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첫 위 기

 

시월도 하순에 접어드니 밤바람이 제법 매웠다. 그해 우주26(2019)년의 가을은 유난히 짧아서, 채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벌써 겨울 기운이 스며들고있었다. 나는 방안의 온풍기를 미리 꺼내놓고 콤퓨터앞에 앉아 그날 올릴 영상의 마지막 편집본을 들여다보고있었다. 창밖은 이미 캄캄하였고, 본체의 랭각기소리만이 고요한 방을 채우고있었다. 책상 한켠에는 식다 못해 아예 차게 식어버린 곽밥 그릇이 뚜껑도 덮이지 않은채 놓여있었는데, 그것을 치울 새도 없이 화면만 들여다보던 나날이 그무렵 계속되고있었다.

그 영상의 제목은 《우결 중 처음 찾아온 위기(?)》였다. 제목 끝에 물음표를 하나 달아놓은것부터가 이미 그 성격을 짐작케 하였다. 정말로 위기였는지, 아니면 위기라는 말을 빌려 그저 한번 시청자들을 놀래켜보려는 수작이였는지, 그 경계가 스스로도 뚜렷하지 않았던것이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그때 일을 되짚어보려 하니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아직도 그날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흔들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여러차례 옛 자료를 뒤적이고 블루동지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 발단이 무엇이였는지는 두사람의 기억에서도 이미 흐려진지 오래였다.

다만 그무렵의 나날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위기라는것이 어디서 비롯되였는지 그림자만은 그려볼수 있다. 그러자면 그보다 몇달 앞선 그해 봄부터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을수 없다.

그 봄, 온유와 이진아의 노래 《밤과 별의 노래》를 블루동지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영상이 뜻밖의 반향을 일으킨 뒤로, 시청자들의 눈길은 전에 없이 날카로워져있었다. 우리 둘이 나누는 말 한마디, 웃음 한번에도 온갖 뜻을 헤아리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대화창에는 그 익숙한 넉자 《ㅁㅇㅁㅇ》가 하루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인기라는것은 참으로 묘한것이여서, 사람을 띄워주는 동시에 사람을 조여오기도 한다. 노래 한곡으로 우리 두사람 사이의 일거일동이 《우결》이라는 하나의 서사속에 촘촘히 꿰이게 되였고, 그때부터 나는 카메라앞에서 하는 말 한마디에도 전보다 몇곱절은 더 마음을 쓰게 되였다.

그 사이 우리를 지켜보는 눈은 헤아릴수 없이 불어나있었다. 처음 《우결》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화창에 오가는 이름들이 낯이 익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새로 들어온 얼굴들이 태반이여서 우리가 처음에 무슨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는지조차 설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였다. 지켜보는 눈이 많아진다는것은 고마운 일이면서도, 그만큼 우리 둘의 사사로운 감정 하나까지 남의 눈에 낱낱이 비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 들어 우리는 유난히 자주 방송을 함께 하였다. 《배틀그라운드》 합방이 거의 매주 잡혔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 한토막씩을 만들어냈다.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간것도 그무렵이였는데, 시청자들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있는 모습에 매번 새삼스레 놀라워하였다.

그런가 하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너무 많다 ㅎㅎ》라는 영상도 그 뒤를 이였다. 제목 끝에 붙은 《ㅎㅎ》 두 글자처럼, 우리 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시청자들에게는 이야기거리가 되여주었다.

그러다 문득 《오랜만에 블루님이랑 전화하였어요!》라는 영상을 올리게 되였을 때, 나는 그 제목을 쓰면서 속으로 조금 뜨끔하였다. 정말로 오랜만이였기때문이다. 방송에서는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였지만, 정작 방송을 끄고나면 서로 안부를 묻는 일이 뜸해져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는 늘 있었다. 편집, 다음 방송 기획, 여러가지 사정이 겹치다보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였다. 카메라앞에서는 늘 다정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카메라를 끄면 서로에게 안부문자 한통 넣을 여유조차 없었다는것 —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분명 블루님이랑 둘이 만나기로 하였었는데...?》라는 제목의 영상도 그즈음의 산물이였다. 약속을 잡아놓고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긋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것을 또 하나의 이야기거리로 웃어넘기며 지나가곤 하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웃어넘김속에는 진짜 서운함이 조금씩 섞여들고있었던것 같다. 방송으로는 매번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실상 서로의 실제 하루가 어떠한지는 점점 흐릿해져갔다.

