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L i v e 2 D

 

우주28(2021)년 유월, 그해의 첫 장마전선이 아직 남쪽바다 어디쯤에서 머뭇거리고있다는 예보를 듣던 밤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방송실 창문 너머로는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스며들고있었고, 콤퓨터 두대가 나란히 돌아가는 랭각기소리만이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커피잔이 식어가고있었고, 벽시계의 초침소리만이 그 정적을 간간이 끊어놓았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빗기운을 머금은 유리창에 부옇게 번져있었고, 나는 그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래 앉아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몇해 사이 세상은 소리없이 바뀌여가고있었다. 화면 저편에서 그림으로 그려진 얼굴들이 하나둘 방송을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림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오락을 하는 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불어나있었다. 개중에는 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이미 그 세계에 자리잡은 이들도 있어, 나는 가끔 그들의 방송을 넋놓고 들여다보고는 하였다.

나는 그 흐름을 처음에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흘려들었다. 내가 몸담은 세계는 어디까지나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실사 방송의 세계라고만 여기였기때문이다. 세상일이란 흔히 그러하듯, 먼 이야기로만 여기던 흐름이 어느 틈엔가 내 발밑까지 밀려와있었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것을 깨달은것은 훨씬 뒤의 일이였다.

그무렵의 나는 몇해째 얼굴을 내놓고 방송을 해오던 사람이였다. 카메라 렌즈앞에 앉아 표정을 짓고 마이크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나의 하루하루였다. 방 한켠에는 오래된 조명 몇대와 낡은 웹카메라가 늘 자리를 지키고있었는데, 그것들은 몇해를 두고 내 얼굴을 비추어온 물건들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어느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한때 나는 《강형》이라 불릴만큼 거친 말투로 방송을 하던 사람이였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말들 사이사이에 욕설도 서슴지 않고 섞어넣던 나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지나 《15강지》로, 다시 《감자》로 불리는 사이 나는 조금씩 유순해졌다고들 하였다. 나 스스로는 그저 나이를 먹은 탓이라 여기였을뿐, 그것이 그리 큰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결》을 진행하며 나는 또 한번 말투를 고쳐야 하였다. 블루동지앞에서는 목소리 어조를 한결 부드럽게 하고 거친 말을 삼가야 하였으니, 오랜 벗 악녀가 《자기앞에서도 그렇게 좀 말해달라》고 서운해할 정도였다.

그렇게 말투 하나를 몇번이나 고쳐 다듬는 사이, 얼굴이라고 그대로일 리 없었다. 표정을 짓는 방식도, 카메라를 대하는 몸가짐도 조금씩 달라져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목소리만 달라졌다고 여기였으나, 실은 얼굴 근육 하나하나가 그 변화를 함께 겪어내고있었다.

실사로 방송을 오래 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카메라앞의 얼굴이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온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까지 낱낱이 비추는 렌즈앞에서 나는 종종 내 얼굴이 나 자신의것이 아니라 방송의것처럼 여겨지고는 하였다.

방송을 마치고 카메라를 끈 뒤에도 나는 한동안 거울앞을 떠나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종일 지어온 표정의 자국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듯하여, 그 자국을 씻어내는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리였다.

그해 봄부터 나는 그림 아바타로 방송하는 사람들의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기였다. 화면속에서 웃고 놀라고 토라지는 그림 얼굴들을 보면서, 저 편한 표정 뒤에 앉은 사람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있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 여기였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그 화면들을 들여다보고나니, 나도 저 그림 뒤에 한번 서보고싶다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 마음은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호기심 정도로만 여기였다. 그러나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림 얼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일이 잦아지자, 나는 이것이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는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였다.

마침 그무렵 오른팔 미기가 사무실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내게 물었다. 《사장님, 요즘 왜 자꾸 그림 방송만 찾아보세요?》 그 물음에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 못한채로 얼버무렸다.

