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방 송 사 고

 

그해 이월 하순, 우주27(2020)년의 겨울은 아직 그 끝자락을 다 놓아주지 않고있었다. 사무실 창밖으로는 늦은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다가도 낮이 되면 이내 녹아 사라지곤 하였고,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볕은 하루하루 조금씩 길어지는 기색이 뚜렷하였다. 나는 그 계절의 변화를 콤퓨터앞에 앉아 방송준비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화면속의 시계는 자정을 넘어가고있었으나 방안의 공기는 묘하게 들떠있었다. 콤퓨터 본체에서 나는 나직한 랭각기소리와 마이크의 미세한 잡음이 뒤섞여 방안을 채웠는데, 나는 그 소리에 익숙해진지 이미 오래였다.

사무실 마당 한구석의 나무가지에도 어느새 물이 오르고있었으나 꽃봉오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채였다. 봄이 왔다고 하기에는 이르고, 겨울이라 하기에는 늦은 그 어정쩡한 시절이 그해 이월의 끝무렵이였다. 나는 방송을 시작하기 전이면 으례 마이크를 두어번 두드려보고 소리크기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고성기를 타고 울릴 때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기를 속으로 빌군하였다.

그무렵 나는 방송실을 오가는 길에 곧잘 거리를 눈여겨보았다. 아직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간혹 얇은 웃옷 하나만 걸치고 종종걸음을 치는 이들도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아, 봄이 정말 오기는 오는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군하였다.

그무렵 나와 블루동지 사이에는 이미 높임말이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앞절에서 이미 적어둔대로 우리는 그해 이월 초순의 어느날을 기하여 서로 말을 트고 호칭을 바꾸었는데, 그 뒤로 방송의 공기가 사뭇 달라졌다는것을 나는 곧 느끼게 되였다. 높임말을 쓸 때는 몰랐던 어색함과 즐거움이 동시에 밀려들었고, 시청자들도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대화창에다 온갖 반응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무렵의 이야기를 하자면 며칠 앞서있었던 그 비루스 소동의 뒤끝부터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콤퓨터를 새로 손보고 방송을 재개한 뒤로도 나는 한동안 화면 한구석에 뜨는 알림창마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블루동지는 그 일을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아 방송 중에도 심심하면 《그거 또 거위 아니예요?》 하고 물어오군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대화창은 또다시 왁자하게 끓어올랐다.

나는 그 놀림을 받을 때마다 짐짓 성난 척을 하였으나 속으로는 그 소동이 남긴 웃음거리가 싫지 않았다. 사람이 한번 크게 놀란 일은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좋은 안주거리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그해 이월에서 삼월로 넘어가는 사이, 우리의 나날은 대단한 사변이랄것도 없이 자잘한 웃음거리들로 채워지고있었다.

지금 와서 그 하나하나를 옮겨적자니 새삼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그 웃음들이야말로 《우결》이라는 이름아래 우리가 함께 쌓아온 나날의 참모습이였다고 생각한다. 큰 사변은 뒤에 가서 따로 적을 자리가 있을것이나, 이 절만은 오로지 그 소소한 사고와 농담들을 위해 남겨두고싶다. 력사라는것이 언제나 대단한 결단과 전투로만 이루어지는것은 아니라고, 나는 그 시절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 생각한다.

그무렵 우리가 가장 자주 열었던 방송은 역시 《배그》였다. 블루동지는 총을 들면 사람이 달라지는 재주가 있었는데, 적을 눕히고 나서는 으례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고 웃어젖히군하였다. 평소에는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아 방송내내 차분한 편이였으나 그 순간만은 톤이 확 달라졌으므로,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무자비해질수도 있는가 하고 새삼 놀라군하였다.

