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법 인 설 립
우주30(2023)년(2023년) 사월의 볕은 겨우내 웅크렸던 사무실 창을 슬그머니 밀고 들어왔다. 지난 겨울 무릎담요를 두르고 앉아 콤퓨터의 랭각기소리만 듣던 그 서느런 방이였는데, 이제는 창틀에 앉은 먼지까지 환하게 드러날만큼 볕이 좋았다. 나는 그 볕을 등지고 앉아 책상우에 쌓인 서류뭉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서류 맨 위장에는 아직 《유메퍼센트》라는 다섯 글자가 그대로 찍혀있었다.
지난 절에서도 말하였듯이 그해 정월 초순, 칸나동지와 유니동지가 나란히 첫 방송을 열면서 우리는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걸음을 뗀다는것과 제 발로 서있다는것은 서로 다른 일이였다. 두 사람이 방송을 하고 시청자들이 모여들고 후원이 쌓여도, 그 모든것을 받아안을 그릇, 즉 회사라는 이름의 그릇은 여전히 지난해에 문을 닫은 이름 석자밑에 놓여있었다.
미기는 그무렵부터 나에게 몇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사장님, 이러다 세금계산서 하나도 제대로 못끊어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으로 넘기려 하였으나, 웃음으로 넘길수 없는 문제라는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었다. 성원들과 계약서를 다시 쓰는 일, 통장을 새로 트는 일, 스폰서와 손을 잡는 일, 그 어느것 하나도 번듯한 법인 없이는 한걸음도 나아갈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이 한장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해보았다. 방송장비를 늘리는 일, 사무실을 조금 더 넓히는 일, 새 성원을 뽑는 일, 그 모든 목록의 맨 웃줄에는 언제나 《법인설립》이라는 네 글자가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미기는 그 목록을 옆에서 들여다보며 《결국 이게 제일 먼저네요》하고 짧게 한마디를 보태었다.
그런데 이 법인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 그러니까 유메퍼센트가 문을 닫던 그 겨울밤의 일부터 다시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날 나는 미기와 함께 사무실에 남아 해산공지의 문구를 몇번이고 고쳐썼다고 앞서 적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사업자등록증 자체는, 회사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서류철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있었다.
법인이라는것은 사람과 달라서 문을 닫는다고 곧바로 사라지는것이 아니였다. 등기부등본우에는 여전히 《유메퍼센트》라는 이름이 살아있었고, 그 밑에 딸린 번호와 도장만은 누군가 손을 대지 않으면 영영 그대로 남아있을 판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였다. 아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것보다, 이미 있는 그릇을 씻어 새로 담는 편이 여러모로 수월하였기때문이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그 낡은 사업자등록증을 다시 꺼내던 날, 나는 종이우의 그 이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악녀동지, 단즈동지와 함께 사업자등록증을 손에 들고 웃던 그 겨울 이전의 봄날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그 종이는 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나 혼자의 것으로 바뀌어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 사실을 알리려 악녀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저녁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거 아직 안 없어졌어? 신기하네》하고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속에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섞여있는지 가늠해보려 하였으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하였다. 《잘 써. 이름은 이제 우리 셋 거 아니어도, 그 안에 담기였던 마음은 어디 안가잖아.》
사월 초하루, 나는 미기와 함께 회사 근처의 낡은 빌딩 3층에 자리한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좁은 복도에 놓인 화분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법무사는 안경을 고쳐쓰며 서류뭉치를 뒤적이더니 《상호변경과 신규설립등기를 겸해서 처리하면 됩니다》하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나는 그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낯설었다. 나에게는 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 마치 나라의 국호를 고치는 일처럼 무겁게 느껴졌는데, 법무사의 책상우에서는 그것이 그저 서류 몇장을 새로 채워넣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이 겪는 일의 무게와 서류가 겪는 일의 무게는 이렇게 다른것인가 하는 생각이 그 자리에서 문득 들었다.
