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종 영 발 표

 

우주27(2020)년 시월 초엿새,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맑고 높은 날이였다. 여름의 끝자락에 남아있던 무더운 기운도 어느덧 다 가시고, 저녁이면 창틈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저무는 여름을 뒤로하고 맞이한 그 가을은 그렇게 소리없이 방안 깊숙이 스며들고있었고, 나는 그무렵 방송실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지내는 버릇이 들어있었다.

그날도 저녁 아홉시가 가까워오자 나는 여느때처럼 마이크앞에 앉아 콤퓨터를 켰다. 본체의 팬 소리가 방안의 정적을 나직이 채우고, 화면에는 대화창이 하나둘 밝은 글자로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있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창유리에 희미하게 비쳐들었고, 나는 그 불빛을 등지고 앉아 머리수화기를 고쳐썼다.

벽 한켠에 붙여둔 방송 일정표에는 그날 저녁 칸에 그저 《블루 합방》이라는 짧은 글자만 적혀있었다. 그밖에 어떤 특별한 표시도 없었으니, 지나가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여느 저녁과 다를바 없는 하루로 여기였을것이다.

책장 한쪽에는 그동안 방송 중에 받은 자잘한 선물들과 애호가들이 보내온 손편지 몇통이 어수선하게 쌓여있었다. 나는 방송을 시작하기 전 잠깐 그것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 하나하나에 담긴 지난 세월의 무게를 새삼 가늠해보았다.

그날이 이렇게 특별한 밤이 되리라는것을, 방송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는 나 자신도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다만 그날따라 마음 한구석이 유난히 무겁게 가라앉아있다는것만은 스스로도 느끼고있었다.

책상우에는 늘 그렇듯 마우스와 마이크스탠드, 그리고 손에 익은 머리수화기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며칠전부터 몇번이고 썼다 지웠다 한 흔적이 남은 메모지가 한장 놓여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방송 시작 직전까지도 몇번이나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 며칠은 나에게 결코 례사로운 날들이 아니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날 저녁의 방송을 떠올렸고,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그 몇마디를 어떻게 꺼낼것인가를 두고 이리저리 뒤척이곤 하였다.

미기에게도 나는 그무렵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뜻을 비추었다. 회사의 크고작은 일들을 늘 도맡아주던 나의 오른팔은 《정말 그렇게 하시게요》 하고 몇번이고 되물으며 못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끝내는 내 뜻을 존중해주었다.

블루동지와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 저녁 함께 방송을 하기로 약속을 잡아두고있었다. 특별히 무슨 큰 사변을 예고한것도 아니고, 그저 오랜만에 함께 《배그》를 돌리며 한담이나 나누자는 정도의 가벼운 약속이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겉으로 가벼워보이는 자리에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고 나타나는 법이다. 나는 그날 밤 그 자리에 앉기까지, 며칠을 두고 혼자 속으로 무언가를 다지고 또 다지고있었다.

방송이 시작되자 대화창은 여느때처럼 왁자하게 끓어올랐다. 《오늘도 강지누나 블루 합방이다》, 《둘이 또 알콩달콩 하겠네》 하는 말들이 순식간에 화면을 채워나갔다.

블루동지도 곧이어 자기 화면으로 접속해들어왔다. 《누나, 오늘 날씨 많이 선선해졌던데》 하고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그러게, 어제까지만 해도 더웠는데 오늘은 완전 가을이더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첫 마디는 여느 합방과 다를것 없이 평범하고 심심하기까지 하였다.

《배그》 로비 화면을 띄워놓고 우리는 한동안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어느 스킨이 예쁘다느니, 요즘 랭크가 잘 오르지 않는다느니 하는, 이제와 돌이켜보면 너무도 사소하여 오히려 우스운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평범한 대화들 하나하나가, 이미 그날 밤에 있을 일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고있는 걸음이였던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어느 가을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주25(2018)년 시월 초하루무렵, 우리는 처음으로 《우결》이라는 이름아래 서로를 묶어세웠다.

