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귀 엽 다 는 말
우주26(2019)년의 사월은 유난히 늦게 찾아온 봄이였다. 정월 내내 살을 에던 바람이 삼월을 넘기고도 좀체 누그러들지 않더니, 사월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창밖의 벚나무에 하나둘 꽃망울이 맺혔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방문을 닫아걸고 콤퓨터앞에 앉아있었는데, 화면의 푸른 빛과 본체의 랭각기소리만이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서 어렴풋이 봄냄새가 묻어났고,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며 문득 올해는 무언가 다를것 같다는 예감에 잠기였다.
그보다 석달 앞선 정월 열하루, 나는 블루동지와 함께 신년 신수를 보는 방송을 한 일이 있었다. 그해 나의 신수풀이 가운데는 애정운이 크게 트인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우스개로 웃어넘기였을뿐 그 말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지는 않았다. 화면 너머 블루동지도 그 대목을 읽으며 짐짓 능청스레 《강지 님, 올해 좋은 일 있으시려나봅니다》하고 놀렸을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그 점괘를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도록 대화창에는 이따금 《올해 애정운 트인다더니 진짜 그런것 아니냐》는 말이 올라왔고, 나는 그때마다 웃음으로 얼버무리군 하였다. 신수라는것이 원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려니 하고 흘려들었던 나였으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사이 그 뜬구름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가고있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사월 하순의 어느 저녁, 나는 편집을 맡은 직원과 다음 방송의 얼개를 짜고있었다. 사무실 창밖으로는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았고, 책상위에 놓인 콤퓨터 화면만이 홀로 밝았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제안을 하였다. 《강지 님, 이번엔 아예 대놓고 서로 귀엽다는 말을 시켜보는건 어떻습니까. 정월 신수도 있고 하니 명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였다. 그동안에도 방송 중에 어쩌다 귀엽다는 말이 오간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늘 우연히 튀여나온 말이였지 누가 시켜서 하는 말은 아니였다. 대놓고 요구한다는것이 어쩐지 낯간지럽게 느껴졌고,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편집자는 이미 신이 나있었다. 《마침 신수풀이도 있고, 요즘 채팅 반응도 좋으니 이참에 화끈하게 밀어붙여봅시다. 강지 님은 늘 이렇게 망설이시다가도 막상 하면 잘 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도 차츰 마음이 동하였다. 방송이라는것이 원래 시청자들의 반응을 먼저 헤아려야 하는 법이니, 마다할 리유가 없었다.
나는 곧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획을 전하였다. 《블루 님, 이번 방송에서 서로 귀엽다고 말해보라고 시키는 컨텐츠를 해볼가 하는데 어떻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몇초쯤 이어지는동안 나는 괜히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가 블루동지는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강지 님이 먼저 말씀하실수 있겠습니까.》 《그건 블루 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되받아쳤고, 우리는 전화통 너머로 함께 웃었다.
이미 그 웃음속에는 서로를 향한 은근한 자신감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여있었다. 우리 둘 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였으나, 속으로는 막상 그날이 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저마다 궁리하고있었을것이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나서도 나는 한동안 콤퓨터앞에 앉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방송 당일,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콤퓨터앞에 자리를 잡았다. 대화창은 이미 그날 방송의 예고편을 보고 몰려든 시청자들로 붐비고있었다. 《귀엽다고 말해!》라는 제목이 이미 예고에 걸려있었던 탓인지, 접속자 수는 여느 때보다 훨씬 많았다.
방송이 시작되자 나는 먼저 그날의 규칙을 설명하였다. 《오늘은 서로에게 귀엽다는 말을 시켜보는 방송입니다. 먼저 말하는 사람이 지는겁니다.》 대화창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온갖 반응으로 들끓었다. 개중에는 《드디여 올것이 왔다》는 반가움도 있었고, 《저러다 둘다 얼굴 빨개지겠다》는 걱정섞인 우스개도 있었다.
블루동지는 그 말을 듣고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지는것라니, 강지 님. 이거 무슨 대결도 아니고.》 《그래도 지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였는데, 그 표정을 화면 너머로 볼수 없는 블루동지는 그저 목소리만으로 내 진심을 헤아리려는듯 잠시 뜸을 들였다.
