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데 뷔
우주30(2023)년(2023년) 정월 초이레 새벽, 사무실 창밖에는 밤사이 내린 눈이 희끗희끗 남아있었다. 콤퓨터를 켜자 랭각기소리가 낮게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책상우에 펼쳐둔 일정표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일정표 맨 윗칸에는 며칠 전부터 붉은 글씨로 적어둔 이름 두개, 칸나동지와 유니동지가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날은 칸나동지가 새 이름을 걸고 다시 방송을 여는 날이였다. 나는 그 새 이름을 몇번이고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스텔라이브. 아직 혀끝에 붙지 않아 어색하면서도, 어쩐지 자꾸 되뇌이고 싶어지는 이름이였다.
창밖 골목은 이른 시간이라 아직 인적이 드물었고, 지나가는 차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나는 그 고요속에 홀로 앉아 오늘 하루가 앞으로 이 조그마한 회사의 력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가늠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그 무게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상우에는 지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정리한 서류뭉치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새 방송통로의 소개문, 방송 시작화면에 넣을 문구,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질문들에 대한 답변까지 하나하나 적어둔 종이들이였다. 나는 그 종이들을 한장씩 다시 넘겨보며 빠뜨린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라디에터에서는 이따금 딸깍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겨울이 유난히 매서운 해였다. 그러나 그 매서움속에서도 오늘만은 무언가 새로 돋아나는 기운이 있는것 같아, 나는 자꾸만 창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 절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그해가 저물어가던 섣달 스무여드레 나는 칸나동지, 유니동지와 함께 작은 이름 하나를 새로 지어 걸었다. 유메퍼센트라는 이름 아래 함께 울고 웃던 아홉 사람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나와 더불어 다음 걸음을 내딛기로 하였으니, 그 이름이 바로 스텔라이브였다.
회사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만큼 작은 재조직이였다. 사무실도, 인원도, 살림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단출하였다. 그러나 그 단출함속에는 이전에 없던 단단함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 한번 넘어져본 사람들만이 지닐수 있는 다짐 같은것이였다.
이름을 정한 뒤에도 우리는 곧바로 방송을 열지 못하였다. 새 이름에 걸맞도록 방송통로를 정비하고, 인사말을 다듬고, 그동안의 사정을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것인가를 두고 여러날 머리를 맞대야 하였기때문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며칠이 지나서야 우리는 겨우 날자를 잡을수 있었다.
이름을 정하던 그날의 회의를 나는 지금도 웃음 없이 떠올리지 못한다. 라이브12, 클러치, 플로리스, 이렇게 몇가지 후보를 놓고 셋이서 밤늦도록 저울질을 하였으나 좀처럼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그러다 유니동지가 문득 별을 뜻하는 말과 방송이라는 말을 붙여보면 어떻겠냐고 하였고, 그 한마디에서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이 태여났다.
《별들의 방송이라니, 나쁘지 않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대꾸하였던것으로 기억한다. 칸나동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저는 이게 제일 좋아요》라고 하였다. 그렇게 별것 아닌듯한 한마디에서 시작된 이름을 걸고, 우리는 이제 그 이름값을 해내야 할 차례를 맞이하고있었다.
그런데 이 재데뷰를 이야기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칸나동지와 유니동지가 처음으로 방송이라는것을 시작한 날은 사실 이보다 다섯달이나 앞선, 우주29(2022)년(2022년) 팔월 스무날이였다.
그날도 나는 오늘처럼 콤퓨터앞에 앉아 두 사람의 첫 인사를 지켜보았다. 유메퍼센트라는 간판 아래 처음 카메라를 마주한 두 사람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였고, 대화창은 그 떨림을 감싸안듯 격려의 말들로 순식간에 채워지였다. 나는 그때 두 사람이 세상에 처음 나온 순간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이 되였다.
그러나 그 첫 데뷰로부터 겨우 넉달만에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하였다. 그 겨울의 일은 앞선 절에서 이미 자세히 적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문을 닫던 날, 나는 두 사람에게 방송이라는것 자체를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몇번이나 말하였던 기억만은 다시 한번 적어두고 싶다.
그로부터 다섯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또다시 그 두 사람의 데뷰방송을 준비하고있었다. 한번 세상에 나온 사람을 다시 한번 세상에 내놓는 일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참으로 그렇게 느껴지였다. 마치 한 사람이 두번 태여나는 광경을 지켜보는것 같은, 기이하고도 벅찬 심정이였다.
