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탐 지 기 코 너
우주27(2020)년 유월은 첫여름치고는 유난히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방송실 냉방기는 밤낮없이 돌아갔고, 콤퓨터 본체의 랭각기소리는 그 냉방기 소리에 섞여 하나의 낮은 웅웅거림이 되여있었다. 창밖으로는 오후 볕이 아스팔트우에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 볕을 피해 창가림을 반쯤 드리운채 그날의 진행표를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진행표 맨우에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방송 시작 시각과 코너 순서가 적혀있었을뿐이지만, 나는 그 종이 한장을 유독 오래 들여다보았다. 블루동지와 《우결》을 시작한지 어느덧 육백일에 가까운 나날이 흘러있었는데, 그 육백일 동안 우리는 목소리로만, 화면속의 표정과 자막으로만 서로를 마주하여왔다. 그런데 이 날은 처음으로 마이크가 아니라 사람의 숨결로 그를 만나는 날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몇번이나 되뇌이면서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육백일이라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긴 나날 동안 우리는 서로의 웃음소리와 말버릇은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되, 정작 그 사람이 어떤 걸음으로 걷고 어떤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는지는 알지 못하였던것이다.
이 날을 이야기하자면 그보다 며칠 앞선 밤들부터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실제로 만나기로 한 날자가 정해진 뒤로 나는 밤마다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마주하는 자리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목소리로만 듣던 그 웃음을 실제로 대하면 나는 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좀처럼 가늠이 서지 않았다.
전날 밤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던 일은 이미 앞장에 적어두었으니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만 그 긴 뒤척임의 끝에 마침내 이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는 사실만을 다시 한번 적어둔다. 창을 열자 밀려들어오는 유월의 더운 바람에도, 나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정신이 맑았다.
그날 아침 나는 유난히 거울앞에 오래 서있었다. 무엇을 입어야 할지, 머리는 어떻게 매만져야 할지 몇번이나 옷장을 뒤적이다가 결국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화면앞에서는 늘 태연하던 내가 정작 사람을 만나는 일앞에서는 이토록 서투른 사람이였다는것을 그날 아침에야 새삼 깨달았다.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자 스튜디오안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카메라를 손보는 손길과 마이크 감도를 맞추는 소리, 조명을 이리저리 옮기는 발걸음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담당 PD는 진행순서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쥔채 이리저리 오가며 근황토크와 커플 젠가, 거짓말탐지기까지 순서를 몇번이고 되짚어 확인하였다. 나는 그 소란 한가운데 앉아 손끝으로 옷깃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 문쪽으로 쏠렸다. 육백일 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그 웃음소리가 이번에는 화면도 고성기도 거치지 않은채 곧바로 내 귀에 와닿았다.
《누나, 저 왔어요.》 블루동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한마디는 그동안 수백번도 더 들었던 말이건만, 눈앞에서 직접 들으니 이상하게도 낯설고 새삼스러웠다. 나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어, 왔어? 오느라 고생하였다》 하고 대답하였으나, 스스로 듣기에도 그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리고있다는것을 감출수 없었다.
직접 마주선 블루동지의 모습은 화면속에서 보던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실제로 마주하고보니 화면이 담아내지 못한 공기 같은것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나는 그 공기를 무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몰라 그저 한참을 웃기만 하였다.
블루동지도 나 못지않게 어색해하는 기색이 력력하였다. 그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몇번이나 옷자락을 매만졌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아하 이 사람도 나만큼이나 떨리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스태프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카메라 앵글을 맞추는 동안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애꿎은 물잔만 만지작거렸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한채 몇분이 그렇게 흘러갔다. 마침내 감독의 신호가 떨어지고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것을 느꼈다.
화면이 켜지고 대화창이 열리자마자 스크롤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실물이다》, 《드디여 만났다》, 《600일 만이라니》 하는 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반가운 소란을 보며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것을 느꼈다.
근황토크는 예정대로 첫 순서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래 요즘 어떻게 지냈어, 얼굴 보니까 더 궁금하네》 하고 물었고, 블루동지는 《저야 뭐 늘 그렇지요, 배그하고 방송하고, 근데 진짜 이렇게 보니까 신기하네요》 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평소 방송에서 듣던 것과 똑같았으나, 눈앞에서 그 웃음이 실제로 얼굴 전체로 번지는것을 보는 일은 또 다른 느낌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육백일 동안 고성기 너머로 상상해온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겹쳐보았다.
