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년 의 클 리 셰
우주27(2020)년의 첫 주가 지나갈무렵이였다. 정월 초하루의 소란도 어느덧 가라앉고, 창밖 골목에는 밤사이 내린 눈이 희끗희끗 남아있었다. 나는 방문을 닫고 콤퓨터앞에 앉아 그해 처음 올릴 영상의 기획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본체의 랭각기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채웠고, 창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가 손끝을 시리게 하였다.
벽에 걸린 달력은 아직 새것이어서 종이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다. 지난해의 달력은 구석에 접힌채로 밀려나있었는데, 그 마지막 장에는 온갖 일정과 낙서가 빼곡하여 한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말없이 증명하고있었다. 나는 그 낡은 달력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새 달력의 첫 장으로 눈을 옮기였다.
책상우에는 지난밤 마시다 만 랭수 한잔과 새로 뽑은 원고 몇장이 놓여있었다. 나는 이따금 화면에서 눈을 떼고 대화창의 지난 기록을 되돌려보았는데, 새해 인사를 나누던 시청자들의 말들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듯하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지 님, 블루 님도요》 하는 인사가 유난히 많았다.
그무렵 우리는 지난해 섣달 그믐 어름에 매듭지은 한 이야기를 겨우 지나온 참이였다. 오해와 서운함이 오가던 그 며칠을 무사히 넘기고 나니, 해가 바뀌였다는 사실이 그저 달력의 수자 하나가 넘어간것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 겨울, 위태롭던 고비를 넘긴 뒤에 찾아오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껴보았다.
위기라는것이 지나가고 나면 사람은 으례 지난 시간을 되짚어보는 여유를 가지게 되는 법이다. 나 역시 그러하였다. 문득 우리 둘이 벌써 한해하고도 몇달을 이 방송을 함께 이끌어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며칠 사이 나는 우리의 지난 영상들을 하나하나 다시 훑어보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새여나오기 시작하였다. 영상마다 되풀이되는 말투와 장면들이 눈에 밟혔기때문이다.
그날 오후, 늘 편집을 도맡아 나의 오른팔 노릇을 해주는 미기가 자료실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몇장의 종이를 들고있었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지난 한해 동안 올린 영상 제목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강지 님, 이거 좀 보십시오. 제목만 쭉 늘어놓고 보니 아주 가관입니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고 한줄 한줄 읽어내려갔다.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로 시작하여 《귀엽다고 말해!》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는지 새삼 헤아려보게 되였다. 처음엔 그저 웃어넘기였으나, 다 읽고나니 이상하게 낯이 뜨거워졌다.
그 종이 아래쪽에는 《블루님께 집을 선물해주었어요》라든가 《배그》 안에서 벌어졌다는 이른바 탄약 프로포즈 소동을 다룬 제목도 끼여있었다. 그무렵의 일들은 이미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으나, 종이우에 활자로 박혀있으니 마치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나는 그 제목들을 손끝으로 짚어가며 언제 이렇게 많은 페지가 쌓였는가 하고 혼자 감탄하였다.
《이거 완전히 우리 둘의 버릇을 정리해놓은것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미기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듯 눈을 반짝이며 대꾸하였다. 《그러니 말입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대놓고 한번 정리해보시는건 어떻습니까. 1년 넘게 우결을 하면 이런 멘트들이 나온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우리 둘 사이의 일을 우리 손으로 직접 짚어가며 웃음거리로 삼는다는것이 어쩐지 낯간지러웠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시청자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강지 님과 블루 님이 먼저 짚어주면 더 반가와할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보니 일리가 없지 않았다.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수첩을 펴놓고 우리 둘 사이에 굳어진 말들을 하나씩 적어내려갔다. 적다보니 목록은 금세 한페지를 넘기였다.
