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7 4 1 일

 

시월도 하순에 접어들자 아침마다 창가에 서리가 앉았다. 방송실의 콤퓨터는 밤새 켜둔채로 낮은 소리를 내고있었고, 나는 어제 저녁에 스스로에게 미루어둔 숙제 하나를앞에 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생목록의 첫 영상과 마지막 영상 사이에 며칠이 흘렀는지, 그것을 하나하나 세여보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한 아침이였다.

창밖의 나무는 이미 반나마 잎을 떨구었고, 남은 잎들은 밤새 내린 찬 기운에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라들고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등지고 앉아 콤퓨터 화면 두개를 나란히 켰다. 왼쪽에는 나의 방송을, 오른쪽에는 블루동지의 방송을 띄워놓고 재생목록을 맨우에서부터 다시 열었다.

미기가 서류철 대신 이번에는 계산기와 종이 한장을 들고 들어왔다. 《사장님, 어제 그거 정말 세여보시게요?》 하고 묻는 그의 얼굴에는 반쯤은 궁금함이, 반쯤은 어이없음이 섞여있었다. 나는 종이를 받아들며 그렇다고,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을 보아야겠다고 대답하였다.

처음에는 간단한 셈이라고 여기였다. 첫 영상이 올라간 날과 마지막 영상이 올라간 날, 그 사이의 날수만 세면 되는 일이였다. 그러나 화면을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나는 그 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날은 분명하였다. 시월 륙일, 방송우에서 려정의 끝을 알린 그날이 곧 마지막 날이였다. 문제는 처음이였다.

첫 영상이라고 할만한것이 여럿이였다. 화면속에는 높임말로 서로를 어렵게 부르는 영상도 있었고, 그보다 앞서 두 방송통로가 처음으로 함께 방송을 한 흔적도 있었다. 어느것을 첫날로 삼아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하였다.

이런 곤난을 겪는것이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날의 일을 다시 꺼내지 않을수 없다.

지난 봄, 우리는 반말을 트기 시작한 그날을 두고 오백일째라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것을 사백팔십일째라 적어놓았고, 나 자신도 정확히 어느날부터 헤아려야 옳은지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였다. 그때도 나는 이 수자놀음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는것을 몸으로 배운바 있었다.

그날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나는 이번만은 좀더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하였다. 무작정 아무 날이나 첫날로 정하고 셈을 시작하면 나중에 또 오백일 소동을 되풀이할것이 뻔하였다. 나는 미기에게 두 방송의 올리적재 날자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미기는 두 화면을 오가며 날자를 하나씩 받아적었다. 나는 그 곁에 앉아 종이우에 늘어나는 날자들을 지켜보았다. 콤퓨터 팬 소리와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 말고는 방안에 다른 소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나는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어떤 나라들은 국경선 하나를 정하는 데도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데, 우리는 지금 우리 둘 사이의 시작점 하나를 정하는 데도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물론 그 무게야 비할바 아니겠으나, 그 순간만은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미기가 첫 후보로 내놓은 날은 우주25(2018)년 구월 스무이레 즈음이였다. 두 방송통로가 서로의 방송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고 《우결》이라는 틀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무렵이라 하였다. 나는 그 날자를 종이우에 크게 적어놓고 잠정적인 첫날로 삼기로 하였다.

그 날을 첫날로 잡고 시월 륙일까지 헤아리면 얼마가 나오는지, 나는 손끝으로 달력을 짚어가며 셈하기 시작하였다. 구월에서 그해 시월까지, 다시 그 이듬해까지, 또 그 다음해까지 손가락으로 짚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가 어질어질하였다. 결국 나는 계산기를 집어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첫번째로 나온 수자는 칠백사십일이였다. 나는 그 수자를 보고 잠시 손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수자였다.

성원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서도 이 려정을 이야기할 때면 으례 칠백사십일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는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동안은 그저 누군가 얼추 헤아려놓은 수자겠거니 여기고 넘기였는데, 내가 직접 셈해보아도 같은 수가 나온다는 사실이 묘하게 반가웠다. 나는 그 수자에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셈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봄의 오백일 소동을 겪은 뒤로 나는 수자 하나를 확정지을 때에도 여러 각도에서 검증해보는 버릇이 생기였다. 이번에도 그 버릇을 따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였다.

