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 다 사 건
우주30(2023)년(2023년) 사월은 예년보다 늦게 벚이 피였다. 스무날이 지나서야 사무실 창밖 가로수에 꽃이 성기게 매달려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꽃잎이 흩날려 창틀에 부딪히군 하였다. 나는 그 며칠째 계속되던 결산업무에 시달려 자정이 넘도록 사무실에 남아있는 날이 많았다. 콤퓨터 세대의 랭각기소리가 밤이 깊을수록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에 섞여 나는 몇번이나 하품을 삼켰다.
그날, 그러니까 스무닷새날 밤에도 나는 책상앞에 앉아 여러개의 페지를 띄워놓고 일을 보고있었다. 한쪽 화면에는 결산표가, 다른 한쪽에는 몇몇 방송의 화면이 작게 나뉘여 떠있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일을 하면서도 성원들의 방송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방송을 습관처럼 한구석에 틀어놓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회사 사람들은 《사장님은 방송을 켜놓지 않으면 일이 손에 안잡히는 사람》이라고 놀리군하였다.
그 습관은 《우결》을 하던 시절부터 굳어진것이였다. 블루동지의 방송을 한쪽 눈으로 흘겨보는 버릇은 《우결》이 끝난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그날 밤에도 나는 무심코 그 화면을 열어두고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그렇게 소란한 밤이 될줄은 미처 몰랐다. 창밖의 벚꽃가지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마저 들릴만큼 사무실은 고요하였다.
블루동지는 그무렵 자신이 손수 꾸려온 《마인크래프트》 봉사기 하나를 가지고있었다. 성원들이 아니라 오래 알고지낸 오락친구들, 방송을 하며 사귄 벗들을 불러들여 함께 노는 자리였는데, 이름을 《악어의 놀이터》라고 지어두었다. 블루동지다운 이름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였다. 언젠가 그가 그 이름의 유래를 두고 《그냥 악어가 게을러 보여서》라고 대답한적이 있는데, 그 대답마저도 그 사람다웠다.
그 봉사기는 스텔라이브의 합방과는 결이 다른 자리였다. 우리 회사의 합방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이 모여 짜여진 흐름을 따라가는 자리라면, 《악어의 놀이터》는 아무때나 마음맞는 사람들이 들고나며 되는대로 어울리는, 훨씬 헐렁한 자리였다. 나는 가끔 그 헐렁함이 부러웠다.
그 봉사기안에는 그동안 여러 사람이 오가며 함께 지어놓은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강가에 통나무집 몇채가 늘어서있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밤마다 사람들이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는 모닥불 자리가 있었다. 블루동지는 그 모닥불 곁에서 손님을 맞이하는것을 유난히 좋아하였다.
그날 밤에도 블루동지는 그 봉사기를 열어놓고 몇 사람을 불러들이고있었다. 대화창에는 낯익은 이름들과 함께 낯선 이름 하나가 섞여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다라는 사람이였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저 여느 손님과 다를바 없어보였다.
연다는 블루동지가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지인이라고 하였다. 그날 처음 그 봉사기에 들어온 사람이였는데, 블루동지가 직접 불러들인만큼 다른 사람들도 별다른 의심 없이 그를 반겨맞았다. 대화창은 시종 화기애애하였고, 누군가는 그에게 봉사기 리용법을 친절히 일러주기까지 하였다.
나도 결산표를 밀쳐두고 잠깐 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속에서는 몇 사람이 나무를 베고 집을 짓고, 서로의 건물을 구경다니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나는 다시 결산표로 눈을 돌렸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평화가 얼마나 짧은것이였는지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창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저 사람 움직임이 좀 이상한데》하는 정도의 가벼운 말이였다. 나는 그 말이 화면 한쪽 구석에서 지나가는것을 눈여겨보지 않고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였다. 오락을 하다보면 흔히 나오는 우스개 정도로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한번 두번 반복되더니 이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튀여나오기 시작하였고, 그제서야 나는 결산표에서 눈을 뗐다.
