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전 날 밤

 

우주27(2020)년(2020년) 유월 초닷새 밤은 늦게까지 무더웠다. 낮 동안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아 창문을 열어두어도 바람 한점 들지 않았고, 나는 방송을 끝낸 뒤에도 콤퓨터앞을 떠나지 못한채 화면만 들여다보고있었다. 화면의 푸른 빛만이 어두운 방안을 희미하게 밝히고있었고, 본체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였다. 벽에 걸린 조그마한 달력에는 유월 초엿새 칸에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있었다. 언제 그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동그라미를 나는 몇번이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창밖으로는 늦게까지 오가는 차소리와 이따금 취객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여느 때 같으면 방송을 마친 뒤 곧장 자리에 누웠을 시간인데, 그날은 좀처럼 몸을 일으킬 마음이 나지 않았다. 하루 앞서 올린 예고 영상의 대화창은 아직도 새로고침될 때마다 새 감상글을 쏟아냈고, 나는 그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드디여 만나네요 축하해요》, 《육백날 만이라니 이건 진짜 력사적인 순간 아니냐》, 《래일 방송 몇시부터 하나요 잠 안자고 기다립니다》 하는 감상글들이 꼬리를 물었다. 어떤 이는 벌써부터 두 사람의 재회를 두고 자기 일처럼 들떠 축하의 글을 남기였고, 또 어떤 이는 장난삼아 결혼식 날자라도 잡는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 감상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랭수 한잔과 빈 캔 몇개가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방송을 진행할 때 쓰던 마이크는 이미 스위치를 내려두었는데도 나는 자꾸 그쪽으로 손이 갔다. 습관이라는것은 참 무서운것이여서, 정작 할말이 없어도 마이크앞에 앉으면 무슨 말이든 하고싶어지는 법이다.

그 영상의 제목은 간단하였다. 《블루랑 현실 합방 약속 잡은 날》. 이 몇 글자 안되는 제목 하나가 지난 몇해동안 쌓여온 기다림을 일순간에 밖으로 터뜨려놓았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우결》이 시작된지 어느덧 육백날에 가까워지고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화면을 사이에 두고 목소리와 글자로만 만나왔다. 마이크 저편의 웃음소리, 카메라앞의 손짓, 대화창에 흘러가는 한마디한마디가 우리 둘 사이의 전부였다.

지금 이 회고록을 읽는 후대의 벗들은 화면 저편의 목소리로 한해 반 남짓을 지내오고서도 정작 손 한번 잡는데 어찌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느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결》이라는 이 기이한 자리는 원래 그런 자리였다. 웃음도 다툼도 정도 전부 화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만 오가는, 참으로 묘한 제도였던것이다.

그런데 이 밤을 말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결》을 처음 시작하던 우주25(2018)년(2018년)의 어느 방송을 나는 지금도 어제일처럼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서로 높임말을 썼다. 블루동지는 화면 저편에서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 하며 능청스레 웃었고, 나 또한 《블루님~ 어제 제 꿈 꾸었어요?》 하는 물음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그 시절 어느 《배그》 방송에서는 탄약 몇발을 걸고 청혼 비슷한 장난을 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정작 그 자리에 있었던 나조차 지금은 그날의 자세한 경위를 낱낱이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 우스운 장난 하나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여 《탄약 프로포즈》라는 이름까지 붙었으니, 사람의 말이란 한번 세상에 나가면 저 혼자 자라나는 모양이다.

서로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던 그 시절은 지금 돌이켜보면 아득하게 멀다. 해가 한번 두번 바뀌는 사이 호칭도 조금씩 옮겨갔다. 어느 방송에서는 《강지 님~ 귀엽기는~》 하는 말이 오갔고, 또 어느 날엔가는 내가 얼떨결에 《블루 오빠…》 소리를 처음으로 입에 올려 대화창을 뒤집어놓았다. 블루동지는 그 말 한마디에 좋아 죽겠다는듯 방송 내내 헤벌쭉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위기라 불릴만한 시기도 한번은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정확히 무엇이 발단이였는지는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캐물어도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런 굽이를 몇번 지나고 나서야 사이라는것이 비로소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어렴풋이 배운듯하다.