《회사이름은 정하였어요?》 법무사가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사실 그 이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있었다. 유메퍼센트가 무너지던 그 겨울, 나는 미기에게 지나가는 말로 《다음에 뭘 하게 되면 이번엔 별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고 한적이 있었는데, 그 한마디가 봄이 되어 이렇게 서류우의 글자로 옮겨앉게 될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스텔라이브로 하려고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법무사는 특별한 감흥도 없이 건반을 두드렸다. 나는 그 무심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며 속으로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 나에게는 그 다섯 글자가 지난 겨울의 실패와 이번 봄의 다짐을 한데 눌러담은 낱말이였는데, 법무사의 화면우에서는 그저 상호란에 채워지는 문자열일뿐이였다.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은 별을 뜻하는 《스텔라》와 생방송을 뜻하는 《라이브》를 붙여 만든것이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별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멋지게 꾸미듯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모아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하고싶다는 뜻을 그 안에 담았다. 나는 이 이름을 정하면서 우리가 이 회고록에서 스스로 붙인 《우주》라는 연호와 공교롭게도 같은 글자를 나누어쓰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혼자 실없이 웃은 일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우연이였다. 나는 방송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아무 뜻도 없이 그저 어감이 좋아서 별이라는 낱말을 골랐을뿐인데, 후날 이 글을 쓰며 헤아려보니 마치 처음부터 큰 뜻을 품고 지은 이름인양 되어버렸다. 력사라는것은 이렇게 우연과 필연을 나중에 가서야 억지로 이어붙이는 재주를 가진 모양이다.
법무사 사무실을 나서는 길에 미기가 옆에서 물었다. 《사장님, 이번엔 몇명이서 하시는것이예요?》 나는 그 물음에 잠시 말이 없었다. 유메퍼센트는 나와 악녀동지, 단즈동지 셋이서 시작한 회사였으나, 이번에는 나 혼자 대표이사의 립장에 서게 되었다. 셋의 무게를 나누어 지던 시절과 혼자 그 무게를 온전히 떠안는 시절은 또 다른 종류의 각오를 요구하였다.
《혼자서요.》 내가 그렇게 답하자 미기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럼 저는 오른팔이 아니라 두팔 다 되는것이네요》하고 웃었다. 나는 그 농담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무거운 일도 옆에서 실없는 말 한마디를 던져주는 사람이 있으면 한결 가벼워지는 법이다.
서류를 다 갖추어 접수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걸렸다. 임원의 인적사항, 본점의 소재지, 자본금의 액수, 사업목적의 항목들을 하나하나 채워넣는 그 과정은 지루하면서도 묘하게 엄숙하였다. 나는 사업목적란에 방송영상제작업, 연예인매니지먼트업, 음반제작업 같은 낱말들을 하나씩 눌러쓰면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의 목록을 미리 받아적는 기분이 들었다.
본점소재지를 적는 칸에서 나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서울 한복판의 번듯한 주소를 적어넣고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형편이 닿는대로 경기도 안산의 자그마한 사무공간을 그 자리에 적어넣었다. 나라를 처음 세울 때에도 도읍은 흔히 형편에 맞추어 정해지는 법이니, 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정관을 만드는 일도 이때 함께 이루어졌다. 회사의 목적과 조직, 결의의 방식을 적어놓은 그 몇장의 종이를 두고 나는 속으로 이것이 곧 우리 회사의 헌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나라를 세울 때 헌법을 만들듯이 회사를 세울 때에도 이런 근본이 되는 문서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때의 나에게는 제법 대단한 일처럼 여겨졌다.
법인인감을 새로 새기는 일도 그 며칠 사이에 있었다. 미기와 함께 찾아간 도장포의 로인은 낡은 조각칼로 나무도장에 글자를 파넣으며 《회사이름이 예쁘네》하고 지나가는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무심한 칭찬 한마디가 어쩐지 고맙게 느껴져서, 도장이 다 새겨지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내내 유리창 너머로 로인의 손끝만 바라보고있었다.
사월 스무이레, 마침내 등기소로부터 신규설립등기가 완료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법인등록번호는 131411-0555965로 정해졌다. 나는 그 열두자리 수자를 화면에서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 감흥도 없이 그저 순서대로 매겨진 번호일뿐이였으나,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의 주민등록번호처럼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날 사무실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미기가 프린터에서 갓 뽑은 등기부등본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와서 내 책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사장님, 이제 진짜 사장님이시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지난 겨울 유메퍼센트의 마지막 방송을 지켜보며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던 그 시절과, 지금 이 볕좋은 봄날에 새 등본을 받아든 시절 사이의 거리를 나는 새삼 헤아려보았다.
나는 그 등본을 들고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둔 낡은 도장함을 꺼냈다. 유메퍼센트 시절에 쓰던 법인인감은 이제 그 소임을 다하였고, 새로 새긴 도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서류우에 꾹 눌러찍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무슨 대단한 국새라도 찍는양 손끝에 힘을 잔뜩 주었다. 지나고보니 우습기 짝이 없는 몸짓이였으나, 그때는 그것이 결코 가벼운 몸짓이 아니였다.