미기는 그무렵 나를 도와 방송통로 정비의 자잘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화면 배경을 바꾸고, 방송 시작 화면의 글자체를 고르고, 인사말 문구를 몇번이고 고쳐쓰는 그 모든 일에 미기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미기가 있어 이 재조직의 절반은 이미 든든하다고 여러번 말하고 다녔다.
정월 초닷새 저녁, 나는 칸나동지, 유니동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방송 진행을 맞추어보는 자리를 가지였다. 화면 너머로 두 사람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결 야무져 보였으나, 그 눈빛속에는 첫 데뷰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긴장이 여전히 어려있었다.
《떨리지 않아?》 내가 그렇게 묻자 칸나동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떨리기는 하는데, 처음보다는 나은것 같아요.》 그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보다 낫다는 그 말속에, 그동안 겪은 일들이 다 담겨있는것 같아서였다.
유니동지는 그 옆에서 화면 구석의 대화창 위치를 몇번이나 다시 확인하며 중얼거리였다. 《이번에는 시작하자마자 인사말부터 제대로 하고싶어요.》 나는 그 말속에서 지난 데뷰 때 미처 다 하지 못하였던 아쉬움 같은것을 읽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굳이 대단한 각오를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새 이름으로 새로 시작하는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그저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부터가 실은 누구보다 긴장하고있었다.
나 자신도 오래전 처음 마이크앞에 앉았던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때는 카메라도 없이 목소리 하나만 가지고 시청자들앞에 섰었는데, 그 떨림이 지금 이 두 사람의 떨림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에게 잔소리 대신 그저 곁을 지켜주는 쪽을 택하였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래일이면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여는 방송이 있을 예정이였고, 나는 그 방송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꾸만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그려보았다. 창밖에는 그날도 잔눈이 성글게 흩날리고 있었다.
정월 초이레 아침이 밝았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나가 콤퓨터 여러대의 화면을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방송 송출에 쓰는 장비들, 대화창을 띄우는 화면, 그리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 예비 회선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좀 놓이였다.
낮 시간이 다 지나고 저녁이 가까워오자 나는 콤퓨터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송 시작 시간이 다가올수록 대화창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글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오늘 재데뷔라던데 진짜 하는것이야?》, 《기다렸다》 같은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화면 속 칸나동지의 아바타가 서서히 밝아지였다. 배경음악이 잦아들고, 마이크 너머로 짧은 숨소리가 한번 들리더니 이내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스텔라이브 소속 칸나입니다.》
그 한마디에 대화창은 순식간에 물결처럼 출렁이였다. 반가움을 표하는 글, 응원의 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글들이 서로 뒤엉켜 올라왔다. 나는 그 화면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것을 느끼였다.
칸나동지는 처음 몇마디를 마치고 나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있었다. 새 이름으로 다시 서게 된 이 자리가, 본인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것이다.
이윽고 칸나동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동안의 사정을 짧게 설명하였다. 예전 이름으로 활동하던 회사가 문을 닫았던 일,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름 아래 다시 서게 된 일을 차분히 풀어놓았다. 대화창은 그 설명을 듣는 동안 한동안 숙연해지였다가, 이내 다시 응원의 글들로 채워지였다.
예전 방송통로를 즐겨찾던 시청자들 가운데는 이 새 이름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벌써부터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 글들을 보며 사람의 발걸음이라는것이 이름 하나 바뀌였다고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것이 두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시간의 무게였다.
나는 사무실 한켠에서 그 방송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두시간 남짓 이어진 그 방송에서 칸나동지는 오락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시청자들의 물음에도 하나하나 답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 정말로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대화창에는 예전부터 지켜봐온 시청자들의 글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예전이랑 목소리는 그대로네》, 《이번엔 왠지 더 편안해 보인다》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시청자라는것이 참으로 세심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였다. 저 사람들이야말로 이 재데뷰의 진짜 증인들이였다.
방송이 끝나갈무렵 칸나동지는 마지막 인사를 하며 목소리를 살짝 떨었다. 《오늘 다시 시작할수 있게 되여서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인사말이 끝나자 대화창은 다시 한번 크게 술렁이였다.
