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 윗 감 백 점
우주27(2020)년 오월 초순은 봄과 녀름이 자리를 바꾸는무렵이였다. 아침에는 아직 선들선들한 기운이 남아있었으나 한낮이 되면 볕이 제법 따가와, 사무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잎사귀들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있었다.
나는 그날도 이르게 사무실에 나와 저녁 합방을 준비하고있었다. 콤퓨터 두대가 나란히 돌아가는 소리와 마이크 점검을 하느라 짧게 끊어지는 시험음성, 창밖 골목을 지나는 차소리가 뒤섞여 방안을 채웠다. 창밖으로는 오월의 신록이 짙어가는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그날 저녁에 잡힌 합방은 여느 날의 합방과 성격이 크게 달랐다. 상대가 스텔라이브의 다른 성원이나 이웃 유튜버가 아니라, 다름아닌 나의 어머니였기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 하루가 례사롭지 않게 흘러가리라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이 합방이 어떻게 잡히게 되였는지를 말하자면 그보다 몇주 앞선 어느 저녁부터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그 며칠 전 나는 본가에 들렀다가 어머니와 마주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는 그날 유난히 방송이야기를 궁금해하였다.
《너 요새 그 블루라는 총각이랑 하는 그거, 그게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한다면서?》 어머니가 밥술을 뜨다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우결말이에요? 네, 그럭저럭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뜸 《배틀그라운드》라는 오락이 그렇게 재미있다는데 자기도 한번 해보고싶다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그저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뒤로도 전화를 할 때마다 《배그》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며칠 뒤 저녁, 본가에 콤퓨터를 한대 더 들여다놓고 조종법부터 가르쳐드려야 하였다. 어머니는 조종간을 이리저리 눌러보며 《이게 뛰는것고 이게 앉는것고, 그럼 총은 어떻게 쏘는것니》하고 하나하나 캐물었다. 나는 옆에 붙어앉아 마우스와 건반을 짚어가며 몇번이고 같은 설명을 되풀이하였다.
그렇게 두어시간을 씨름한 끝에 어머니는 겨우 걷고 뛰는 정도만 익힌채로 그날 련습을 마쳤다. 나는 속으로 이 정도로 실전 합방이 될가 걱정이 앞섰으나, 어머니는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걱정마라, 나는 눈치가 빠르다》며 큰소리를 쳤다.
결국 나는 어느 날 무심결에 블루동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말았다. 블루동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반색을 하였다. 《진짜요? 어머님이 배그를요? 그거 재밌겠는데요, 누나.》 그 말투에는 순수한 호기심 말고도 어딘가 은근한 기대가 섞여있었는데, 나는 그때는 그 기대의 정체를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몇주가 지나 마침내 날이 잡혔다. 참가자는 나와 어머니, 블루동지, 그리고 《우결》 초반부터 삼각관계의 한 축을 맡아온 김박사까지 넷이였다. 김박사는 극중에서 나의 옛 애인 역할을 자처하며 곧잘 블루동지와 신경전을 벌이던 인물이였다.
그가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그날의 판이 례사롭지 않게 흘러갈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그 예감은 그렇게 크게 틀리지 않았다.
저녁 여덟시, 넷의 화면이 나란히 하나의 방송창에 떠올랐다. 나는 마이크를 고쳐잡으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였습니다. 바로 저희 어머니세요.》
어머니는 처음 마이크앞에 앉아보는 사람답게 다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강지 엄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대화창은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등불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강맘 등장이다》, 《이거 실화냐》, 《오늘 방송 국가행사급이다》 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속으로 실소하였다. 어머니가 마이크앞에 앉은것뿐인데 마치 온 나라가 들썩이는 사변이라도 난듯한 소란이였다.
블루동지는 그 소란속에서도 유난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블루입니다. 오늘 잘 좀 봐주세요!》 그 인사에서부터 이미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김박사도 질세라 넉살좋게 끼어들었다. 《어머님, 저는 얘 첫사랑입니다. 오래 봐온 사이니까 저를 더 예뻐해주세요.》 그 말에 어머니는 소리내여 웃었고, 나는 마이크를 붙든채 손사래를 쳤다.