생각하여보면 《우결》이라는 자리는 마치 두 나라 사이의 오랜 협약과도 같았다. 높임말로 서로를 대접하던 첫 조인식 시기가 있었고, 호칭을 바꾸어가며 조항을 하나씩 고쳐쓰던 개정의 시절이 있었고, 크고작은 위기를 넘기며 서로의 진심을 다시 확인하는 재신임의 절차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유월의 밤을 지나면 마침내 두 나라의 사절이 국경을 넘어 직접 마주앉는 순서만이 남아있었다. 물론 이 모든것은 웃자고 하는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밤의 내 심정을 가장 정직하게 옮기자면 아마 이보다 더 나은 비유도 없을것이다.

그러다 우주27(2020)년 이월, 사귄지 오백날이 되던 날을 즈음하여 우리는 마침내 높임말을 벗어던졌다. 그날 이후로 블루동지는 나를 《누나》라 불렀고, 나는 그를 《바이비》라 불렀다. 몇해를 두고 조금씩 좁혀오던 거리가 그 한마디로 단숨에 줄어든 셈이였다.

그로부터 넉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유월의 밤이 왔다. 육백날이라는 수자는 언뜻 들으면 대수롭지 않아보이지만, 매일 방송을 하며 하루하루를 세는 사람에게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였다. 마치 한 왕조의 재위년수를 세듯 나는 가끔 그 날자수를 손꼽아보군하였다.

방송을 진행할 때면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투를 눅잦혔다. 본디 성미가 거칠어 방송 밖에서는 험한 말도 곧잘 뱉는 편이였으나, 블루동지앞에서만은 유독 그러지 못하였다. 친구 악녀는 그런 나를 보고 《네 앞에서도 그렇게 말 좀 해줘》 하며 웃음 섞인 핀잔을 놓기도 하였다.

그런 내가 이 밤만은 방송용 목소리조차 낼 겨를이 없었다. 카메라도 마이크도 꺼진 방안에서 나는 오로지 나 자신과 마주앉아있었다.

창밖 가로등 밑으로 여름밤 벌레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콤퓨터 화면을 끄고 잠시 어둠속에 앉아있었다. 어둠은 낮보다 훨씬 정직해서, 낮 동안 애써 누르고있던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래일이면 나는 처음으로 블루동지의 실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화면도 마이크도 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말이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그 생각 하나에 심장이 요동을 쳤다. 이태 가까이 방송으로 오만 소리를 다 주고받은 사이인데, 정작 얼굴을 마주할 일앞에서는 신인방송원처럼 손끝이 떨리였다.

나는 자정무렵 손전화를 들어 블루동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니?》 짧은 물음 하나에 답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안자. 누나도 안자?》 화면에 뜬 글자를 보며 나는 픽 웃었다. 서로 잠들지 못한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놓이였다.

곧이어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낮고 차분하였지만, 말끝이 자꾸 흔들리였다.

《래일 진짜 보는것 맞제.》 당황하면 튀여나온다는 그 특유의 사투리가 오랜만에 묻어나왔다. 나는 짐짓 태연한척 대답하였다. 《그래, 맞아. 왜, 무서워?》

《무섭기는. 그냥… 좀 이상해서.》 블루동지는 말을 흐리다가 이내 아하하하핳 하고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였다. 나도 따라 웃었지만 웃음 끝에 남는 떨림까지는 숨기지 못하였다.

《뭐가 이상한데.》 내가 묻자 블루동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였다. 《맨날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인데 래일은 진짜 눈앞에 있잖아. 그기 좀…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신기하고 무섭다는 그 말이 내 속을 그대로 짚어낸것 같아서였다. 잠시 말이 끊기였다가 블루동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좋다. 래일 만나서 맛있는것도 먹고, 이거 완전 개꿀 아니가.》 방금까지의 떨리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신이 난 티가 역력하였다. 흥이 오르면 금세 저렇게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사람이라는것을 나는 새삼 다시 확인하였다.

우리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래일 무엇을 입을지, 어디서 만나 무슨 이야기부터 꺼낼지, 시청자들이 얼마나 몰려올지 - 정작 중요한것은 하나도 정하지 못한채 통화만 길어졌다.

《누나, 나 진짜 떨려서 잠도 못 잘것같은데.》 블루동지가 그렇게 말하였을 때 나는 대수롭지 않은척 웃어넘기였지만 속으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나는 한참을 앉아 지난 채팅기록들을 넘겨보았다. 높임말로 서로를 님이라 부르던 시절의 글, 처음 누나라는 말을 듣던 날의 글, 그 사이사이 수천통은 될 문자들이 화면우로 흘러갔다.

