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탄 약 프 로 포 즈
그해 시월 그믐의 소동이 가라앉을 즈음, 어느덧 동지달도 절반을 넘어서고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부쩍 매서워졌고, 창밖 가로수는 잎을 거의 다 떨구어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나는 방송실 의자에 파묻혀 콤퓨터 팬 소리를 들으며 그날 저녁 방송거리를 궁리하고있었다. 머리수화기를 목에 건채 식어가는 차 한잔을앞에 놓고, 나는 문득 이 겨울이 참으로 빨리도 왔다는 생각을 하였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믹스 커피 봉지와 마우스패드가 뒤엉켜있었고, 화면 옆 작은 고성기에서는 방송을 켤 때마다 나는 낮은 신호음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머리수화기 줄을 풀어 정리하고, 오늘 쓸 대화창을 새로 띄워놓았다.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였다.
그무렵 나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고 느끼고있었다. 시월 그믐날의 그 영상 하나로 대화창은 아직도 들썩이고있었고, 거기에 닷새전 김박사동지가 새로 얽혀들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복잡해져있었다. 나는 그 어수선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란스러움속에서 하루하루가 새롭게 채워지는 재미를 느끼고있었다.
우주25(2018)년 동지달 초입, 나는 그날도 《배그》 방송을 하려고 저녁 여덟시가 넘어서 콤퓨터앞에 자리를 잡았다. 화면에는 이미 왓구홍길동이 로비에 들어와있다는 표시가 떠있었고, 곧이어 블루동지의 이름도 떠올랐다. 나는 머리수화기를 고쳐 쓰며 마이크를 켰다.
《강지 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이크 저편에서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답하였다. 《네, 오늘은 어디 내려볼가요.》 그날은 유난히 방이 빨리 꽉 찼다.
스쿼드에는 왓구홍길동과 김박사동지도 함께하였다. 김박사동지는 닷새전 이 자리에 처음 얽혀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스쳐가는 손님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우리 방송의 단골 얼굴이 되여있었다. 그가 마이크를 켜자마자 대뜸 이런 말부터 던졌다. 《오늘은 또 무슨 일 안 만드실거죠, 형수님?》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오늘은 그저 조용히 오락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다짐이였는지는, 그날밤이 다 가기도 전에 스스로 깨닫게 되였다.
처음 두어판은 정말로 평온하였다. 우리는 자물쇠섬 언저리에 내려 남새밭을 뒤지듯 건물을 뒤졌고, 총 한자루 변변히 줍지 못한채 초반에 허무하게 죽은 판도 있었다. 블루동지는 죽고나서도 관전화면으로 나를 지켜보며 훈수를 두었는데, 그 훈수가 번번이 어긋나서 오히려 내 발목을 잡았다.
《블루님, 훈수 좀 그만하세요, 자꾸 틀리잖아요.》 내가 그렇게 쏘아붙이자 블루동지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였다고 발뺌하였다. 왓구홍길동이 옆에서 그 말을 받아 블루동지의 정찰 실력이 원래 그렇다고 놀려댔다. 대화창에는 그 훈수 장면을 두고 벌써 웃음 섞인 반응들이 올라오고있었다.
세번째 판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오락이 제대로 풀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네사람은 군용지대 인근에서 물자를 넉넉히 갖추었고, 자기장이 좁혀들수록 살아남은 스쿼드의 수도 하나둘 줄어들었다. 나는 그 긴장감속에서 오랜만에 손끝이 저릿해지는 재미를 느끼고있었다.
스쿼드 통화창에서는 왓구홍길동이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았다. 그는 아까부터 자기가 주운 방탄복이 얼마나 질이 좋은지 자랑을 늘어놓았고, 김박사동지는 그 말을 들은체만체하며 건물 지붕우에서 총성만 골라내고있었다. 그 왁자한 통화창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랜만에 넷이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잠깐 옆길로 새서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 있다. 그보다 며칠 앞서, 블루동지는 방송 중에 문득 자신이 오락에서 탄약 정리하는 버릇이 유별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총알 하나도 종류별로 가지런히 나누어 넣어두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는데, 그때 나는 그 말을 그저 흘려들었을뿐 별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소한 버릇이 며칠뒤 이렇게 큰 이야기거리로 돌아올줄은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다.