차분하던 사람이 총만 잡으면 표정부터 달라지는 그 반전이 나는 늘 재미있었다. 나는 오히려 평소에 말이 많고 방정맞은 편이여서,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면 성격이 완전히 뒤바뀐 한쌍처럼 보였다. 시청자들도 그 대비를 곧잘 짚어내여 대화창에 《이 커플 성격이 바뀐것 같다》는 농담을 곧잘 올리곤 하였다.

또 어쩌다가 통쾌한 장면을 만나면 블루동지는 《개꿀!》 하고 외마디를 내지르고는 하였는데, 그 한마디에 대화창은 곧장 온통 같은 글자로 도배가 되였다. 나는 그 옆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이크에 대고 놀려대군하였다. 그럴 때면 블루동지는 당황한 나머지 이따금 《아이 그기 아이고, 그래 카는데...》 하는 식으로 고향말투가 툭 튀여나오군하였다.

블루동지는 방송중 골똘히 생각할 때면 곧잘 턱을 괴고 화면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게임 속 상황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 역시 말이 막히면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으니, 시청자들은 그런 우리 둘의 습관까지도 놓치지 않고 짚어내여 놀려대였다. 서울말을 매끄럽게 구사하다가도 당황하면 어김없이 그 흔적이 드러나는것이 나에게는 늘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짓궂게 《지금 그거 사투리 아니냐》고 캐물었는데, 블루동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얼굴이 벌게지고는 하였다. 그런 사소한 실랑이 하나가 그날 방송의 절반을 채우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저녁, 나는 문득 장난기가 동하였다. 블루동지가 혼자 생방송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채팅으로 전해듣고, 나는 몰래 마이크앞에 앉아 짧은 음성편지 하나를 록음하였다. 대단한것도 아니였다. 그저 몇마디 안부와 실없는 농담을 담아 파일 하나를 만들었을뿐이였다.

나는 그 파일을 블루동지의 방송 관계자에게 슬쩍 넘겨 화면에 띄우도록 부탁하였다. 블루동지는 아무것도 모른채 오락에 열중하고있다가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이크에 대고 《어? 어어? 이게 뭐예요, 이거 진짜예요?》 하며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 당황한 목소리가 얼마나 우습던지, 나는 내 화면앞에서 혼자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소리를 나는 내 방송에서 그대로 지켜보고있었는데, 화면속 블루동지의 얼굴이 붉어지는것이 고스란히 보이였다. 대화창은 삽시에 《ㅁㅇㅁㅇ》라는 초성으로 도배되였고, 몇몇 시청자는 아예 《저러다 방송사고 나는것 아니냐》고 우스개소리를 얹기도 하였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이 정도면 성공한 장난이라고 혼자 흡족해하였다.

블루동지는 그날 방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그 이야기를 하며 나를 나무랐다. 《누나, 그거 너무한거 아니예요? 나 진짜 놀랐잖아요.》 하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그러나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나는 그것이 진짜 화가 난 소리가 아니라는것을 금방 알아차렸고, 오히려 다음에는 무엇으로 놀래켜줄까 하고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사나흘이 지난 어느날, 블루동지는 나에게 그 빚을 갚겠다고 벼르고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가 무슨 수를 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다. 사람 좋게 웃던 그 얼굴 뒤에 그런 계획이 숨어있을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날 방송에서 블루동지는 나를 합방으로 불러들여놓고는, 미리 준비해둔 옛 방송 클립들을 하나둘 꺼내들었다. 높임말을 쓰던 시절의 내 목소리,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던 장면들이 화면에 차례로 지나갈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에 몸둘바를 몰랐다. 《이거 완전 역습이잖아》 하고 내가 항의하자 블루동지는 태연한 얼굴로 《누나가 먼저 시작한거잖아요》 하고 되받아쳤다.

