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마 지 막 공 기

 

우주27(2020)년 시월에 접어들자 날씨는 어느새 서늘해졌다. 여름내 활짝 열어두던 창문도 이무렵에는 반쯤만 열어놓는 버릇으로 바뀌여있었다. 방송실 창틈으로 스며드는 가을바람은 창가림자락을 가만가만 흔들고 지나갔고, 콤퓨터 본체의 팬 소리는 여느때처럼 무겁게 웅웅거렸다. 그런데 그 익숙한 소리조차 그날 저녁만은 어쩐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랭수 한컵이 놓여있었다. 화면의 푸른 불빛만이 어두운 방안을 희미하게 밝히고있었고, 마우스우에 올려둔 손끝은 그날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 냉기를 애써 무시한채 다시 화면을 향해 자세를 고쳐앉았다.

시간은 저녁 아홉시를 넘어서고있었다. 방송은 이미 몇시간째 이어지는 중이였고, 《배그》 화면은 여전히 켜진채로 자기장이 좁혀오는 소리를 내고있었다. 대화창은 그날따라 유난히 빠르게 올라가고있었으나, 나는 그 빠르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하고있었다.

조금전 나는 이미 그 말을 하였다. 《우결》을 시작한지 칠백사십일일째 되는 이날, 이제 그만 접겠다는 말과 함께 미련이 없다는 말도 함께 내던진 뒤였다. 그 말들이 정확히 어떤 낱말로 오갔는지는 앞장에 이미 적어두었으니 여기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말이 떨어진 다음의 그 공기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의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말을 마친 순간 방안에는 잠시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 마이크는 여전히 켜져있었으나, 그 순간만은 나도, 화면 저편의 블루동지도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하였다. 대화창마저 한순간 멈춘듯하였다. 평소라면 쉴새없이 올라가던 글자들이 그 몇초 동안은 마치 숨을 죽인것처럼 뜸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봇물이 터지듯 대화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놀람의 말들과 아쉬움의 말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하였다는 위로의 말들이 뒤섞여 순식간에 화면을 가득 채웠다. 후원 알림신호도 잇달아 울려퍼졌는데, 평소라면 반갑게 웃어넘기였을 그 소리가 그날 저녁만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나는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글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으나, 이상하게도 그 하나하나가 눈에 다 들어왔다. 《누나》 하고 블루동지가 나직이 불렀다. 나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왜》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진짜 끝난거네》 하고 그가 다시 말하였다.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채 한동안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러게, 진짜 끝났다》 하고 나는 겨우 대답하였다. 목소리는 담담하게 나갔으나속은 그렇지 못하였다.

얼굴을 마주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기에, 서로의 표정을 짐작만 할뿐 확인할 길이 없다는것이 그날따라 유난히 아쉽게 느껴졌다. 카메라도 없고 얼굴도 없는 방송을 그렇게 오래 함께 이어왔으면서도, 정작 가장 무거운 순간에는 서로의 낯빛 하나 살필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 순간 화면 대신 상상으로만 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몇해를 함께 방송하였어도 정작 마주앉아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이런 아쉬움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창밖 골목에서는 늦은 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평소라면 무심히 흘려들었을 그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뚜렷하게 들려왔는데, 아마도 방안이 그만큼 고요해진 탓이였을것이다. 가로등 불빛이 창틈으로 비스듬히 스며들어 책상 한켠을 옅게 물들이고있었다.

그런데 이 저녁의 공기를 말하자면, 그보다 앞선 그날 오후부터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몇시간 동안 나는 유난히 안절부절못하였다. 평소라면 방송 시작 직전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딴 일을 보던 나였는데, 그날만은 몇번이고 메모지를 뒤적이며 할 말을 다시 가다듬었다.

