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 박 사
그해 동지달 초입은 유난히도 바람이 매웠다. 창밖 은행나무는 잎을 거의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흔들리고있었으며, 저녁이 되면 유리창에 성에가 뽀얗게 서리는 날이 잦아졌다. 나는 방송실 의자에 앉아 두손을 비비며 콤퓨터가 켜지기를 기다렸는데, 본체의 랭각기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그런 밤이였다. 책상 한켠에는 식어가는 랭수 대신 뜨거운 차 한잔을 놓아두었으나, 방송이 시작되고나면 그 차마저 잊어버리고 마는것이 그무렵 나의 버릇이였다.
그무렵 우리 방송은 이미 여러 시청자들 사이에서 《ㅁㅇㅁㅇ》이라는 넉자와 함께 알려져있었다. 높임말 뒤에 숨은 다정함이 조금씩 새여나오는 모습을 시청자들이 즐겨보아준다는것을 나는 그제서야 어렴풋이 깨달아가고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내가 켠 방송이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날은 《배그》 스쿼드를 짜는 날이였다. 블루동지와 왓구홍길동이 먼저 방에 들어와있었고, 나는 마이크를 켜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하는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여느때처럼 차분하게 들려왔고, 왓구홍길동은 벌써부터 오늘은 치킨을 먹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그날은 넷째 자리가 하나 비여있었다. 왓구홍길동이 누군가를 부르겠다며 잠깐 기다리라 하였는데, 나는 그가 누구를 데려오려는지 미처 묻지 못하였다. 대화창에는 벌써 《네번째는 누구에요》 《오늘 특별손님인가》 하는 궁금증이 하나둘 올라오고있었다.
몇분 지나지 않아 로비에 낯선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김박사동지였다. 나는 그 이름을 보고 잠깐 멈칫하였는데,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라 반가운 마음과 낯선 마음이 함께 들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김박사동지라는 이름은 그날 처음 듣는것이 아니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는 이미 여러 방송원들 사이에서 익히 알려진 얼굴이였고, 왓구홍길동과는 오래전부터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고 들었다. 나 역시 어느 합방 자리에서 스치듯 그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으나, 그때는 서로 인사 몇마디만 주고받았을뿐 깊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였다.
그가 왜 《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였는지는 나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목소리만은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데가 있었으니, 걸걸하면서도 어딘가 능청스러운 억양이 특히 그러하였다.
아무튼 그날 왓구홍길동이 그를 데려온다고 하였을 때, 나는 그저 오랜만에 새 얼굴 아닌 새 목소리 하나 늘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기였다. 그것이 《우결》이라는 이야기안에 새로운 조연 하나를 들여놓는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날 밤의 방송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가리라 믿었고, 시간이 흘러 그 하루가 이렇게까지 자주 되새겨지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강지야, 오랜만이다.》 마이크가 켜지자마자 들려온 첫마디가 그것이였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머리수화기를 고쳐썼다.
그도 그럴것이, 그 자리에는 블루동지가 함께 있었고 서로 깍듯이 높임말을 쓰던 그무렵의 우리 사이에 갑자기 반말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끼여든것이다. 대화창은 그 몇마디만으로도 벌써 물음표로 가득 찼다.
《누구세요, 이 목소리는.》 누군가 채팅에 적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지님 아는사이인가봐요》하고 짐작을 적어놓았다. 또 어떤 이는 《설마 진짜 아는사이?》하며 반신반의하는 글을 남기였는데, 그 짧은 몇줄 사이에도 저마다의 상상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리며 김박사동지를 소개하였다.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오빠에요. 다들 놀라였지요.》 소개를 마치고 나서도 대화창의 물음표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블루동지는 그 순간 잠깐 말이 없었다. 머리수화기 너머로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을뿐, 그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화창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시청자들은 《블루님 표정 봐야하는데》 《목소리에서 이미 티난다》 《이거 긴장한거 맞죠》하는 식의 우스개를 쏟아냈는데, 나는 화면 저편의 반응을 보며 어쩐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박사동지는 그런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야, 근데 너 요즘 되게 유명하더라. 남자친구 생기였냐?》 그 물음에 나는 대답을 궁리하느라 잠깐 말을 고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그 말에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하였으나, 대화창은 이미 그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낚아채였다. 《남자친구라니》 《지금 옆에 계신분한테 물어봐야될듯》 《박사님이 사고쳤다》하는 감상글들이 빠르게 올라왔다.