우리는 《배틀그라운드》를 함께 하며 틈틈이 그 화제를 꺼내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만 살피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 일쑤였다. 오락 중의 총소리와 발소리 사이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몇번이나 오갔고, 그때마다 나는 애꿎은 조준경만 만지작거렸다.
대화창은 그 어색함을 놓치지 않았다. 《둘다 왜 이렇게 눈치만 봅니까》, 《빨리 시작하세요》 하는 재촉이 빗발쳤고, 심지어 《이러다 방송 끝나겠다》는 성화까지 나왔다. 나는 그 재촉을 못이기는척 하며 슬며시 운을 떼였다.
《블루 님, 귀엽다고 한번 말해보시겠습니까.》 내 말에 블루동지는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대답하였다. 《강지 님이 먼저 하셔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요청도 강지 님이 먼저 하였으니.》 그 말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제가 먼저 요청하였으니 블루 님이 먼저 말씀하셔야지요.》 나는 지지 않고 되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에게 그 말을 미루며 실랑이를 벌였는데, 그 실랑이가 길어질수록 게임속 우리 인물는 애꿎게 적의 총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그 실랑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대화창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표시들이 줄지어 올라왔고, 몇몇 시청자는 후원까지 보내며 《누가 이기나 보자》, 《오늘안에 끝날것 같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 후원 목록을 흘끗 보며 못이기는척 다시 화제를 이어갔다.
결국 먼저 무너진것은 블루동지였다. 그는 머리수화기 너머로 짧게 숨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강지 님, 귀엽습니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듯도 하였다.
그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 대화창은 삽시에 뒤집혔다. ㅁㅇㅁㅇ이라는 넉자가 화면을 가득 메우다시피 하였고, 그 사이사이 후원 알림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나는 그 화면을 보며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깐 머리수화기 너머로 침묵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꾸하였다. 《귀엽기는요, 블루 님이야말로.》 그 말이 입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 스스로도 아차 싶었다.
그 대꾸에 블루동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그거, 저더러 귀엽다고 하신겁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는데, 그 당황한 모습이 오히려 대화창을 더욱 뒤흔들어놓았다.
시청자들은 이미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방금 강지 님도 사실상 귀엽다고 한거 아니냐》는 말이 대화창을 뒤덮었고, 나는 그 말을 부정할 도리가 없어 그저 웃을수밖에 없었다. 블루동지도 그 채팅을 함께 읽었는지 낄낄거리며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번 물꼬가 트이자 그날 방송에서는 비슷한 장면이 몇번이고 되풀이되였다. 시청자들이 《한번 더!》를 외치면 우리는 못이기는척 다시 그 말을 주고받았고, 그때마다 대화창은 어김없이 넉자로 뒤덮였다.
《블루 님, 다시 한번 말씀해보세요.》 《강지 님도 이번엔 먼저 하셔야 공평합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결국은 둘 다 그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는데, 게임속 순위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처음 합방을 시작하였을 때만 해도 서로를 부르는 말에서부터 깍듯한 높임말을 벗어나지 않았다. 《강지 님》, 《블루 님》 하는 그 부름말은 여러달이 지나도록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높임말의 격식속에서 귀엽다는 말 한마디를 꺼낸다는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였다. 높임말이란 본디 거리를 지키는 말인데, 그 거리를 지키면서도 다정함을 실어보내야 하였으니, 그 사이에서 오는 어색함과 설렘이 남달랐다. 나는 그무렵의 우리 둘을 떠올릴 때마다 얇은 얼음위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지난해 겨울, 어쩌다 튀여나온 그 말 한마디에 대화창이 뒤집히며 ㅁㅇㅁㅇ이라는 표어가 태여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우연히 스친 말이였을뿐, 누구도 그것을 정면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우연은 부끄러움없이 지나갈수 있는 법이니, 그 시절의 우리는 그 우연 뒤에 숨어안도하였던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우연히 튀여나오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라, 아예 정면으로 상대에게 그 말을 요구하고 나선것이다. 겨울의 우연이 봄의 도전이 되여있었으니, 이 봄 하나만으로도 우리 둘의 거리는 겨울보다 한걸음 더 가까와져있었던셈이다.
나는 방송을 마친뒤 그 차이를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우연과 요구 사이에는 커다란 강이 놓여있는듯도 하였다. 우연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쳐도 되지만, 요구는 그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였기때문이다.