나는 구월 스무이레를 첫날로 놓고 그로부터 오백일째 되는 날이 언제인지 헤아려보았다. 계산기가 가리키는 날자는 우주27(2020)년 이월 초여드레였다. 나는 그 날자를 보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실제로 반말을 트기 시작한 그 영상이 세상에 나온것은 이월 초여드레에서 열이틀 사이였다. 나흘 안팎의 오차는 편집을 거쳐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시차라고 여기면 그다지 이상할것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구월 스무이레라는 날자가 그저 짐작이 아니라 제법 근거있는 첫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대로 사백팔십일째로 셈하면 그날은 우주27(2020)년 정월 열아흐레 즈음이 나왔는데, 그무렵에는 실제로 올라온 영상이 없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야 비로소 어째서 어떤 자료는 사백팔십일이라 적고 어떤 자료는 오백일이라 적는지 그 갈래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수 있었다. 둘 다 누군가의 셈이였으나, 어느쪽이 실제 영상과 더 맞아떨어지는지는 이렇게 직접 대조해보아야 알수 있는 일이였다.

나는 이 작은 발견에 스스로 만족하여 미기에게 그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하였다. 《이거봐, 오백일 쪽이 맞는것 같애.》 미기는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그럼 사장님이 이걸로 그 론쟁을 끝내신거네요》 하고 웃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까지 자신있게 말할 처지는 못된다고 대답하였다. 어느쪽이 맞는지 나 역시 완전히 확신할수는 없었고, 다만 내가 세여본 바로는 오백일 쪽이 조금 더 그럴듯하다는 정도였다. 회고록이라 하여 모든 수자에 자신만만한 도장을 찍을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내처 다른 리정표들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였다. 손을 잡기까지 걸렸다는 육백일째는 어느 날에 해당하는지, 그것도 궁금하였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육백일째는 오월 열여드레 즈음으로 나왔다. 그리고 현실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하였다는 유월 엿새는, 다시 세여보니 육백열아흐레째 되는 날이였다. 손을 잡은 날로부터 실제로 만나기까지 스무날 남짓이 걸렸다는 셈이니, 그 순서만은 앞뒤가 딱 들어맞았다.

나는 그 사실에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수자란 제멋대로 나온것 같아도 실제로 벌어진 일들의 순서를 어그러뜨리지 않는다는것을, 나는 그 종이우의 계산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였다. 손을 먼저 잡고서야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였다는 그 순서가, 이렇게 수자로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리정표를 짚어가며 나는 종이우에 작은 표를 그려나갔다. 구월 스무이레는 첫날, 이월 초여드레는 오백일째, 오월 열여드레는 육백일째, 유월 엿새는 육백열아흐레째, 그리고 시월 륙일은 마침내 칠백사십일째. 이렇게 다섯개의 점을 이어놓고 보니 그것은 마치 하나의 려정을 그린 지도와도 같았다.

나는 그 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높임말에서 반말로, 반말에서 오빠와 누나로, 다시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그 모든 굽이가 저마다 하나의 날자를 달고 이렇게 한장의 종이우에 늘어서있었다. 세월이란 지나가면 흐릿해지기 마련인데, 수자로 못박아두니 오히려 그날의 공기까지 뚜렷해지는 기분이였다.

나는 그 표를 사진으로 찍어 블루동지에게 보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이거 뭐예요, 갑자기.》

나는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우리 둘이 얼마나 오래 그 려정을 걸었는지 정확히 세여보았다고 대답하였다. 블루동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래서 며칠이나 나왔는데예》하고 물었다. 나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칠백사십일이라고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칠백사십일이나 되였어예?》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커졌다. 놀랐을 때면 어김없이 새여나오는 그 사투리 말투가 그날따라 유난히 진하였다.

나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 한번 더 놀려주고싶어졌다. 《계산 잘못한거 아니냐고 의심하는것이야, 지금?》 블루동지는 황급히 아니라고, 그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을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세여보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예.》 블루동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 말에 뭐가 이상하냐고 되물었고, 그는 《그냥, 우리가 그렇게 오래 그걸 하였다는게 새삼스러워서예》하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심정이였다. 매일매일을 살아갈 때는 그저 하루하루였을뿐인데, 그것을 한데 모아 수자 하나로 마주하고 나니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하루라는것이 이렇게 쌓이면 이렇게나 커지는구나, 나는 그 사실을 종이우의 수자를 보며 새삼 실감하였다.