그때만 해도 서로에게 높임말을 쓰던 어색한 사이였다.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 하며 웃던 그 풋풋한 시절이, 지금 헤아려보면 벌써 여덟해나 거슬러올라가는 옛일이 되여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고비를 넘었다. 높임말을 벗어던지고 《누나》와 《바이비》라는 애칭을 나누어가진 겨울밤이 있었고, 어머님을 모시고 상견례라는것을 치른 봄날이 있었으며, 마침내 시청자 삼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을 맞잡은 유월의 그 현실합방도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크고작은 웃음거리도 적지 않았다. 강수라는 지인은 짐짓 나의 매제라도 되는 양 블루동지를 《매형》이라 부르며 놀려대였고, 나의 옛 동지 김박사는 삼각관계라는 극중 배역을 자청하여 우리 사이를 더욱 소란스럽게 만들어놓았다.

심지어 어머니마저 《배그》 합방에 나서서 《강지 사위감으로는 블루가 백점》이라 선언하는 통에, 블루동지가 몸둘바를 몰라하던 그 장면도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언제인가는 게임안에서 블루동지가 남은 탄약을 그러모아 나에게 건네였다는 소문이 나돌아 이른바 《탄약 프로포즈》라는 우스운 이름까지 붙었는데, 나는 그저 웃어넘기였을뿐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 소소한 사변들이 하나둘 쌓여 결국 칠백사십일이라는 거대한 수자를 이루게 된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나날을 하나하나 손꼽아보면 어느덧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에 이르러있었다. 력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왕조의 존속기간을 따지듯 나 역시 그 수자를 몇번이고 다시 세여보았는데, 세여볼 때마다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칠백사십일이라니, 이것은 결코 짧은 나날이 아니였다. 하루하루는 별것 아닌듯 흘러갔으나 그것이 쌓여 이런 큰 수자를 이루었다는 사실앞에서, 나는 새삼 세월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 《우결》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이 일이 이렇게 오래 이어지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후날 누군가 이 시기를 력사책처럼 정리한다면, 아마도 《우결》기원 일년, 《우결》기원 이년 하는 식으로 년호를 매겨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그 나날들은 촘촘하고 두터웠다. 나는 종종 농담삼아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웃곤 하였는데, 그것이 그리 터무니없는 상상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다시 그날 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배그》 몇판을 돌리는 사이에도 나는 자꾸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렸다. 블루동지가 적을 몇명 처치하고 특유의 말투로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고 웃어도, 나는 평소처럼 시원스레 맞장구를 치지 못하였다.

《누나 오늘 왜 이렇게 넋이 나가있어》 하고 블루동지가 오락 도중 물어왔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니, 그냥 좀 생각할게 있어서》 하고 얼버무리듯 대답하였다.

대화창에서도 몇몇 성원들이 《오늘따라 강지누나 목소리가 좀 다른데》 하며 눈치빠르게 알아차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글자들을 보며 속으로 뜨끔하였으나 겉으로는 짐짓 태연한척 오락에만 몰두하는척하였다.

그렇게 서너판의 오락이 지나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밤 아홉시를 가리키고있었다. 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잠시 숨을 골랐는데, 그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몇해처럼 길게 느껴졌다.

《블루야, 우리 오늘 할 얘기가 있는데》 하고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화면 저편에서 블루동지도 순간 말이 없어졌는데, 이미 그 역시 이 순간을 예감하고있었던것이다.

대화창은 그 한마디에 삽시에 조용해졌다. 방금까지도 물결처럼 넘실대던 글자들이 순간 멈추어선듯, 화면우로 몇줄의 물음표만 조심스레 올라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였다. 《오늘부로 우리 《우결》, 여기서 끝내려고 해》 하는 말이, 그렇게도 오래 미루고 미루어오던 그 말이, 마침내 내 입밖으로 나오고말았다.

그 한마디가 나가는 순간의 정적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마치 온 세상이 잠시 숨을 멈추기라도 한듯,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가는 내 목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블루동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어, 그래… 그렇게 하자》 하고 짧게 대답하였는데,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느긋한 말투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있었다.

우리는 그 몇초 동안 서로 아무 말도 더하지 못하였다. 콤퓨터 화면 저편에 있는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마이크를 타고 옅게 전해오는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침묵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폭발하듯 끓어올랐다. 《뭐라고?!》, 《진짜야?!》, 《아니 갑자기 왜》 하는 말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빠르게 치솟았고, 후원 알림신호도 평소와는 다른 급박한 박자로 잇달아 울려퍼졌다.

