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 다 림
우주27(2020)년 오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날씨는 부쩍 더워졌다. 방송실 창문을 반쯤 열어놓으면 초여름 바람이 창가림자락을 슬쩍 흔들고 지나갔고, 콤퓨터 본체의 팬 소리는 방안의 무더위를 그대로 실어 나르는듯 무겁게 웅웅거렸다.
며칠전 블루동지의 방송에는 《블루랑 현실 합방 약속 잡은 날》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갔다. 영상 자체는 길지 않았으나, 그 짧은 영상 하나가 마치 무슨 포고문이라도 되는 양 두 방송의 대화창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나는 그 영상이 올라간 뒤로 며칠동안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약속을 잡았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을줄은 나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내 애호가들인 강도단은 이 소식을 두고 두건 그림을 다시 꺼내들어 축하 그림을 그려올렸고, 블루동지의 오랜 팬 쁠몬들도 저마다 감상글난에 감격의 말을 남기였다. 두 무리가 이렇게 한목소리로 들뜨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만남이 이미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것을 절감하였다. 성원 몇몇은 지나가는 말로 《저러다 장작이 알아서 다 탄다》며 웃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굳이 부인하지 않고 그저 웃어넘기였다. 부인해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것이 뻔하였기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처음 《우결》이라는 이름으로 묶인것이 우주25(2018)년 가을이였으니, 이 여름까지 헤아리면 어느덧 육백일에 가까운 나날이 흘러간 셈이였다. 수자를 꼽아보는 버릇이 없던 나조차도 그무렵에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날수를 세여보곤 하였다.
그 육백일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강지 님》, 《블루 님》이라 부르며 어렵게 높임말을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어느 겨울밤 마침내 그 높임말을 벗어던지고 《누나》와 《바이비》라는 애칭을 나누어가진 사이가 되였다.
뒤이어 봄이 오자 우리는 실제 어머님을 모시고 두 남자와 상견례라는것을 치르기까지 하였으니, 방송이라는 형식을 빌었을뿐 그 자리에 오간 정과 웃음만은 결코 가짜가 아니였다. 그러나 그렇게 온갖 사변을 다 겪고도 정작 두 사람이 한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일만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있었다.
그동안에도 만날 기회가 아주 없었던것은 아니다. 몇번인가 서로 날짜를 맞추어보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방송 일정이 겹치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무산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런 일이 몇차례 거듭되고나니 대화창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저 둘은 영영 못 만나는것 아니냐》는 우스개 섞인 걱정마저 떠돌 지경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봄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무렵 온 세상에는 낯선 전염병이 번지여 사람들의 나들이길을 온통 가로막고있었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행인들만 드문드문 오갔고, 방송국이나 촬영장의 문턱도 전에 없이 높아져있었다.
그런 시국에 두 사람이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방송까지 함께 한다는것은 결코 가볍게 정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만나는 날짜 하나를 잡으려 해도 서로의 건강과 주변의 사정을 몇번이고 확인해야 하였으니, 육백일이라는 수자 뒤에는 이런 조심스러운 나날도 함께 쌓여있었던 셈이다.
나는 가방 한켠에 마스크 여러장과 소독약을 미리 챙겨넣었다. 즐거운 나들이를 앞두고 이런 채비까지 해야 한다는것이 낯설고 서글펐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서로를 지키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막는다고 막아지는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였기에 만난다는 그 사실 하나가 더욱 크고 귀하게 느껴졌던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무렵 방송을 마치고 홀로 앉아있을 때마다 알수 없는 설렘과 조바심이 동시에 밀려오는것을 느꼈다.
약속이 잡힌 뒤로 나는 메신저 화면을 전에 없이 자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기였다. 블루동지에게서 새 말풍선이 뜰 때마다 심장이 한박자 빨리 뛰는것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였다.
《누나, 진짜 이제 며칠 안 남았네》 하고 블루동지가 쪽지를 보내왔다. 나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러게, 나도 실감이 잘 안 난다》 하고 답을 보냈다.