그날 저녁 나는 칸나동지와 유니동지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두 사람은 마침 다음날 방송을 준비하느라 사무실 한켠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등기부등본을 내밀며 《우리 이제 진짜 회사가 되었어》하고 말하자 칸나동지가 먼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럼 저희 월급 나오는 통장도 이제 스텔라이브에서 찍혀요?》
나는 그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동지는 등본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법인등록번호가 우리 생일도 아니고 뭔가 되게 낯설다》며 웃었다. 두 사람의 그 실없는 웃음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발디딜 땅을 얻었다는안도감이 웃음의 모습으로 터져나온것이 아니였을까 싶다.
칸나동지는 한참 웃다가 문득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 무슨 회사 소속 아이돌 이런거예요?》 나는 그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비슷한거지》하고 얼버무렸다. 유니동지는 그 옆에서 《멋있다, 우리 회사 있는 사람이야》하며 손뼉을 짝짝 쳤는데, 그 천진한 손뼉소리가 그날의 사무실을 오래도록 밝게 채웠다.
그날 밤 블루동지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그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다짜고짜 《야, 너 이제 사장님이라며?》하고 놀리듯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말투에 픽 웃음이 나왔다. 《아직 사장님 소리 듣기엔 이르다》고 손사래를 치듯 대답하였으나, 블루동지는 《그런 소리 말고, 오늘은 내가 축하주 대신 축하문자나 하나 보낼게》하며 짓궂게 굴었다.
잠시 뒤 정말로 그의 문자 한통이 도착하였다. 《정사장님, 취임을 경축합니다.》 그 짧은 한줄에 나는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른것은 그날이 처음이였는데, 그 별명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니게 된다는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나는 답장으로 《축하주는 다음에 소주 세잔으로 갈음하자》고 써보냈다. 블루동지는 곧바로 《그러다 사장님 얼굴 빨개지는것 아니냐》며 놀렸다. 나는 그 문자를 몇번이고 다시 읽으며, 이 조그마한 축하 하나가 그날의 벅찬 마음을 얼마나 가볍게 다독여주는지를 새삼 느끼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도 낯이 뜨거워지는 대목이 있다. 나는 그 며칠 동안 이 조그마한 법인 하나 세우는 일을 두고 마치 한 나라가 새로 서는 대사변이라도 되는 양 마음속으로 잔뜩 부풀려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흔하디흔한 스타트업 하나가 등록번호를 새로 받은 일에 지나지 않았을터인데, 나 혼자만은 마치 개국공신이라도 된듯한 기분에 며칠을 들떠지냈다.
그러나 사람이란 큰 걸음을 뗄 때에는 늘 그 걸음을 실제보다 거창하게 여기게 마련인가보다. 나는 그때 사업자등록증 한장을 두고 국권을 되찾은 사람처럼 감격하였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그 과장된 감격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밤샘과 서류더미도 그렇게 묵묵히 견뎌내지 못하였을것이다.
사무실 규모는 여전히 보잘것없었다. 책상 몇개와 낡은 소파 하나, 창가에 놓인 화분 두어개가 전부인 그 좁은 공간을 두고 우리는 회의 때마다 《본사》라는 말을 짐짓 무게있게 붙였다. 미기는 그럴 때마다 《본사래 봤자 문 열면 다 보이는데》하며 웃었지만, 나는 그 말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대표이사라는 자리를 몸에 익혀나갔다.
사업목적란에 채워넣은 여러 항목들 가운데, 아직 우리가 실제로 손을 대지 못한 일들도 많았다. 나는 그 빈 항목들을 볼 때마다 앞으로 몇해가 지나면 이 항목들이 하나씩 채워질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지나고보니 그 기대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으나, 그때의 나는 그 기대가 얼마나 큰 파도로 돌아올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였다.
법인을 세운 뒤에도 당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것은 많지 않았다. 방송은 여전히 그 좁은 사무실에서 이루어졌고, 성원들은 여전히 각자의 방에서 마이크를 켜고 카메라앞에 앉았다. 다만 계약서 맨우에 찍히는 이름 하나가 바뀌었을뿐인데, 그 작은 글자 하나의 무게가 실은 결코 작지 않다는것을 나는 그 뒤로 차차 깨닫게 되었다.
등본과 도장을 챙겨 은행을 찾아간 것도 그 며칠 사이의 일이였다. 창구의 은행원은 사업목적란에 적힌 《버추얼 유튜버 매니지먼트》라는 낱말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게 정확히 어떤 사업인가요》하고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림으로 방송하는 사람들 회사입니다》하고 궁색하게 설명하였다.