정작 방송에서는 준비한 말의 절반도 그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슨 큰 의식이라도 되는 양 신경이 쓰였다. 오른팔이라 부르는 미기도 그날 오후 지나가는 말로 《오늘 진짜 하실거예요》 하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어, 오늘 할거다》 하고 짧게 대답하였는데, 그 짧은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몇번이고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블루동지도 그날따라 메신저로 여러번 말을 걸어왔다. 《누나, 오늘 진짜 하는것이야》 하고 그가 몇번이나 되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어, 오늘 할거다》 하고 짧게 답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 자신도 그 말을 몇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고있었다.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나는 일찌감치 방송실 자리에 앉았다. 평소 즐겨먹던 떡볶이도 그날만은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머리수화기를 쓰고 마이크를 점검하면서도 손끝이 자꾸 떨려왔다. 저혈압 체질이라 원래도 아침저녁으로 몸이 무거운 편이였으나, 그날의 그 떨림만은 몸의 탓이 아니라는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있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뒤척인 끝에 마침내 방송이 시작되였다. 여느때처럼 《배그》를 켜놓은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끝내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이야기가 다시 그날 저녁으로 돌아온다.

말을 마친 뒤의 그 정적속에서, 나는 문득 지난 칠백사십일일의 나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것을 느꼈다. 높임말로 서로를 어렵게 부르던 첫날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상견례를 치르던 봄날, 그리고 육백일만에 손을 맞잡던 그 여름날까지, 그 모든 장면들이 그 몇초 사이에 다시 눈앞을 스쳐갔다.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은 흐릿한 사진처럼 겹쳐졌다가 이내 흩어지곤 하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칠백사십일일을 다 되짚어보았다는것이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블루동지의 목소리도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늘 차분하던 그 톤이 그날만은 어딘가 가라앉아있었는데, 애써 담담한척하는 기색이 오히려 더 뚜렷이 느껴졌다. 《속시원하다, 그지》 하고 내가 먼저 농담처럼 물었다. 블루동지는 잠시 웃다가 《속시원하기도 하고 좀 이상하기도 하고》 하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블루동지는 그날따라 말끝에 낯선 사투리가 문득문득 묻어나왔다. 평소 당황하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는 그 말투가 그날은 유난히 자주 들렸는데,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애써 감추려던 떨림의 흔적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나는 짐짓 못 들은척 넘기였으나, 속으로는 그 사투리가 반갑고도 짠하게 느껴졌다. 서울말을 능숙히 구사한지 오래인 사람도 결국 떨리는 순간에는 고향의 말투를 감추지 못하는 법이였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후련함과 서운함이 반반씩 뒤섞인 그 이상한 감정을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지 알수 없었다. 대화창은 여전히 빠르게 올라가고있었다. 《수고하였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잊지 못할것 같아요》 하는 말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그 사이사이로 《아쉽다》는 말도 적지 않게 섞여있었다. 나는 그 두 마음이 결코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는것을, 그 화면을 들여다보며 새삼 깨달았다. 강도단 몇몇은 그새 자신들의 상징인 두건 그림을 다시 꺼내들어, 짐짓 상복이라도 두른것처럼 검은 리본을 그려붙인 그림을 대화창에 걸었다. 나는 그 우스운 그림을 보며 어이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림밑에는 《우리 엄마 이제 뭐하고 사나요》 하는 우스개소리도 달려있었다. 나는 그 감상글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였는데, 그날은 별의별 우스개소리에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블루동지의 오랜 팬인 쁠몬들도 저마다 감상글난 대신 대화창에 몰려와 짧은 인사말을 남기였다. 《블루몬들도 다 지켜보고있어요》 하는 말이 유난히 자주 눈에 띄였다.

몇몇 시청자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지난 방송의 캡처 화면들을 꺼내들어 대화창에 나란히 걸어놓기도 하였다. 높임말을 쓰던 시절의 캡처부터 최근 사진까지 죽 늘어놓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많은 기록들이 남들의 손에 차곡차곡 쌓여왔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누군가는 그 캡처들밑에 날짜까지 꼼꼼히 적어놓아, 마치 조그마한 년대기라도 엮어놓은듯하였다.

대화창 곳곳에는 《ㅠㅠㅠㅠ》 같은 초성들이 줄지어 올라왔고, 몇몇은 낯익은 《ㅁㅇㅁㅇ?!》라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쓰며 그 순간을 오래된 자기들만의 말로 되새기였다. 나는 그 낯익은 표현을 볼 때마다, 우리가 남긴 무수한 영상 제목들이 어느새 성원들 사이에서 하나의 고유한 말투처럼 자리잡았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몇해에 걸쳐 쌓인 그 말투 하나하나가, 이제와 돌이켜보면 우리 두 사람만의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지켜준 모든 이들의것이기도 하였다.

