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 외 진 출
우주28(2021)년 십일월이 저물어갈무렵부터 방송실 창밖에는 첫눈이 오락가락하였다. 도장을 찍고 회사이름을 올린 뒤로도 나는 여전히 밤마다 콤퓨터앞에 앉아 얼굴 없는 그림 하나로 방송을 이어갔으나, 화면 아래쪽에는 이제 대화창 말고도 열어놓은 창이 하나 더 늘어있었다. 사업계획서라는 이름의 그 흰 페지는 밤이 깊도록 채워지지 않은채 나를 물끄러미 마주보고있었다.
회사를 세운다는것과 회사를 굴린다는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것을, 나는 그 겨울 며칠 사이 뼈저리게 깨달았다. 서류에 도장을 찍는 자리에서는 셋 다 들뜬 얼굴이였으나, 정작 그 도장이 마르고 나니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악녀와 단즈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였다.
우리는 결국 한주에 한번씩 화상으로 얼굴을 맞대기로 하였다. 각자 자기 방송 일정이 있었으므로 셋의 시간을 맞추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악녀는 밤방송이 잦았고 단즈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감이 몰리는 사람이였으므로, 결국 셋 다 방송이 끝난 자정무렵에야 겨우 화면속에서 얼굴을 마주할수 있었다.
본사라는 말을 쓰기는 하였으나, 정작 그 본사라는것이 어느 한 건물에 있는것은 아니였다. 악녀는 자기 방에서, 단즈는 또 단즈대로 자기 자리에서,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방송실 겸 살림방인 그 좁은 방에서 각자 화면 하나씩을 켜놓고 회의를 하였다. 셋의 얼굴이 나란히 뜬 그 작은 화면이야말로, 그때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사옥이였던 셈이다.
그런 처지를 두고 후날 누군가 유메퍼센트의 창업 사옥이 어디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화상통화창이였다고 대답할 작정이다. 대단한 사옥도 응접실도 없었으나, 그 대신 우리에게는 밤을 새우고도 아깝지 않을 이야기거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으로 충분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첫 회의라고 이름 붙인 그 자리에서, 나는 콤퓨터 화면에 세계지도를 하나 띄워놓았다. 시간대를 나타내는 줄무늬가 지도우에 어지럽게 그어져있었다. 악녀는 그 지도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게 뭐 무슨 작전지도야?》
나는 짐짓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작전지도 맞지. 우리가 노릴 시청자가 어느 시간대에 자고 어느 시간대에 깨여있는지도 모르고 방송을 잡으면 안되잖아.》 단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결국 문제는 말이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인것 같아요.》 단즈가 그렇게 짚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림을 예쁘게 그려세워도, 그 안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하였다.
언어를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셋은 그날 밤 몇시간이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자막을 입힐것인가, 아예 영어로 방송을 하게 할것인가, 아니면 서투르더라도 우리말 그대로 밀고나갈것인가 하는 물음들이 화면 이쪽저쪽에서 오갔다. 악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밀어붙였다. 《까짓거 서투르면 서투른대로 하는것지, 완벽하게 준비된다음에 나가려면 평생 못 나가.》
단즈는 그 말에 반쯤 동의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서투른건 괜찮은데, 아예 준비 없이 던져놓으면 그건 서투른게 아니라 그냥 방치인것 같아요.》 나는 둘의 말을 번갈아 들으며 화면 한켠에 열어둔 빈 페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있었다.
그 페지에 내가 적어놓은 낱말은 겨우 두개, 〈용기〉와〈준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낱말들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 두 낱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것이 사업계획서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회의는 그날 결론을 내지 못한채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끝이 났다.
회의가 끝나고 홀로 남은 방에서, 나는 식어버린 차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한참을 앉아있고는 하였다. 원래 저혈압이 있어 손발이 찬 편이였는데, 그 겨울따라 유독 손끝이 시렸다. 몸은 지쳐있었으나 머리속은 오히려 말똥말똥해져서, 잠자리에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았다.