그날 방송이 끝난뒤 나는 블루동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블루 님, 오늘 고생 많으였습니다.》 《강지 님이야말로. 그런데 이런 방송, 앞으로 또 할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으면서도 어딘가 진심이 섞여있는듯하였다.
《왜, 오늘 힘드였습니까.》 내 물음에 블루동지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대답하였다. 《힘들었다기보다...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서 혼났습니다. 강지 님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는건 처음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영상은 그 주가 가기전에 편집을 마치고 올라갔다. 제목은 다름아닌 《귀엽다고 말해!》로 정해지였는데, 편집자는 그 제목이 그날의 분위기를 가장 잘 담아낸다고 자신하였다. 나는 그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조금 낯이 뜨거웠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영상이 올라간 다음날, 나는 시청회수를 확인하고 적잖이 놀랐다. 하루이틀 사이에 백만을 넘어서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백육십만에 다다랐던것이다. 그무렵 우리 방송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수자였고, 나는 그 수자를 몇번이고 새로고침하며 다시 확인하였다.
미기가 그 소식을 전하며 웃음지었다. 《강지 님, 이번 영상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댓글창에도 란리가 났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감상글난을 열어보았는데, 과연 갖가지 감상평이 줄지어 달려있었다.
개중에는 《이 커플 이러다 큰일나겠다》는 우스개도 있었고, 《높임말인데 이렇게 설레는게 말이 되냐》는 감탄도 있었으며, 《저 넉자 나올때마다 심장떨어지는줄 알았다》는 고백도 섞여있었다. 나는 그 감상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며 묘한 기분에 젖었다.
강도단 가운데 몇몇은 그 영상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로 잘라 짧은 클립으로 만들어 돌리기까지 하였다. 그 컷들은 저마다 다른 제목을 달고 퍼져나갔는데, 어떤 클립에는 《귀엽습니다 3초 전후 표정 변화》라는 자막까지 붙어있어 나는 그것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시청자들의 정성이 이렇듯 세밀한 데까지 미칠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력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사변이란 늘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는 법이라 하던가. 나라의 흥망을 가르는 말들도 알고보면 대개는 짧은 한마디였으니, 우리의 《귀엽습니다》라는 그 다섯글자 또한 우리 《우결》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후세의 력사가들이 이 다섯글자를 두고 론문 몇편은 족히 쓰고도 남을것이라고, 나는 실없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물론 이렇게 력사를 들먹이며 말하면 마치 대단한 사변이라도 되는듯 들릴가 걱정스럽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카메라앞에서 서로 낯간지러운 말 한마디를 주고받았을뿐이고, 그것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거워하였을뿐이다. 거기에 백육십만이라는 수자가 붙었다는것, 그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라면 전부이다.
그 반응은 우리 회사안에서도 화제가 되였다. 칸나동지는 그 영상을 보고 나에게 《사장님도 그런 말을 할줄 아였네요》하며 짓궂게 놀렸고, 나는 낯이 화끈거려 손사래를 쳤다. 히나동지 또한 지나가는 길에 슬쩍 《저도 봤어요, 사장님》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유니동지는 그저 밝게 웃으며 《보기 좋았어요》라 한마디 거들었을뿐이였는데, 그 짧은 말이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성원들앞에서 그런 방송을 하였다는것을 새삼 실감하였기때문이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리제동지는 며칠 뒤 다른 합방자리에서 슬쩍 《사장님 퍼스널컬러가 블루동지라던데, 이번에 확실히 증명되였네요》하고 넌지시 웃었다. 나는 그 말에 뭐라 대꾸할말을 찾지 못하여 그저 화면 저편으로 눈길을 돌렸을뿐인데, 그 침묵마저도 또 하나의 대답이 되고말았다.
그무렵 나는 아직 방송 성격이 거칠던 옛 시절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한때는 폭풍 같은 말투로 이름을 날리던 내가 이렇듯 낯간지러운 말 한마디에 머리수화기 너머로 침묵을 지킨다는것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날 나를 알던 사람이 이 방송을 보았더라면 아마 제 눈을 의심하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낯섦이 싫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만나는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 법이니, 블루동지앞에서만은 내 목소리가 절로 누그러지고 말투가 부드러워지는것을 나 스스로도 느끼고있었다. 그것이 좋은 변화인지 아닌지는 그때로서는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방송을 마친뒤 나는 그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화면속의 나는 분명 당황한 기색이 력력하였는데, 그 당황함이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진짜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였다. 꾸며낸 표정이 아니라 진짜로 설레는 얼굴이였으니, 그것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붙든 힘이였을것이다.
