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감 블 러 와 꽃 핀

 

우주27(2020)년 3월도 하순에 접어드니 밤바람은 아직 매웠으나 낮에는 볕이 제법 도타워졌다. 사무실 창밖 나무가지에는 어느새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였고 방 안 콤퓨터들은 밤이 깊도록 꺼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무렵 매일같이 방송실에 앉아 대화창의 글발을 넘겨보며 다음 기획을 궁리하고있었다. 화면 불빛이 창유리에 되비쳐 방안은 낮이나 밤이나 늘 푸르스름하였고 건반 두드리는 소리만이 그 고요를 깨뜨렸다.

책상 위 마이크 곁에는 늘 마시다 만 랭수 한 컵이 놓여있었고 머리수화기 줄은 밤마다 이리저리 얽혀 아침이면 다시 풀어야 하였다. 그무렵의 나는 하루하루가 방송과 방송 사이의 짧은 잠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지 못할만큼 그 생활에 젖어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보다 먼저 들려오는것은 대화창의 웃음소리와 후원 알림신호이였다. 나는 늘 그 소리들속에 파묻혀 다음 방송을 무엇으로 채울지 궁리하는것이 하루의 절반이였다. 그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까운 방송원들도 그무렵이면 으례 방송 도중에 이번 만우절엔 또 무슨 일을 벌일 셈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때마다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고 웃어넘기였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그럴듯한 사변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강도단이라 불리는 내 애호가들도 대화창에서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저마다 억측을 늘어놓고 있었다.

앞서 예고편에서 밝혔던 대로 우리는 만우절에 무엇인가 크게 한번 저질러보자는 생각을 벌써부터 품고있었다. 예고만 내걸고 정작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갔다. 대화창에는 벌써부터 도대체 무슨 특집이냐는 물음이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왔지만 나 자신도 아직 뾰족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블루동지와 나는 밤마다 통화를 하며 이런안을 냈다가 저런안을 지웠다가를 되풀이하였다. 어느 날은 서로 역할을 바꾸어 방송을 진행해보자 하였고 어느 날은 상대편 시청자에게 서로 편지를 읽어주자 하였으나 다 시들해졌다.

《누나, 그냥 서로 자리를 바꿔버리는건 어때. 나는 다른 사람이랑 우결하고 누나는 딴 사람이랑 하고.》 블루동지가 어느 밤 문득 이런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처음엔 웃어넘기려 하였다. 한해 반 남짓 다듬어온 우리 두 사람의 극중 관계를 하루 만에 통째로 뒤집자는 소리였으니 처음 들었을 때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야, 그거 우리 둘한테는 재밌겠지만 상대방 시청자들은 배신감 느끼는것 아니야?》 내가 이렇게 되묻자 블루동지는 웃으며 만우절이니까 다들 웃고 넘어갈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보다 더 만우절다운 발상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실로 대담한 결단이였다. 한해 반 남짓 쌓아온 우리 두 사람의 극중 관계를 단 하루 만에 통째로 뒤엎어버리자는 것이였으니, 력사에 견주자면 오래 다스려온 강산의 경계를 하루아침에 다시 긋는 일에 못지 않았다. 물론 그 강산이라는것이 고작 게임 방송의 설정일뿐이라는 점은 우리 둘 다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상대였다. 나 혼자 다른 사람과 《우결》을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블루동지도 새 상대를 구해야 이 판이 온전히 성립하는것이였다. 우리는 통화를 붙든 채 서로 아는 얼굴들을 하나씩 꼽아보았다.

《내 쪽은 감블러가 어때. 걔라면 넉살도 좋고 나랑도 스스럼이 없잖아.》 내가 이렇게 말하자 블루동지는 대번에 좋다고 하였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벌써부터 웃음이 새여나온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감블러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감블러와 나는 우주26(2019)년 러스트 봉사기에서 처음 마주쳤다. 낯선 봉사기에 접속하자마자 누군가 다짜고짜 나를 저격하여 물자를 몽땅 털어갔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감블러였다.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애써 모아둔 나무와 돌을 하루아침에 빼앗기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화창에 능청스레 죄송하다고 적어놓은 문투가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때는 서로 높임말을 썼다. 나는 그를 낑깡님이라 부르고 그는 나를 감자님이라 불렀다. 어디서 붙은 별명인지는 지금도 분명치 않으나 그 우스꽝스러운 호칭이 오히려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러스트 봉사기라는 곳이 원래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한 곳이지만 이상하게도 감블러와 나 사이에는 그런 살벌함보다 웃음이 먼저 오갔다. 몇번을 더 마주치고 몇번을 더 물자를 뺏기고 나서야 우리는 말을 트게 되었다. 지금은 그가 나를 붕어야 누나라 부르고 나도 스스럼없이 그를 붕어라 부른다.