잠버릇이 원래 험한 편이라 잠들고 나서도 이불을 걷어차기 일쑤였는데, 그 겨울에는 아예 잠드는것 자체가 더디였다. 머리속에서 세계지도와 성격유형과 사업계획서의 문장들이 뒤엉켜 돌아갔기때문이다. 그런 밤이면 나는 차라리 이불을 걷고 일어나 콤퓨터앞에 다시 앉아버리고는 하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밤마다 버릇이 하나 늘었다. 방송을 마치고도 곧장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콤퓨터앞에 그대로 앉아 바다건너의 방송들을 몇시간이고 들여다보는 버릇이였다. 낯선 말로 오가는 대화창을 자막도 없이 들여다보고있자면, 마치 남의 나라 잔치집 창밖에 서서안을 들여다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 해외라는 낱말을 두고 내가 이토록 조바심을 낸데에는 그보다 훨씬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아직 얼굴을 그림 뒤에 감추기 전, 카메라앞에 몸을 그대로 내놓고 방송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도 이따금 낯선 나라말로 대화창에 인사를 남기는 시청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 인사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번역기라는것을 켜놓고 한글자 한글자 그 뜻을 옮겨 읽어가며 대꾸를 하고는 하였다. 번역기가 뱉어내는 말이 하도 어색하여서, 도리여 그 어색함때문에 대화창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적도 여러번이였다. 그때는 그저 우스개로 넘기였던 그 어색함이, 후날 돌이켜보면 바로 이 유메퍼센트라는 이름의 씨앗이였던 셈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만은 통할수 있다는것을, 나는 그 서투른 번역기 대화들을 통해 어렴풋이 느끼고있었다. 다만 그 어렴풋한 느낌을 사업이라는 형태로 옮겨세우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수고를 요구하였다. 나는 그 며칠 사이 그 옛 기억을 몇번이고 곱씹었다.
다시 그해 겨울의 회의로 돌아오면, 악녀는 언어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였다. 《언어야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만, 당장 어떤 그림을, 어떤 성격으로 세울건지부터 정해야 하는것 아니야?》 나는 그 물음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얼굴을 그림으로 대신한다는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었으나, 그 그림에 담을 성격과 목소리를 처음부터 남에게 지어붙인다는것은 또 다른 일이였다. 나는 그림 뒤에서 내 목소리로 나를 살아가고있었으나, 앞으로 세울 이들은 애초에 남의 손으로 지어진 그림과 성격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것이였다. 그 무게가 새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일단 시청자들이 좋아할만한 성격을 몇가지 추려보자.》 단즈가 그렇게 정리하였다. 《밝은 아이, 차분한 아이, 짓궂은 아이, 이렇게 유형을 나눠놓고 시작하는게 어떨까요.》 악녀는 그 말에 손뼉을 치며 반가와하였다.
《오, 그거 좋다. 근데 그중에 누가 해외 애들 마음을 제일 잘 잡을지는 또 따로 고민해봐야겠네.》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화면 한쪽에 유형별로 이름표만 붙인 빈 자리들을 그려나갔다. 아직 아무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그 자리들을 바라보고있자면, 묘하게도 설레는 마음이 앞섰다.
빈 자리에 이름표만 붙여놓고 끝낼수는 없는 노릇이였으므로, 나는 밤마다 종이에 색연필로 어렴풋한 그림들을 끄적여보기도 하였다. 머리카락은 어떤 빛갈이 좋을지, 옷차림은 어떤 느낌이 좋을지를 두고 혼자 이것저것 그려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종이를 구겨 던져버리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림 솜씨가 그리 뛰여난 편은 아니였으므로, 그 구겨진 종이뭉치만 방 한구석에 수북히 쌓여갔다.