《나 사실 좀 떨려, 이거 실제로 보는것 처음이잖아》 하고 블루동지가 다시 쪽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말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났다. 방송에서는 그렇게 넉살좋게 굴던 사람이 메신저앞에서는 이렇게 솔직하게 떨린다고 털어놓는것이 새삼스러웠다.
나는 《야, 나도 떨리거든》 하고 짧게 답을 보내고는 한동안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하였다. 화면 저편에서 블루동지도 비슷한 사정이였는지 한참동안 말풍선이 뜨지 않았다.
그날 저녁 방송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슬쩍 흘렸다. 《얼마전에 약속 영상 올라간거 다들 봤지》 하고 운을 떼자 대화창은 순식간에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드디여?!》, 《진짜 만나는것이야?》, 《몇일 남았어요》 하는 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후원 알림신호도 평소보다 훨씬 잦게 울려퍼졌다.
우리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배그》를 켜놓고 방송을 진행하고있었다. 락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짧은 순간에도 대화창은 온통 만남 이야기뿐이였으니, 자기장이 좁혀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정작 우리 둘은 오락보다 그 이야기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블루동지는 적을 발견하고도 《아 잠깐, 그거보다 이거 진짜 언제 만나는것이야》 하고 딴청을 부리다가 그자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 꼴을 보며 《야, 방송 중에 그러다 죽는다》 하고 나무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새삼 이 일이 나 혼자만의 설렘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지난 육백일을 함께 지켜봐온 성원들에게도 이 만남은 오래 기다려온 하나의 사변과 같았던것이다.
대화창 한켠에서는 누군가 스스로 자막을 붙여가며 남은 날수를 세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계산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으나, 속으로는 나 역시 비슷한 계산을 하고있었다는것을 들키고싶지 않았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그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머리수화기를 벗어놓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채, 그동안 쌓여온 나날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처음 높임말을 쓰던 그 어색한 시절도, 상견례 자리에서 두 남자를 나란히 앉혀놓고 웃음을 참던 그 순간도, 이제와 돌이켜보면 모두 이 하루를 향해 차곡차곡 쌓여온 계단과 같았다.
회사안에서도 이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성원들은 나를 두고 짐짓 《엄마》라 부르며 나의 일을 제일처럼 여기던 터라, 이번 일에도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였다.
유니동지는 지나가는 말로 《사장님 드디여 만나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하며 웃었고, 칸나동지는 《긴장되시겠다, 옷은 뭐 입으실거예요》 하며 짓궂게 물어왔다. 나는 그 물음에 정작 아직 아무것도 정해두지 못하였다는것을 깨닫고 조금 당황하였다.
히나동지는 지나가듯 《누나라고 부르는것 실제로 들으면 기분이 다를것 같아요》 하고 신기해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방송을 통해서만 듣던 그 호칭을 실제 목소리로 듣는다는것이 또 하나의 낯선 경험이 되리라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시로동지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잘 다녀오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런 성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이 만남이 이제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실감하였다.
리제동지는 합방 중에 지나가는 말로 《사장님 퍼스널컬러는 원래 블루동지잖아요》 하며 짓궂게 놀렸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헛웃음만 흘렸는데, 틀린 말도 아니였기때문이다.
시부키동지와 타비동지, 리코동지 같은 3기 성원들도 이 소식을 어렴풋이 알고있는 눈치였다. 합방 중에 은근슬쩍 이 이야기를 꺼내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회사안에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린동지와 나나동지, 후야동지 역시 지나가며 한마디씩 축하를 보태였으니, 회사 전체가 마치 한식구의 경사를 앞둔것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이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면서 동시에 고마운 일이다.
어머니 역시 이 소식을 듣고는 대뜸 전화를 걸어왔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총각을 이제 진짜로 본다고?》 하고 묻는 목소리에는 걱정 반, 기대 반이 뒤섞여있었다.