그무렵 특히 눈에 띄였던것은 우리 둘 사이에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가 끼여드는 이야기들이였다. 《이 남자를 이뻐하는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는 내가 다른 남성 방송원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 다루어졌고, 그것을 본 블루동지는 방송 중 짐짓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지님..저 말고 [오빠]가 있어요?》라는 영상이 올라갔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던 셈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질투를 연기하는 이 놀이는 시청자들에게 매번 큰 즐거움을 주었다.

《그 남자들의 목소리》라는 영상에서는 아예 우리 둘 각자의 주변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비교하는 식의 이야기까지 만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다면 유치한 장난이였으나, 그때는 그것이 우리 방송을 지탱하는 큰 줄기의 하나였다.

《이럴 거면 둘이서 하러 가》라는 제목이 붙은 영상에 이르러서는 그 질투놀이가 거의 절정에 달하였다. 시청자들은 대화창에서 저마다 편을 갈라 응원하였고, 우리는 그 반응을 보며 다음 회차에는 또 무슨 장난을 쳐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블쨘 그건 오해인뎀...》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갔다. 블쨘이라는 말은 그무렵 블루동지를 가리키는 애칭 가운데 하나로 굳어져있었는데, 제목에 붙은 말줄임표 세개가 어쩐지 례사롭지 않게 느껴졌던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영상을 찍던 날, 나는 대본에도 없던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가 서둘러 주워담은 일이 있었다. 방송이라는것은 원래 이런 사소한 실수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법이다.

그 흐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침내 《우결 중 처음 찾아온 위기(?)》라는 영상을 찍게 되였다.

그날은 시월 스무하루였다. 나는 오후 늦게 블루동지에게서 련락을 받았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낼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였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음에도 나는 어쩐지 그 물음 뒤에 무언가 다른 무게가 실려있는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저녁 아홉시,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통화련결을 켠채 콤퓨터앞에 마주앉았다. 화면 너머로 블루동지의 방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책상우의 스탠드조명, 벽에 걸린 머리수화기, 그리고 그 특유의 차분한 표정. 마이크의 붉은 표시등이 켜지기 전까지 우리는 몇마디 잡담을 나누었는데, 그 잡담마저도 그날은 어쩐지 뜸을 들이는것처럼 느릿느릿하였다.

강지 님, 오늘은 좀 진지하게 얘기해야 할것 같습니다.》 블루동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느긋한 말투와 다르지 않았으나, 말과 말 사이에 평소보다 조금 긴 틈이 끼여있었다.

《무슨 얘기신데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다. 화면 속 그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속으로 여러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혹 그만두자는 말이 나오는것은 아닐가, 혹 서로에게 서운하였던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게 되는것은 아닐가.

《요즘 우리, 예전 같지가 않은것 같아서요.》

그 한마디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였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어렴풋한 거리감을 느끼고있다는것만은 분명하였다.

《저도 그런 느낌은 있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뭐때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그런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건지.》

