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 년 운 세
우주26(2019)년의 첫 아침은 여느 해보다 유난히 조용하게 밝았다. 밤사이 눈이 소리없이 내려 창밖 골목은 하얗게 덮이였고, 지붕과 담장우에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방안에서는 콤퓨터 본체의 랭각기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리고있었고, 그 소리조차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새로 넘긴 달력의 첫 장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난해 겨울 첫 애호가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의 설레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처음으로 화면 밖에서 마주한 얼굴들, 서투르게 건넨 인사말, 손끝에 남아있던 그 온기가 지금도 뚜렷하였다. 그 자리에서 만난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면 어느새 해가 바뀌여있었다는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방구석에는 지난해 시청자들이 보내온 선물꾸레미가 아직 다 풀리지 않은채로 쌓여있었다. 나는 그 꾸레미들을 볼 때마다 그해 한해를 어떻게 채워왔는지 새삼 돌아보게 되였다. 창밖 나무가지에는 눈이 얹혀 가지끝이 새하얗게 휘여있었고, 골목 저편에서는 이따금 눈치우는 삽소리가 들려왔다.
새해가 밝으면 으례 그해에 무엇을 할것인가를 궁리하는것이 나의 오랜 버릇이였다. 방송도 례외는 아니어서, 정월이면 그해 첫 내용물를 무엇으로 열것인가를 며칠이고 골똘히 생각하군 하였다. 시청자들에게 새해 첫 인사를 어떤 얼굴로 건넬것인가는 해마다 나를 조바심나게 만드는 숙제였다.
그해에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머리속으로 이런저런 기획을 굴려보았으나 어느것 하나 손에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수첩에 몇글자 적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하며 밤을 새운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블루동지에게서 새해인사 쪽지가 왔다.
《강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화면에 뜬 그 짧은 글자를 보며 나는 문득 웃음이 나왔다. 높임말을 꼬박꼬박 붙이는 그 태가 여전하였기때문이다. 그 반듯한 문장 하나에서도 블루동지다운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나도 지지 않고 답을 보냈다. 《블루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는 우리 뭘 해볼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글자가 떴다. 《신수 한번 봐볼가요?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화면속의 그 여섯 글자가 그날따라 유난히 반갑게 느껴졌다.
신수라는 그 한마디에 나는 곧바로 마음이 동하였다. 어쩐지 새해에 어울리는, 그러면서도 우리 둘이 함께 웃을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신수보기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서 말하지 않을수 없는것이 있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새해 첫머리가 되면 한해의 운수를 미리 가늠해보는 풍속을 지녀왔다. 정월이 오면 이 땅의 사람들은 토정비결을 펼쳐 신수를 보고, 혹은 마을 어귀 점집을 찾아가 대주의 한해 운수를 묻군 하였다. 흉년이 들지 몰라, 혼사가 이루어질지 몰라, 사람들은 그 한해의 운수를 알고싶어 조바심을 내였다.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새해 첫 운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것은 실로 오랜 래력을 가진 일이였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진 오늘에도 새해 첫날이면 신문마다 그해의 운세면을 싣는것을 보면, 이 풍속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새삼 느껴진다. 그러니 우리가 콤퓨터 화면앞에 마주앉아 신수를 본다 한들 그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였던 셈이다.
녯적에는 정월 초하루 새벽에 처음 듣는 소리로 그해 운수를 점치는 청참이라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까치소리를 들으면 길하다 하고 까마귀소리를 들으면 언짢다 하였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신수앞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가 콤퓨터 화면에서 기다리던 그 몇초의 정적도 결국은 같은 마음에서 나온것이 아니였을가 생각한다.
다만 그 방식이 붓과 책 대신 마이크와 카메라로 바뀌였을 따름이다. 옛적 사람들이 점쟁이앞에 다소곳이 앉았듯, 우리는 콤퓨터 화면앞에 마주앉아 서로의 생년월일을 불러주었다. 나는 그것을 우리 세대나름의 세시풍속이라 불러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리는 그해 신수, 그중에서도 남들이 가장 궁금해할 련애운을 점쳐보는 내용물를 함께 찍기로 뜻을 모았다. 날자는 1월 11일로 정해지였다. 그날은 마침 서로의 방송 일정이 겹치지 않는 드문 날이기도 하였다.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냈는지는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며칠 사이 서로의 쪽지창에 《신수》라는 두 글자가 여러번 오간것만은 뚜렷이 남아있다. 그 두 글자를 주고받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들뜨는것을 느꼈다.