오락이 시작되자 넷은 한 스쿼드로 뭉쳐 강하를 하였다. 어머니는 조종이 서툴러 착지부터 방향을 잃었는데, 블루동지가 재빨리 옆에 붙어 길을 안내하였다. 《어머님 이쪽이요, 이쪽. 제가 먼저 갈게요.》
김박사도 지지 않고 반대편에서 소리쳤다. 《어머님 저쪽 말고 이쪽에 좋은 총이 있어요, 제가 먼저 주워다 드릴게요!》 두 남자가 서로 앞다투어 어머니를 챙기는 모습에 나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블루동지는 그날따라 유난히 킬을 많이 잡았다. 적을 하나 쓰러뜨릴 때마다 특유의 웃음으로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하고 웨쳤는데, 어머니는 그 웃음소리가 재미있다며 따라 웃었다.
《저 총각 웃는 소리가 참 시원시원하다.》 어머니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블루동지는 신이 나서 대꾸하였다. 《그렇지요, 어머님? 저 원래 좀 그렇습니다, 개꿀!》 대화창에는 《아빠 오늘 텐션 미쳤다》는 글이 스쳐지나갔다.
김박사는 그 틈에도 어머니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회복약을 아낌없이 어머니에게 몰아주며 《어머님은 제가 지켜드릴게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그 둘을 번갈아 보며 어머니에게 짐짓 물었다. 《엄마, 둘 중에 누가 더 마음에 들어요?》 그 물음은 원래 방송을 살리기 위한 가벼운 농담이였는데, 어머니는 뜻밖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총소리와 발자국소리만 고성기를 채웠다. 스쿼드는 자기장 안쪽으로 이동하며 다른 팀과 교전을 벌였고, 블루동지가 앞장서서 적을 셋이나 눕히는 활약을 하였다. 어머니는 그 활약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이무렵부터 블루동지와 김박사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붙기 시작하였다. 블루동지가 어머니 앞으로 좋은 총을 밀어주면 김박사는 그보다 나은 방탄복을 찾아다 바치며 질세라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건 흡사 두 나라가 한 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다투는 외교전 같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어머님, 이 총이 더 좋아요. 이걸로 바꾸세요.》 블루동지가 권하면 김박사가 곧바로 끼여들었다. 《아니 어머님, 그건 반동이 세서 저희 어머님한테는 이게 맞아요.》 두 사람은 서로 어머님이라는 말을 유난히 힘주어 부르며 점수를 다투었다.
교전이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어머니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나는 이 블루총각이 우리 강지 사위감으로는 백점인것 같아.》 그 한마디가 고성기를 타고 흐르는 순간, 방송실 공기가 잠깐 멎는듯하였다.
블루동지는 순간 머리수화기를 고쳐쓰며 말을 더듬었다. 《예? 어, 어머님, 그, 그게 아이고... 제가 그런 뜻으로 한게 아이라카는데...》 당황하면 튀여나온다는 그 특유의 사투리 말투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김박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머님, 이거 완전 판정패 아닙니까! 저는 첫사랑인데 백점을 저 자식한테 주시면 어떡해요!》 그 억울한 목소리에 대화창은 웃음 이모티콘으로 뒤덮였다.
나는 마이크를 붙든채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웃음소리만 듣고있었다.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였다. 《아니 왜, 사람이 착실하고 인사성 밝고,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데 백점이지 그럼.》
나는 그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마이크와 화면 사이 어디쯤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몇해째 방송을 해오며 웬만한 돌발상황에는 리력이 붙었다고 자부하였는데, 정작 어머니의 이 한마디앞에서는 그 자부심이 조금도 쓸모가 없었다.
대화창은 그야말로 국무회의라도 열린듯 빠르게 올라갔다. 《강도단 비상》, 《쁠몬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이거 인정하실겁니까》 하는 글들이 서로 뒤엉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다른 성원들의 방송에까지 흘러들어갔다. 마침 개인방송을 켜고있던 히나동지가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전해듣고 자기 대화창에 《아빠가 오늘 어머님한테 사위 인증 받았대요》하고 전하였다. 시부키동지도 어디선가 그 소식을 듣고 《블루동지 이제 완전 우리 집안 사람이 다 되였네요》하며 웃었다는 말을 나는 나중에야 전해들었다.