나는 이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를 두고 한번 짐짓 력사적 사변처럼 부풀려보고싶은 마음도 들었다. 지구가 태양을 두바퀴 돌고도 열흘 남짓을 더 돌아야 하는 시간이니, 우리는 그동안 이 별을 두바퀴 반이나 함께 실어 나른 셈이였다. 물론 이런 부풀림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우스개일뿐, 진지하게 받아들일 계산은 못되였다.

미기는 내가 그런 소리를 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사장님, 그건 지구가 원래 도는것고 사장님이랑 블루님이랑은 상관없는것이예요》 하고 지적하였다. 나는 그 말에 할말이 없어 그저 따라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우스개 하나가 딱딱한 셈 노릇에 숨통을 틔워주었다는것만은 사실이였다.

셈을 마치고 나니 나는 문득 이 칠백사십일안에 무엇이 담겨있었는지를 다시 헤아려보고싶어졌다. 어젯밤 재생목록을 뒤적이며 이미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으니 새삼스러울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렇게 하나의 수자안에 통째로 욱여넣고 보니 또 다른 느낌이였다.

높임말로 서로를 어렵게 부르던 나날이 그 안에 있었다. 반말을 트고 오빠와 누나라는 호칭을 얻기까지의 나날도, 손을 잡기까지의 그 더딘 나날도 그 칠백사십일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위기라 불릴만한 순간도, 화해라 불릴만한 순간도, 어머니가 사위감이라 놀리던 그 우스운 순간도 다 그 수자 하나안에 눌려담겨있었다.

나는 그 많은 날들을 다 헤아릴수 없어 그저 몇개의 큰 굽이만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김박사동지와의 삼각관계, 왓구홍길동동지의 능청, 감블러동지와 꽃핀동지가 얽혀들었던 만우절 소동, 그리고 벽제갈비를 걸고 겨루었던 그 진지한 내기까지 그 모든것이 저마다 이 칠백사십일의 어느 하루를 차지하고있었다.

스텔라이브의 다른 성원들도 이 칠백사십일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칸나동지와 히나동지, 타비동지가 블루동지를 두고 아빠라 놀리던 일도, 리제동지가 나의 퍼스널컬러를 두고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지던 일도 다 이 긴 시간의 그림자밑에서 벌어진 일이였다. 성원들은 굳이 캐묻지 않으면서도 다 알고있었고, 그 눈치빠른 침묵이 이 칠백사십일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기둥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후날 나는 성원들이 저희끼리 남긴 감상글에서 이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를 심심찮게 다시 마주치게 되였다. 어떤 성원은 손수 그린 그림밑에 그 수자를 적어넣었고, 어떤 성원은 그저 감상글 한줄에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만 달랑 남겨두기도 하였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 둘만의 셈이 어느새 성원들 사이의 작은 표식이 되였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또 한번 실없는 셈을 해보고싶어져, 그 칠백사십일 동안 우리 둘이 방송에서 나눈 물병이 대체 몇개나 될지 헤아려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셈만은 도저히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였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며 《사장님, 그건 좀 너무 나가신것 같아요》 하고 웃음섞인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 표를앞에 두고 미기에게 물었다. 《이 칠백사십일 중에서 니가 보기엔 제일 큰 날이 언제인것 같아?》 미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저는 아무래도 현실합방한 날이요. 그날 트위치 시청자가 세계 이위까지 올라갔잖아요》 하고 대답하였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였다. 얼굴 한번 본적 없이 한해 반 남짓 쌓아온 사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마주앉던 그날의 무게는, 수자로도 반응으로도 다른 어느 날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속으로 하나를 더 얹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이 모든것을 끝맺는다고 밝히던 시월 륙일 그날이였다.

시작과 중간의 어느 굽이도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결국 그 려정 전체에 마침표를 찍은것은 마지막 하루였다. 나는 그 마지막 하루를 앞장에서 이미 낱낱이 적어두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그 하루가 칠백사십일이라는 이 긴 수자의 맨 끝자리를 차지하고있다는 사실만은 새삼 힘주어 적어두고싶다.