《블루 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로 시작하는 물음, 《제가 아마 누나일 거에요》 하던 대답, 상대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내면 짐짓 토라진 척 하는 버릇, 오락 도중 나오는 서로의 감탄사까지. 수첩우에는 어느새 우리 둘만이 알아볼수 있는 암호 같은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나는 그 목록을 들고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번 울린 뒤 그가 전화를 받았다. 《강지 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다짜고짜 그 목록 이야기부터 꺼냈다. 《블루 님, 저희가 벌써 1년을 넘게 이러고 있잖아요. 그동안 쌓인 우리만의 멘트들을 아예 정리해서 영상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가 하는데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근데 강지 님, 그거 만들다가 저희 둘 다 부끄러워서 촬영 못하는것 아닙니까.》 블루동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이미 흥미를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부끄러운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요.》
통화를 끊고나서도 나는 한참을 웃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이 일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였다. 이렇게 해서 새해 벽두의 기획 하나가 그날 밤 사이에 얼떨결에 정해지고말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얼마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해 섣달 그믐께, 그 위태롭던 이야기가 겨우 매듭지어지던 밤이였다.
그날 방송을 마치고 나서 블루동지와 나는 마이크를 끄지 않은채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지 님, 저희 이러다가 나중에 이 일도 그냥 하나의 이야기거리로 남겠지요.》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이 모든게 나중에 보면 다 클리셰 아니겠어요.》 그때는 그 말이 그저 서로를 위로하려고 던진 우스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말 한마디가 이미 새해에 벌어질 일의 씨앗이였던 셈이다. 사람의 말이란 그렇게 무심코 던져놓고도 뒤에 가서야 그 무게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우스개를 정말로 영상 하나로 빚어내게 된것이다.
촬영은 그로부터 이틀 뒤로 잡히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렸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방송실에 나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손수 점검하였다.
블루동지도 곧 도착하였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수첩을 펼쳐든 나를 보고 짐짓 엄살을 부렸다. 《강지 님, 오늘 정말 그거 다 읽으실 겁니까. 저 좀 봐주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콤퓨터의 록화 단추를 눌렀다. 대화창에는 벌써 시청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고있었다. 《오늘은 무슨 방송이에요》 하는 물음들이 화면을 채웠다.
나는 먼저 목록의 첫 항목을 읽어내려갔다. 《1년 넘게 우결을 하다보니 이제는 시청자분들이 저희가 무슨 말을 할지 먼저 압니다. 이를테면, 블루 님이 다른 녀성 이야기를 꺼내면 제가 대뜸 목소리를 낮추고 캐묻는것 말입니다.》
블루동지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건 제가 잘못한적이 없는데 매번 강지 님이 그렇게 몰아가시는것 아닙니까.》 나는 시치미를 떼고 대꾸하였다. 《그러니 이것도 하나의 클리셰라는겁니다.》
대화창은 대번에 들썩였다. 《이거 완전 국룰이잖아》, 《이번엔 진짜 잘못 없다는데?》 하는 말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나는 그 반응을 곁눈질로 살피며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두번째로는, 배그를 하다가 위기 상황이 오면 서로에게 반사적으로 높임말이 아니라 이름부터 부르는 버릇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블루동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짜 그렇습니다. 저도 모르게 나오더군요.》
《세번째는 이것입니다. 상대가 요즘 저 좋아하세요, 하고 물으면 절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것.》 나는 그렇게 읽고나서 블루동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블루동지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는 그런 질문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만.》
그 뻔뻔한 대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다. 대화창에도 《저거 봐 저거 봐》 하는 웃음 표시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미기도 카메라 밖에서 소리죽여 웃는 기색이 력력하였다.
나는 목록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네번째, 합방 중에 다른 방송인이 저희 이야기를 꺼내면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아무도 먼저 부인하지 않는것.》 블루동지는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것도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다섯번째는 팬분들이 이제 저희 목소리 톤만 듣고도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맞추신다는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목록의 절반을 읽어냈음을 확인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채 우리는 그렇게 항목 하나하나를 짚어나갔다.