블루동지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강지 님, 저분은 누구신지 소개를 좀 제대로 해주셔야 할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정중하였으나 어딘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있었다.
나는 그 말투가 어쩐지 우스워서 웃음이 났다.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오빠라니까요, 왜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
《정색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례의상 여쭤보는겁니다.》 블루동지의 그 대답에 김박사동지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끼여들었다. 《아이고, 이 친구 벌써 긴장하였네.》
짐짓 력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그 몇마디야말로 후날 여러날에 걸쳐 이어질 삼각의 서사가 그 첫 장을 연 순간이였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것을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오락이 시작되고 우리 넷은 자물쇠섬 어딘가에 함께 내렸다. 김박사동지는 착지하자마자 총 한자루를 주워들고는 《내가 이 구역 접수한다》며 호기롭게 나섰는데, 정작 얼마 못가 다른 팀의 총에 맞아 허무하게 쓰러지고말았다.
《아니, 이렇게 허무하게?》 그의 그 억울한 외침에 스쿼드 전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왓구홍길동은 관전화면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낄낄거렸고, 나 역시 마이크를 잡은채 한참을 웃었다.
죽고나서도 김박사동지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관전화면으로 나를 따라다니며 계속 훈수를 두었는데, 그 훈수 사이사이 《형수님, 조심하세요》하는 말을 슬쩍 끼워넣었다.
나는 그 호칭에 놀라 되물었다. 《형수님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나 김박사동지는 능청스럽게 대답을 피하며 《아니 그냥, 이제부터 그렇게 불러야 할것 같아서》하고 웃어넘기였다.
아무런 공식 발표도 없이 새 칭호 하나가 이렇게 슬쩍 던져진 한마디로 태여난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력사에는 기록되지 않을 사변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 짧은 한마디가 그날 이후 오래도록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으로 굳어지리라고는 그때는 짐작하지 못하였다.
블루동지는 그 호칭을 듣고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으나, 게임안에서는 어쩐지 여느 때보다 더 조심스럽고도 날카롭게 움직이고있었다. 상대 팀을 상대할 때마다 유난히 집중하는 기색이 마이크 너머로도 느껴졌고, 평소라면 가볍게 넘길 교전에도 한마디씩 진지하게 대응하였다.
왓구홍길동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놀려댔다. 《블루님, 오늘따라 왜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그 말에 블루동지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리였다.
둘째 판에서는 또 다른 소동이 벌어졌다. 건물을 뒤지던 중 김박사동지가 방한복 한벌을 주웠는데, 그는 그것을 굳이 나에게 건네주며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형수님, 이거 입으세요. 옛정을 생각해서 드리는겁니다.》
그 말을 들은 블루동지가 곧바로 끼여들었다. 《제가 드릴테니 그건 넣어두셔도 됩니다, 박사님.》 두 사람이 서로 방한복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그 모습에 나는 그저 웃음만 나왔고, 정작 나는 이미 다른 건물에서 주운 옷을 입고있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밝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왓구홍길동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럴줄 알았으면 나도 뭐 하나 주울걸》하고 뒤늦게 아쉬워하였는데, 그 너스레에 대화창은 또다시 웃음 표시로 가득 찼다.
그날의 판은 결국 우리 넷이 결승권까지 살아남는 좋은 결과로 끝났다. 후날 사가들이 이 한판을 어떻게 평가할는지는 알수 없으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우리에게는 그 한판의 생존이 곧 그날의 가장 큰 사변이였다.
방송을 마치고 나는 대화창 다시보기를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형수님》이라는 말과 《정색》이라는 말이 감상글 여기저기에서 되풀이되고있었고, 개중에는 벌써 김박사동지를 《전 남친》이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이 일이 그저 하루밤으로 끝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날밤 늦게 블루동지에게서 통화가 걸려왔다. 《강지 님, 오늘 그분 말씀 말인데요.》 그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형수님 소리 말씀이세요?》 내가 먼저 짚어 묻자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였다. 《네, 그것도 그렇고... 강지 님이 예전부터 아시던 분이라니 조금 놀랐습니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질투하는것이예요?》 장난삼아 던진 물음이였는데, 블루동지는 뜻밖에도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질투라기보다는... 그냥 좀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솔직한 대답에 나는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여느 때 같으면 웃음으로 넘길 자리였는데, 그날은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들렸다.
