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A G F 의 위 기
우주30(2023)년(2023년) 십일월에 접어들면서 계절은 성급하게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다. 아직 단풍이 채 지지 않은 나무들 곁으로 찬 바람이 밀려들었고, 사무실 창밖의 가로수들은 잎을 절반쯤 떨군채 서있었다. 나는 그무렵 밤마다 콤퓨터앞에 앉아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을 걸고 벌어지는 온갖 크고작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에 손끝이 시렸지만 화면의 불빛만은 식을 줄을 몰랐다. 방안에는 콤퓨터의 랭각기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있었고, 그 소리를 듣고있노라면 회사가 지나온 몇해의 걸음이 함께 돌아가는듯한 기분이 들군 하였다. 책상우에는 아직 손도 못댄 결재서류들이 켜켜이 쌓여있었으며, 나는 그것들을 곁눈으로 흘겨보면서도 다른 한 화면에는 늘 팬 카페 창을 띄워두고있었다.
그해에도 어김없이 세밑의 큰 잔치가 다가오고있었으며, 나는 그 준비를 앞두고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 잔치란 다름아닌 《AGF》, 곧 아세아 최대의 만화영화·게임 축전이였다. 해마다 십일월이면 온 나라의 창작자들과 애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가 사랑하는 이름들을 서로 나누는 대축전으로, 우리 회사로서도 결코 소홀히 여길수 없는 자리였다.
성원들의 얼굴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우리 방식으로는 이런 자리야말로 애호가들과 실제로 만날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였다. 지난 몇해 동안 이 축전에 참가할 때마다 애호가들은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몰려들었고, 우리로서도 그 열기를 볼 때마다 새삼 힘을 얻군 하였다. 전시대앞에 늘어선 줄이 행사장 저편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볼 때면 나는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였다.
그때마다 나는 다음해에는 더 잘 치러보리라고 스스로 다짐하군 하였는데, 그 다짐이 그해에는 도리여 발목을 잡을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그해에도 이 축전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준비를 맡을 사람들을 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회사가 얼마나 빨리 커졌는지, 그리고 그 커진 몸집에 우리의 손발이 얼마나 뒤따라가지 못하고있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사업이 늘어나는속도만 보고 달려왔을뿐, 그 사업 하나하나를 떠받치는 자잘한 일솜씨까지 함께 여물었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던것이다. 행사가 다가오면서 애호가들에게 안내되여야 할 참가 정보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온다는것이 고작 공식 팬 카페로 가라는 링크 한 줄이 전부였다.
몇시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성원들을 만날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가야 하는지 - 이런 물음들에 우리는 제때에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카페안에서 작은 불만들이 조용히 오갈뿐이였다. 애호가들은 예년에 비해 안내가 너무 부실하다고 여기면서도 그저 서로 눈치만 살피며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한 팬이 이대로는 안된다는 뜻으로 제법 날카로운 글을 하나 올렸다. 그 글의 요지는 간단하였다. 회사가 이렇게 큰 잔치를 앞두고도 안내문 한 장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였다.
그 글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동안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만 품고있던 말을 대신 꺼내준 셈이였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카페를 맡아 돌보던 운영진이 그 글을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불온한것으로 여겨 이내 지워버렸고, 글을 쓴 사람마저 카페에서 강퇴해버린것이다.
지적 하나를 조용히 덮으려던 그 손길이 오히려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되고말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애호가들은 원래의 불만보다 몇곱절 더 큰 분노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행사 준비가 미흡하다는 지적 하나가 순식간에 《우리 목소리를 틀어막으려 한다》는 훨씬 무거운 문제로 번져버린것이다.
지워진 글의 캡처는 오히려 다른 모임터로 옮겨다니며 더 넓은 자리에서 되풀이하여 이야기되였다. 남의 눈에는 카페 한구석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려가는 태풍과 같았다. 나는 그 소식을 전해듣고 한동안 화면앞에서 말을 잃었다.
지적을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워버리는것, 그것이야말로 회사가 커지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였다. 작은 불씨 하나가 미처 손쓸틈도 없이 온 카페를 태우는 큰 불로 번지는 광경을 나는 그저 화면 너머에서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대화창을 새로고침할 때마다 성난 말들이 몇줄씩 더 쌓여있었고, 나는 그 줄을 하나하나 읽어내리며 등골이 서늘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일을 말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의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팬 카페라는것은 회사가 아직 몇명 안되는 식구로 시작하던무렵, 팬 몇 사람이 자원하여 소박하게 꾸려나가던 사랑방과 같은 곳이였다. 그때는 나 자신도 짬이 나면 직접 카페에 들어가 글을 읽고 감상글을 달군 하였다.