촬영을 앞둔 며칠 동안 나는 무엇으로 신수를 볼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였다. 오래된 만세력을 뒤적여도 보고, 여기저기 떠도는 신년운세 페지도 여러개 들여다보았다. 어느것은 지나치게 복잡하였고, 어느것은 너무 심심하여 방송에 담기에는 맥이 빠졌다.
결국은 생년월일을 넣으면 그해 애정운을 풀이해주는 간단한 프로그람 하나를 고르는것으로 낙착되였다. 복잡한 사주풀이보다야 둘이 웃고 떠들기에는 그편이 나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것을 두고 서로 놀리고 웃을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1월 11일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겨울치고는 드물게 볕이 좋았던 그날,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방을 정돈하고 조명을 손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볕이 책상우에 앉은 먼지까지 뚜렷이 비추어, 나는 몇번이고 손걸레로 화면과 마이크를 닦아냈다.
마이크 위치를 다시 잡고 대화창이 잘 보이도록 두번째 화면를 켰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나는 통화프로그람을 열어 블루동지에게 통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그 몇초가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신호음이 몇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련결되였다. 《강지 님, 준비 다 되였습니까.》 하는 그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고성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나는 록화단추를 누르며 대답하였다. 《네, 다 되였습니다. 블루 님 먼저 생년월일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저편에서 잠시 종이 넘기는 소리 같은것이 들려왔다.
블루동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자신의 생년월일을 불러주었다. 나는 그것을 화면의 빈칸에 한글자 한글자 입력하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화면 이편에서는 보이지 않을 표정이였지만, 나는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무슨 큰 점괘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 이제 결과가 나옵니다.》 화면이 뜨기를 기다리는 몇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침묵속에서 나는 어쩐지 손끝이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통화너머로도 블루동지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신년운세 페지는 화면 한복판에 붉은 글자로 큼직하게 결과를 띄우는, 요란하달것도 없는 수수한 생김새였다. 동그라미 표시가 몇초 빙글빙글 돌다 사라지면 그 자리에 풀이글이 나타나는 식이였는데, 그 몇초의 깜빡임이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마치 무슨 대단한 통지문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세를 고쳐앉았다.
이윽고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음... 올해 애정운이 나쁘지 않다고 나오네요.》 하고 내가 읽어내려가자 블루동지가 대뜸 웃음을 터뜨리였다. 《그거 저한테 좋다는 겁니까, 강지 님한테 좋다는 겁니까.》 그 말투에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웃고 말았다. 《그러게요. 이게 누구 신수인지 헷갈리네요.》 그 대답에 블루동지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고스란히 록음되였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나도 생년월일을 불러주었고, 블루동지가 그것을 받아적어 결과창을 눌렀다. 그 잠깐 사이 나는 괜히 화면 저편의 대화창을 흘끔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강지 님은... 올해 누군가와 인연이 깊어질 운이라고 나오는데요.》 블루동지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이거 완전 저 아닙니까.》 짐짓 능청스러운 그 말투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에이, 그건 블루 님 생각이고요.》 나는 짐짓 새침하게 대꾸하였으나 속으로는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고있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그 짧은 대화가 록화되는 내내 이어졌다.
블루동지는 평소에는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이 느긋한 사람이였으나, 그날따라 자기 결과를 놓고 짐짓 당황한듯 《아, 이거 뭐카는데, 진짜로.》하고 사투리 섞인 말을 흘렸다. 나는 그 말투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짚어냈다. 《어, 방금 사투리 나왔지요?》 블루동지는 허둥지둥 《아닙니다, 아닙니다.》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리였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신수를 번갈아 읽어주며 한시간 남짓을 웃고 떠들었다. 화면 저편의 대화창은 그 사이 쉴새없이 올라오는 글자들로 가득찼다. 나는 록화를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그 글자들을 곁눈으로 살피였다.