《그냥... 궁금해서.》 그 대답이 스스로도 어설프게 들렸으나, 그때는 그 마음을 더 자세히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미기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 짧은 물음 하나가 내 마음속에서는 며칠동안 떠나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그림 방송들을 이것저것 찾아보며 저 그림 얼굴 뒤에는 어떤 표정이 숨어있을가 하는 생각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블루동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결》이 끝난 뒤로도 우리는 이따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늦은 시각이라 나는 조금 놀라며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 느긋하였다.

《누나, 요즘 방송 좀 뜸하네? 무슨 일 있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하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속에 있던 말을 꺼내보았다.

《나 그림으로 한번 방송해볼가 싶어서.》 전화기 저편에서 블루동지가 잠깐 말이 없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가? 그 얼굴 놔두고?》

나는 그 웃음에 괜히 심통이 나서 쏘아붙였다. 《왜, 안 어울려?》 블루동지는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니, 재밌을것 같아서. 한번 해봐, 누나.》

그 한마디가 뜻밖에도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별것 아닌 말이였으나, 망설이던 마음에 작은 쐐기 하나를 박아준 셈이였다. 전화를 끊고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한번 해봐》라는 짧은 말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줄은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날 이후로 마음을 굳히고 그림 아바타를 맡아줄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그림쟁이들의 화면을 뒤지고 이런저런 소개를 받아가며 며칠동안 발품을 팔았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그림쟁이를 찾아 의뢰를 넣었다. 내가 어떤 얼굴로 서고싶은지를 몇마디 말로 설명하는 일부터가 낯설고 어려운 작업이였다.

그림쟁이와는 며칠에 걸쳐 문자와 그림을 주고받았다. 머리색은 원래 내 머리색을 닮되 조금 더 짙게, 눈매는 너무 사납지도 너무 순하지도 않게 해달라고 몇번이나 고쳐 청하였다.

실사 방송을 할 때는 그저 거울앞에서 매만지면 그만이던 얼굴을, 이번에는 말로 풀어 남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눈매는 어떻게, 표정은 어떻게, 색은 어떻게 하고싶은지를 하나하나 짚어 설명하다보니 내가 평소에 스스로의 얼굴을 얼마나 무심히 대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였다.

처음 받아본 밑그림속의 얼굴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낯익었다. 나는 그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저것이 어쩌면 내가 스스로도 몰랐던 내 얼굴의 다른 한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며칠이 아니라 몇주가 걸렸다. 그 사이 나는 따로 시간을 내여 추적기와 카메라를 새로 구해다 방구석에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미기는 그 상자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 이거 다 뭐예요? 방이 무슨 실험실 같아졌어요.》 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는데, 돌이켜보니 그때의 방안 풍경은 방송실이라기보다 정말 무슨 실험실에 더 가까웠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상자를 하나씩 뜯었다. 《그림으로 방송해보려고. 미기도 좀 도와줘야겠다.》 미기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팔을 걷어붙이며 《그럼 이제부터 저도 기술자네요》하고 농담을 던졌다.

미기는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케이블을 련결하고 카메라 각도를 맞추는 일을 도맡아 해준것도 미기였다.

그러나 방안의 낡은 형광등 불빛이 추적기 카메라와 자꾸 어긋나 몇번이나 촬영이 끊기였다. 미기는 결국 스탠드등을 새로 사다 방 한켠에 세워놓고서야 《이제야 좀 잡히네요》하며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장비를 다 갖추고 프로그람을 처음 실행하던 날, 화면속에는 아직 낯선 그림 얼굴이 나를 따라 눈을 깜빡이고 입을 벌렸다. 나는 그 낯섦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미기도 옆에서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며 《신기하다, 진짜 사장님 표정이 저기서도 나오네요》하고 감탄하였다.

《야, 이게 나야?》 나는 화면을 향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림속의 나는 내가 고개를 젖히면 따라 젖히고 내가 웃으면 따라 웃었으나, 어딘가 나보다 한박자 늦게 움직이는듯한 어색함이 있었다. 그 어색함은 마치 거울을 보는것도 아니고 남을 보는것도 아닌, 참으로 묘한 느낌을 자아내였다.