그때는 규칙이라 할것도 따로 없이 다들 서로 얼굴은 몰라도 마음만은 통하는 사이로 지냈고, 어쩌다 험한 말이 오가도 며칠이면 저절로 가라앉는 작은 동네였다. 카페를 돌보는 이도 회사가 따로 세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애호가들 가운데서 손이 빠르고 마음씨 좋은 이가 자연스레 맡아온 자리였다. 나는 그런 이들의 수고를 고맙게만 여기였을뿐, 그 자리에 따라올 무게까지는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는 새로 가입한 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말을 남기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식구가 적으니 얼굴은 몰라도 이름만은 눈에 익었고, 누가 무슨 사정으로 며칠 안보이면 다른 팬이 먼저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 그런 다정한 동네를 나는 오래도록 마음속 어딘가에 그대로 남겨두고싶어하였던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방식은 그 시절에는 맞는 방식이였다. 식구가 몇백명 남짓일 때는 자원한 이들의 손끝만으로도 넉넉히 돌아가는 살림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성원의 수가 늘고 팬의 수가 그보다 몇곱절 더 불어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사랑방의 운영 방식을 좀처럼 고쳐나가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몸은 몇 배로 자랐는데 옷은 여전히 옛적에 맞추어입은 그대로였던 셈이다. 나는 회사살림을 늘리는 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면서도, 정작 그 살림을 애호가들에게 알리는 자잘한 일에는 마음을 넉넉히 쓰지 못하였다. 큰 것만 보고 작은것을 놓치는 버릇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늘 스스로 경계하는 병이다.
나는 그 소박한 사랑방의 정을 못내 귀히 여긴 나머지, 거기에 필요한 규율과 책임까지 함께 자라나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 점에서는 나 자신에게도 마땅히 돌아와야 할 책망이 있었다. 회사의 대표로서 그런 자리를 방치한 잘못은 결코 운영진 한 사람에게만 물을수 있는 일이 아니였던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운영진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 속내까지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손이 빠르고 마음씨 좋던 그 사람도 몸집이 몇곱절로 불어난 카페를 예전처럼 혼자 감당하려다 지쳐있었으리라는 짐작만은 해볼따름이다.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그런 자리를 미처 정비하지 못한 우리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편이 옳을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카페 매니저 강퇴 사건》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돌기 시작하였다. 후날 누군가는 이런 일을 두고 그저 대수롭지 않은 소동으로 여길지도 모르나, 그때 우리에게는 회사의 신용이 걸린 실로 엄중한 고비였다. 지금 와서 조금 낯간지러운 말을 보태자면, 그것은 회사를 창립한 이래 처음 겪은 내홍이라 할만하였다. 강도단이라 불리는 나의 오랜 애호가들조차 이번만은 나서서 편을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여론은 완강하였다.
나는 이것을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직접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처음 마이크를 잡았을 때 나는 아직 사태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한채였다. 생방송 중에 한 팬이 이번 일을 두고 회사의 준비가 왜 이렇게 허술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다소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회사의 빠른 성장속도에 따라가기 벅차다》는것이 그때 내가 할수 있었던 가장 정직한 말이였다. 성장이 벅차다는 하소연은 그 자체로 거짓이 아니였으나, 애호가들이 정작 듣고싶어한 말은 아니였다. 마이크를 내려놓고나서도 나는 그 대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 대답은 사실이였을지언정 애호가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말이였다. 성장이 벅차다는 하소연은 위로가 될지언정 해명은 되지 못하였다. 대화창에는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것이냐》는 물음이 꼬리를 물었고, 나는 그 물음앞에서 다시 한번 말을 아껴야 하였다.
방송을 끝내고나서도 그 물음은 오래도록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며칠동안 밤낮으로 미기와 마주앉아 일을 의논하였다. 미기는 언제나 내 오른팔이라 부를만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였고, 이때에도 카페의 지난 게시물들과 애호가들의 반응 하나하나를 조용히 정리하여 내 앞에 늘어놓았다.