《이거 완전 신수가 아니라 프로포즈 아니냐》, 《올해도 저 둘이 심상치 않다》는 감상글들이 실시간으로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글자들을 곁눈으로 읽으며 웃음을 삼켜야 하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그렇게 빠르고 뜨거울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대화창에는 《올해 신수 못믿겠으면 나랑 바꾸자》느니 《저 결과 저도 좀 봐주세요》느니 하는 우스개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그중에는 《두분 이러다 진짜 어떻게 되는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떠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감상글들을 하나하나 다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올라오는것을 보며 그저 웃음이 났다.
록화를 마친 뒤 블루동지가 물었다. 《강지 님, 근데 이거 진짜 믿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하였다. 《반은 믿고 반은 안 믿습니다. 근데 오늘 나온 결과는... 왠지 믿고싶네요.》 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조금 낯이 간지러웠다.
그 말에 블루동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 웃음소리가 통화너머로도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던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것을 말해주는듯하였다.
편집을 맡은 직원에게 그날 록음한 파일을 넘기며 나는 몇번이고 당부하였다. 《이 대목은 자막을 좀 크게 넣어주세요, 재미있는 부분이라서.》 직원은 알겠다고 하면서도 대체 무슨 대목이냐며 궁금해하였다.
며칠 뒤 편집이 끝난 영상을 미리 확인하던 직원이 메신저로 한마디를 보내왔다. 《이거 저도 보다가 웃기였습니다. 두분 케미가 진짜...》 나는 그 말에 그저 웃어넘기였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해 겨울 그 방에는 나 말고도 편집과 자막을 맡아준 직원 한사람이 늘 함께였다. 그이는 밤늦도록 화면앞에 붙어앉아 대화창 반응 하나하나를 캡처해가며 어느 대목이 웃음을 사는지 꼼꼼히 기록해두는 사람이였다. 그 조용한 손끝의 수고가 없었더라면 그날의 웃음도 이렇게 오래 남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조그마한 신년운세 영상 하나가 후날 우리 사이에서 해마다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례로 굳어질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저 새해를 맞아 가볍게 웃고 넘길 내용물 하나라고만 여기였을뿐이다.
짐짓 력사적인 어투를 빌려 말하자면, 그 정월의 화면 하나는 실로 《우결》사에 있어 하나의 년례행사의 기원이 된 사변이라 이를만하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블루동지도 그런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날의 웃음에 열중하였을뿐이다.
그날의 록화가 특별히 거창한 일은 아니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한시간 남짓, 준비랄것도 마이크 위치를 바로잡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소해보이는 일이 두고두고 되새겨지는 법이니, 이 또한 그러하였다.
록화를 마친 그날 저녁, 나는 혼자 방에 앉아 그날 나눈 대화를 다시 들어보았다. 《올해 애정운이 나쁘지 않다》는 그 한마디가 새삼 다르게 들렸다. 록음파일속의 내 목소리는 그날의 나보다 조금 더 들떠있는것 같았다.
새해 첫 내용물로 무엇을 올릴가 고민하던 지난 며칠이 무색하게, 정작 그 답은 아주 가까운데 있었던 셈이다. 블루동지가 아니였다면 나는 아마 그해에도 다른 무엇을 궁리하며 며칠을 더 허비하였을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나니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영상이 올라간 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시청회수는 하루이틀 사이 빠르게 늘어났고, 감상글난에는 《내년에도 또 해주세요》라는 요청이 여럿 달리였다. 개중에는 그해 자신의 신수를 함께 봐달라는 우스개 섞인 감상글도 적지 않았다.
그 요청이 씨앗이 되여, 신수보기는 이후 몇해 동안 정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정례 내용물로 자리잡았다. 나는 이것을 우리 둘이 만들어낸 작은 세시풍속이라 부르고싶다. 해가 바뀔 때마다 그 내용물를 기다린다는 시청자들의 감상글을 볼 때마다 나는 새삼 마음이 뭉클해지군 하였다.
후날 스텔라이브를 차리고서도 나는 정월이면 성원들과 비슷한 자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칸나동지도, 유니동지도 저마다 새해 신수를 궁금해하며 카메라앞에 둘러앉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우주26(2019)년 그 정월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시초라는것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까지 그 흔적을 남기는 법인가보다.