다시 그날밤으로 돌아가면, 세번째 판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기장은 한 마을 어귀 정도의 좁은 구역으로 줄어들어있었다. 남은 스쿼드는 우리를 포함하여 셋뿐이였고, 나는 탄약이 거의 다 떨어져 소총 한자루를 든채로 초조하게 엄폐물 뒤에 웅크리고있었다. 그 순간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마이크 너머로 다급하게 들려왔다.
《강지 님, 잠깐만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가 이르는대로 몸을 낮추어 옮겨갔다. 화면속에서 블루동지의 인물은 내 앞에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바닥에 늘어놓고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의 다음 한마디를 들었다.
《이거, 받아주실래요.》 그 말과 함께 그가 무엇을 어떻게 바닥에 벌여놓았는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뚜렷이 그려내지 못한다. 다만 화면 한쪽에 탄창인지 탄약상자인지 모를것들이 나란히 놓여있었고, 그 앞에 블루동지의 인물이 가만히 서있던 장면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을뿐이다. 나는 그 순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그저 웃음부터 터뜨리고 말았다.
《이게 뭐예요, 지금?》 내가 그렇게 묻자 블루동지는 마이크 저편에서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헛기침만 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이렇게 말하였다. 《그냥... 이런것도 있어야 할것 같아서요.》 그 대답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지금도 나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 짧은 순간을 지켜보던 왓구홍길동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방금 그거 뭐야, 프로포즈야?》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대화창은 삽시에 뒤집어졌다. 나는 얼떨결에 그저 웃으며 얼른 자리를 옮기자고 재촉하였으나, 그 짧은 장면은 이미 클립으로 잘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였다.
지금 이 회고록을 쓰면서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그날 그 장면이 무엇을 뜻하였는지 블루동지에게 제대로 캐물어본 일이 없다. 그가 정말로 무슨 뜻을 담아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그저 그 순간의 장난기에서 나온 우발적인 행동이였는지, 나는 아직도 다 알지 못한다. 다만 그날 이후로 이 장면이 우리 두사람 사이의 또하나의 전설이 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판은 결국 우리가 이기지 못하고 두번째 자리로 마쳤다. 마지막 교전에서 내가 그만 탄약이 다 떨어져 허둥대다가 먼저 쓰러졌고, 블루동지도 뒤이어 쓰러졌다. 왓구홍길동은 그 결과를 두고 우리가 탄약을 아까 그렇게 늘어놓느라 정작 싸울 탄약이 모자랐다며 두고두고 놀려댔다.
김박사동지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관전화면으로 그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돌려보았는지, 낄낄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형수님, 이건 진짜 영상 제목감인데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였다.
그러나 사람의 예감이란 때로 무섭도록 정확한 법이다. 방송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면을 잘라놓은 클립이 이곳저곳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날밤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어 콤퓨터를 다시 켜고 그 클립을 찾아보았다.
클립밑에 달린 반응들은 하나같이 호들갑스러웠다. 《이거 프로포즈 아니야?》, 《탄약으로 프로포즈하는 사람 처음 본다》, 《강지 님 표정 봐 ㅋㅋㅋ 완전 당황하였네》 하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는 그 글들을 읽어내려가며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이란 짧은 장면 하나에도 이렇게 온갖 사연을 붙여 즐기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이튿날 블루동지가 그 장면을 따로 편집하여 자기 방송에 영상을 올렸다.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또한번 헛웃음을 지을수밖에 없었다. 《강지 님이 배그에서 탄약 프로포즈 하였다고?! 어머머머머!!》 나는 그 제목을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며 도대체 누가 이런 제목을 생각해내는가 싶었다.
나는 곧바로 블루동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기요, 프로포즈는 제가 아니라 블루님이 한것 같은데요.》 몇분뒤 답이 왔다. 《아, 그런가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였나봐요.》 그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어두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이 회고록을 쓰는 나 자신도, 그날 블루동지가 정확히 어떤 물건을 어떤 모양으로 늘어놓았는지, 또 그것이 정말로 무엇을 본뜬 모양이였는지 다 기억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의 분위기와 그 뒤에 이어진 소동만이 뚜렷할뿐이다. 후날 이 일을 두고 자세히 캐물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도 블루동지도 그때마다 웃음으로 얼버무릴뿐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소동에 기름을 부은것은 다름아닌 다른 시청자들의 우스개였다. 그무렵 어디선가부터 《배그 운영자도 축하하는 과몰입 《우결》 커플》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나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로 오락회사에서 무슨 축하 문구라도 띄운줄 알고 놀랐으나, 알고보니 그것은 순전히 시청자들이 지어낸 우스개였다.