방송을 마친 뒤 칸나동지에게서 나에게 짧은 문자가 왔다. 《사장님, 저 오늘 잘하였나요?》 나는 그 문자를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잘하였느냐고 묻는 그 말투가, 처음 데뷰하던 날의 서투른 인사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느껴지였기때문이다.
나는 답장에 이렇게 적어보냈다. 《잘하였다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짧은 문장이였지만 나로서는 그 안에 담고싶은 말이 참 많았다. 다만 그 많은 말들을 다 눌러담기에는 문자 한통이 너무 작았을뿐이다.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 칸나동지의 방송 다시보기 시청회수를 몇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수자가 조금씩 올라가는것을 지켜보는 일이 이렇게 마음을 졸이게 하는 일인줄, 나는 그전까지 미처 몰랐다. 창밖의 눈은 그날도 그치지 않고 성글게 흩날리고있었다.
이튿날인 정월 초여드레, 이번에는 유니동지의 차례였다. 나는 전날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사무실 콤퓨터앞에 앉아 같은 점검을 되풀이하였다. 이번에도 대화창은 방송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벌써 사람들로 북적이고있었다.
유니동지는 방송을 시작하며 평소의 밝은 목소리를 애써 유지하려 하였으나, 그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리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스텔라이브 소속 유니입니다, 오래 기다리였죠!》 그 인사말에 대화창은 다시 한번 크게 반가움을 표하였다.
유니동지는 방송 초반, 시작하자마자 인사말부터 제대로 하고싶다던 전날의 다짐을 그대로 지켰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전날 화면 구석을 몇번이나 확인하던 그 진지한 눈빛을 떠올렸다. 다짐이라는것은 이렇게 조그마한 자리에서도 지켜질수 있는것이였다.
방송 중간 유니동지는 지난 데뷰 때를 잠깐 돌아보며 웃었다. 《그때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알것 같아요.》 그 말에 대화창에서는 《많이 컸다》는 우스개소리가 여럿 올라왔다.
나는 그 우스개소리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달이라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였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분명 저마다 조금씩 자라있었다. 사람이 자란다는것은 이렇게 큰 사건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의 작은 흔들림들이 쌓여 만들어지는것인가보다.
유니동지의 방송도 두시간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마지막 인사에서 유니동지는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였는데, 그 되풀이가 결코 형식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진심임을 화면 너머로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두 사람의 재데뷰 방송이 이틀에 걸쳐 무사히 끝난 뒤, 나는 비로소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러나 그 안도도 잠시, 나는 곧바로 그 다음 일들을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시청자들이 이 작은 재조직을 얼마나 오래 지켜봐줄것인가 하는 물음이 자꾸만 머리속을 맴돌았다.
사무실은 이틀 동안의 긴장이 빠져나가자 오히려 더 조용해진것 같았다. 콤퓨터 랭각기소리만 여전히 낮게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텅 빈 책상우에 남은 서류뭉치를 정리하였다. 겨우 이틀이였는데도, 그 이틀 사이에 사무실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유메퍼센트 시절에는 아홉 사람의 방송을 챙기느라 이 책상 저 책상을 오가며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단 둘의 방송만을 지켜보면 되였다. 홀가분하다면 홀가분한 노릇이였으나, 그 홀가분함 뒤에는 어쩐지 서운한 감정도 함께 섞여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여서, 짐이 가벼워지였다고 마냥 좋아할수만은 없는것이다.
그런데 그 걱정은 뜻밖에도 오래가지 않았다. 데뷰한지 채 한주일도 지나지 않아, 칸나동지의 방송에는 동시에 만명이 넘는 시청자가 모여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때문이다. 나는 그 수자를 처음 전해듣고도 한동안 믿기지 않아 몇번이나 다시 확인하였다.
미기가 화면을 가리키며 《사장님, 이거 진짜예요》하고 말해주고 나서야 나는 겨우 그 수자를 실감하였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홉 사람의 살림을 짊어지다 문을 닫아야 하였던 처지를 생각하면, 이 만명이라는 수자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회복이였다.
나는 그날 저녁 홀로 사무실에 앉아 그 수자를 몇번이고 되뇌였다. 짐짓 력사에 길이 남을 사변이라도 되는 양, 나는 속으로 《이것이야말로 재기의 첫 신호탄이다》하고 거창하게 되뇌여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운 노릇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순간이였다.