사무실 한켠에 마주앉아 화면을 들여다보는 미기의 얼굴에는 나만큼이나 무거운 빛이 어려있었다. 우리는 몇날 며칠을 두고 이 일을 어떻게 추스릴것인지 머리를 맞대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밤이 깊어지면 둘이서 식은 곽밥을 나누어먹으며 잠시 말을 쉬기도 하였다.
미기는 회사가 아직 자리를 잡기 전부터 나와 함께 크고작은 일을 도맡아온 사람이였다. 말수는 적었으나 한번 손댄 일은 끝을 보고야마는 성미였고, 나는 그런 미기를 늘 내 오른팔이라 불렀다. 이번에도 미기는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기보다 내 뒤에서 자료를 갈무리하며 묵묵히 힘을 보태였다.
결국 우리는 카페 운영을 그대로 둘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적을 지우고 사람을 내쫓는 방식으로는 어떤 신뢰도 다시 쌓을수 없었기때문이다. 십일월 십육일, 우리는 카페 매니저의 직을 거두어들인다는 공지를 내걸었다.
공지가 올라가던 그날 나는 화면앞에서 오래도록 그 문구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짧은 글 하나에 그동안의 소란을 다 담을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우리가 문제를 문제로 알고있다는 뜻만은 전하고싶었다. 미기는 곁에서 그 문구를 몇번이고 함께 다듬어주었다.
애호가들의 반응은 반쯤은안도하고 반쯤은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것이였다. 사람 하나를 물러나게 하는것으로 일이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사람들이 정작 듣고싶어하는것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것인가 하는 대답이였지, 누구를 벌하였다는 소식이 아니였다.
나는 그제서야 이 일을 말로써가 아니라 낱낱이 밝혀보이는 방식으로 매듭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나는 직접 자료를 만들어 애호가들앞에 서기로 하였다. 회사의 규모가 어떻게 늘어왔는지, 그 사이 우리가 미처 갖추지 못한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바로잡을것인지를 하나하나 페지에 옮겨적는 일이였다.
나는 그것을 회사 내부에서만 쓰던 보고 자료의 격식을 빌려 만들기로 하였는데, 애호가들앞에 이런 자료를 들고 나선것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십일월 하순의 며칠동안은 그 자료를 만드는 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였다. 자정을 넘긴 사무실에는 나와 미기, 그리고 콤퓨터 두대의 랭각기소리뿐이였다.
미기는 곁에서 지난 몇달치 카페 게시물과 채팅 기록을 다시 훑어 어떤 물음들이 되풀이하여 나오는지 골라주었고, 나는 그것을 하나씩 페지에 옮기며 빠짐없이 대답을 마련하였다. 마치 큰 싸움을 앞둔 부대가 진을 치듯, 나는 그 며칠을 오로지 그 일에만 붙들려 지냈다. 페지 한장을 만들었다가는 지우고 다시 만들기를 되풀이하느라 자정을 넘기기가 례사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며칠 사이에 나는 다른 자리에서도 회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무렵 열린 한 오락 전문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우리가 잘할수 있고 좋아하는것을 할것이다》, 《앞으로 빠른 페이스로 음악 콘텐츠로 다양한 시도를 할 예정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곧바로 다시 페지 만드는 생각으로 돌아가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가 바로 이 소동이 한창이던무렵이였다. 밖으로는 앞날을 자신있게 말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런 소란을 다스리지 못하고있었으니, 그 간극이야말로 그 시절의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가 한다. 겉으로 의젓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밤새 페지와 씨름하던 그 며칠이야말로 경영자라는 자리의 참모습이였는지도 모른다.
십일월 삼십일 그날은 아침부터 목이 뻣뻣하니 긴장이 되였다. 나는 마이크를 몇번이고 다시 매만졌고, 밤새 만든 페지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며 마치 무슨 국정 보고라도 앞둔 사람처럼 마음을 다잡았다. 미기는 마지막까지 곁에서 페지 순서를 짚어주며 잘될것이라고 눈짓으로만 다독여주었다.