블루동지는 그 와중에도 어쩔줄 몰라하며 연신 머리수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님, 저, 정말 감사한데... 이거 방송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 어떡합니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한채 얼굴이 붉어진 기색을 목소리로만 남기였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끼어들었다. 《엄마, 방송인데 그런 말씀을 그렇게 대뜸 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나 그 말에는 이미 나 자신도 웃음이 섞여있어 나무라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아니 사실이 그런데 뭐. 지난번에 통화할 때도 하도 걱정을 해주길래 내가 그때부터 이미 맘에 들었다.》 나는 그 말에 얼굴이 화끈거려 머리수화기를 고쳐쓰는 척 화면에서 눈을 돌리였다.
김박사는 억울함을 못이겨 계속 항의하였다. 《아니 저도 어머님한테 잘하였잖아요, 아까 총도 다 챙겨드리고!》 어머니는 그런 김박사를 다독이듯 말하였다. 《너도 착하지, 근데 사위감은 하나만 뽑는것이잖니.》
그 한마디에 대화창은 웃음으로 폭발하였다. 스쿼드의 오락은 잠시 총소리보다 웃음소리가 더 커지는 진풍경을 빚었다. 나는 그 소란속에서 문득 이 장면이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잠깐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나 붙이지 않을수 없다. 《우결》이라는 극에는 어느샌가 나 몰래 여러 조연들이 저마다의 배역을 얻어 붙어있었다. 강수라는 지인은 나의 《우결》 상대의 매제라는 리유로 블루동지를 매형이라 불러왔고, 김박사는 첫사랑을, 이제 어머니까지 나서서 사돈감을 심사하는 자리에 앉아버린것이다.
나는 그 배역들이 어느새 이렇게까지 자라나있었다는것을 그날 새삼 깨달았다. 방송이라는 무대 하나가 사람들의 상상속에서 얼마나 크고 복잡한 집안을 지어올릴수 있는지, 나 스스로도 놀라울만큼 신기하였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이렇게 선뜻 방송에 응해준것부터가 뜻밖이였다. 내가 처음 방송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어머니는 안정된 자리를 두고 왜 그런 불확실한 길을 가려느냐며 한동안 걱정을 놓지 못하였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는 마이크앞에 앉아 낯선 총각들과 스스럼없이 농을 주고받고있으니, 나는 그 변화가 새삼 신통하게 느껴졌다.
교전이 다시 시작되어 넷은 자기장을 피해 이동하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조종에 서툴러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달렸는데, 그때마다 블루동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머님 거기 아니예요, 이쪽, 이쪽!》
김박사도 질세라 방향을 잡아주려 하였지만, 어머니는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웃으며 대꾸하였다. 《아유 이제 백점짜리가 안내하는대로 갈란다.》 그 말에 김박사는 콤퓨터앞에서 탄식하듯 웃었다.
그날의 판은 결국 순위권에 들지 못한채 일찍 끝이 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 결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미 그날 방송의 승부는 총알이 아니라 어머니의 한마디로 갈려있었기때문이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머리수화기를 벗으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대답하였다. 《그럼,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도 좋게 봐줘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한해 반 남짓 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온 인연이 어느 틈엔가 실제 집안의 대화로 스며들어와있다는것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뭉클하였다.
어머니는 머리수화기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니가 하는 일 옆에서 다 보지는 못해도, 저렇게 살가운 사람이 곁에 있으면 엄마는 안심이다.》 나는 그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는데, 목이 메여 얼른 다른 말을 잇지 못하였다.
블루동지는 방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그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메세지를 보내왔다. 《누나, 저 진짜 오늘 심장 떨어지는줄 알았어요. 어머님이 그렇게 말씀하실줄은 상상도 못하였어요.》
나는 그 메세지를 보며 웃음이 났다. 《바이비, 너 아까 사투리 다 나온거 알아? 어머님앞에서 그카는데 그카는데 하던거.》 블루동지는 부끄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날 밤 방송분의 클립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사위감 백점》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짧은 컷은 여러 갈래로 잘려나가 스텔라이브 팬 모임터와 《우결》을 지켜보던 시청자들 사이를 오르내리였다.
칸나동지는 그 클립을 보고 합방 중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졌다. 《사장님 이제 진짜 어머님한테까지 공인받으신거에요?》 나는 그 물음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넘기고말았다.