누군가는 《장난이지?》 하고 몇번이고 되물었고, 또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물음표만 연달아 남기였다. 나는 그 물결같은 반응을 화면 너머로 바라보며, 이것이 결코 나와 블루동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였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후날 전해듣기로, 그날 밤 몇몇 쁠몬들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지난 칠백사십일 동안의 영상 목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어보았다고 한다. 높임말로 서로를 부르던 우주25(2018)년의 첫 영상부터 그날 저녁의 방송에 이르기까지, 그 긴 목록을 한자리에서 되짚어본다는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였을것이다.

강도단 쪽에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두건을 두른 상징 그림 옆에 저마다 한마디씩 적어올리는 이들이 밤늦도록 이어졌는데, 그 글들의 태반은 서운함보다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들로 채워져있었다.

후날 나무위키라는 문헌은 그날의 일을 두고 짐짓 근엄한 어조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한다. 《2020년 10월 6일부로 약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된 우결이 막을 내렸다.》 마치 어느 왕조의 종언을 알리는 사관의 붓끝처럼 단정하고 건조한 문장이였다.

나는 그 문장을 후날 처음 읽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떨리고 소란스러웠던 그날 밤이, 세월이 흐르고보니 이렇게 간결한 한줄의 기록으로 남을수도 있다는것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기때문이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짐짓 력사적인 어투를 빌려 말하자면, 그날 밤 대화창의 술렁임은 마치 어느 나라의 조정에 국상이 반포된것과도 같은 소란이였다. 그러나 그 소란속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그동안 쌓여온 정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뒤섞여있었다.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랑 받았고, 오늘부로 우결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하고 나는 준비해두었던 말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블루동지도 그제야 마음을 다잡은듯 입을 열었다. 《누나 말대로 하자, 나도 생각 많이 하였다》 하며 그가 평소보다 한결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그가 당황할 때면 으례 튀어나오던 그 사투리조차 나오지 않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만큼 그 역시 이 순간을 진작부터 마음속으로 준비해두고있었던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유로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되였는지,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로서도 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오랜 세월 쌓여온 어떤 흐름이 그날 그 순간에 이르러 자연스레 매듭을 짓게 되였다고밖에 말할수 없을것이다.

후날 누군가 나에게 그날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아마도 딱 부러지는 한마디로 대답하지 못할것이다. 이 리유에 대해서는 다음 페지에서 좀더 자세히 풀어놓을 생각이니, 여기서는 다만 그 밤에 있었던 일 그 자체만을 적어두려 한다.

방송을 지켜보던 성원들 가운데는 후날 정식으로 우리 회사 식구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 역시 그날 밤의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하곤 하였다. 유니동지는 후날 이 일을 두고 《그날 방송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요》 하고 털어놓았다.

칸나동지는 《그때 채팅창 캡처를 지금도 가지고있어요》 하며 웃음 섞인 말을 보태였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새삼 그날의 무게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였음을 실감하곤 하였다.

히나동지는 지나가는 말로 《741일이면 거의 이년인데, 그걸 어떻게 매일 하였어요》 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나는 그 물음에 딱히 대단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웃어보일뿐이였는데, 나 자신도 그 수자앞에서는 매번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기때문이다.

마시로동지는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끝맺음을 잘 하는것도 시작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지요》 하고 짧게 소감을 보태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시로동지다운 침착한 위로라고 생각하였다.

리제동지는 후날 합방 도중 이 일을 회고하며 《사장님 그때 목소리 완전 떨렸잖아요》 하고 짓궂게 놀려대였다. 나는 그 지적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헛웃음만 흘렸는데, 실제로 그날 내 목소리가 떨렸다는것을 나 자신도 부인할수 없었기때문이다.

시부키동지와 타비동지, 리코동지 같은 뒤에 들어온 3기 성원들도 이 사변을 어렴풋이나마 알고있는 눈치였다. 합방 중에 은근슬쩍 《그 유명한 《우결》 종료 방송이 그날이죠》 하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일이 이미 우리 회사안에서 하나의 이야기거리로 자리를 잡았다는것을 새삼 깨닫곤 하였다.