악녀는 화상통화 너머로 그 종이뭉치를 보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야, 그거 그림이야 낙서야?》 나는 그 말에 억울한 척 항변하였다. 《낙서 아니야, 초안이지. 나중에 진짜 그리는 사람한테는 이거보다 훨씬 낫게 부탁할거야.》
단즈는 그 낙서들 중 몇장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뜻밖의 말을 보태였다. 《근데 이 색깔 조합은 나쁘지 않은데요. 나중에 실제로 그림을 맡길 사람한테 참고자료로 보여줘도 될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겸연쩍으면서도 은근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그 겨울 내내 그렇게 빈 자리들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작업에 매달렸다. 셋이 모여앉아 나눈 이야기를 후날 어느 사가가 무슨 국서를 짓는 자리처럼 근엄하게 옮겨적는다면, 정작 그 자리에서 우리가 먹은것은 각자 시켜온 배달음식과 식은 커피뿐이였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할것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자리에서 오간 말들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당을 무엇으로 할것인가 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은 숙제였다. 나와 악녀는 오래도록 《트위치》라는 마당에서 방송을 해왔으나, 해외의 흐름을 보면 《유튜브》쪽에 힘을 싣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후원을 받는 방식도, 대화창의 생김새도, 심지어 시청자들이 웃고 놀리는 말투까지도 마당마다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트위치는 우리가 손에 익었으니 편하긴 한데.》 단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해외쪽 새 시청자를 끌어오려면 유튜브도 같이 봐야 할것 같아요.》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두 마당을 동시에 챙긴다는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것을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그무렵 나는 밤마다 해외 방송의 후원 화면을 캡쳐해두는 버릇도 생기였다. 어떤 문구가 뜨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후원한 사람의 이름이 화면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캡쳐 뭉치야말로 내가 그 겨울에 밤새워 지은 가장 볼품없는 론문이였던 셈이다.
악녀는 그런 나를 보며 짐짓 놀리듯 말하였다. 《너 그러다 방송은 안 하고 연구만 하다 늙겠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꾸하였다. 《연구라도 안 하면 뭘 믿고 시작하냐. 우리 셋 다 이 바닥 처음이잖아.》
그 말이 떨어지자 화면 저편의 단즈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우리 셋은 이 판에서 저마다 방송이라는 이름으로는 리력이 있었으나, 회사를 굴리고 해외를 겨냥한다는 일에서만은 하나같이 초행길이였다. 그 초행길을 걷는 방법은 결국 밤새워 남의 길을 훑어보는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우리 셋의 회의는 점점 길어졌다. 자정에 시작한 회의가 새벽 서너시를 넘기는 일이 례사였다. 나는 그무렵 방송실 의자에서 그대로 잠이 든날도 여러번이였다.
어느 날인가 새벽녘에 잠에서 깨여보니 콤퓨터 화면에는 아직도 회의창이 켜진채였고, 저편에서 단즈가 혼자 남아 자료를 정리하고있는 모습이 비치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화면을 두드렸다. 《미안, 나 잠깐 존것같은데.》
단즈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웃으며 대답하였다. 《괜찮아요, 저도 그냥 자료 정리하다가 시간 가는줄 몰랐어요.》 그 목소리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위안을 받았다. 혼자였다면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을 이 일을, 이렇게 누군가와 나누어질수 있다는것이 새삼 고마웠다.
그해 겨울,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밤을 조금씩 나누어가지며 사업계획서라는 이름의 흰 페지를 한장 한장 채워나갔다. 처음에는 낱말 두개뿐이던 그 페지가, 겨울이 다 갈무렵에는 제법 두툼한 뭉치가 되여있었다. 나는 그 뭉치를 손에 들 때마다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뿌듯함과 별개로, 그 뭉치 어딘가에는 아직 셋이서 미처 맞추지 못한 결이 하나둘 섞여있었다. 그때는 그 결의 어긋남이 그저 사소한 취향차이로만 보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소함들이야말로 후날 우리 배를 흔들 잔물결의 첫 파문이였다는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마케팅을 두고도 셋의 생각이 조금씩 갈리였다. 악녀는 처음부터 크게 소문을 내고 화려하게 시작하자는 쪽이였다. 《기왕 할거면 요란하게 해야지, 조용히 시작해서 누가 알아주냐.》
단즈는 그 말에 손사래를 치며 반대편에 섰다. 《너무 요란하게 시작하였다가 기대만 부풀리고 정작 알맹이가 못 따라가면 그게 더 무서운거예요.》 나는 그 사이에서 또다시 저울추 노릇을 하였다.