칸나동지 본인도 그 수자를 보고는 방송 중에 몹시 놀란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였다. 《저 진짜 이렇게 많이 봐주실줄 몰랐어요》하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화면 너머로도 눈에 선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재데뷰가 결코 헛된 시도가 아니였음을 확신하게 되였다.
유니동지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는 나에게 련락을 해왔다. 《칸나 진짜 대단하다, 나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나는 그 말속에서 경쟁심보다는 순수한 기쁨을 더 크게 느낄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게 서로의 성공을 제 일처럼 반기는 마음이 늘 자리하고있었다.
블루동지에게서도 그무렵 축하한다는 련락이 왔다. 《새로 시작한다며, 잘된 일이다.》 짧은 그 한마디였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오랜 벗이라는것은 이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 전할수 있는 사이인가보다.
나는 답장으로 짐짓 엄살을 부려보았다. 《힘들어 죽는줄 알았다, 이 나이에 다시 개국공신 노릇이라니.》 블루동지는 그 말에 웃음 섞인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 몇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것을 느끼였다.
정월이 다 가기 전,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작은 자리를 마련하였다. 거창한 축하연이랄것도 없이, 근처 식당에서 따뜻한 국밥이나 한그릇씩 나누어 먹는 조촐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조촐함속에서도 세 사람의 웃음소리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식당안은 김이 뽀얗게 서려있었고, 창밖으로는 그날도 가는 눈발이 흩날리였다. 뜨거운 국물을 한술 뜨며 칸나동지는 《이렇게 국밥 먹으니까 진짜 실감이 나네요》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큰 다짐이란 이렇게 작은 그릇 하나에서도 실감이 나는 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칸나동지는 그 자리에서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사장님, 우리 이제 진짜 잘될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나는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예감이 부디 맞아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유니동지는 그 옆에서 국밥 그릇을앞에 두고 《저는 이번에는 진짜 오래오래 하고싶어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오래오래라는 그 소박한 바람이야말로 이 작은 회사가 가장 절실하게 붙들어야 할 목표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그무렵부터 회사 안팎에서 나를 두고 《엄마》라 부르고 성원들끼리 서로 《딸내미》라 이르는 말투가 어렴풋이 싹트기 시작하였음을 떠올렸다. 그 말투가 어디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갔는지는 뒤의 절에서 다시 이야기할 일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미리 적어두고 싶은것은, 그 말투의 첫 씨앗이 뿌려진 자리가 다름아닌 이 정월의 국밥집 한켠이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을앞에 앉혀두고 오래오래 하라고 당부하던 그 마음이, 후날 돌이켜보면 이미 부모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것이다.
이 권의 이름을 《딸들이 태어나다》라 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월 초이레와 초여드레, 이 이틀이야말로 그 제목이 가리키는 첫 페지였다. 짐짓 거창한 표현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보다 더 알맞은 말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
다섯달 전에 한번 세상에 나왔다가 겨울 한철 사라졌던 두 사람이, 새 이름을 걸고 다시 세상에 나온 그 이틀은 이 조그마한 회사에 있어서는 참으로 새로운 탄생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 이틀을 이 회사의 진짜 생일로 여긴다.
짐짓 력사를 다루는 사람처럼 말해보자면, 우주30(2023)년 정월 초이레와 초여드레는 스텔라이브라는 나라 아닌 나라가 세워진 건국의 날들이라 불러도 좋을것이다. 국기도 없고 국경도 없는 이 작은 나라의 첫 백성은 겨우 세 사람뿐이였으나, 그 세 사람의 마음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사업자등록의 날자도, 뒤에 이어질 법인 설립의 날자도 아닌, 두 사람이 새 이름을 걸고 처음 인사를 건넨 바로 그 이틀 말이다. 력사라는것은 이렇게 서류보다 먼저 목소리로 씌여지는 법인가보다.
이 조그마한 재조직은 이제 다음 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사무실 한칸과 세 사람의 열정만으로는 언제까지고 버틸수 없다는것을 나는 이미 짐작하고있었으나, 그 다음 걸음이 무엇이였는지는 다음 절에서 이어 적을 일이다.
다만 여기서 미리 말해두고싶은것은, 그 다음 걸음의 첫 디딤돌이 다름아닌 이 정월의 이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새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울려퍼진 그 이틀이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틀이 없었더라면 그 뒤의 어떤 이야기도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