오락이 끝날 때마다 화면에 뜨는 그 익숙한 승전 문구를 두고, 몇몇 시청자들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저것이 마치 우리 두사람의 인연을 오락회사가 인정해준 증표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 억지스러운 론리에 기가 막히면서도 웃음이 났다. 사람이 재미있자고 마음먹으면 이렇게까지 엮어낼수 있는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대화창에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이것도 《배그》 운영자가 축하해준거다》 하는 말이 류행처럼 번지였다. 나는 그 말이 나올 때마다 그저 실없이 웃으며 넘기였지만, 속으로는 이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을 지녔다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클립은 어느새 우리 세계에서 무슨 국보급 사료 취급을 받았다. 누군가는 그 몇초짜리 장면을 몇번이고 느리게 돌려보며 손끝의 각도까지 분석하였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우결사료편찬위원회》라는 우스개 이름까지 지어붙였다. 나는 그런 호들갑을 지켜보며 겨우 오락 한판의 소동이 이렇게까지 거창해질수 있는가 하고 어이없어하면서도 은근히 즐거웠다.
어느 시청자는 그 클립을 두고 마치 오랜 조약문을 해석하듯 정지화면을 걸어놓고 한줄 한줄 주석을 달았고, 또 어느 시청자는 그 장면의 배경음까지 따로 추려내여 붙여놓았다. 나는 그것을 보며 겨우 몇초짜리 오락 장면 하나가 이렇게까지 정밀한 고증의 대상이 될줄은 미처 몰랐다고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이야기가 이렇게 커지자 나는 슬며시 걱정도 되였다. 《배그》 안에서 벌어진 일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면, 혹시 오락회사쪽에서 우리를 이상하게 여기지나 않을가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 소동은 그저 우리 두 방송의 훈훈한 우스개거리로 남았을뿐이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 영상의 시청회수는 꾸준히 불어났다. 감상글난에는 갖가지 추측이 쏟아졌다. 어떤 이는 블루동지가 미리 대본을 짜서 그렇게 하였을것이라 주장하였고, 또 어떤 이는 순전히 우발적인 장난이였을것이라 반박하였다.
나는 그 론쟁을 지켜보며 굳이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나조차도 다 알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상상으로 이야기를 채워가는 그 모습이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무렵 나는 방송을 마치고나면 종종 그날의 장면을 다시 돌려보군하였다. 화면속의 나는 영문도 모른채 웃고있었고, 블루동지는 무언가를 늘어놓은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 짧은 몇초의 장면이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줄은, 그날밤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 일을 두고 짐짓 력사적인 사변처럼 말하자면, 후날 《우결》의 년대기를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날을 두고 《탄약동맹의 날》이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조약도 아니고 겨우 게임 속 탄약 몇발을 두고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인다는것이 스스로도 우스웠으나, 그때 우리에게는 그만큼이나 대단한 사변으로 여겨졌던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또 한가지 곁이야기를 하지 않을수 없다. 사실 블루동지는 평소에도 물건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버릇이 남달랐다. 그가 자기 방을 촬영한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책상우에는 무엇 하나 흐트러진것 없이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그런 그가 게임속에서까지 탄약을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해두는 버릇을 보였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였다. 다만 그 정리벽이 하필 그 순간, 하필 내 앞에서 발휘되여 이렇게 큰 소동으로 번질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을뿐이다.
왓구홍길동은 이 일을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았다. 그는 그 뒤로도 스쿼드 방송을 할 때마다 총알 하나만 주워도 짐짓 진지한 얼굴로 《이거 프로포즈용으로 챙겨둘가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는 그 장난이 싫지 않았다.
김박사동지도 그뒤로 나를 볼 때마다 짐짓 정중한 얼굴로 《형수님, 지난번 프로포즈는 결국 어떻게 되였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군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슨 프로포즈냐고 눈을 흘기였지만, 그 능청스러운 인사가 오히려 그무렵 우리 스쿼드의 흥겨운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무렵에는 다른 성원들도 이 소동을 전해듣고 한마디씩 보태였다. 누군가는 나를 볼 때마다 짐짓 정색한 얼굴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고, 누군가는 그저 웃음으로 화답할뿐이였다. 나는 그런 반응들을 마주할 때마다 겸연쩍은 웃음으로 넘길뿐 달리 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 며칠 사이 나는 어머니에게서도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대뜸 요즘 인터네트에서 내 이름과 함께 프로포즈라는 말이 같이 돈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방송에서 장난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어머니는 미심쩍은듯 몇번이나 되물었다.