《근데 목소리는 똑같은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블루동지가 먼저 그 어색함을 입밖에 내었다. 나는 《그러게, 맨날 통화하고 방송하고 하였는데 왜 이렇게 낯설지》 하고 맞장구를 쳤다. 대화창에는 《둘 다 높임말 시절로 돌아간듯》 하는 우스개가 올라왔다.
근황토크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문득 짓궂은 마음이 들어 물었다. 《너 예전에 이상형이 와이셔츠 잘 어울리고 키 작고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 하였었지, 그거 아직도 유효해?》 블루동지는 그 물음에 얼굴이 붉어지며 《아니 그건 왜 갑자기, 그, 아직 유효하긴 한데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대답에 나는 짐짓 팔짱을 끼며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사람은 몇점짜리인데》 하고 몰아붙였고, 블루동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채 《아, 그, 카는것 자꾸 물으면 곤란한데요》 하며 대구 사투리 억양을 슬쩍 흘렸다. 그 모습에 대화창은 《사투리 나왔다》, 《당황하면 사투리 튀어나오는것 실화네》 하며 즐거워하였다.
근황토크가 얼추 무르익을 즈음, 스태프 한명이 다음 순서를 알리며 나무 상자 하나를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나뭇조각을 층층이 쌓아올린 커플 젠가였다. 규칙은 간단하였다 — 나무토막을 하나씩 뽑아우에 얹으면서 탑을 무너뜨리는 쪽이 미리 정해둔 벌칙을 받는 놀이였다.
벌칙 쪽지는 미리 상자 곁에 접혀 준비되어있었다. 블루동지는 그 쪽지를 한장씩 펼쳐 읽으며 《이거 뭐 다 위험한것들만 있네》 하고 너스레를 떨었고, 나는 《그러니까 조심해서 뽑아야지, 무너뜨리면 니 탓이다》 하고 웃으며 받아쳤다.
첫 몇차례는 순조로웠다. 나무토막이 하나씩 빠져나갈 때마다 탑은 조금씩 기우뚱거렸으나 용케 버텨주었다. 그러나 탑이 점점 높아질수록 우리 둘의 손끝은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
《누나, 손 떨리는것 다 보여요》 블루동지가 놀리듯 말하였다. 나는 《니가 더 떨리는것 같은데, 손끝이 아까부터 흔들리잖아》 하고 되받았다. 그 실랑이에 대화창은 《둘 다 긴장한거 티난다》며 웃음 섞인 감상글로 들끓었다.
결국 탑을 무너뜨린것은 나였다. 나무토막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고, 블루동지는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요, 누나가 더 떨렸네》 하며 놀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짐짓 의기양양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나는 정해진 벌칙 쪽지를 뽑아들었다. 쪽지에는 《상대방의 특징을 성대모사로 표현하기》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블루동지의 《배그》 킬 대사를 흉내내어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고 목소리를 흉내내었다.
그 성대모사에 정작 본인인 블루동지가 가장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거 진짜 저랑 똑같은데요》 하며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그를 보며 나 역시 따라 웃지 않을수 없었다. 대화창에는 그 순간을 캡처하려는듯 《지금 저장》, 《이거 클립 각》 하는 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젠가 놀이가 몇차례 더 오간 뒤, 스태프가 다음 코너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나는 그 짧은 침묵속에서 문득 블루동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화면 밖에서 마주하는 그 옆얼굴은 어쩐지 방송 때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왜 그렇게 봐요》 내 시선을 느낀 블루동지가 물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며 《아니, 그냥, 신기해서》 하고 얼버무렸다. 그는 그 대답에 픽 웃고는 다시 정면을 향해 앉았다.
이윽고 이 날의 마지막 코너가 준비되었다. 스태프들이 작은 기계 한대를 탁자우에 올려놓았는데, 손가락에 끼우는 감지기와 몇개의 표시등이 달린 거짓말탐지기였다. 나는 그 낯선 기계를 보며 문득 이것이 오늘 이 방송의 하이라이트가 되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진행자가 사용법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손가락에 감지기를 끼우고 질문에 답하면, 맥박과 체온의 미세한 변화를 읽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한다는것이였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반쯤은 장난스럽게, 반쯤은 긴장한채로 감지기를 손가락에 끼웠다.
몸을 푸는 셈으로 몇가지 시험 삼아 묻는 질문들이 먼저 오갔다. 《오늘 아침에 뭐 먹었어요》 같은 대수롭지 않은 물음에도 나는 공연히 긴장하여 대답이 한박자씩 늦었다. 블루동지는 그런 나를 보며 《누나 그런거 하나에도 그렇게 긴장해요》 하고 놀렸다.