대화는 곧 다시 평소의 농담조로 돌아왔지만, 나는 통화를 끊은 뒤에도 그 짧은 침묵을 오래 곱씹었다. 방송이라는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속 사소한 결까지 건드려놓을줄은 그전까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 사이 날씨는 한층 더 매서워졌다. 창밖에는 어느새 첫눈이 성글게 흩날리기 시작하였고, 나는 방한복을 하나 더 껴입고서야 겨우 콤퓨터앞에 앉을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동안에도 대화창에서는 여전히 《형수님》이니 《전남친》이니 하는 말들이 잊혀지지 않고 되풀이되고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는 다시 넷이서 합방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박사동지는 한술 더 떠 아예 《전 남친》을 자처하고나섰다.
《야, 나 사실 이 자리에 있는게 좀 억울해. 내가 먼저 알았는데.》 그가 능청스럽게 늘어놓은 그 대사에 대화창은 또 한번 폭발하였다. 《전남친 등판》이라는 말이 순식간에 도배가 되였다.
블루동지는 그 말을 듣고 짧게 웃었으나, 그 웃음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박사님, 지나간 인연은 그만 놓아주셔야지요.》
그 한마디에 스쿼드 전체가 자지러졌다. 왓구홍길동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끈채 한참을 낄낄거렸다고 뒤에 고백하였다.
김박사동지는 그 대꾸에 짐짓 서러운 척 목소리를 떨며 대답하였다. 《아니 형씨,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면 나 진짜 웁니다.》 그러고는 정말로 훌쩍이는 시늉까지 곁들이니, 듣고있던 우리 셋은 도저히 진지한 얼굴을 유지할 재간이 없었다.
그 장면이 그대로 영상 제목이 되여 《울지마 김박사...》라는 이름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웃음이 절로 났는데, 정작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울린것인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영상이 올라간 뒤 반응은 뜨거웠다. 시청자들은 저마다 김박사동지를 위로하는 감상글을 달았는데, 그 위로랍시고 다는 말들이 하나같이 놀리는 말투여서 오히려 우스웠다. 《박사님 힘내세요》라는 감상글밑에는 어김없이 웃음 표시가 줄줄이 달려있었고, 《형수님은 이제 다른 남자꺼입니다》하는 짓궂은 대감상글까지 달렸다.
편집을 맡은 직원은 그무렵 감상글 수를 세여보고는 나에게 웃으며 이렇게 전하였다. 《강지 님, 이 영상 댓글의 절반이 박사님 놀리는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치 무슨 여론조사 결과라도 되는듯 새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우스운 일이였다.
짐짓 력사적 사변을 흉내내여 말하자면, 이날의 일로 우리 《우결》이라는 이야기에는 마침내 하나의 조연이 정식으로 등록된 셈이였다. 삼각관계라는것이 원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구성이였으나, 그것이 방송이라는 무대우에서 진짜 사람들의 웃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빚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였다.
그런데 이 삼각의 구도라는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옛이야기에서도 흔히 보던 낯익은 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 소설에서도 두 남자가 한 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견제하는 장면이 그 이야기의 재미를 돋우는 법이였으니, 우리가 그날 벌인 소동도 알고보면 그 오래된 틀을 방송이라는 새 그릇에 담아낸것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옛이야기속의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기는커녕 도리여 그 소동을 함께 즐기고있었다는것이다. 미움 없는 삼각관계라는것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나는 그때 처음 배웠다.
김박사동지는 그뒤로도 종종 우리 방송에 얼굴 아닌 목소리를 들이밀었다. 올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형수님》을 찾았고, 블루동지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옅은 한숨을 내쉬였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어중간한 자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실랑이 자체가 방송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것을 나는 어느새 깨달아가고있었다.
왓구홍길동은 그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며 은근히 불을 더 지피는 역할을 하였다. 《형님들 왜이러세요, 사이좋게 지내야죠》하면서도 정작 그 말투에는 장난기가 가득 묻어있었다.
그는 한번은 이런 말도 하였다. 《누나 나는..? 사실 귀여운 유명 유투버분과 《우결》 중입니다.》 스스로도 자기만의 《우결》이 있다고 능청스레 끼여드는 그 말에 스쿼드 전체가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되였다.