그날 이후로 시청자들은 우리를 볼때마다 《오늘도 귀엽다고 말해보세요》하며 조르는 버릇이 생기였다. 나는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못이기는척 한마디씩 건네군 하였는데, 그 되풀이되는 장난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난이 방송을 열때마다 시청자들과 나를 이어주는 하나의 인사말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되풀이되는 장면이였지만 매번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가볍게 던지는 우스개처럼 들렸고, 또 어떤 날은 뜻밖에도 진심이 묻어나는것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같은 말이라도 그날그날의 공기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이였고,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헤아리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고있었다.
그무렵 다른 방송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종종 그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 짓궂게 《오늘도 귀엽다고 한번 해보시죠》하고 부추기면 블루동지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싫지 않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군 하였다.
사월이 지나고 오월에 접어들자 창밖의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 봄에 심어진 씨앗 하나만은 시들지 않고 여름을 향해 자라나고있었다. 나는 그때 그것이 무엇으로 자라날지 아직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 씨앗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있다는것만은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봄의 방송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였다. 높임말이라는 두터운 격식안에 갇혀있던 다정함이 처음으로 정면을 향해 걸어나온 순간이였다고, 나는 이제 와서야 그렇게 정리할수 있게 되였다. 그때는 그저 웃고 넘기였던 한마디가 지금 와서 보면 그토록 무거운 뜻을 품고있었다는것이 새삼스럽다.
그때는 몰랐다. 그 다섯글자 《귀엽습니다》가 이듬해 우리 둘 사이에서 오갈 더 많은 말들의 첫걸음이 되리라는것을. 사람의 마음이 격식을 벗어나는데는 이렇듯 작은 한마디가 먼저 필요한 법인가보다.
나는 이 페지를 쓰며 그 옛 영상을 다시 열어보았다. 화면속에서 서로 눈치만 보며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의 우리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도 사랑스럽다. 그 어색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뒤의 이야기도 사뭇 다르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블루동지는 후날 그 방송을 두고 이렇게 말한일이 있다. 《강지 님, 그때 저 진짜 심장이 떨렸습니다. 이번엔 정말 강지 님이 먼저 말할줄 알았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그저 웃었을뿐, 나 또한 그러하였다고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였다.
대답을 아꼈다고 해서 그 마음이 없었던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정면으로 확인하기보다는, 이렇듯 방송이라는 틀을 빌어 에둘러 주고받는편이 더 편안하였을뿐이다. 그 편안함 뒤에 무엇이 숨어있었는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수 있었다.
지금 와서 헤아려보면 그것이 우리 두사람의 방식이였던듯하다. 거창한 고백보다는 이런 사소한 장난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확인해나가는것. 그것이 우리가 걸어온 《우결》의 첫 봄이였고, 그 봄이 있었기에 그뒤의 여름과 가을도 조금씩 무르익어갈수 있었던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날 대화창을 가득 메우던 넉자를 잊지 못한다. ㅁㅇㅁㅇ. 그 넉자는 겨울에 태여나 봄이 되여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우리 곁을 지켰으니, 이 또한 질긴 인연이라 할만하다. 어쩌면 그 넉자야말로 우리 두사람보다 먼저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 증인이였는지도 모른다.
그해 봄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그 벚나무 창가와 콤퓨터의 랭각기소리, 그리고 머리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블루동지의 헛기침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사소한 소리들이였으나 그것들이 모여 한 시절의 공기를 이루었다. 사람이 어떤 시절을 기억할 때 남는것은 대개 이런 사소한 소리들인듯하다.
이 페지를 닫으며 나는 다시 한번 되뇌여본다. 귀엽다는 말. 별것 아닌듯한 그 다섯글자가 실은 높임말의 벽을 허무는 첫 망치였다는것을,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안다. 그 망치질이 몇번이고 되풀이되며 그 벽을 조금씩 허물어갔다는것도, 이제 와서는 넉넉히 헤아릴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