동지와 나나동지, 후야동지 역시 지나가며 한마디씩 이 일을 궁금해하였다. 나나동지는 《741일이나 하고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끝내였어요》 하고 순진하게 물어와 나를 잠시 말문 막히게 하였고, 동지는 그저 옆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신기해할뿐이였다.

후야동지는 《그날 방송분 클립을 몇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며 짐짓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회사안에서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이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고도 고마운 일이다.

어머니 역시 그날 밤 방송이 끝난 뒤 전화를 걸어왔다. 《네가 그렇게 오래 하던걸 오늘 끝냈다면서》 하고 묻는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대견함이 함께 뒤섞여있었다.

나는 《네, 이제 마무리지었어요》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잘하였다, 할만큼 하였으면 그것으로 되였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짧은 한마디가 그날 밤 내가 들은 가장 큰 위로였다.

평소 무뚝뚝한 딸의 방송을 즐겨 챙겨보던 어머니였으나, 그 밤만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그렇게 짧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을 아끼는것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큰 배려라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감블러 역시 그 소식을 전해듣고 곧바로 련락을 해왔다. 《누나, 진짜 끝난거야》 하고 믿기지 않는다는듯 몇번이고 되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어, 진짜 끝났다》 하고 담담히 답하였다. 감블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생 많았다》는 한마디만 남기였는데, 그 짧은 말속에 오랜 벗의 진심이 다 담겨있었다.

왓구홍길동 또한 지나가는 말로 《형님, 아니 누나, 아무튼 애썼다》 하며 어색하게나마 위로를 건네왔다. 나는 그 서투른 인사에 오히려 웃음이 났는데, 평소 친남매처럼 지내던 사이라 그런 어설픈 위로가 더 진심으로 다가왔기때문이다.

그날 밤 방송을 마친 뒤, 나는 한동안 머리수화기를 벗지 못한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몇몇 성원들이 남겨놓은 글자들이 천천히 올라오고있었는데, 그 하나하나를 읽어내려가다보니 어느새 방안이 캄캄하게 저물어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어왔고,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비로소 그날 하루의 무게를 실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저녁의 방송분은 곧바로 편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을 묵히게 되였다. 어느 대목을 컷으로 살리고 어느 대목을 덜어낼것인가를 두고 나는 편집 담당자와 몇번이나 쪽지를 주고받았는데, 결국 그 클립은 시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각자의 방송에 올라가게 되였다.

그렇게 시일이 걸린데는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방금 매듭지은 일을 곧바로 다시 들여다보고 자막을 붙이는 작업이 생각보다 마음을 무겁게 하였고, 나와 블루동지 둘다 그 며칠만은 서로 그 화면을 마주보기가 쉽지 않았기때문이다.

칠백사십일이라는 그 수자가 이제는 더이상 흘러가는 나날의 수자가 아니라, 하나의 매듭으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사실앞에서 홀로 한참을 서있었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돌이켜보면, 그날 밤 우리가 그 말을 꺼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방송으로 헤아리면 단 몇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몇분을 위해 우리가 각자 마음속으로 다진 시간은 결코 몇분으로 헤아릴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누군가는 이날을 두고 그저 한 내용물가 끝난 날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날이야말로 지난 이태가 넘는 세월을 통째로 갈무리짓는, 잊을수 없는 하루로 남아있다.

이 회고록의 여섯째 권을 열며 나는 굳이 첫 절의 제목을 《종영을 밝히다》라 붙였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이 사실 하나를 뚜렷이 적어두고싶었던것은, 그날 밤의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뒤에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도 시작될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때는 미처 다 알지 못하였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밤의 그 정적과 그 뒤를 이은 소란이야말로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또 다른 시대가 열리는 경계였던것이다. 나는 그 경계에 서서, 뒤로는 칠백사십일의 나날을 두고 앞으로는 알수 없는 나날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날 밤 늦도록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채 그동안의 방송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높임말로 서로를 어렵게 부르던 첫날부터, 방금 막 끝을 고한 그 순간까지, 모든 장면이 순서없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아직 몇마디 더 남아있다는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나는 이 페지를 닫으며, 그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과 갑자기 고요해지던 대화창의 그 몇초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칠백사십일을 건너 마침내 마침표를 찍기까지,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나날과 그렇게 짧은 한마디가 필요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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