방송을 켜기 앞서 나는 늘 하던대로 따뜻한 물을 한잔 마였다. 큰일을 앞둘 때면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목청부터 가다듬고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그 한잔이 오래도록 손안에서 식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그 자료를 들고 생방송앞에 앉았다. 화면에는 내가 밤새 만든 페지들이 하나씩 넘어갔고, 나는 그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애호가들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첫 페지를 넘길 때만 해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먼저 행사 정보가 왜 그렇게 늦었는지를 낱낱이 설명하였다. 준비 인력이 몇해 전 규모 그대로 머물러있었다는것, 그사이 행사의 크기는 몇곱절로 불어났다는것을 나는 숨기지 않고 그대로 페지에 담아 보여주었다. 화려한 말로 감싸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것이 낫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다음으로 카페 운영을 어떻게 바꿀것인지를 말하였다. 앞으로는 회사가 직접 소식을 확인하고 책임질수 있는 창구를 따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어떤 절차를 새로 두겠다는것까지 되도록 에두르지 않고 말하려 애썼다.
대화창은 처음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물음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페지가 몇장 넘어가는 사이 그 물음들은 차츰 잦아들었다. 몇몇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준비해온것을 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 말들을 보며 회사를 일군다는것이 결국 애호가들과 함께 신뢰를 쌓아가는 일임을 다시금 되새기였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오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몇시간의 발표로 몇달치 소란이 단번에 가시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우리가 등을 돌리지 않고 마주섰다는 사실만은 애호가들에게 전해진듯하였다.
그날 밤 나는 미기와 함께 늦은 곽밥을 나누어먹으며 서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창밖은 이미 캄캄하였고, 사무실안에는 콤퓨터 랭각기소리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가 앞으로의 회사살림에 어떤 자국을 남길지 가만히 헤아려보았다.
그해가 저물고 우주31(2024)년(2024년)이 밝으면서 회사는 이 일을 계기로 소통하는 방식을 근본에서부터 고쳐나가기 시작하였다. 팬 카페 하나에만 기대던 창구를 넓혀 공식적인 소식 창구를 따로 마련하였고, 이런 일을 전문으로 맡아볼 담당자를 새로 두었다. 나와 미기 둘이서만 밤을 지새우던 자리에 이제는 정식으로 사람을 두게 된것이니, 이 또한 그 겨울이 남긴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렇게 새로 자리를 맡은 사람이 바로 이브였다. 이브는 조용하고 꼼꼼한 사람으로, 무엇 하나 애호가들에게 알려야 할 소식이 생기면 미리미리 낱낱이 정리하여 내놓는 성미를 지니고있었다. 나는 그런 이브를 볼 때마다 그해 겨울의 그 밤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군 하였다.
이브가 자리를 잡은 뒤로 우리 회사의 소식은 예전처럼 링크 한 줄로 그치는 법이 없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가 미리 낱낱이 안내되였고, 애호가들의 물음에도 예전보다 훨씬 빠르고 성실하게 응답이 돌아갔다. 그다음해 AGF에서는 전시대앞에 줄을 선 애호가들이 이제는 안내문 걱정 대신 사진 찍을 걱정만 한다며 우스개를 하였다는 말도 들려왔다.
나는 그 변화를 지켜보며 한 사람의 자리가 회사 전체의 신뢰를 얼마나 크게 좌우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 겨울의 소란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그런 자리를 그토록 서둘러 마련하지 못하였을것이다. 화를 내던 애호가들에게도, 그 화를 받아낸 우리에게도 그 겨울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되짚어보면 그것은 회사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한번은 치러야 하였던 성장통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이 자라는속도와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속도가 늘 나란히 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해 십일월의 소란은 우리에게 그 어긋남을 뼈아프게 가르쳐준 첫 스승이였던 셈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 왜 하필 그렇게 정보가 늦었는지, 어째서 운영진이 그런 방식으로 대응하였는지 그 속내를 낱낱이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한것은, 그 겨울의 소동을 지나며 나는 비로소 경영자라는 자리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인지를 몸으로 배웠다는 사실이다. 지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보는것, 그것이 그해 겨울이 내게 남긴 가장 값진 교훈이였다.
돌이켜보면 짐짓 력사적인 사변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소박한 소동이였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회사를 일군 이래 처음으로 밤을 지새워 페지를 만들어야 하였던 겨울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딸들이 하나둘 태여나 자라나듯 회사도 그렇게 아픔을 겪으며 자라났고, 나는 그 아픔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이 자리가 가벼운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던것이다. 그 겨울을 지나며 애호가들도 우리도 서로에게 조금은 더 무거운 믿음을 지니게 되였으니, 그것이야말로 그해 겨울이 남긴 가장 뜻깊은 자국이 아닐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