《여섯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합방 자리에서 제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블루 님이 아무 말 없이 그저 화면 구석에서 잠자코 지켜만 본다는것.》 나는 그렇게 읽으며 짐짓 그의 표정을 살폈다. 블루동지는 뜨끔한듯 헛기침을 하고는 딴전을 피웠다. 《그건 그냥 게임에 집중하고있었던것뿐입니다.》
《일곱번째는 이것입니다. 저희 둘 중 누구든 상대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안 부르고 넘어가는 방송이 없다는것.》 그 말에 대화창에서는 곧바로 《그건 인정》이라는 말이 빗발쳤다. 블루동지도 이번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였다. 《그건 진짜 반박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덟번째, 이건 저 혼자만 아는 사실인데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블루 님 방송을 다시보기로 몰래 챙겨본다는것.》 나는 그렇게 읽고나서 시치미를 뚝 떼였다. 블루동지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예? 그건 저도 몰랐던 사실인데요. 저야말로 그렇습니다만.》 그 대답에 대화창은 삽시에 홍수를 이루었다.
그 사이사이 블루동지는 종종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끝내 어느 항목 하나도 부인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목록에 적힌 말들을 하나하나 소리내여 읽을 때마다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버릇을 새삼 깨닫는 기분이였다.
력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눈으로 이 장면을 돌아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실로 중대한 사변이라 할만하였다. 어느 나라의 조약도 이보다 더 촘촘하게 조목조목 짚어가며 맺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우리는 그날 우리 둘 사이의 관습법을 스스로 성문화하고있었던 셈이다.
어느 나라에 력사를 바로잡는 위원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날의 촬영이 꼭 그런 위원회의 첫 회의와 같았다. 위원은 단 둘뿐이였고 안건도 단 하나, 지난 1년의 언행을 조목조목 심의하는 일이였다. 다만 그 결의는 국회의 표결이 아니라 대화창에 올라오는 웃음 표시의 많고 적음으로 갈음되였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놓고보면 나 스스로도 우습다. 실상은 그저 부끄러움을 웃음으로 넘겨보려는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장난이 뜻밖에도 우리 둘의 지난 1년을 가장 정직하게 요약해주는 기록이 되였다는 사실만은 부인할수 없다.
촬영을 마칠무렵 블루동지가 문득 말하였다. 《강지 님, 이러다 저희 진짜 이 코너 하나 만들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럽시다. 우리만 아는 농담, 뭐 이런 이름이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정해진 이름은 아니였지만, 뒤에 미기가 편집을 하며 그 말을 그대로 옮겨적었다. 영상의 제목은 결국 《1년 넘게 우결하면 나오는 멘트》로 확정되였다. 나는 그 제목을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정말 새로운 코너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실감이 들었다.
미기는 미리보기를 고르면서도 몇번이고 나에게 확인을 구하였다. 《강지 님, 이 사진이 낫습니까 저 사진이 낫습니까.》 나는 두 장을 번갈아 보다가 블루동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있는 쪽을 골랐다. 《이쪽이 더 우리답습니다.》 미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그 사진으로 정하였다.
영상은 새해 초이튿날 저녁에 올라갔다. 나는 그날 밤 늦도록 콤퓨터앞을 떠나지 못하고 시청회수와 감상글이 늘어가는것을 지켜보았다. 반응은 내가 예상한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감상글난에는 《이거 완전 정곡을 찌른다》, 《저 시청자인데도 다음 대사 예상되던데 본인들은 오죽하겠냐》 하는 말들이 줄지어 달렸다. 어떤 이는 《이쯤되면 국가공인 커플 아니냐》는 우스개 섞인 감상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 감상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우리 둘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새삼 실감하였다.
반응이 예상보다 좋으니 미기는 신이 나서 다음 기획을 들고왔다. 《강지 님, 이 코너 이대로 묻어두기는 아깝습니다. 아예 시리즈로 밀어붙이시지요.》 그는 벌써 몇가지 제목 후보까지 적어온 참이였다.