결국 그 방송은 《블루의 역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갔는데, 시청자들은 그 제목 하나에도 갖은 추측을 덧붙이며 즐거워하였다. 나는 속으로 이것을 력사에 남을 큰 반격전이라고 우스개소리로 이름붙였으나, 정작 그 반격이 남긴 상처라고는 서로의 웃음소리뿐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옛 방송 클립을 함부로 남에게 넘겨주지 않겠노라 속으로 다짐하였으나, 그 다짐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그무렵 방송에는 우리 둘 말고도 여러 얼굴들이 드나들었다. 삼각관계를 자청하며 초반부터 우리와 어울리던 김박사도 종종 합방에 끼여들어 자리를 채웠고, 왓구홍길동은 나와 친남매 같은 궁합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몰입을 한층 부추기였다. 그들이 화면 한켠에 앉아있는것만으로도 방송의 공기는 훨씬 왁자해졌다.

김박사는 그무렵도 여전히 나의 옛 애인 행세를 하며 능청스럽게 끼여들었고, 그때마다 블루동지는 짐짓 경계하는 표정을 지어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내였다. 왓구홍길동은 또 왓구홍길동대로 나를 친누이처럼 놀려대며 분위기를 풀어주었으니, 그 셋이 한자리에 모이면 방송은 으례 산으로 가군하였다. 그래도 시청자들은 그렇게 뒤죽박죽이 되는 방송일수록 오히려 더 좋아하였으니, 나로서도 굳이 그 흐름을 바로잡을 리유가 없었다.

그무렵 밤늦도록 편집을 손보다가 출출해지면 나는 서랍에 넣어둔 떡볶이나 뿌링클 따위를 꺼내먹었다. 매운것을 잘 못 먹는 블루동지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지만, 정작 자기는 단것을 잘 못 먹어 나에게 늘 놀림을 받았다. 서로의 그런 사소한 취향까지 낱낱이 알게 된것도 그무렵부터였다.

나는 원래 저혈압이 있어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편이였는데, 그무렵은 밤늦게까지 방송과 편집에 매달리다보니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을 하고있었다. 잠버릇이 심한탓에 자다가도 이불을 다 걷어차기 일쑤였는데, 그런 나를 두고 블루동지는 《누나 잘 때 조심해야겠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그런 우스개소리 하나에도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있다는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해 그무렵 우리는 처음으로 더블데이트라는것을 시도해보았다. 사귀는 사이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던 다른 짝 방송원들을 초대하여 넷이서 함께 오락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나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방송을 위한 설정이였지만, 마주앉은 다른 짝은 실제로 그런 사이였으므로 그 온도차이가 은근히 느껴지였다.

블루동지는 오히려 그런 자리를 편안하게 즐기는듯 보였다. 그는 상대 짝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며 능청스럽게 조언까지 건넸는데,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저 사람이 저럴 때는 또 저렇게 능글맞아지는구나 하고 새삼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 옆에서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날 자리에는 네대의 콤퓨터 화면과 네개의 마이크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다들 웃고 떠드는 가운데서도 나는 이따금 곁눈으로 저쪽 짝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훔쳐보았는데, 그 눈빛에 담긴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와 블루동지 사이에도 언젠가 저런 눈빛이 오갈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으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웃음으로 털어버리였다.

방송이 끝난 뒤 그날의 영상은 《귀여운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하였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나갔다. 시청자들은 감상글마다 우리 두 사람의 어색한 거리감을 놀려댔는데, 나는 그것을 읽으며 속으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확실히 우리는 진짜 련인들앞에서 어딘가 서투른 흉내를 내고있었던것이다.

삼월에 접어들자 날씨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사무실 창문을 열어두어도 찬바람이 그리 매섭지 않았고, 나는 그 계절의 변화를 핑계삼아 새로운 기획을 하나 꺼내들었다. 겨우내 방안에 갇혀지내던 우리에게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때였다.