처음 며칠은 그저 추적기 조정만으로도 하루가 다 갔다. 눈을 감았다 뜨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림 얼굴이 반쯤 눈을 감은채 굳어있는 일이 례사로 벌어졌다.

미기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몇번이나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사장님, 지금 그 얼굴 그대로 방송 나가면 큰일나요.》

나 역시 그 화면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짐짓 력사적인 사변으로 치자면, 그림 아바타 도입 첫주는 첨단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눈꺼풀 하나와의 씨름으로 기록될 법하였다.

입모양을 마이크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립싱크도 처음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면 그림의 입은 한박자 늦게 벌어졌다가 딱딱하게 닫히고는 하였다.

나는 몇번이고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 읽으며 프로그람의 반응을 맞추었다. 《안녕하세요, 강지입니다》라는 짧은 인사말 하나를 서른번 넘게 되풀이한 밤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씨름한 끝에야 그림 얼굴은 조금씩 나를 닮아가기 시작하였다.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내가 웃을 때 함께 웃어주는 정도는 되였다.

첫 방송을 잡은 날은 유월 열아흐렛날이였다. 그날따라 창밖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려 방안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 눈을 떴으나 좀처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몇해를 실사로 방송해온 사람이 그림 뒤에 처음 서는 날이라 생각하니, 괜히 첫 출근을 앞둔 사람처럼속이 울렁거리였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방송실에 들어와 장비를 점검하였다. 마이크 감도를 몇번이나 다시 맞추고, 추적기의 카메라 각도를 재차 확인하였다. 그렇게 몇번이나 같은 자리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시계바늘은 어느새 방송을 시작할 시각에 가까워지고있었다.

미기는 조정실 유리 너머에서 엄지를 세워 보이며 눈짓을 하였다. 《준비 다 마쳤어요, 사장님. 떨지 마세요.》 나는 그 손짓을 보며 짧게 숨을 고르고, 이제 정말 되돌릴수 없는 순간이 왔다는것을 실감하였다.

나는 그 말에 웃었으나 속으로는 손끝이 조금 저릿한것을 느끼고있었다. 몇해를 실사로 방송해온 사람에게도, 처음 그림으로 화면에 서는 일은 낯선 긴장을 몰고왔다.

방송을 시작하는 단추를 누르는 순간, 화면 한켠에 낯익은 그림 얼굴이 떠올랐다. 대화창은 몇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어? 강지님 그림이다!》, 《목소리는 그대로네 ㅋㅋㅋ》, 《이게 뭔일이야》 하는 글들이 앞다투어 올라왔다. 나는 그 반응들을 하나씩 읽어내리며 그림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는 《얼굴 왜 숨기였어요》라고 묻기도 하였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더 귀여운데요》라며 반기였다. 나는 그 상반된 반응들을 들으며 이것이 앞으로 겪을 일의 축소판일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였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대답하였다. 《얼굴 숨긴게 아니라, 그림으로 갈아입은거예요.》 그 말에 대화창은 다시 한번 웃음 섞인 글들로 뒤덮였다.

강도단 가운데 오래된 시청자 하나는 《목소리 듣자마자 강지님인줄 알았어요》라는 글을 남기였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얼굴은 바뀌어도 목소리만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뜻밖에도 마음을 놓이게 하였다.

몇몇 시청자는 그림체를 보고 어느 그림쟁이의 솜씨인지를 서로 알아맞히려 대화창에서 한바탕 추리를 벌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낯선 형식 하나가 이렇게나 빨리 사람들의 놀이거리가 될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방송 도중 그림의 표정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몇번인가 어색한 순간도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림이 반응하지 않아 나 혼자 어색하게 눈만 껌뻑인 장면도 있었다.

시청자들은 그마저도 재미있어하며 《지금 버그난거죠 ㅋㅋㅋ》하고 놀렸다. 나는 그 놀림에 발끈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안도하였다. 낯선 형식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길이 뜻밖에 너그럽다는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방송 중간, 블루동지가 대화창에 들어와 짧은 글 하나를 남기였다. 《누나, 그림도 잘 어울리는데?》

나는 그 글을 발견하고 마이크를 향해 웃으며 대꾸하였다. 《거봐, 재밌을거라며. 진짜 재밌긴 하다.》 대화창은 오랜 시청자들답게 그 짧은 주고받음에도 곧바로 반응하였다.