방송이 끝나갈무렵, 회사 단체대화방에도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간 모양이였다. 나는 머리수화기 너머로 손전화가 연달아 울리는것을 느꼈으나, 방송 중이라 선뜻 들여다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방송을 마치고서야 확인해보니, 성원들의 말이 저마다 짧게 남겨져있었다.

유니동지는 《사장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였어요》 하고 적어놓았고, 칸나동지는 《속시원하시겠다, 그래도 조금 아쉽다》 하며 짧은 말을 남기였다. 히나동지는 《누나 소리 이제 못 듣는것이예요》 하며 짐짓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마시로동지는 여느때처럼 차분한 말투로 《고생 많으였어요, 푹 쉬세요》 하는 인사만 짧게 남기였다.

리제동지는 《이제 퍼스널컬러 바꾸셔야겠네요》 하며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나는 그 글을 나중에 읽고서야 피식 웃음을 흘렸는데, 그 순간만은 그런 농담조차 고맙게 느껴졌다. 시부키동지와 타비동지, 리코동지 같은 3기 성원들도 짧게나마 한마디씩 남겨놓았다. 다들 《우결》이라는 이름을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의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있는 눈치였다.

동지와 나나동지, 후야동지 역시 저마다의 말투로 위로와 축하가 뒤섞인 인사를 남기였다. 회사 전체가 마치 오래 미뤄온 무슨 큰 사변을 함께 지켜본것처럼, 그날 저녁만은 평소보다 유난히 조용하였다. 어머니에게서도 짧은 문자가 와있었다. 《장하다, 애썼다》는 몇마디뿐이였으나, 나는 그 짧은 글속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오랜 벗 감블러도 짤막한 말을 보내왔다. 《누나, 진짜 끝났다며》 하고 먼저 물어온 뒤, 《수고 많았다, 진작에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서 놀리는 기색보다는 담담한 위로가 더 크게 묻어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왓구홍길동도 지나가듯 한마디를 남기였다. 《속시원하겠다, 좋은 결정이다》 하는 그 짧은 말이 오히려 어떤 긴 위로보다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강수는 짐짓 서운한 티를 내며 《매형 이제 못 보는것냐》 하는 우스개소리를 남기였다. 나는 그 말에 웃음이 났으나, 한편으로는 그 우스개소리속에도 진심이 섞여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나는 그 사이 책상우에 놓아두었던 랭수 한컵을 그제야 한모금 들이켰다. 이미 다 식어버린 물이였으나, 목을 축이고나니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듯하였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놓여있던 그 물컵 하나가, 이 저녁의 시작과 끝을 고스란히 지켜본 셈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방송 화면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니, 블루동지는 여전히 화면 저편에서 조용히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배그》 킬을 잡고 넉살좋게 웃어젖히던 그 목소리도, 그날만은 한결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이거 뭔가 되게 대단한 조약이라도 맺은 기분이다》 하고 내가 짐짓 과장스레 말을 던졌다. 블루동지는 그 말에 실없이 웃으며 《그러게, 무슨 나라 사이 조약식 같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 무거운 공기를 조금씩 눅여나갔다. 지나고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말들이였으나, 그 순간에는 그런 농담이야말로 우리 둘 사이를 지켜주는 유일한 끈이였다. 대화창에서도 누군가 《력사에 남을 방송이다》 하는 우스개소리를 남기였다. 나는 그 글을 보며 피식 웃었는데, 어쩐지 그 과장된 말이 마냥 헛말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또 누군가는 《이 방송을 몇년 뒤에도 다시 보게 될것 같다》는 말을 남기였다.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돌이켜보면, 그 성원의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였던 셈이다. 누군가는 벌써 그 순간을 짧게 잘라 컷으로 만들어 돌리기 시작한 모양이였다. 나는 그런 클립들이 후날 두고두고 돌아다니리라고는 그때까지 미처 짐작하지 못하였다.

방송은 그렇게 조금씩 잦아들며 끝을 향해가고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자잘한 일들을 몇마디 되풀이하며 웃다가, 서로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였다. 《누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 하고 블루동지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너도 고생 많았다, 바이비》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이제 뭐하지, 우리》 하고 블루동지가 문득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딱히 답을 찾지 못하여 《몰라, 일단 오늘은 좀 쉬자》 하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블루동지도 따라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았다.