감자님과 낑깡님으로 지내던 그 시절에도 우리는 서로를 웃기려고 온갖 짓을 다 하였다. 한번은 감블러가 내 기지 근처에 몰래 함정을 파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딴청을 부린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며칠을 그 함정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런 시시한 장난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인연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감블러를 떠올릴수 있었다. 넉살 좋고 장난기 많은 그라면 이 뜬금없는 자리바꿈 놀음에도 기꺼이 응해줄 사람이였다. 나는 그날 밤으로 감블러에게 련락을 넣었다.

《형, 만우절에 나 대신 블루랑 좀 놀아줘요. 재밌는 거 하나 걸어놨어요.》 내가 이렇게 운을 떼자 감블러는 대뜸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는 한참을 웃더니 못할 것도 없다며 흔쾌히 응하였다.

남은것은 블루동지 쪽 상대였다. 나는 잠시 궁리하다가 꽃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블루 쪽은 꽃핀 언니는 어때. 언니라면 재미있게 받아줄것 같은데.》 꽃핀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꽃핀은 내가 가장 아끼는 언니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방송 밖에서도 종종 안부를 묻고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공교롭게도 꽃핀과 블루동지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이 어느 자리에서 밝혀진 적이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하였다. 타향에서 만난 동향 사람이라는 것은 방송 바닥에서도 특별한 인연으로 여겨지는 법이다.

방송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속으로는 외로운 날이 적지 않은 일인데 꽃핀은 그런 날 부담 없이 말을 건넬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꽃핀을 그저 방송 바닥에서 마주친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기댈수 있는 언니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꽃핀이라면 블루동지와 새로운 짝을 이루어도 어색함보다 정겨움이 앞설 것이라 나는 생각하였다. 블루동지도 내 말을 듣고는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그날 밤 안으로 넷의 자리가 다 짜여진 셈이였다.

이렇게 하여 넉 사람의 판이 짜여졌다. 강지와 감블러, 블루와 꽃핀. 각기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의 하루를 살던 네 사람이 하나의 합방을 위해 모이게 된것이다.

날짜는 3월 28일 밤으로 잡혔다. 만우절 당일에 생방송을 하면 오히려 너무 뻔한 수작으로 보일까 염려되어 우리는 사흘을 앞당겨 미리 촬영해두기로 하였다. 진짜 만우절날에는 이미 벌어진 사변을 편집하여 세상에 조금씩 흘려보내자는 계산이였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방송 준비를 마쳤다. 마이크를 손보고 카메라 각도를 맞추는 손끝이 유난히 분주하였다. 대화창에는 벌써부터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느냐는 물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물음들을 짐짓 못 본 체하며 화면 한켠에 《배틀그라운드》 로딩창을 띄워두었다. 머리수화기를 고쳐쓰는 손이 살짝 떨렸는데 그것이 긴장인지 웃음을 참는 탓인지 나 자신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넷이 차례로 접속하는 소리가 머리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감블러가 제일 먼저 들어와 특유의 능청스러운 인사를 던졌고 뒤이어 꽃핀이 들어와 반갑게 웃었다. 블루동지는 례의 그 느긋한 목소리로 마지막에 합류하였다.

《오늘은 특별히 자리를 한번 바꿔볼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운을 떼자 대화창이 순식간에 물음표로 뒤덮였다. 시청자들은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아직 짐작하지 못한 눈치였다.

《오늘 하루는 저랑 감블러가 짝이 되고 블루랑 꽃핀 언니가 짝이 되어보려구요.》 설명이 끝나자 대화창은 한바탕 뒤집혔다. 누군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고 누군가는 벌써부터 재미있겠다며 손뼉을 쳤다. 몇몇은 저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두고 저희끼리 다투기까지 하였다.

오락은 여느 때처럼 《배틀그라운드》로 시작하였다. 비행기가 지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평소 블루동지와 즐겨 내리던 자리를 놓아두고 감블러가 좋아하는 외진 곳으로 락하지점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얼마나 낯선 하루인지가 실감되었다.

락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짧은 순간에도 넷의 대화는 평소와 다른 낯설음으로 가득하였다. 나와 감블러는 원래 하던 대로 서로를 놀리며 착지하였다.

《누나, 오늘부터 내가 블루 대신이니까 잘 좀 챙겨줘요.》 감블러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원래도 격 없이 지내던 사이였으니 자리를 바꾸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우리는 착지하자마자 총 한 자루를 두고 서로 먼저 줍겠다며 실없는 몸싸움을 벌였다.