육백날치고는 참으로 많은 말을 주고받았구나 -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정작 손 한번 맞잡아본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낯설게 다가왔다.

어머니에게서도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래일 그 총각 만난다며. 옷은 단정하게 입어라.》 짧은 몇마디였지만 나는 그 문자를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문득 언젠가 강수가 그를 매형이라 불렀던 일이 생각나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우결》이라는 자리가 극이라고는 하나, 그 극속의 호칭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번져 이런 우스개를 만들어내는것을 보면 사람 사는 자리란 참으로 알수 없는 노릇이다.

배가 출출해져 나는 부엌으로 나가 떡볶이를 데워 조금 집어먹었다. 원래도 떡볶이와 뿌링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편이였는데, 그날 밤은 매운 맛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다른 데 가있으면 혀끝의 감각마저 무디여지는 모양이였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잠이 올까 잠시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원래 주량이 소주 서너잔을 넘기지 못하는 몸이라, 이런 밤에 섣불리 술을 입에 대였다가는 래일 아침 낭패를 볼것이 뻔하였다. 나는 대신 랭수 한잔을 더 따라 마시는것으로 그 생각을 접었다.

새벽 한시가 넘도록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원래 저혈압 체질이라 아침에 일어나는 일 자체가 고역이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정신이 말똥말똥하였다.

잠버릇이 사나운 편이라 이불은 아침이면 늘 저만치 밀려나있고는 하였는데, 그날 밤도 례외는 아니였다. 다만 그날은 애초에 잠들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애호가들이 나를 두고 강공지주라 부르며 놀리던 말이 문득 떠올라 나는 피식 웃었다. 지주라면 응당 태연해야 할 터인데, 이 밤의 나는 그 별명값을 전혀 하지 못하고있었다.

이 밤을 력사적인 사변에 비긴다면 지나친 말이겠으나, 적어도 나 개인에게는 그러하였다. 어느 사절이 국경을 넘기 전날 밤도 아마 이런 마음이였을것이다 - 온갖 채비는 다 해두었으면서도 정작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나는 옷장앞에 서서 몇벌의 옷을 꺼냈다가 도로 넣기를 되풀이하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을 옷차림 하나에도 이 밤만은 유난히 신경이 쓰이였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블루동지의 리상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와이샤쯔가 잘 어울리고 키가 작고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던가. 나는 피식 웃으며 옷장속의 와이샤쯔 한벌을 흘낏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것까지 신경쓸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손은 자꾸 그 옷걸이 쪽으로 갔다.

옷 문제를 겨우 접어두고 나니 이번에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눈에 밟히였다. 래일 방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에서 진행해야 하니 배터리도 여벌로 챙기고 삼각대도 다시 점검해야 하였다. 그렇게 짐을 꾸리다보니 어느새 가방 하나가 출정이라도 나가는 사람의 배낭처럼 묵직해졌다. 보조배터리를 두개나 챙기고도 하나를 더 넣을지 말지를 두고 한참을 망설였으니, 지나고 보면 우스운 일이였다.

장비를 하나하나 챙기면서도 나는 자꾸 딴생각에 빠졌다. 래일 시청자들이 얼마나 몰려올까, 방송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그런 걱정들 사이사이로 정작 블루동지의 얼굴을 실제로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가 가장 큰 걱정으로 떠올랐다. 방송이라는 일을 그렇게 오래 하고도 이런 일앞에서는 초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옷 한벌을 놓고도 한참을 실랑이하다보니 어느새 새벽 두시를 넘기고있었다. 나는 결국 아무 옷이나 손에 잡히는대로 의자에 걸쳐놓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고 오만 생각만 꼬리를 물었다. 래일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낼지, 화면 밖의 목소리는 화면안의 목소리와 얼마나 다를지, 그런 시답잖은 걱정들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시 손전화가 울리였다. 블루동지에게서 온 문자였다. 《누나, 나도 잠 안 온다. 그냥 우리 래일 하루종일 떠들자.》 짧은 그 한마디에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였다. 나 혼자만 이 밤을 뒤척이는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가 그렇게 든든할수가 없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래, 래일 실컷 떠들자. 대신 잠은 좀 자둬라.》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잠들 기미가 전혀 없었다.