어느날 나는 방송 중에 불쑥 《나... 너희랑 하고 싶은게 생기였어...》 하고 말을 꺼냈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무슨 일이냐며 술렁였고, 몇몇은 설마 《우결》을 그만두려는것이냐며 지레짐작으로 걱정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아차 싶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실은 별것도 아니였다. 나는 그저 몇몇 방송원들과 함께 새로운 장난을 하나 꾸며보고싶었을 뿐인데, 말을 꺼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비장하였던 탓에 애꿎은 오해만 잔뜩 사고말았다. 블루동지는 그 소동을 옆에서 지켜보며 《누나 그렇게 말하면 다들 놀라지》 하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말을 듣고서야 내 화법에 문제가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장난의 결과가 바로 며칠 뒤 나온 그 내용물였다. 나는 블루동지와 데이트를 하는 시늉을 하다가, 미리 짜놓은대로 눈치없는 벗 하나를 등장시켜 자꾸 우리 사이에 끼여들게 하였다. 그 벗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것도 모르는척 우리 대화에 끼여들었는데, 그 능청스러움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나조차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블루동지는 그 자리에서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에게 《질투나?》 하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는데, 그 웃음소리가 고스란히 방송에 잡혀 두고두고 시청자들의 놀림감이 되였다. 그날의 영상은 《질투나? 항상 눈치없는 썸녀의 친구가 데이트 방해하더라?》라는 제목을 달고 나갔다.

그 눈치없는 벗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시치미를 떼며 《나는 그냥 지나가다 들른것뿐》이라고 우겨댔는데, 그 뻔뻔함이 오히려 더 큰 웃음을 자아내였다. 나는 그날 저녁 그 벗에게 따로 련락하여 수고하였다는 인사를 전하였다. 그 벗은 도리여 다음에도 또 불러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그 넉살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나는 그저 웃을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유치한 장난이였으나, 그때는 그런 유치함이야말로 우리 방송을 지탱하는 큰 힘이였다. 사람이란 언제나 거창한 사변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이런 실없는 웃음 한줌으로도 넉넉히 하루를 버틸수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올릴 때마다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무렵 찍은 영상들 가운데는 지금에 와서 찾아볼수 없게 된것도 하나 있다. 《정말 아무 리유가 없었을까??》라는 제목의 그 영상은 어느 순간부터 비공개로 돌려져, 나조차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왜 그렇게 되였는지, 나는 아직도 그 리유를 다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그리 된것인지 그 사정을 캐묻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다만 그 제목만은 지금도 이따금 떠올라 나를 픽 웃게 만든다. 남겨지지 못한 기록도 그나름으로 한 시절의 흔적이라는것을, 나는 그 영상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그무렵 나를 오래 지켜본 벗들은 내 목소리가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고들 하였다. 한창때는 성정이 거칠어 방송에서도 걸찍한 말을 서슴지 않던 나였는데, 블루동지앞에서만은 어느새 말투를 한껏 눅여 쓰고있었던 모양이다. 가까운 벗 하나는 그것을 못마땅해하며 자기앞에서도 그렇게 좀 부드럽게 말해달라고 농담삼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나는 그말을 듣고 겸연쩍게 웃을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누구앞에서 어떤 말투를 쓰는가 하는것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의 크기를 재는 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블루동지앞에서만은 나도 모르게 그 자를 조금 후하게 재고있었던 셈이다. 그것을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사뭇 부끄럽고도 흐뭇한 일이다.

그무렵 대화창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후원을 보내며 실없는 문구를 적어넣는 이가 있는가 하면, 초성 몇자로 자기 마음을 대신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 짧은 글자들속에서도 사람들의 정성을 읽을수 있었으므로, 방송을 하는 보람이 크다고 새삼 느끼였다.

어느 시청자는 후원 문구에 《누나 목소리 바뀐거 저만 느낀거 아니지요?》 하고 적어보내였고, 또 어느 시청자는 그저 초성 몇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그런 짧은 글줄들을 하나하나 소리내여 읽으며 방송을 이어갔는데, 그럴 때마다 화면 저편의 사람들과 정말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날은 방송 도중 대화창이 온통 한가지 반응으로 뒤덮이는 일도 있었다. 블루동지가 실수로 마이크를 켜놓은채 딴청을 부리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허둥대면, 시청자들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런 사소한 실수들이 오히려 방송을 더 사람냄새나게 만들어주었다.