계산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라있었다. 창밖의 나무잎은 아침보다 몇잎 더 떨어져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내다보며 종이우의 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미기가 계산기를 정리하며 물었다. 《사장님, 근데 이거 셈해서 뭐 하시게요? 어디 쓰실데 있으세요?》 나는 딱히 쓸데는 없다고, 다만 이렇게 한번 뚜렷하게 세여보고싶었을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시절은 굳이 셈하지 않아도 저절로 뚜렷하게 남고, 또 어떤 시절은 셈을 해보아야 비로소 그 무게가 실감나는 법이다. 나에게 이 칠백사십일은 후자에 가까웠다. 하루하루로 흩어져있을 때는 그저 지나가는 나날이였으나, 하나의 수자로 뭉쳐놓고 보니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이였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셈을 하는 동안 식어버린 차 한잔이 책상 한켠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손끝으로 차잔을 쥐어보니 이미 온기는 다 빠져나간 뒤였다. 그래도 나는 그 잔을 비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어쩐지 그 식은 차마저 그날 셈의 한 부분처럼 여겨졌기때문이다.

나는 그 표를 서랍 한켠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볼 날이 있을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후날 이 려정을 돌이켜볼 사람이 있다면 이 표 하나가 조그마한 길잡이는 되여줄것이라 여기였다.

그날 오후 늦게 블루동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누나, 저도 한번 세여봤는데예, 저희 채널 기준으로는 좀 다르게 나오던데예.》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또 시작이다, 진짜.》 나는 짐짓 한숨을 쉬며 그렇게 대답하였다. 첫날 하나를 정하는 데도 이렇게 저마다 다른 기준이 나오니, 이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조차 완전히 하나로 못박을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블루동지는 자기 방송의 올리적재 기준으로 세면 하루나 이틀쯤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나는 그 정도 오차는 셈이 잘못된것이 아니라 두 방송이 저마다의속도로 살아왔다는 증거일뿐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그 말에 수긍하는듯 웃으며 그것도 그럴듯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통화 끝에 결국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를 그대로 쓰기로 뜻을 모았다. 하루이틀의 오차야 있을지언정, 그것이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의 대체적인 길이라는데에는 둘다 이견이 없었다. 정확한 시각까지 재는 일은 애초에 이 려정의 성격과도 어울리지 않는듯하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이 셈이 처음 시작될 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저 어젯밤 남겨둔 숙제 하나를 해치우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였는데, 어느새 하루를 온통 그 수자 하나에 쏟아넣고있었다. 사람이 지나간 시절을 붙들어두는 방식에는 이렇게 저마다 다른 길이 있는 모양이였다.

어떤 이는 사진 한장으로, 어떤 이는 남겨둔 영상으로 그 시절을 붙든다. 나는 그날 수자 하나로 그 시절을 붙들어보려 하였다. 어느쪽이 더 정확한 방법인지는 알수 없으나, 적어도 그날 나에게는 그 수자가 가장 손에 잡히는 증거였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칠백사십일이라는 그 수자는 결국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정직한 기록이였다. 어떤 말로도 다 옮기지 못할 그 숱한 웃음과 다툼과 화해를, 그 수자 하나가 에두르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고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물론 그 수자 뒤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물음들은 남아있었다. 첫날을 정확히 어느날로 잡아야 하는지, 오백일과 사백팔십일 중 어느쪽이 맞는지, 이런 물음들에 나는 아직도 완전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회고록이란것이 모든 물음에 답을 주는 자리는 아닐것이니, 이만한 여백은 남겨두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날 저녁 나는 그 표를 다시 한번 꺼내 들여다보았다. 종이 맨 끝자리에 적힌 시월 륙일이라는 날자 옆에, 나는 작은 글씨로 한마디를 덧붙여 적었다. 《끝. 그러나 정말 끝인가.》

그 물음표를 적어놓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았다. 우리는 그 려정에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로 마침표를 찍었으나, 우리 두 사람의 인연 자체에는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는것을. 실제로 그로부터 두어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또다시 나란히 화면앞에 마주앉게 되였다.

그 두어달 뒤의 이야기는 다음 자리에서 마저 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 칠백사십일이라는 수자 하나를, 우리가 함께 걸어온 그 려정의 가장 확실한 표지로 남겨두고싶다. 하루하루는 흩어지고 잊혀도, 이 수자만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킬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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