그 짧은 인사를 끝으로 방송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화면이 꺼지는 순간까지도 대화창에는 못다한 말들이 빼곡히 올라오고있었다. 마이크를 끄고나자 방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콤퓨터 본체의 팬 소리만이 아까와 다름없이 웅웅거리고있었으나, 그 소리조차 어쩐지 낯설게 들렸다.

오래 앉아있었던 탓인지 어깨와 목이 뻐근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몇번 이리저리 틀어보았으나, 굳어진것은 어깨만이 아니였던 모양인지 마음 한구석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창가에 서서 굳은 목덜미를 손으로 눌러가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방금까지도 화면 저편에서 함께 웃던 목소리가 이제는 아득히 멀어진듯한 그 순간이, 나에게는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머리수화기를 벗어놓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슬며시 들어와 방안의 후끈한 열기를 조금씩 식혀주고있었다. 화면속 대화창은 이미 닫혔으나, 나는 그 캄캄해진 화면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빠르게 오가던 말들이 이제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수 없었다.

나는 문득 지난 칠백사십일일의 나날을 다시 헤아려보았다. 높임말을 쓰던 어색한 첫날의 영상 제목들, 이를테면 《강지 님은 이미 제 거잖아요》라던가 《잘못된 만남》같은 옛 제목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탄약으로 프로포즈를 하였다던 짓궂은 소동도, 갈비 한상을 걸고 내기를 벌이던 여름날의 소란도, 그 모든것이 그 밤의 정적속에서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를 누나와 바이비라 부르며 참으로 많은 사변을 함께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 모든것을 끝맺는 자리에서는, 무슨 거창한 말 대신 그저 몇마디 짧은 인사만이 오갔을뿐이였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큰 사변일수록 그 끝은 오히려 조용하고 담담한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날 밤 홀로 앉아 새삼 깨달았다.

사람들은 흔히 큰 일의 시작은 요란하나 그 끝은 초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을 겪고서야, 오히려 그 반대일수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시작은 소문없이 조용하였던 우리의 인연이, 끝에 이르러서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을 한자리에 모아놓았으니 말이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채 목소리만으로 이어온 칠백사십일일이였기에, 그 마지막 순간마저도 서로의 표정을 보지 못한채 흘려보내야 하였다는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굴을 가린채로도 이만큼 진한 마음을 나눌수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후날 어느 자리에서 나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것이 오히려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이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의 그 정적을 돌이켜보면 그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였다는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날 저녁의 그 공기를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마이크가 꺼진 뒤의 그 정적, 반쯤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던 가을바람, 그리고 캄캄해진 화면 화면 — 그 모든것이 그날 저녁의 마지막 공기로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 이 페지를 쓰며 돌이켜보면 그 짧은 정적이야말로 칠백사십일일이라는 긴 나날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순간이였다.

시작할 때는 그렇게도 요란하였던 우리의 인연이, 끝을 맺을 때에는 이렇게도 조용한 숨결로 마무리되였다. 방안에 홀로 남아 그 정적을 곱씹으며, 나는 이제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서 완전히 끝나는것은 아니라는것을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그것이 어떤 예감이였는지는 그때의 나로서도 다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였다. 그날 저녁의 그 마지막 공기를 나누어 마신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였다는것, 그리고 그 공기속에는 칠백사십일일의 웃음과 눈물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는것이다. 후날 우리는 이날의 방송을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것이였으나, 그것은 아직 뒤에 올 일이다.

그날 밤 나는 자리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노라니, 낮에 보았던 대화창의 글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듯하였다. 몸은 지쳐있었으나 머리속은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도 뚜렷하게 깨여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며칠동안 우리 둘 사이에는 묘한 여운이 감돌았다. 방송으로는 이미 끝을 알렸으나, 정작 그 끝을 영상으로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아직 열흘 남짓한 날이 더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자리를 달리하여 다시 적어야 할것이다.

이렇게 하여 칠백사십일일째 되는 그날 저녁은 저물어갔다. 요란한 시작과 조용한 끝을 함께 품은 그 하루가, 우리 두 사람의 력사에 또 하나의 페지로 접혀들어갔다. 그리고 그 페지우에는, 아직 우리 둘 다 다 읽지 못한 다음 장이 조용히 기다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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