나는 《네, 이번에 진짜 만나기로 하였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몸조심하고 옷 단정하게 입고 가라》는 당부만 짧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짧은 통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손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그 짧은 당부속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있는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이제 남은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어들자, 나는 평소에는 신경쓰지 않던것들까지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하였다. 원래 저혈압 체질이라 아침잠이 유난히 많은 나였지만, 그무렵에는 이상하게도 새벽 일찍 눈이 뜨이는 날이 잦아졌다.
잠버릇이 심한 편이라 늘 이부자리를 어지럽히곤 하였는데, 그날들만은 이상하게도 뒤척임 없이 말끔한채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두고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기며 웃어넘기였다.
옷장앞에 서서 이 옷 저 옷을 꺼내보는 밤도 여러날 이어졌다. 방송에서야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옷차림에 크게 마음쓸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나는 결국 옷장앞에서 몇번이고 망설이다가 가장 무난하고 단정한 차림을 고르는것으로 그 며칠밤의 고민을 마무리지었다. 지나고 보면 우스운 고민이였으나, 그때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블루동지도나름의 걱정을 메신저에 늘어놓았다. 《나 그날 혹시 사투리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하고 그가 물어왔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네가 언제는 안 그랬냐, 당황하면 카는데 소리 나오는것 다 안다》 하고 놀리듯 답을 보냈다.
블루동지는 《아니 그건 진짜 당황하였을때만 그런다니까》 하며 억울해하는 답을 보내왔다. 나는 그 화면을 보며 실제로 그가 당황해 얼굴이 벌개지는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는 또 《매운거 잘 못 먹는것 알지, 혹시 매운거 시키면 안된다》 하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말에 《걱정마라, 내가 그런거 하나 못 챙기겠냐》 하고 짐짓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도 술을 잘 못하는 처지라, 혹시 그 자리에서 무슨 술자리라도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속으로 하고있었다. 소주 서너잔이면 이미 얼굴이 붉어지는 주량을 가지고 무슨 큰소리를 쳤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다.
나는 만나는 자리에 빈손으로 가고싶지 않아 곽밥을 손수 싸갈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준비할지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다. 결국은 블루동지가 유난히 못 버틴다는 스타벅스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사가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매운것도 단것도 잘 못 먹는 사람이 유독 그 프라푸치노 하나만은 사족을 못쓴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오래도록 우스운 구경거리였다. 나는 그것을 사들고 갈 생각을 하며 속으로 몇번이고 웃음을 참았다.
그 며칠사이 방송에서도 이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화제로 올랐다. 시청자들은 《디데이가 며칠 남았냐》며 저마다 손꼽아 날을 세였고, 몇몇은 아예 자막판에 남은 날수를 적어넣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자막을 볼 때마다 짐짓 못 본척 넘기였지만, 실은 나 자신도 매일 아침 달력을 넘겨보며 같은 수자를 세고있었다. 력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소한 초조함을 두고 무슨 대사변이라 이름붙이지는 않겠으나, 나에게는 그 며칠이 그 어느 전투의 나날 못지않게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대화창의 성원들은 지난 세월 우리가 남긴 영상 제목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들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 하던 시절부터 《누나 왜 그랬어》 하며 서로를 놀리던 시절까지, 그 모든 제목들이 새삼 새롭게 읽히는듯하다는 말들이 오갔다.
나 역시 한가한 시간이면 지난 영상들의 제목을 죽 훑어보는 버릇이 생기였다. 높임말로 서로를 어렵게 부르던 그 옛 영상들을 보고있노라면, 지금의 이 설렘이 결코 하루아침에 생긴것이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였다.
성원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두고 진작부터 방송계의 《우결 대표커플》이라 부르는 말이 돌고있었다. 그 거창한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몸둘바를 몰라 손사래를 쳤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만큼 성실히 이 나날을 지나왔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다.