《그래도 이럴 때 좋은 사람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두어라.》 어머니의 그 한마디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뒤로도 종종 그 말을 우스개삼아 꺼내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저 못 들은척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블루동지는 이 소동이 커지자 오히려 담담한 얼굴이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큰일이 될줄 알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요, 그냥 그 순간에 그러고싶었어요.》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큰 계획없이 그저 그 순간의 마음을 따랐을 때, 오히려 그것이 더 오래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나는 그뒤로도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계산되지 않은것들이 때로 가장 큰 이야기가 된다는것을 새삼 되새기군하였다.
그무렵 우리 두 방송의 감상글난에는 이 일을 놓고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 장면이야말로 그해의 《우결》 명장면이라 추켜세웠고, 어떤 사람은 그저 우연한 해프닝일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였다. 나는 그 모든 반응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우리가 만들어낸 이 짧은 장난이 이렇게까지 다양한 풀이를 낳는다는것이 새삼 신기하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 소동이 지나가고서야 비로소 그날의 장면이 왜 그렇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았는지 조금은 헤아릴수 있게 되였다. 사람들은 오락이라는 가상의 공간안에서마저 진짜 같은 정을 찾고싶어하였고, 우리 두사람은 그 바람에 마침 딱 들어맞는 장면을 아무 생각없이 만들어낸 셈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배그》 방송을 할 때마다 습관처럼 인벤토리의 탄약칸을 한번 더 살펴보게 되였다. 혹시라도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가 하는 우스운 경계심때문이였다. 블루동지는 그런 나를 보며 뭘 그렇게 신경쓰냐고 놀렸지만, 나는 한번 데인 사람의 습성이라며 웃어넘기였다.
이 일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른 자리에서 함께 나들이를 하게 되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 가서 따로 하기로 한다. 다만 이 절을 마치기전에 한가지 더 적어두고싶은것이 있다. 그것은 이 소동이 지나가고도 오래도록, 시청자들 사이에서 《탄약》이라는 말만 나오면 자연스레 이날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누군가 《배그》 이야기를 하다가 탄약을 언급하면 저도모르게 그날밤의 장면이 떠오른다. 화면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그 알수없는 물건들과, 영문도 모른채 웃음부터 터뜨리던 그날의 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게 사소한 낱말 하나에도 옛일을 통째로 불러오는 힘을 지닌 모양이다.
후날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우결》 초창기의 대표적인 명장면으로 꼽게 될줄은, 그날 그 순간에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저 그날밤 오락 한판을 지고, 웃음 섞인 소동 하나를 겪었을뿐이라 여기였는데, 그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될줄은 몰랐다.
지금 이 회고록을 써내려가면서 나는 다시한번 생각한다. 정작 그 일을 벌인 블루동지도, 그 일을 겪은 나도, 그날 무슨 일이 정확히 어떻게 벌어졌는지 다 설명하지 못하는데, 세상은 그 빈틈을 저마다의 상상으로 채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어쩌면 이야기라는것은 언제나 이렇게, 당사자도 다 알지 못하는 빈자리를 남에게 내어줌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는것인지도 모른다.
그해 겨울, 찬바람이 부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그 소동을 새삼 떠올렸다. 나무잎도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사이로 가로등 불빛만이 외로이 비치고있었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문득, 이 하찮아보이는 《배그》 속 소동 하나가 우리 두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풍성하게 채워주었는지 새삼 헤아려보았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무렵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크고작은 이야기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주는 사이가 되여있었다. 대본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저 그 순간순간의 장난과 웃음이 쌓여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이루어가고있었던것이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드문 인연인지, 그때는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 절을 마치며 나는 다시한번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아직도 그날 블루동지가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늘어놓았는지, 그것이 정말로 프로포즈라 부를만한것이였는지 다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의 웃음소리와 그뒤에 이어진 숱한 놀림과 애정어린 소동들만이, 지금도 뚜렷하게 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있을뿐이다.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고, 우리의 이야기도 그와 함께 한걸음씩 더 깊어져갔다. 다음에 있을 나들이는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안겨줄지, 그때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채 그저 그날밤의 웃음을 곱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