《둘이 여전하네 ㅋㅋㅋ》, 《우결 감성 아직 살아있다》 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글들을 보며 《우결》이 끝난지 여러달이 지났어도 어떤것은 쉽게 바래지 않는다는것을 새삼 느끼였다.

방송을 마칠무렵, 나는 그림 얼굴로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았다. 실사로 방송할 때보다 훨씬 크고 과장된 몸짓을 짓게 되는것이 그림 아바타의 또 다른 재미라는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방송을 끝내고 머리수화기를 벗으니 방안은 다시 콤퓨터 팬 소리만 남은 고요한 공간으로 돌아가있었다. 나는 잠시 그 고요속에 앉아 방금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미기가 조정실 문을 열고 들어와 웃으며 말하였다. 《사장님, 반응 진짜 좋던데요. 이거 계속 하실거예요?》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였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그런것 같아. 얼굴 하나 내려놓았을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가벼워.》

그 말을 하고나서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방금 한 말이 그저 하루치 감상이 아니라, 앞으로 오래 곱씹게 될 말이라는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하였다.

짐짓 력사적인 대목처럼 부풀려 말해보자면, 그날의 그 한마디는 후날 강도단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려놓은 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였다. 나는 그 표현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웃음을 참기 어려웠는데, 곽밥 한덩이 나눠먹은 자리도 사변이라 불리는 판에 이만한 일이 이름 하나 얻는것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 부풀림을 걷어내고 보면, 그날의 전환에는 분명 남다른 무게가 있었다. 나는 몇해 동안 다져온 실사 방송이라는 틀을 접고, 그림 한장 뒤에 서기로 스스로 결정한것이였다. 그 결정을 내린 참된 리유가 무엇이였는지, 나는 지금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카메라앞의 얼굴이 무거웠다는 말도, 그림 방송이 신기해보였다는 말도, 다 그 리유의 한 조각씩일뿐 전부는 아닐것이다.

다만 분명한것은, 그해 유월의 그 결정이 그뒤로 이어질 여러 일들의 첫 걸음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나로서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다만 한가지 어렴풋이 느낀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문 하나가 그 밤 조용히 열리였다는 사실뿐이였다.

그림으로 방송을 시작한 뒤로도 나는 한동안 실사 시절의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였다. 카메라앞에서 무심코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려다가, 화면 속 그림 손이 따라 움직이지 않는것을 보고 혼자 머쓱해한 날도 여러번이였다.

그런 서투름조차 시청자들은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림인데도 사장님 성격 그대로 나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얼굴은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하였다. 그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그림 뒤에 숨은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을 빌려 나를 더 뚜렷이 드러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나는 실사 시절의 방송 갈무리 몇편을 다시 꺼내보았다. 화면속에는 지금과는 다른 얼굴을 한 내가 웃고 떠들고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고있자니 서운함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나는 그 갈무리들을 지우지 않고 고이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림 얼굴로 새로 서는 나날이 아무리 길어져도, 저 얼굴로 지나온 나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그림도 없었을것이기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 얼굴은 서로 다른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걸어온 두 시절의 이름일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페지를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해 유월의 그 그림 하나가 후날 유메퍼센트로, 다시 스텔라이브로 이어지는 먼 길의 첫 걸음이였다는것을 안다. 그러나 그 첫 방송을 마치고 머리수화기를 벗던 그날 밤에는, 나는 그저 얼굴 하나를 내려놓았을뿐이라고만 여기였다.

창밖의 빗소리는 방송을 마칠무렵에도 그치지 않고있었다. 나는 그 빗소리를 들으며 콤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며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얼굴 하나를 내려놓는 일이 이렇게 홀가분할줄은, 그리고 그 홀가분함이 앞으로 걸어갈 먼 길의 첫걸음이 될줄은, 그때는 미처 다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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