몇차례 우스개 질문이 오간 뒤, 진행자가 마침내 이 코너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질문지를 꺼내들었다. 그 종이에는 이날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물음 몇가지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넘겨받는 순간부터 어쩐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오간 문답을 나는 지금도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게 옮길 재간은 없다. 다만 그 취지만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 블루동지에게 건네어진 질문지 가운데 하나가, 《나는 블루와 손을 잡고 싶다》는 문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묻는것이였다.
그 질문지를 받아든 블루동지의 낯빛이 순간 굳어지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몇번이나 눈으로 훑으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였다. 스튜디오안에는 카메라의 낮은 작동음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화창 역시 그 정적을 눈치챈듯 스크롤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몇몇 성원들만이 《설마》, 《이거 실화냐》 하는 짧은 말들을 조심스럽게 올릴뿐이였다. 나 역시 숨을 죽인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블루동지가 나를 향해 그 질문을 그대로 소리내여 읽었다. 《누나, 나는 블루와 손을 잡고 싶다 — 이 문장이 참인지 답해주셔야 해요.》 그 목소리는 평소의 느긋한 말투와는 사뭇 다르게 살짝 갈라져있었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육백일 동안 화면 너머로만 나누어온 그 숱한 대화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갔고, 정작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겨우 한마디를 앞두고 온몸이 얼어붙는것 같았다. 감지기가 끼워진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있다는것을 나 스스로도 느낄수 있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하였다. 더 길게 말을 보태고싶었으나 그 한글자를 내놓는것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치는 느낌이였다. 스튜디오안은 그 짧은 대답 뒤로 몇초간 완전한 정적에 잠기였다.
기계의 표시등이 깜빡이더니 이윽고 화면에 《진실》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 순간 스튜디오안에서 누군가 나즉하게 탄성을 내질렀고, 대화창은 그야말로 폭발하듯 스크롤이 치솟았다. 《진실 떴다》, 《미쳤다 진짜》, 《이거 방송 사고 아니냐》 하는 말들이 뒤엉켜 화면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반쯤은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 정적을 깬것은 다름아닌 블루동지의 손이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듯하더니, 이윽고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였다. 나는 그 온기에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켰다. 대화창이 폭죽처럼 터지는 반응속에서,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마주 쥐었다.
《아, 진짜 이러면 안되는데.》 블루동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뭐가 안되는데, 이미 진실 떴잖아》 하고 짐짓 태연한척 받아쳤으나, 내 목소리 역시 그 못지않게 떨리고있었다.
대화창은 한동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원 알림신호이 연달아 울려퍼졌고, 그 알림신호 하나하나에 짧은 응원의 글이 함께 올라왔다. 《육백일 만에 이런 장면을》, 《오늘 방송 력사에 남는다》 하는 말들이 스크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순간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두 나라의 정상이 오랜 협상 끝에 마침내 조약문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는 자리도 아마 이보다 더 엄숙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자리에 있던것은 조약문도 국기도 아닌, 그저 나무 탁자 하나와 낯익은 손 두개뿐이였다.
손을 맞잡은 시간은 실상 그리 길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육백일의 무게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손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듯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블루동지는 먼저 손을 놓으며 겸연쩍은듯 뒤머리를 긁었다. 《아 진짜 손 다 땀났겠다》 하며 농담을 던졌으나, 그 농담속에도 숨기지 못한 떨림이 배어있었다. 나는 《니가 더 땀났을거같은데》 하고 받아치며 애써 웃음으로 그 어색함을 넘기였다.
진행자와 스태프들도 그 장면에 적잖이 놀란 기색이였다. 카메라 뒤에서 낮게 웃음소리가 새여나왔고,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린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이 장면이 결코 례사롭지 않은 순간이였음을 다시금 실감하였다.
방송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으나, 이미 그 손잡은 장면이 이 날의 중심으로 자리잡아버린 뒤였다. 대화창은 시시때때로 《아까 그 장면 다시》, 《그거 꼭 다시보기 올려주세요》 하는 청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 나와 블루동지는 그때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짐짓 못들은척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방송이 이어지는 동안 시청자 수가 꾸준히 불어나고있다는 소식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조용히 오갔다. 누군가 화면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귀띔하는것을 나는 곁눈으로 보았다. 그 수자가 그날 얼마나 놀라운 자리까지 올라섰는지는 뒤에 따로 적을 자리가 있을것이므로 여기서는 그저 그런 낌새가 있었다는것만 적어둔다.