이렇듯 그무렵의 우리 방송은 어느 한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럿이 얽혀 만들어내는 하나의 커다란 극이 되여가고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새삼스럽고도 즐거웠으며, 매일 저녁 콤퓨터를 켤 때마다 오늘은 또 누가 무슨 대사를 던질가 궁금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김박사동지가 맡은 배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다. 그는 이따금 진지한 목소리로 옛일을 회상하는 척하다가도 이내 웃음으로 뒤집어엎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 완급조절이야말로 그를 훌륭한 조연으로 만들어준 재간이였다.
블루동지 또한 처음의 서투른 질투에서 점차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여유를 익혀갔다. 《박사님이 또 오였네요, 오늘은 또 무슨 하소연을 하시려나》하고 먼저 선수를 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김박사동지는 오히려 머쓱해하며 《야, 이제 네가 나보다 더 능글맞다》하고 항복선언을 하였다. 그 역전된 구도를 시청자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하였으며, 대화창에는 《박사님 밀린다》하는 말들이 줄지어 올라오군 하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것이 처음 자리를 잡을 때의 모양 그대로 굳어지는 법이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질투하던 사람이 여유를 얻고, 여유롭던 사람이 도리여 진지해지기도 하는것, 그것이 방송이든 삶이든 마찬가지였다.
방송 밖에서 마주친 김박사동지는 마이크앞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늘 사람 좋게 웃었고, 만나면 으례 지난 방송 이야기부터 꺼내며 서로의 근황을 묻곤 하였는데, 그 웃음소리만은 화면속에서 듣던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나는 매번 신기하게 여기였다.
그해 동지달의 그 며칠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유난히 웃음이 많았던 나날로 기억된다. 매일 저녁 방송을 켤 때마다 오늘은 또 어떤 실랑이가 벌어질가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 겨울은 따뜻하였다.
물론 그 며칠 사이에 오간 말들 가운데 얼마만큼이 진심이고 얼마만큼이 그저 방송을 위한 우스개였는지는 나로서도 다 가려낼 재간이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래 농담과 진심 사이 어디쯤에 걸쳐있는 법이니 말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것은, 김박사동지라는 이름이 그날 이후로 우리 이야기에서 빠질수 없는 한 조각이 되였다는 사실이다. 후날 그가 다시 등장할 때마다 시청자들은 어김없이 《전남친》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었고, 그 자신도 그 딱지를 마다하지 않고 즐겨 걸치였다. 심지어 그 딱지를 스스로 더 부풀려 걸치고 다니는 통에, 정작 그 배역을 지어낸것이 시청자들인지 그 자신인지 나중에는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였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 그가 우리 어머니앞에서까지 그 배역을 이어가며 점수를 따려 애쓰는 모습을 보이게 될줄은 그때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 이야기까지 여기서 다 풀어놓자면 너무 앞서가는것이 될것이니, 다만 그런 날이 후날 오게 된다는것만 이 자리에 적어두려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영상을 다시 돌려본다. 《울지마 김박사...》라는 제목 아래 세 사람이 서로 놀리고 놀림받으며 웃던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 겨울밤 방송실의 찬 공기와 콤퓨터 랭각기소리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는것 같다.
그때는 그것이 그저 하루밤의 우스개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우스개 하나가 실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사변의 씨앗이였다는것을, 나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였다.
며칠 뒤 우리는 또다시 넷이서 《배그》 스쿼드를 짰고, 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웃지못할 사변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는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한다.
이 페지를 닫으며 나는 다시금 그 겨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강지야, 오랜만이다》하던 그 첫마디와, 《질투는 아니고 신경이 쓰였다》던 블루동지의 그 서투른 고백과, 《누나 나도 《우결》 중입니다》하던 홍길동의 능청까지, 그 모든 목소리가 뒤섞여 그해 겨울을 이루었다.
지금 와서 헤아려보면 라이벌이라는것은 결국 미워할 상대가 아니라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또하나의 등장인물이였을뿐이다. 삼각관계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고 보면 무슨 대단한 사변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저 사람 좋은 오빠 하나가 짓궂은 장난을 걸어온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라이벌이라 하면 서로 밀어내고 다투는 사이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김박사동지가 있어 블루동지의 마음이 더 뚜렷이 드러났고, 그 뚜렷해진 마음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즐거움 또한 그만큼 깊어졌으니, 라이벌이라는 자리도 결국은 누군가의 진심을 비춰주는 거울 노릇을 하는것이였다.
그날의 그 콤퓨터 랭각기소리와 성에 낀 유리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박사동지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