세시풍속이라 하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 이름값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몇해동안 그 자리를 지키였다. 해마다 방식은 조금씩 달라졌으나, 새해 벽두에 함께 앉아 한해를 점쳐보는 그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은 내용물가 오래 살아남은 리유였을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내용물가 정확히 몇해까지 이어졌는지 셈해보지 않았다. 다만 그 시작이 우주26(2019)년 정월 십일일 하루였다는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 하루가 없었다면 그 뒤로 이어진 여러해의 신수보기도 없었을것이다.
지금은 스텔라이브라는 회사를 차리고 여러 성원들과 함께 새해맞이 방송을 꾸리는 처지가 되였지만, 그때는 그저 콤퓨터 두대와 마이크 하나로 새해를 맞이하는 소박한 시절이였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오히려 그 소박함이 그리워지군 한다.
그 소박함속에서도 우리는 그해의 운수를 진지하게, 또한 유쾌하게 점쳐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신수보기라는 오랜 풍속의 본디 뜻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니였을가 싶다. 화려한 장치도, 대단한 준비도 없이 그저 두사람의 목소리와 웃음만으로 채워진 시간이였다.
블루동지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그 신수 이야기를 꺼내군 하였다. 《강지 님, 그때 그 신수 기억나십니까. 저는 아직도 그거 믿습니다.》 그런 말을 할 때면 목소리에 옛일을 그리워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나는 그럴때마다 웃으며 대답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해는 확실히 나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블루동지도 따라 웃었다. 그 짧은 주고받음이 몇해가 지나도록 변하지 않았다는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그날의 화면을 다시 떠올려본다. 두대의 화면, 대화창을 가득 채우던 글자들, 그리고 통화너머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차례로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그 모든 장면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 웃음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있는것을 보면, 그날은 나에게도 결코 례사로운 하루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지나고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하루가 있다더니, 그날이 꼭 그러하였다.
새해 첫 내용물를 무엇으로 할가 고민하던 그 며칠의 시간은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로 짧았다. 정작 답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 사실을 그해 겨울에야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새해가 올때마다 신수보다 먼저 블루동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버릇이 생기였다. 이것이 신수보기라는 내용물가 나에게 남긴 진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화면 속 운세풀이보다 더 정확한 무엇인가가 그해 겨울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던 셈이다.
이듬해 겨울, 우리는 또 다른 내용물에서 서로 귀엽다는 말을 대놓고 주고받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 오는 페지에서 다시 하기로 하자. 지금 돌이켜보면 그 흐름은 이미 이 정월의 신수보기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는 분명히 말해둘수 있다. 그 모든 애정표현의 시작점을 굳이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그 정월의 신수보기를 꼽겠다. 거기서부터 우리 사이의 말투도, 표정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거창한 사변도, 대단한 결심도 없었다. 그저 새해 첫머리에 무료한 며칠을 보내던 두사람이 우연히 나눈 몇마디에서 시작된 일이였다. 그러나 그 우연이 후날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그때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력사라는것이 늘 그러하듯, 사소해보이는 시작이 두고두고 큰 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우리의 새해 신수보기도 그러하였다. 작은 웃음 하나가 몇해에 걸쳐 되풀이되는 풍경으로 자라난것을 보면 새삼 그 말이 옳다고 느껴진다.
나는 지금도 정월이 오면 그해 콤퓨터앞에 앉아있던 그날의 볕좋던 아침을 떠올린다. 창밖의 눈은 이미 오래전에 녹아 사라졌으나, 그날의 웃음소리만은 여태 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정월이 돌아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그 아침을 다시 꺼내본다.
우주26(2019)년 정월 십일일, 그 하루를 이렇게 길게 적어놓고 보니 스스로도 조금 겸연쩍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하루야말로 그해 우리 두사람의 첫 페지를 여는 문장이였다. 짧고 소박한 그 문장 하나가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냈는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신수보기라는 이름의 그 작은 사변은 《우결》사의 한 모퉁이에, 소리없이 그러나 뚜렷하게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그 문장 뒤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는지는, 뒤에 오는 페지들이 하나하나 증명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