오랜 벗 감블러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듣고는 짐짓 놀리는 말투로 련락을 해왔다. 《누나 드디여 만나는것이야, 그동안 뭐한거야》 하며 웃음 섞인 핀잔을 주었는데, 나는 그 핀잔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웃어넘기였다. 오래 알고지낸 벗의 그런 농담 섞인 축하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왓구홍길동 또한 지나가는 말로 《드디여 만나는구나, 좋은 시간 보내라》 하며 짧은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그런 인사들이 하나둘 쌓일 때마다, 이 만남을 기다려온것이 나와 블루동지 두 사람만이 아니였다는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내 지인 강수는 예전부터 블루동지를 두고 짐짓 매형이라 부르던 사람이였는데, 이 소식을 듣더니 대뜸 《매형 드디여 처제 보러 오시는겁니까》 하며 능청을 떨었다. 나는 그 너스레에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래 알고지낸 언니 꽃핀도 안부를 물어왔다. 블루동지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 서로 남다른 정을 나누는 사이였던 그는 《동향 총각 데려다 뭐하려고, 잘 좀 대해줘라》 하며 짓궂게 웃었다. 나는 그런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며, 이 육백일의 기다림이 나와 블루동지 두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는것을 깨달았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만큼 크게 부풀지 못하였을 설렘이였다.
남은 날이 하루하루 줄어들수록 나는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눈을 감으면 어쩐지 그동안의 방송 장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갔다.
어떤 밤에는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 꿈속에서까지 낯선 자리에서 블루동지를 만나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처음 《배그》 방송에서 서로 높임말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장면, 어머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치르던 장면, 밤늦도록 메신저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장면들이 순서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나는 그 모든 장면들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이 육백일이라는 수자가 결코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는것을 깊이 느꼈다.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오늘의 이 설렘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밤에는 블루동지가 대뜸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라면 메신저로 짧게 안부만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그날은 어쩐지 목소리가 듣고싶었다고 그가 먼저 말하였다.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좀 낫다》 하고 그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그 말에 괜스레 마음이 놓이며 《나도 그렇다》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날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방송에서있었던 자잘한 일들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며 웃었을뿐인데, 그 시시한 대화조차 그때는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통화를 끊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손전화를 손에 쥔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여름 밤의 바람이 창틈으로 슬며시 들어와 방안의 후끈한 공기를 조금씩 식혀주고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것은 화면 너머의 목소리와 글자를 통해서였으나, 이제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는것이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고.
세상에는 화면 저편의 인연을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만남이 당사자에게는 저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변으로 다가오는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 며칠사이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성원들 사이에서는 이제 아예 날짜를 세는것이 하나의 놀이처럼 자리잡았다. 《디데이 며칠》이라는 말이 대화창에 오르내릴 때마다 나는 짐짓 모르는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어떤 성원은 아예 아이디 뒤에 남은 날수를 붙여가며 이름을 바꾸어달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 정성스러운 장난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정성이 고마워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줄어들수록, 나는 육백일 전의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상대의 얼굴도 모른채 그저 화면 속 목소리 하나만 믿고 시작한 일이였는데, 그 일이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며칠사이의 설렘과 조바심은 결코 유난스러운것이 아니였다. 육백일이라는 나날을 함께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자리에 서서 똑같이 가슴을 졸였을것이다.
력사에는 큰 사변만 기록되는것이 아니다. 이런 작은 기다림의 나날들이 쌓이고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커다란 사변도 제 무게를 갖추는 법이라고, 나는 그 며칠사이에 홀로 되뇌이곤 하였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돌이켜보면 그 기다림의 나날이야말로 만남 그 자체 못지않게 소중한 시간이였다. 설렘으로 가득찬 그 며칠이 없었다면, 정작 만나는 날의 그 벅찬 마음도 이만큼 크지 못하였을것이다.
이제 그 초여름의 며칠도 하루하루 저물어가고, 마침내 만남을 하루 앞둔 밤이 다가오고있었다. 그 마지막 밤에 있었던 일들은 자리를 달리하여 다시 적어야 할것이다. 나는 이 페지를 닫으며, 그 초여름의 바람과 뒤척이던 밤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육백일을 건너온 끝에 마침내 손을 잡기까지, 우리에게는 이렇게 설렘으로 가득한 기다림의 나날이 필요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