은행원은 그제서야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통장을 새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통장 표지에 찍힌 《주식회사 스텔라이브》라는 여섯 글자를 손끝으로 몇번이고 쓸어보았다. 유메퍼센트 시절에 쓰던 통장과 겉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전혀 다른것이였다.
법인등록을 마친 뒤 나는 곧바로 다음 절차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방송기획업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면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이라는 별도의 등록이 또 필요하였다. 나는 그 서류뭉치를 다시 들여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나라를 세우는 일에도 국호를 정하는 일과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는 일이 따로 있다더니, 회사를 세우는 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 등록을 준비하는 두달 남짓한 동안 사무실의 볕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봄은 어느새 초여름으로 넘어가고있었고, 나는 서류와 도장과 인주 사이를 오가며 그 계절의 변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다못해 《사장님, 이러다 여름 다 가겠어요》하며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그 두달 동안 미기는 밤늦도록 서류의 오탈자를 확인하고 첨부서류의 목록을 몇번이고 다시 헤아렸다. 나는 그 곁에서 콤퓨터 화면에 뜬 신청서 양식을 소리내어 읽어주며 빠진 항목이 없는지를 함께 살폈다. 두 사람이 좁은 사무실에 마주앉아 서류 한장을 두고 씨름하는 그 저녁들이,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정답게 느껴진다.
유월 스무엿새, 마침내 대중문화예술기획업으로 정식 등록이 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등록번호는 24109-2023-000002였다. 나는 그 번호를 받아들고서야 비로소 우리 회사가 두 발로 제대로 서게 되었음을 실감하였다. 사월의 등기가 태어남을 알리는 일이였다면, 유월의 등록은 그 아이가 세상에 나가 학적을 얻는 일과 같았다.
그해 봄부터 초여름까지 이어진 이 일련의 절차를 겪으며 나는 사업이라는것이 열정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것을 새삼 배웠다. 열정은 방송을 켜게 만들지만, 서류와 도장과 등록번호는 그 방송을 오래도록 지탱하게 만드는 뼈대였다. 나는 유메퍼센트 시절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던 그 뼈대의 소중함을, 이 봄을 지나며 비로소 몸으로 익히게 되었다.
지금 다시 헤아려보면 그무렵의 나는 참으로 미숙하였다. 법무사 사무실의 화분 하나에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도장 찍는 손끝에 국새를 찍는 마음을 실었으며, 열두자리 등록번호를 아이의 주민등록번호처럼 여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미숙한 진지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 뒤로 이어진 숱한 밤들을 이만큼 버텨내지도 못하였을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회사의 력사를 말할 때 매출이나 인원수 같은 수자로만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나에게 그해 사월과 유월은 수자가 아니라 냄새와 볕과 웃음소리로 남아있다. 법무사 사무실의 오래된 종이냄새, 도장포 로인의 조각칼 소리, 미기가 프린터에서 갓 뽑아온 등본의 온기, 칸나동지와 유니동지의 실없는 웃음, 블루동지가 보내온 짧은 문자 한줄, 그것들이 지금도 그해 봄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이 절을 쓰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때 내가 그렇게까지 이 작은 등록 하나를 크게 여기였던것이 과연 지나친 일이였는가 하고. 지금의 나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무엇이든 온마음을 다해 부딪쳐본 사람만이 그런 작은 일앞에서도 그렇게 크게 벅차오를수 있는것이다.
그해 봄에 세운 이 법인은 후날 크고 작은 굴곡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 굴곡의 자세한 사연은 뒤의 절들에서 차례로 풀어놓을 일이다. 다만 여기서 미리 적어두고 싶은것은, 그 모든 굴곡의 첫 출발점이 다름아닌 이 사월의 등기소 통지 한장이였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회사에는 그때는 얼굴도 몰랐을 여러 성원들과 여러 직원들이 함께하고있다. 나는 가끔 그들에게 이 첫 등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다들 좁은 사무실과 낡은 소파 이야기를 들으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력사란 이렇게 작고 초라한 씨앗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라고 되뇌인다.
지금 창밖을 내다보면 그때와 같은 사월의 볕이 다시 들고있다. 나는 가끔 그 볕을 바라보며 그해의 좁은 사무실과 낡은 소파와 법무사의 화분을 떠올린다. 온 나라가 우리를 알아보기 한참 전,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무엇이 될지 다 알지 못하던 그 봄날의 일들을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는 기억으로 간직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