《일단 알맹이부터 착실하게 채우고, 그 다음에 소문은 자연스럽게 나게 하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악녀는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이내 수긍하였고, 단즈는안도하는 낯빛을 보였다.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봉합이 되였으나, 봉합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 밑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기도 하였다.
해가 바뀌여 우주29(2022)년이 되였다. 정월의 방송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었으나, 우리 셋의 회의만은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고있었다. 나는 그무렵 처음으로 사업계획서라는 이름의 문서를 앞뒤 한장씩 온전히 채워낼수 있었다.
회사이름밑에 붙일 구호도 그 정월에 정하였다. 〈꿈을 몇 퍼센트까지 채울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는 그대로 회사의 지향으로 삼기로 하였다.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작 그 구호를 정하던 자리에서 셋은 각자 라면 한그릇씩을앞에 놓고 후룩거리며 의논하였을뿐이였다.
후날 어느 사가가 이 자리를 두고 무슨 건국의 강령을 선포하는 자리처럼 옮겨적는다면, 정작 그 자리에 놓여있던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세그릇뿐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실소를 금치 못할것이다. 그러나 그 라면그릇앞에서 나눈 말들만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봄이 가까와지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을 그려세울지, 몇명으로 첫 발을 뗄지를 두고도 머리를 맞대였다. 악녀는 처음부터 여럿을 한꺼번에 세우자는 쪽이였고, 단즈는 하나둘 신중하게 늘려가자는 쪽이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도 여전히 저울추였다.
《한꺼번에 여럿을 세우면 그만큼 눈에 띄기는 쉽겠지.》 나는 그렇게 말을 열었다. 《근데 우리 셋이 그 여럿을 다 챙길 손이 있나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지.》 단즈는 그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맞아요. 사람 한명 한명이 방송에 나서는 순간부터는, 그림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을 우리가 같이 짊어지는것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림 뒤에 사람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그 자리에서만은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나 스스로가 그림 하나로 살아온 시간이 벌써 반년을 넘어가고있었으므로, 그 무게를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였다. 그러나 내 몫의 무게와 남의 몫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는것은 또 다른 셈법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 봄, 그 셈법을 배우느라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그무렵 나는 문득 《우결》을 진행하던 시절을 떠올리고는 하였다. 그때는 카메라앞에서 블루동지와 나 둘이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아직 얼굴도 없는 여러 사람의 앞날까지 함께 그려야 하는 처지가 되여있었다. 시절이 바뀌면 짊어지는 몫도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그 봄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악녀는 그무렵 나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왔다. 《야, 근데 우리 진짜 이거 되긴 되는것 맞지?》 나는 그 물음에 매번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하였다.
《되는지 안되는지는 해봐야 아는것지. 다만 이왕 시작한거, 대충 하지는 말자.》 나는 그렇게만 대답하였다. 악녀는 그 대답이 성에 안 찬다는듯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또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단즈는 그무렵 조용히 자료만 쌓아가는 사람이였다. 화상통화 화면 저편에서 그가 밤마다 정리해놓은 자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이 배의 밑바닥을 다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소란스러움은 악녀가, 속으로 다지는 단단함은 단즈가 맡고있는 셈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이도저도 아닌 저울추 노릇을 하며 봄을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저울추 노릇이야말로 대표라는 자리가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일이였다. 누구의 말도 온전히 옳지 않고 누구의 말도 온전히 그르지 않다는것을, 나는 그 봄의 회의들을 거치며 몸으로 배웠다.
삼월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마침내 첫 몇 사람을 그려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투로 시청자들앞에 설지에 대한 큰 줄기가 그무렵 대강 잡히였다. 아직 이름 하나 붙지 않은 빈 자리들이였으나, 그 자리를 채울 손과 목소리를 구하는 일이 그 봄의 가장 큰 과업이 되였다.