문제는 다른 조였다. 블루동지가 입을 열자마자 나는 머리수화기 너머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수 있었다. 평소라면 《배그》 이야기부터 늘어놓았을 그가 그날은 첫마디부터 결이 달랐다.

《꽃핀 누나, 오늘 하루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사람이 누나예요.》 블루동지의 이 한마디에 꽃핀은 당황한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느긋하고 차분하던 블루동지가 그날따라 유독 낯간지러운 멘트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아니 블루야, 그런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면 나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꽃핀이 이렇게 되받아쳐도 블루동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더욱 오글거리는 대사를 이어갔다.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하루종일 힘이 나요. 진짜예요.》 대화창은 이 대목에서 완전히 뒤집어졌다. 시청자들은 저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아우성을 쳤고 몇몇은 저게 정말 우리가 알던 그 블루가 맞느냐고 되물었다. 누군가는 오늘 방송을 다시보기로 세 번은 돌려볼 것 같다고 적기까지 하였다.

나는 머리수화기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감블러도 옆에서 킥킥거리며 저 녀석 오늘 단단히 작정을 하였다고 놀려댔다. 나는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 한참을 소리죽여 웃었다.

한창 그러던 참에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더니 낯선 이름의 대원 하나가 우리 쪽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나와 감블러는 정신없이 몸을 숨기며 서로 방향이 다르다고 소리를 질러댔고 결국 나란히 쓰러지고 말았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감블러는 이게 다 누나가 총 안 나눠줘서 그런거라고 억지를 부려 나를 어이없게 웃기였다.

오락 한판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도 블루동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낙사한 우리가 관전 화면으로 남은 둘의 자리를 지켜보는 동안 그는 더욱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였다.

《누나, 나중에 저랑 같이 살면 제가 밥은 다 챙길게요.》 꽃핀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야 그건 너무 갔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블루동지는 못 들은 척 한마디를 더 얹었다.

《저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오늘따라 자꾸 하고 싶어지네요.》 이 대사가 나온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꽃핀은 아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웃기만 하였다. 감블러는 옆에서 저것이야말로 오늘 방송의 정점이라며 손뼉을 쳤다.

대화창에서는 이미 블루동지에게 붙일 새 별명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 장난삼아 오늘 블루는 색깔이 다르다고 적었다. 그 한마디가 뒤에 어떤 이름을 낳게 될지 그때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나와 감블러 쪽은 그와는 사뭇 다른 온도로 흘러갔다. 우리는 원래 하던 대로 서로 놀리고 장난치며 오락에 집중하였다. 감블러는 물자를 모으는 틈틈이 나를 놀려대었고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저쪽은 신혼부부 같고 우리는 그냥 친구 같잖아.》 감블러가 이렇게 말하자 나도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자리를 바꾸어도 사람 사이의 결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새삼 깨달았다. 오히려 그 대비가 시청자들에게는 더 큰 구경거리가 된 모양이였다.

두 조가 나란히 화면에 잡히는 자리마다 대화창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우리 쪽 채팅에는 그냥 편하고 좋다는 말이 흘렀고 저쪽 채팅에는 심장에 무리가 온다는 말이 흘렀다. 나는 그 두 흐름을 번갈아 보며 이것이야말로 오늘 판의 묘미라고 생각하였다.

막판 자기장이 좁혀들무렵에는 네 사람이 다시 한 지붕밑에서 마주쳤다. 감블러와 나는 남은 총알을 서로 세어가며 실없이 다투었고 블루동지는 그 와중에도 꽃핀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몸을 바짝 붙였다. 결국 우리 넷은 사이좋게 한꺼번에 적의 총에 쓰러지고 말았는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방송은 서너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끝이 났다. 넷 모두 목이 쉬도록 웃고 떠든 뒤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는 다들 힘이 다 빠진 목소리였다.

《오늘 진짜 힘들었다. 이거 다시는 못하겠다.》 블루동지가 방송을 끝내며 이렇게 말하자 꽃핀도 웃으며 저도 오늘 하루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말에 나와 감블러도 한바탕 크게 웃었다.

