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방송에 이따금 이름을 올리는 사이가 되여있었으나, 아직 정해진 약속같은것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블루동지가 방송 도중 넌즈시 이런 말을 흘렸다.

강지 님, 요즘 《배그》 자주 하세요? 오늘 저랑 한판 하실래요?》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여느때처럼 느긋하였다. 나는 마침 그날도 《배그》를 켜놓고있던 참이라 반가운 마음에 얼른 대답하였다.

《블루님, 안그래도 심심하던 참이였어요. 저도 지금 막 켰습니다. 대신 오늘은 제가 캐리할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는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허세였으나, 그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있었다.

그렇게 얼결에 시작된것이 그해 시월의 《배그》 듀오였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풀이 삼아 한두판 같이 해보자는 정도였을뿐, 그것이 몇달을 이어가는 정례합방으로 자리잡으리라고는 어느 쪽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이렇게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법인가보다.

첫판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나는 락하산에서 뛰여내리자마자 어디로 갈지를 두고 블루동지와 의견이 갈렸다. 둘 다 처음이라 손발이 맞을리가 없었다.

《블루님, 저기 학교로 가시지요. 총이 많이 나오는 자리에요.》 《강지 님, 거기는 사람이 몰려서 위험합니다. 저는 저 외딴 농장으로 가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한사람은 학교로, 한사람은 농장으로 제각각 락하하였다.

그 바람에 오락 초반부터 서로 떨어져 허둥지둥하는 꼴이 되였다. 나는 학교안에서 총 한자루도 못줍고 적에게 쫓기다가 어이없이 쓰러졌다. 화면에 《전사하였습니다》라는 글자가 뜨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학교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 블루님 어디 계세요, 저 죽었어요!》 대화창에는 순식간에 웃음 섞인 글들이 올라왔다. 《누나 성격 그대로네》, 《벌써 죽었대ㅋㅋ》 하는 말들이 겹쳐 올라왔다.

블루동지는 그 소리를 듣고 낮게 웃었다. 《강지 님, 그러게 제가 학교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목소리에 나무람보다는 웃음이 더 많이 섞여있었다.

그날 나는 결국 킬 하나 올리지 못하고 죽었지만, 블루동지는 홀로 세명을 처치하고 상위권까지 살아남았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는 그 특유의 웃음소리 섞인 말투였는데, 평소의 느긋한 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딴사람 같은 톤이였다.

대화창은 그 반전에 또 한번 뒤집혔다. 《저 형 뭐야 무섭다》, 《평소엔 순한데 총만 잡으면》 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나는 이미 죽은 몸으로 관전만 하면서도 그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 첫판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사실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밤 우리 둘 다 오락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마이크를 끄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것만은 뚜렷이 남아있다. 그것이 아마 그날의 진짜 알맹이였을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조금 앞선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그전부터 방송가 사람들과 어울려 여러명이 함께 《배그》를 하는 자리에 종종 끼여있었다. 블루동지와도 그런 자리에서 몇번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홍길동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나와 친남매 같은 궁합로 알려진 사이였는데, 스쿼드에 블루동지까지 함께 들어오면 대화창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시청자들은 그것을 두고 《우결》을 보는 과몰입 트수 모드로 전환된다고 우스개삼아 말하였다.

또 한사람, 김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도 있었다. 그는 극중에서 나의 옛 남자친구 역할을 자처하며 우리 사이에 삼각관계를 만드는 우스운 역을 도맡았다. 넷이서 스쿼드를 짜는 날이면 오락보다 그 안의 촌극이 더 재미있을 때가 많았다.

이야기가 옆길로 조금 새였다. 다시 그해 시월, 처음 둘이서만 판을 돌리던 그무렵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첫판의 그 실수를 겪고나서 나는 다음판부터는 블루동지의 뒤를 순순히 따라다니기로 하였다. 락하지점을 놓고 다투는 대신 그가 고른 자리에 나란히 내려섰다. 이상하게도 그러고나니 살아남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블루님, 오늘은 제가 뒤에 딱 붙어있을게요. 힐은 제가 챙길테니 앞장서세요.》 나는 그렇게 역할을 나누자고 제안하였다. 블루동지는 《네, 강지 님.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렇게 며칠, 몇번을 거듭하다보니 우리 사이에는 어느새 손발이 맞기 시작하였다. 그가 적진으로 뛰여들면 내가 뒤에서 힐과 탄약을 대주고, 내가 위기에 몰리면 그가 몸을 던져앞을 막아섰다. 그것은 그저 게임안의 역할분담일뿐이였으나, 지켜보는 사람들 눈에는 다른것으로 비치였던 모양이다.