리제동지도 어느 방송에선가 지나가는 말로 내 퍼스널컬러가 블루동지라고 슬쩍 짚은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은 이번 백점 소동을 두고 《역시 리제동지 안목이 정확하였다》며 새삼 옛말을 소환해왔다. 나는 그런 감상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성원들이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지켜보고 기억해왔다는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유니동지도 대화창에서 그 소식을 접하였는지 방송 말미에 슬쩍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강지동지, 어머님까지 인정해주었다면서요, 축하드려요.》 나는 고맙다고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을 지울수 없었다.
며칠동안 사무실에서는 그 이야기가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미기는 서류를 건네주며 지나가듯 웃었다. 《사장님, 이제 진짜 장가가시는것이예요?》 나는 그 농담에 손사래를 치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물론 그 백점이라는 수자에 무슨 엄정한 심사기준이 있었을 리는 없다. 어머니는 그저 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성실해보여 반가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것뿐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박한 한마디를 마치 공인기관의 판정서라도 되는 양 부풀려 받아들였다. 《강지 사위 확정》이라는 말이 며칠동안 감상글난을 떠돌았고, 나는 그 부풀림을 볼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밉지 않은 웃음이 났다.
강도단과 쁠몬들은 저마다 자기 진영의 목소리를 내느라 감상글난에서 한바탕 신이 났다. 누군가는 《장작이 알아서 탄다》고 하였고, 또 누군가는 《아니 우리가 장작을 더 넣어야지》라고 맞받았다. 나는 그런 감상글들을 읽으며,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이 이야기를 아끼고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나고보면 그 부풀림에는 다 리유가 있었다. 《우결》이라는것이 시작된지 벌써 이태 가까이 되여가는 사이,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그저 방송용 설정으로 끝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그 바람에 마침 불을 붙인 격이였다. 지어낸 각본이 아니라 진짜 어머니의 진짜 목소리로 나온 말이였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래도록 붙들고 이야기하고싶어하였다.
블루동지는 그 뒤로도 한동안 그 일을 두고두고 곱씹었다. 어느 날 합방 중 그는 문득 말하였다. 《누나, 저 그날 이후로 어머님 뵈면 왠지 자세를 고쳐앉게 돼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꾸하였다. 《잘 보이고싶은가보네, 우리 바이비.》
김박사는 억울함을 못이긴듯 그 뒤로도 종종 그날의 판정을 걸고넘어졌다. 《저는 아직도 그 백점에 승복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진짜 억울함보다 함께 웃어넘기려는 여유가 더 많이 묻어있었다.
나는 이 모든 소동을 겪으며 새삼 깨달은것이 하나 있다. 방송이라는것은 결국 그 안에 앉은 사람들의 진심이 조금씩 새여나오는 자리라는것이다. 아무리 우스개로 시작한 설정이라도 그 안에 진심이 한방울 섞이면 사람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렸다.
그날의 백점은 비단 블루동지 한사람을 향한 점수만은 아니였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것은 몇해에 걸쳐 이어온 이 방송을, 그리고 그 방송을 지켜봐준 성원들과 시청자들 모두를 향한 어머니나름의 격려였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뜻까지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방송실이 발칵 뒤집히고, 블루동지가 사투리를 쏟아내고, 김박사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 소란스러운 저녁 하나로만 기억하였을뿐이다.
되짚어보면 그 저녁은 우리 《우결》의 력사에서 조용하지만 뚜렷한 매듭 하나를 지은 자리였다. 높임말을 벗고 누나와 바이비로 지내온 지 겨우 몇달, 그 사이에 이제는 집안 어른의 승인까지 받아버린 셈이니 말이다.
이 소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곧 또 다른 자리를 예약해두고있었으니, 두 남자와 어머니가 한자리에 마주앉는 상견례라는 이름의 자리가 그로부터 보름 남짓 뒤에 기다리고있었다.
그날 방송실을 나서며 나는 문득 창밖을 보았다. 오월의 저녁하늘은 아직 어둠이 채 내리지 않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있었고,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이 소동이 앞으로 또 어떤 자리를 만들어낼지 잠시 헤아려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다. 국경을 맞댄 나라끼리도 아니고, 겨우 《배그》 한판을 함께 한 저녁에 사돈감이 정해지고 매형이 생기고 첫사랑이 항의서를 내는 판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우스움속에 담긴 진심만은 나는 지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그 헤아림이 그렇게 오래지 않아 두 남자와 어머니를 한식탁에 앉히는 자리로 이어지리라는것을. 그 뒤이야기는 다음절에서 마저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