《오늘 작정함》, 《그녀가 헤어지자고 합니다..》 같은 제목들이 그 후보 목록에 올라있었다. 나는 그 제목들을 보고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제목만 보면 진짜 큰일난것 같지 않습니까.》
미기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니 좋은겁니다. 어차피 클릭해서 열어보면 다 농담인줄 알텐데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새해 초순의 며칠 사이에 《1년 넘게 우결하면 나오는 멘트》를 시작으로 몇편의 영상이 잇달아 올라갔다. 저마다 제목은 놀랄만큼 자극적이였으나, 열어보면 그 안에는 여전히 우리 둘이 서로를 놀리며 웃는 장면뿐이였다. 시청자들도 이제는 그 어긋남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 즐기는 눈치였다.
다만 이 대목에서 후세를 위해 분명히 짚어두고싶은것이 있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합니다..》라는 제목은 그 문구만 놓고 보면 마치 《우결》이 그 자리에서 끝난것처럼 읽힐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해 초에 올라간 여러 자기 패러디 영상 가운데 하나였을뿐, 실제 《우결》의 종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 제목만 보고 놀란 이가 없지 않았다. 오래 소식을 전하지 못하던 한 지인이 그 제목만 보고 부랴부랴 안부를 물어온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물음에 한참을 웃다가 겨우 오해를 풀어준 기억이 난다. 제목 하나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할줄은 나 자신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나는 그 지인에게 웃으며 사정을 설명하였다. 《아니, 그거 그냥 새해맞이 장난으로 만든것입니다. 저희 아직 잘 지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안도의 한숨과 함께 타박이 돌아왔다. 《야, 제목을 그렇게 지으면 누가 안 놀라겠냐. 심장 떨어지는줄 알았잖아.》 나는 그 말에 또 한참을 웃었다.
력사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성급한 자들이 잘못된 소문 하나에 나라가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의 경우는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소동이였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은 우리 방송 하나가 작은 오보의 진원지가 된 셈이였다.
그러나 그 소동마저도 결국은 웃음으로 끝났다. 시청자들은 제목과 내용 사이의 그 어긋남을 알아채고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대화창에는 《또 낚였다》, 《이번엔 안속을줄 알았는데》 하는 말들이 되풀이하여 올라왔다.
다른 방송에서 어울리던 몇몇 진행자들도 이 소동을 전해듣고 우리에게 안부 삼아 말을 건네왔다. 《강지 님, 저희도 제목만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도 뭐,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하는 우스개 섞인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둘의 장난이 어느새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웃고 놀라는 하나의 화제가 되였음을 실감하였다.
나는 그 반응들을 지켜보며 방송이라는것이 결국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함께 빚어가는 하나의 놀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자극적인 제목을 내걸어도, 시청자들이 그 안의 맥락을 이미 함께 알고있었기에 그 놀이는 성립할수 있었다. 어느 한쪽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런 웃음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것이다.
그무렵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우스개들이 후날 누군가에게는 력사의 한 대목처럼 읽힐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였다. 지금 이렇게 페지를 채워가며 그때를 돌이켜보니, 그 생각이 아주 헛된것만은 아니였던 셈이다.
다시 그 겨울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의 버릇을 스스로 짚어가며 새해를 열었다. 지난 1년 동안 무심코 쌓아온것들을 하나하나 목록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웃음거리로 삼아 시청자들앞에 내놓은 그 며칠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시간이였다. 부끄러움과 우스움이 반반씩 섞인 그 묘한 감정을 나는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사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새 버릇들을 쌓아가게 될지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수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삼을수 있을만큼 우리 둘 사이가 편안해졌다는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겨울은 충분히 기록해둘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이렇게 스스로의 클리셰를 대놓고 짚어낼수 있게 되였다는것 자체가 이미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굳건한것이 자리를 잡았다는 증거였다. 서로를 놀리는 말속에도 편안함이 배여있었고, 그 편안함은 며칠 뒤 우리가 마침내 높임말을 벗어던지는 순간으로 조용히 이어지고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뒤에 따로 적어야 할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그 겨울의 목록을 떠올린다. 수첩우에 빼곡히 적혔던 그 우스운 항목들, 그것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며 서로 눈을 마주치던 그 순간들이 눈에 선하다. 큰 사변은 언제나 이렇듯 사소한 웃음들속에서 조용히 움트는 법이다.
나는 이 페지에 그 겨울의 웃음을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