《혹시 제가 뭐 서운하게 한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혼자 눈치 못채고 지나간것일수도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딱히 그런건 없습니다. 그냥… 요즘 우리가 만나는 시간의 대부분이 카메라 켜있을 때뿐이라는게,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켜져있을 때만 서로에게 곰살궂고, 카메라가 꺼지면 각자의 바쁨속으로 흩어지는 나날 — 그것이 우리 둘 사이에 조금씩 쌓여온 서먹함의 정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뜨문뜨문 말을 주고받았다. 어느 한쪽도 손가락으로 짚어 이것이 원인이다 하고 말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니라, 그해 가을 내내 쌓여온 자잘한 어긋남들이 뭉쳐 만들어낸 흐릿한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화면 저편에서 블루동지가 문득 헛기침을 하였다. 《그래도 강지 님, 저는 우결을 그만두고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요.》 나는 곧바로 대답하였다. 스스로도 놀랄만큼 빠른 대답이였다. 《저도 계속하고싶습니다. 다만 요즘 서로한테 좀 소홀하였던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블루동지가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오늘 이 얘기, 그대로 영상에 담읍시다. 우리가 위기라고 느꼈던 이 순간을, 그리고 그래도 계속하고싶다는 마음을. 시청자분들한테도 솔직하게 보여드리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속내를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도 되는것인지, 혹 시청자들이 지나치게 걱정하지는 않을지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숨긴다고 숨겨지는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해서 록화가 시작되였다. 지금 그 영상을 다시 돌려보면, 우리 둘 다 평소보다 말수가 적고 표정도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어색함속에서도 끝내는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대목이 몇번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그 영상이 진짜 위기의 기록이 아니라 위기를 넘기는 기록이 될수 있었던 리유였을것이다.

록화를 마치고나서 나는 곧바로 편집을 맡은 직원에게 영상을 넘기였다. 제목을 정하는 자리에서 나는 《위기》라는 말 뒤에 물음표를 붙이자고 제안하였다. 정말로 위기였는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때문이다.

편집자는 그 제안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웃으며 물음표를 붙였다. 《사장님, 이거 물음표 붙이면 사람들이 더 궁금해할텐데요.》 그때만 해도 나는 사장이라는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그 직원은 벌써 나를 그렇게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물음표 하나에는 지금 돌이켜보아도 묘한 진심이 담겨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날의 대화를 위기라 이름 붙였지만, 정작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것이였는지는 우리 자신도 가늠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영상이 올라간 다음날, 대화창과 감상글난은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로 술렁였다. 《진짜 위기인줄 알고 놀랐다》는 감상글이 있는가 하면, 《에이 또 컨텐츠 아니냐》며 웃어넘기는 감상글도 적지 않았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이렇게 갈리는것을 보며 나는 묘한안도감을 느꼈다. 정말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그만큼 우리 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아껴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였고, 한편으로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무겁게만 비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가까이 지내던 벗들도 한마디씩 보태였다. 어떤 이는 메신저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을 보내왔고, 어떤 이는 장난삼아 놀려대며 웃어넘기였다. 그런 물음들을 받을 때마다 나는 딱히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진짜인지 아닌지를 나조차 분명히 가르지 못하는 상황이니, 벗들에게조차 명쾌한 답을 줄 도리가 없었던것이다. 다만 그들의 물음 하나하나에서 나는 우리 두사람의 이야기가 이제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니게 되였다는것을 새삼 느끼였다.

여기서 잠시 짐짓 력사적인 무게를 실어 말해보자면, 력사에 기록된 수많은 위기들이 그러하듯 이 위기 또한 그 실체를 후세 사람들이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울것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것은, 이 위기라는것이 우리 두사람의 《우결》을 끝내기는커녕 오히려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였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대목을 쓰며 나는 픽 웃음이 나온다. 세상의 온갖 력사서에 기록된 국가적 위기들에 견주면 우리의 이 위기는 실로 보잘것없는것이였으되, 그날 우리 두사람에게는나름대로 진지한 순간이였다는것만은 부정할수 없다.

생각해보면 《우결》이라는것 자체가 애초에 진짜 혼인이 아니라 방송안에서 지어낸 하나의 세계였다. 그런데 그 지어낸 세계안에서 벌어진 위기를 두고 우리 둘이 이렇듯 밤늦도록 진지하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상의 나라에 가상의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 나라를 다스리는 두 사람만은 더없이 진지하였던 셈이니, 이것이야말로 《우결》이라는 세계가 지닌 묘한 매력이 아니였을가 싶다.