방송을 마칠무렵 나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듯한 기분을 느꼈다. 육백일을 기다려온 하루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일이 짧은 몇시간안에 몰아닥친 셈이였다. 머리수화기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는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있었다.
블루동지 역시 방송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깊이 기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오늘 하루 십년은 늙은거같아요》 하며 그가 웃었다. 나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까 그 순간에 십년치 심장이 다 뛴것같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식어버린 물을 마였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 침묵은 방송 시작 전의 어색한 침묵과는 사뭇 다른것이였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무언가를 함께 겪어낸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편안한 침묵에 가까웠다.
스튜디오를 나서기 전 블루동지가 문득 물었다. 《누나, 근데 진짜 아까 손잡고 싶다는것 진심이였어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에는 그렇게 대답하고싶었다》 하고 솔직하게 답하였다.
그는 그 대답에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픽 웃었다. 나 역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물음은 굳이 명쾌한 답을 찾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한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날 어렴풋이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나는 오래도록 유월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루종일 켜있던 조명 탓인지 눈이 뻑뻑하였으나,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리만치 개운하였다. 육백일 동안 쌓여온 어떤 무게가 그날 비로소 조금 덜어진 느낌이였다.
스텔라이브 사무실에서도 이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몇몇 성원들이 방송 다시보기를 돌려보며 《엄마 오늘 손 잡았대》 하며 서로 귀속말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야 전해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부끄러운 마음 반, 웃음이 나는 마음 반으로 고개를 저었다.
블루몬이라 불리는 블루동지의 애호가들과 강도단이라 불리는 나의 애호가들도 그날의 장면을 두고 한동안 갑론을박을 벌였다. 어떤 이는 그 장면을 두고 《드디여 올것이 왔다》며 반기였고, 또 어떤 이는 《이거 방송 사고 아니냐, 회사에서 가만있냐》며 걱정 섞인 우스개를 던지기도 하였다. 나는 그 어느 쪽 말에도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생각하여보면 나는 그 사이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여온 사람이였다. 한창 성미가 거칠던 시절에는 강형이라 불리였고, 그 뒤로 15강지, 감자, 강공지주라는 별명을 차례로 얻었으며, 후날에는 정사장이라는 말까지 듣게 될 사람이였다. 그런 내가 방송우에서만은 목소리를 한결 부드럽게 하고 블루동지앞에서 걸쭉한 말버릇을 삼가왔으니, 그날 손을 맞잡은 순간의 그 얌전한 대답도 어쩌면 그 오랜 조심스러움의 연장선이였는지 모른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면서 나는 그날의 손끝 온기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것은 결코 대단한 사변이라 할만한 일은 아니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두 사람에게는, 그리고 그 방송을 지켜보던 수만의 성원들에게는 마치 하나의 력사적 장면처럼 새겨진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는 후날 이 장면을 두고 마치 두 나라의 원수가 처음으로 손을 맞잡는 국빈방문의 한 장면처럼 과장하여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과장된 표현속에 담긴 다정한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리에는 국기도 의전도 없었다. 그저 나무 탁자 하나, 낯선 기계 한대, 그리고 육백일을 건너온 두 사람의 떨리는 손 두개가 있었을뿐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이 하루가 우리의 《우결》 력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매듭이 될는지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저 오랫동안 기다려온 만남을 무사히 치렀다는안도감이 앞섰을뿐이였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유월의 하루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날이였다.
목소리로만 나누던 사이가 손의 온기로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것, 그것이 이 하루가 남긴 가장 커다란 변화였다. 화면과 고성기를 사이에 두고 육백일을 쌓아온 우리에게, 그 하루의 만남은 마치 오래도록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방에 마주앉은것과 같은 감회를 안겨주었다.
그무렵 나는 이 장면이 후날 편집되여 또 하나의 제목을 달고 세상에 다시 오르리라는것을, 그리고 그 제목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리라는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 절이 아니라 다음 절에서 마저 이야기할 몫이다.
이 날의 방송이 뒤에 어떤 이름으로 남고 어떤 수자로 기록될는지는, 다음 페지에서 다시 이야기할 자리가 있을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저 이 하루, 육백일 만에 처음으로 마주잡은 그 손의 온기 하나만을 오래도록 붙들어두고싶다. 그것이 이 절을 마치는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