방송을 마친 뒤에도 우리 넷은 한동안 통화를 끊지 못하고 그날 나온 대사들을 서로 되짚으며 웃었다. 특히 블루동지가 쳤던 몇몇 멘트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야 너 아까 밥 챙겨준다는 그 대사는 진짜 어디서 배운거야.》 내가 이렇게 놀리자 블루동지는 억울하다는듯 그냥 그 순간 떠오르는 대로 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집은 그 뒤로 며칠에 걸쳐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 사변을 하루에 다 쏟아내지 않고 만우절인 4월 1일부터 시작하여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조금씩 나누어 내보내기로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마치 오래전 어느 나라가 큰 사변을 겪고도 세상에는 그 소식을 조금씩 나누어 알렸다는 이야기와 닮은 데가 있다. 우리는 사흘 앞서 이미 그 밤을 다 살아버렸는데 세상은 그것을 한달 남짓에 걸쳐 나누어 받았던 것이다.

4월 1일 첫 영상이 올라가자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시청자들은 제목만 보고도 이것이 만우절 장난인 줄 알았다가 정작 내용을 보고는 진짜냐고 되묻는 감상글을 무더기로 남기였다.

영상은 그 뒤로도 5월 초까지 순차로 이어졌다. 한 편씩 올라올 때마다 대화창과 감상글난에는 그날 밤 오갔던 대사들이 다시 화제로 떠올랐고 그때마다 나는 또 한번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남은것은 역시 블루동지에게 붙은 새 별명이였다. 그날 밤 대화창에서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어느새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그를 김레드라 부르는 말이 굳어져버렸다.

왜 하필 레드였는지 나는 지금도 다 알지 못한다. 평소 파란빛으로 통하던 그가 그날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만큼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기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그저 운을 맞춘 말장난이라는 설도 있다. 누가 맨 처음 그 이름을 붙였는지는 이제 와서 가려낼 도리가 없다.

확실한 것은 그날 이후로 김레드라는 이름이 블루동지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꼬리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블루몬들 사이에서도 한동안 그를 놀릴 때면 으례 이 별명이 튀어나왔고 블루동지 본인도 그때마다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그 별명만은 좀 잊어달라고 손사래를 쳤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강도단들도 이 영상을 두고 한동안 시끌시끌하였다. 저희 대표가 저런 장난을 다 벌였느냐며 신기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김레드라는 이름을 벌써부터 류행어처럼 써먹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별것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뿌듯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하루는 참으로 유쾌한 사변이였다. 한해 반 남짓 이어온 관계를 하루 만에 뒤집어보자는 발상 자체가 무모하다면 무모한것이였으나 그 무모함이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크게 웃을 여유를 되찾아주었다.

감블러와는 그날 이후로도 려전히 스스럼없는 사이로 지낸다. 붕어야 누나 하는 그 호칭도 려전히 그대로다. 가끔 그날 방송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또 한참을 웃는다.

꽃핀과 블루동지도 그날의 인연으로 한동안 서로를 놀리는 사이가 되었다. 동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생긴 그 묘한 동질감은 그날의 자리바꿈을 거치며 한층 더 깊어진 듯하였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우리 넷이서 그저 하루 웃자고 벌인 이 작은 놀음이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날의 자리바꿈은 단순한 장난 이상의 것이였다. 서로 다른 짝과 마주앉아 하루를 지내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블루동지와 내가 한해 반 남짓 다져온 그 결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를 거꾸로 깨달았다.

남의 옷을 잠깐 입어보아야 제 옷이 얼마나 몸에 맞는지 알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날 우리 넷은 서로의 자리에 잠깐 앉아보고서야 저마다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마음을 더욱 굳혔던 것이다. 그것이 만우절이라는 하루가 우리에게 준 뜻밖의 선물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4권을 두고 나는 높임말을 벗은 시절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그 벗어던짐이 비단 블루동지와 나 사이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였던 셈이다. 감블러와 나 사이의 감자님, 낑깡님이라는 높임말도 그보다 앞서 이미 벗겨졌고 그날 밤에는 블루동지와 꽃핀 사이에 놓여있던 마지막 겉치레마저 잠깐이나마 훌훌 벗겨진 것이였다. 사람 사이의 격식이란 이렇게 서로 자리를 한번 바꿔보는 작은 소동속에서도 뜻밖에 쉽게 허물어지는 법인가 싶었다.

그 밤 이후로도 나와 블루동지의 《우결》은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다만 그 하루만은 우리 둘의 력사 어딘가에 곁가지처럼 따로 접혀 들어가 지금도 이따금 술자리에서나 방송 다시보기에서 문득 펼쳐지곤 한다.

봄바람이 완연해지기도 전에 우리는 이렇게 한바탕 유쾌한 사변을 치렀다. 그리고 그 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로 우리를 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파트너를 바꾸어본 그 하루가 지나가고도 3월은 며칠 더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며칠 사이에 나는 또 하나의 잊을수 없는 자리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절에 가서 마저 풀어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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