블루동지는 그날 이후로도 가끔 그 영상 이야기를 꺼내고는 하였다. 《그때 그거, 진짜 위기였던겁니까 아니면 그냥 컨텐츠였던겁니까.》 그가 웃으며 물으면 나 역시 웃으며 답하고는 하였다. 《글쎄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 대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그날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설명할 재간이 없다. 다만 그 흐릿한 감정의 그림자가 실재하였다는것,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하였다는것만은 분명히 말할수 있다.

방송이라는것을 오래 하다보면 이런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두사람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이야기속에는 진짜와 만들어낸것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게 마련이다.

《우결》이라는 내용물 자체가 원래 그러하였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이 방송을 위한 하나의 설정임을 알고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설정안에 진짜 마음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러니 위기라는것도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그 경계를 나조차 명확히 그을수 없는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에게 좀더 자주 안부를 묻기로 하였다. 거창한 약속은 아니였다. 그저 방송이 끝난 뒤에도 잠깐이나마 안부문자를 주고받자는, 소박한 다짐이였을뿐이다.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지켜졌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다시 바빠지면 또 소홀해지고, 그러다 또 문득 서로를 챙기고, 그런 되풀이가 이어졌던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의 대화 이후로 우리는 그 소홀함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게 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월의 밤은 《우결》이라는 긴 이야기속에서 하나의 작은 매듭이였다. 큰 파국으로 치닫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도 아닌, 그런 애매한 매듭이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큰 강물도 처음에는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해 시월의 그 작은 어긋남은 후날 더 큰 흔들림을 예고하는 첫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우리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영상을 가끔 다시 돌려본다. 화면속의 우리 둘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있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 뒤에는 분명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는것을, 지금의 나는 알수 있다.

블루동지도 언젠가 그 영상을 다시 보았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때 우리 되게 어색하였네요.》 그가 웃으며 말하였을 때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그 뒤로 우리 더 잘 지냈잖아요.》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함 뒤에 찾아온 다짐, 그리고 그 다짐이 지켜지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면서 이어진 우리의 이야기 — 그것이 바로 이 위기라는 매듭이 남긴 진짜 의미였을것이다.

그때 나는 아직 스물몇살, 밤새 방송을 하고 낮에는 죽은듯이 자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젊은 시절이였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의 나를 들여다보면 무엇 하나 여유롭지 못한 얼굴을 하고있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그무렵 나는 아직 회사도 없었고 거느린 식구도 없었다. 오직 콤퓨터 한대와 마이크 하나, 그리고 화면 저편의 블루동지가 내 세상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니 그 관계 하나에 온 마음이 쏠리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지금은 여러 성원들을 거느리고 회사살림까지 돌보는 처지가 되고보니, 그때 그 시절의 사소한 위기가 오히려 그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걱정할것이 오직 한사람과의 사이뿐이였던 그 단순함이, 지금 생각하면 도리여 사치스러운 고민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무렵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강지 님》, 《블루 님》이라 부르는 사이였다. 높임말의 격식을 사이에 두고도 이렇듯 마음을 졸이며 서로의 안색을 살폈으니, 후날 그 격식이 허물어지고 《누나》, 《바이비》라는 다정한 호칭이 자리잡을 때까지 우리에게는 아직 몇달의 시간이 더 필요하였던 셈이다. 그때는 그 몇달이 얼마나 굽이진 길이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으나, 이 작은 위기는 앞으로 몇달 사이 우리 두사람이 겪게 될 더 큰 흔들림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일이란 늘 그러하여서, 큰 흔들림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이렇듯 작은 어긋남들이 미리 길을 닦아놓은 자리에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이 페지를 마치며 나는 그해 가을의 바람소리를 다시 떠올려본다. 창밖은 이미 캄캄하였고, 콤퓨터 랭각기소리만이 방을 채우고있던 그날 밤. 그 밤의 어색한 침묵과 뜨문뜨문 이어지던 대화가, 지금 와서는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매듭이 완전히 풀린것은 아니였다. 해가 넘어가기까지 우리는 몇번 더 크고 작은 흔들림을 겪어야 하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페지에서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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