나 역시 실수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한번은 대화창의 질문을 읽어주다가 엉뚱한 이름을 잘못 불러 방송 내내 놀림을 받은 일도 있었다. 블루동지는 그때 배를 잡고 웃으며 《누나 그것도 새로운 별명 하나 생기겠는데요》 하고 놀려댔는데, 그 별명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고 흐지부지 사라지였다.

그무렵 나에게는 아직 스텔라이브라는 이름도, 그 밑에서 나를 사장이라 부르며 따르는 숱한 동지들도 없었다. 그때는 그저 작은 방 하나에 콤퓨터 한대를 놓고 방송을 하는 한 사람의 유튜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그 시절을 돌아보면, 후날 내가 그렇게 많은 동지들을 거느리는 회사의 대표가 되리라고는 그때의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하였을것이다. 다만 그 작은 방안에서 블루동지와 나누던 그 실없는 웃음들이, 어쩌면 뒤에 올 모든 일들의 첫 씨앗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때는 그 모든것이 그저 하루하루를 채우는 자잘한 사고와 농담일뿐이라고 여기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웃음들 하나하나가 실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조금씩 다져나간 벽돌이였다는것을 알게 된다. 큰 사변만이 력사를 이루는것이 아니라, 그런 자잘한 나날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하나의 시대를 만들어낸다는것을 나는 그 뒤로도 오래도록 곱씹게 되였다.

지금 이렇게 그 소소한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 적어놓고보니, 마치 무슨 전투기록을 정리하는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 전투라는것이 기실은 마이크 하나를 사이에 둔 웃음의 응수에 지나지 않았으니, 력사라는것도 알고보면 이렇게 소박한 데서 비롯되는 모양이다. 대단한 무기도 대단한 진지도 없이, 그저 우스개소리 몇마디로 치른 전투였던 셈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시절을 두고 무어라 이름붙일지는 알수 없으나, 나는 감히 이 시기를 《소동의 봄》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비록 그 소동이라는것이 기껏해야 음성편지 한통, 짓궂은 클립 몇개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이름이야 거창하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두 사람이 웃고 떠든 나날일뿐이니, 력사란 늘 그런 식으로 뒤늦게 이름을 얻는 모양이다.

그렇게 이월과 삼월이 자잘한 웃음속에서 흘러가는 사이, 사무실 달력의 페지는 어느덧 삼월의 뒤쪽을 가리키고있었다. 나는 그 달력을 넘기다가 문득 다음달 초하루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날은 다름아닌 사월 초하루, 해마다 온 나라가 실없는 거짓말로 들썩이는 그 특별한 날이였다.

블루동지도 그 날짜를 놓치지 않았다. 어느날 합방 중에 그가 넌지시 《누나, 이번 사월엔 뭐 재밌는것 안해요?》 하고 물어왔을 때, 나는 이미 머리속으로 무언가를 궁리하고있던 참이였다. 다만 그때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서지 않아, 나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글쎄, 두고봐야지》 하고 대답할뿐이였다.

그 짧은 대화가 후날 얼마나 큰 소동으로 번질지는 그때의 우리 둘 다 짐작하지 못하였다. 다만 사월이 가까워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방송 안팎의 공기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하였다는것을, 나는 그해 삼월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 예감이 얼마나 적중하였는지는 뒤에 가서 다시 적을 자리가 있을것이다.

그무렵의 나날을 되새겨보면, 나는 늘 그 자잘한 사고와 농담들이 그리워진다. 큰 사변을 앞두고 숨을 고르던 그 짧은 봄날들이야말로, 지금 생각해도 가장 사람 냄새나는 시절이 아니였던가 한다. 그리고 그 봄날의 끝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실없고도 잊을수 없는 사변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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