《둘이 진짜 부부 같다》, 《저게 바로 손발 맞는다는것지》 하는 글들이 대화창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런 말을 볼 때마다 못이기는 척 대꾸하곤 하였다. 《에이, 이건 그냥 게임을 잘하기 위한 전략일뿐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말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다음판에서는 일부러 더 다정한 척 대사를 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이미 《우결》이라는 내용물의 씨앗이였던것이다.

오락 도중에는 이따금 엉뚱한 상황극도 벌어졌다. 낯선 적한테 쫓기던 우리는 다급한 김에 서로 딴 사람 행세를 하며 무전을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 즉흥의 장난들은 후날 편집을 거쳐 여러 이름을 얻었는데, 이를테면 《잘못된 만남》이나 《하하하 배린아, 또 속았구나!》 같은 제목의 영상으로 남기도 하였다.

그런 제목들을 지금 다시 보면 실로 낯이 뜨거워진다. 그때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사를 즉석에서 주고받았는지, 세세한 대목까지는 나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선명하다.

이런 즉흥의 촌극들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우리의 《배그》판은 더는 단순한 서바이벌게임이 아니게 되였다. 승패보다 그 안에서 오가는 말과 웃음이 알맹이였다. 즉흥 드라마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자리였다.

그무렵 나는 방송 도중 나도 모르게 목소리 어조를 낮추고 다듬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평소 같으면 거친 말이 튀여나올 상황에서도, 블루동지앞에서는 이상하게 그 말이 목구멍에서 멈추었다. 그 버릇이 후날 얼마나 심해질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며칠에 한번씩 하던 이 합방은 곧 정해진 시간이 있는것처럼 되여갔다. 저녁 방송을 켜놓고 있으면 대화창에 어김없이 《오늘도 《배그》 하나요》 묻는 글이 올라왔다. 나는 그 물음에 답하듯 자연스레 블루동지에게 말을 건네는것이 하루의 순서가 되였다.

지금 와서 헤아려보면 그해 시월부터 몇주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판을 돌렸던것 같다. 정확히 며칠에 한번, 몇시부터 몇시까지였는지는 이제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무슨 임무처럼 어김없이 지켜지던 시절이였다는것만은 분명하다.

그때 우리는 몰랐지만, 이 어김없는 되풀이가 곧 하나의 력사적 사변으로 자라날 씨앗이였다. 물론 이런 표현을 쓰면 우스울 정도로 거창하게 들린다는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러나 후날 이 《배그》 듀오가 그렇게까지 오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 첫판의 락하지점부터 훨씬 더 신중하게 골랐을것이다.

시청자 수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나 혼자 방송할 때보다 블루동지와 함께하는 날이면 언제나 배는 되였다. 대화창의속도가 따라 읽기 힘들만큼 빨라지는 날도 있었다.

어느 밤에는 오락에서 이겨 화면에 《오늘 저녁은 치킨입니다》라는 문구가 뜨자, 나는 마이크에 대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듯 큰소리로 웨치였다. 《여러분, 오늘의 전과를 보고합니다! 블루님과 저, 이 조가 최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블루동지는 그 옆에서 웃으며 《강지 님, 그런건 전과라고 안 합니다.》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래도 아랑곳 않고 한동안 그 말투를 우려먹었다. 이기는 날이면 늘 《전과를 보고합니다》 하고 웨치는것이 어느새 나만의 버릇으로 굳어졌다.

지는 날도 물론 많았다. 초반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판이 이길 때보다 오히려 많았다. 그러나 지고 나와도 우리는 마이크를 끄지 않고 서로 이번엔 뭐가 잘못되였는지를 두고 한참을 떠들었다.

《블루님, 아까 그 집안에 사람 있는것 왜 말을 안 해주었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강지 님. 그건 저도 억울합니다.》 그런 실없는 다툼조차 그때는 재미있기만 하였다.

대화창의 사람들은 우리가 높임말을 쓰는 그 자체를 두고도 이러쿵저러쿵하였다. 《둘이 높임말 쓰는것 왜케 설레냐》 하는 말이 오르내렸는데, 나는 그 말을 볼 때마다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뗐다.

그무렵 나에게는 악녀라는 오랜 친구가 하나 있었다. 후날 그 친구가 나에게, 《우결》 상대앞에서만 그렇게 곱게 말할게 아니라 자기앞에서도 좀 그렇게 말해달라고 볼멘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 불씨는 아마 이무렵부터 이미 지펴지고있었던것 같다.

《배그》 듀오가 거듭될수록 게임안에서만 머물던 이야기가 게임 밖으로도 번져나갔다. 다른 방송에 서로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요즘 강지님이랑 블루님 케미 미쳤다던데》 하는 말이 이 통로 저 통로를 돌아다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쪽 편집을 맡아주던 사람 하나가 이런 제안을 해왔다. 생방송에서 오간 그 재미있는 장면들을 따로 잘라 《유튜브》에 올려보면 어떻겠느냐는것이였다. 생방송을 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놓칠 장면들이 아깝다는 리유였다.