새벽 세시가 넘어가면서 창밖 벌레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대신 먼 데서 이따금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다시 지난 방송들의 클립을 몇개 찾아 틀어보았다. 화면속의 우리는 늘 웃고있었다. 그 웃음의 여덟할은 진짜였고 나머지는 방송이라는 자리가 만들어준 웃음이였을것이다.

그러나 래일부터는 그 구분마저 무의미해질 참이였다. 화면도 마이크도 없이 마주앉아 웃는 웃음에는 어떤 꾸밈도 끼여들 자리가 없을 터였다.

나는 문득 그 사실이 조금 두렵기도 하였다. 몇해를 두고 쌓아온 사이라 해도, 화면 하나를 걷어내면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셈이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앞선것은 기대였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기다려본 일이 내 생애에 다시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하루를 오래 기다려왔다.

시계가 네시를 가리킬무렵에야 나는 겨우 눈을 붙일수 있었다. 그마저도 얕은 잠이여서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였다.

꿈결에 블루동지의 웃음소리가 들린것도 같았다. 아하하하핳 하는 그 특유의 웃음이 귓가에 맴돌다 사라지고는 하였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이 훤하였다. 몇시간 자지도 못하였는데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 아니, 몸이 가벼웠다기보다 마음이 더는 무겁지 않았다고 하는편이 옳을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밤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까닭을 알것도 같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를 앞둔 밤이 아니라 육백날이라는 세월을 건너 마침내 문턱에 닿은 밤이였던것이다. 문턱이라는것은 원래 넘어서기 전이 가장 아득하고 넘어서고 나면 별것 아닌 법이다.

화면 저편의 목소리로만 알던 사람을 실제로 마주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사변이겠는가 하고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밤의 나에게는 그것이 곧 하나의 력사였다.

높임말로 서로를 님이라 부르던 시절부터 헤아리면 한해 하고도 반년이 넘는 세월이였다. 그 긴 시간을 오직 화면 하나로 버텨온 사이가 마침내 그 화면을 걷어내려는 참이였으니, 내가 잠 못 이룬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새벽의 옅은 빛속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밤새 헝클어진 이불을 정리하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되였다. 가자.》

그 한마디에 지난 밤의 온갖 뒤척임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것이여서, 각오를 다지는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쉬이 진정이 되는가 싶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 새벽 무슨 생각을 다 하였는지 낱낱이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밤이 두려움과 설렘 사이 어디쯤엔가 놓여있었다는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만약 그날 밤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한마디 건넬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가끔 생각하여본다. 아마 이런 말이 아니였을까. 《그렇게 옷 고민 안해도 된다, 어차피 래일 일은 다 잘 풀린다》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었고, 나는 그저 혼자 그 밤을 건너야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이런 밤을 몇번쯤은 지나는것 같다. 결과를 이미 아는 후대는 그 밤의 뒤척임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그 밤을 직접 건너는 당사자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크고 무거운 밤인것이다.

후날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낼 때마다 블루동지는 그날 밤 자기도 나와 똑같이 뒤척였노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우리가 같은 밤을 각자의 방에서 나란히 앓았다는 사실이 새삼 뭉클하였다.

육백날 동안 우리는 화면을 사이에 두고 참 많은 말을 주고받았지만, 정작 가장 많은 말을 나눈것은 어쩌면 그 마지막 밤, 서로 잠들지 못한채 주고받은 몇통의 문자였는지도 모른다.

그 문자들속에는 대단한 말이 하나도 없었다. 잠이 오냐는 물음, 옷은 뭘 입을거냐는 실없는 걱정, 떨린다는 솔직한 고백 -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그 시시한 말들이야말로 육백날의 기다림을 가장 정직하게 담고있었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맹세나 눈물어린 고백이 아니라 그저 《잠이 안온다》는 말 한마디가 오히려 사람의 진심을 더 잘 보여줄 때가 있다. 지나고보니 그 밤이 내게 가르쳐준것이 바로 그것이였다. 화려한 말보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오래 남는다는것을, 나는 그 뒤로도 여러번 다시 깨닫게 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우습고도 애틋하다. 몇해나 지난 하루밤의 뒤척임 하나를 이렇게까지 붙들고 늘어놓는것을 보면, 사람이 력사라 부르는것도 실은 이런 자잘한 밤들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제 날이 밝으면 우리는 마침내 마주앉을 것이였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마저 하기로 하고, 나는 여기서 이 밤의 기록을 접는다.

다만 한가지는 미리 적어두고싶다. 그 밤 새운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육백날의 기다림은 이미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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