해외를 겨냥한다는 말을 앞세운만큼, 우리는 그 자리에 앉을 이들에게도 남다른 준비를 요구하기로 하였다. 서투른 외국말이라도 겁내지 않을 배짱, 낯선 문화를 배우려는 열의,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 없이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보일수 있는 뚝심을 갖춘 이들을 찾기로 한것이다. 그 기준을 정하는 자리에서 셋은 또 한번 밤을 새웠다.
《근데 이 기준, 우리 셋 중에 누가 다 갖추고있냐.》 악녀가 문득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단즈도 그 말에 픽 웃었고, 나도 따라 웃을수밖에 없었다. 우리 셋조차 다 갖추지 못한 기준을 남에게 요구한다는것이, 그 순간만은 우습고도 겸연쩍었다.
그러나 그 겸연쩍은 웃음 뒤에는, 우리 스스로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있다는 정직한 인정이 깔려있었다. 사업이라는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들만 벌이는 일이 아니라는것을, 나는 그 봄 내내 몸으로 겪으며 배워나갔다. 우리는 서투른 채로, 다만 서투름을 감추지 않은채로 앞으로 나아가고있었다.
사월이 되자 방송실 창밖의 나무에도 새순이 돋기 시작하였다. 겨우내 눈에 덮여있던 거리가 조금씩 제 빛갈을 되찾아가는것을 보면서, 나는 이 회사도 저 나무처럼 계절을 한바퀴 돌고나면 제법 꼴을 갖추게 되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그 기대는 절반은 옳았고 절반은 그르게 되지만, 그것은 뒤에 가서 이야기할 일이다.
그 사월 어느 회의 자리에서, 악녀가 문득 수익을 어떻게 나눌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슬쩍 꺼내들었다. 《우리 이거 잘되면 나중에 나눠먹는 몫은 어떻게 할건지도 미리 정해놔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아직 시작도 안 하였는데 나눠먹을 몫부터 이야기하는건 좀 이르지 않아? 일단 되고나서 이야기하자.》 그때의 나로서는 그저 순리에 맞는 대답이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순리라는것이 나중에는 셋 각자에게 서로 다른 모양으로 새겨지게 된다는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단즈는 그 대화에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고 조용히 화면만 바라보고있었다. 그 침묵이 그때는 그저 신중함으로만 보이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침묵속에도나름의 셈이 자리잡고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이제 다시 없다.
나는 그 봄의 대화들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지만, 그 대화들속에 이미 후날의 갈림길이 조금씩 새겨지고있었다는것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사람이란 함께 시작할 때에는 서로의 다른 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도, 그 다른 결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배 전체를 기울게 만든다는것을 나는 그때 미처 알지 못하였다.
다만 그 사월의 나로서는, 눈앞에 쌓인 일들을 하나씩 쳐내는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였다. 언어를 정하고, 마당을 정하고, 성격을 나누고, 기준을 세우는 그 모든 일들이 아직 절반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해외를 본다는 말은 쉬웠으나, 그 말 하나를 실체로 옮겨세우는 일은 참으로 더디고 고단하였다.
그무렵 나는 밤마다 방송실에 홀로 앉아, 낮에 나눈 회의 내용을 정리하며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였다. 우리가 지금 그려세우려는 이 자리들이, 후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담아내게 될지 그때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다만 그 자리들을 향한 설렘과 두려움이, 그 봄 내내 내 마음속에서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 겨울과 봄을 되짚어보면, 그때의 우리 셋은 참으로 서투르고 참으로 열심이였다. 셋이 나누어진 밤들, 셋이 함께 채운 페지들, 셋이 미처 다 맞추지 못한 결들이 그 몇달 사이에 고스란히 쌓여갔다. 그 쌓임이 후날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마저 풀어놓을 자리가 있을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저 우주29(2022)년 봄, 아직 아무 얼굴도 목소리도 없던 그 빈 자리들을 향해 셋이 나란히 밤을 지새우던 그 나날들만을 오래도록 붙들어두고싶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서투른 밤들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배를 띄우기 위해 가장 정직하게 노를 저었던 시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