나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에이, 그냥 게임하는 영상인데 누가 보겠어요.》 그러나 그 편집영상들이 하나둘 올라가면서 반응은 내 예상을 훌쩍 뛰여넘었다.

생방송을 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그 영상을 찾아보고 답글을 달기 시작하였다. 《이 커플 뭐야, 실제로 사귀는것 아니냐》 하는 물음이 반농담반진담으로 달리였다. 나는 그 물음들에 일일이 답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 자체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여기서 한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가 그해 시월 벌인 그 《배그》판은 어디까지나 방송안에서의 놀이, 즉 하나의 내용물였을뿐이다. 화면 밖의 우리는 그저 함께 오락을 즐기는 방송원 동료 사이였다.

그러나 화면안에서 우리가 주고받은 그 높임말과 농담, 그 어설픈 다정함이 시청자들의 눈에는 이미 하나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후날 《우결》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자리잡게 될 그 내용물의 원형이였다. 다만 그때는 누구도 그것에 정식으로 이름을 붙이지 못한채, 그저 매일 저녁 락하산을 함께 타는것으로 하루하루를 채웠을뿐이다.

홍길동은 후날 이 시절을 두고 우스개삼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둘이 하는것 보면서 나는 이미 다음 이야기가 뻔히 보였다니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럴리가 있느냐고 손을 내저었지만, 속으로는 그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김박사도 그무렵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웃으며 자기 역할을 자랑스러워하였다. 《내가 그때 삼각관계 만들어준 덕에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진거 아닙니까.》 실없는 농담이였지만, 그 농담 하나에도 그 시절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면서 나는 그해 시월의 밤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본다. 정확히 몇번을 함께 락하하였는지, 몇번을 이기고 몇번을 졌는지, 그런 수자는 이제 나에게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 밤마다 창밖 벌레소리를 배경으로 마이크에 대고 웃고 다투던 그 목소리들만은 지금도 뚜렷하다.

력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소한 오락 한판까지 기록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큰 사변이란 언제나 이런 사소한 되풀이속에서 조용히 몸을 키우는 법이다. 백명이 뛰여내리는 그 작은 전장 하나가, 후날 이토록 큰 이야기의 첫 장이 될줄 그 누가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그 시월이 다 가기 전, 블루동지는 나에게 뜻밖의 물음 하나를 준비하고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였는지는 다음 자리에서 마저 이야기하기로 한다. 다만 그 물음이 나오기까지, 이 《배그》 듀오의 밤들이 조용히 다리를 놓고있었다는것만은 여기 적어두고싶다.

그날 밤도 우리는 몇판을 더 돌리고서야 방송을 마쳤다. 마지막 판에서 우리는 나란히 살아남아 그 우스운 문구, 《오늘 저녁은 치킨입니다》를 함께 보았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웃으며 말하였다. 《블루님, 이러다 우리 진짜 소문나겠어요.》

블루동지는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다가,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뭐, 나쁠거 있습니까.》 그 짧은 대답 하나가 그날 밤 내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방송을 끄고 나서 나는 한참을 그 말을 곱씹었다. 나쁠것 없다는 그 심상한 한마디가,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둘이 앞으로 몇해를 함께 걸어갈 그 긴 길의 첫 리정표였던 셈이다. 그때는 그것을 그저 우스개로만 들었다.

창문을 여니 늦가을 밤공기가 훅 끼쳐들어왔다. 나는 그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오늘 하루도 이렇게 즐겁게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오락 한판, 농담 한마디가 이렇게 사람의 하루를 채워줄수 있다는것이 새삼 신기하였다.

지금 이 회고록을 쓰며 헤아려보면, 그해 시월의 《배그》 듀오는 그저 오락이 아니였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씩 발을 맞추어가는 시간이였고, 후날 《우결》이라 불리게 될 그 긴 이야기의 첫 훈련이였다. 훈련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릴수도 있겠으나, 무엇이든 처음은 다 그렇게 서투르고 조심스러운 법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서투른 락하산질이 몇해 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로 자라나리라는것을. 다만 그 가을밤, 좁은 방안에서 나는 그저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것, 그리고 그 옆에 블루동지가 있다는것, 그 두가지에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었을뿐이다.

우주25(2018)년 시월의 그 밤들을 나는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자기장이 좁혀들던 그 화면 속 작은 섬처럼, 우리 둘 사이의 거리도 그렇게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만큼 천천히 좁혀지고있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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