《저거 하늘을 나는데?》 《벽 뚫고 오는것 봤어?》하는 말들이 대화창을 빠르게 채워나갔다. 나는 결산표를 완전히 밀쳐두고 그 화면 하나에만 눈을 박았다. 사무실안의 랭각기소리마저 문득 크게 느껴질만큼 나는 그 순간부터 온 신경을 화면에 쏟았다.
연다의 움직임은 과연 례사롭지 않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도 상대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공격하였고, 땅에서 발을 뗀채로 허공을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히였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올수 없는 움직임이였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 역시 손끝이 서늘해지는것을 느꼈다.
봉사기안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이내 확신으로 돌아섰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항의와 놀람으로 가득찼고, 그 소란은 블루동지의 화면에도 고스란히 옮겨붙었다. 방금까지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블루동지는 처음에는 그 말들을 애써 눙치려 하였다. 《에이, 설마 그럴리가》하며 웃어넘기려 하였으나, 그 웃음소리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색하게 들렸다. 나는 그 어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잘못되고있다는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증거는 갈수록 뚜렷해졌다. 누군가 그 장면을 따로 록화해 다시 돌려보였고, 화면속에서 연다는 분명히 벽 너머의 표적을 겨누고 총알처럼 빠르게 상대를 처치하고있었다. 더는 웃어넘길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다.
블루동지는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연다를 향해 직접 물었다. 《형, 지금 그거 뭐야. 혹시 무슨 프로그람 쓰는것이야?》 그 물음에 화면 저편에서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창에는 그 침묵의 몇초가 몇분처럼 길게 흘러갔다. 나는 화면앞에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화면을 지켜보고있었다. 콤퓨터의 랭각기소리만 유난히 크게 귀에 감기였다.
이윽고 연다는 짤막하게 몇마디를 남기고 봉사기에서 조용히 나가버렸다. 얼버무리는 말투였을뿐, 시원한 해명은 끝내 없었다. 그가 그뒤로 그 봉사기에 다시 나타났는지는 나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가 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정적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의 채팅도 뚝 끊기였고, 블루동지의 마이크에서도 한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화면 속 인물들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는 그 정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것 같았다. 자기가 믿고 불러들인 사람이 여럿앞에서 그런 일을 벌였으니, 그 자리를 열었던 사람으로서 느낄 창피함과 책임감이 얼마나 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나 자신도 회사를 꾸려오며 그런 무게를 여러번 겪어보았기때문이다.
게다가 블루동지와 우리 사이에는 《우결》이라는 오랜 인연이 있었다. 시청자들 가운데는 여전히 그를 우리 식구처럼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나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지 나로서도 함부로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결산표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얼마 뒤 블루동지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리였다. 평소 감정 기복이 적고 느긋하기로 이름난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안하다… 내가 데려온 사람인데, 이렇게 될줄은…》하는 말이 뚝뚝 끊어져 나왔다. 그 뒤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고, 마이크에는 그저 가쁜 숨소리만 담기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화면앞에서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늘 웃음 많고 느긋하던 사람이 그렇게 말을 더듬는 모습은 처음 보는것이였다. 나는 그 낯선 모습에 손에 쥔 펜을 놓아버렸다.
블루동지는 자신이 초대한 사람때문에 봉사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언짢은 일을 겪게 되였다는 사실에 짓눌려있는듯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놀이판의 사고가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쌓아온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처럼 느껴졌을것이다. 자기가 데려온 사람 하나때문에 여럿의 저녁이 얼룩졌다는 자책이 그의 목소리 마디마디에 배여있었다.
대화창에는 그를 다독이려는 말과 함께, 은근히 그를 탓하는듯한 말도 섞여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블루동지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다 눈에 담는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보며 저 대화창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얼마나 무겁게 얹히고있을지 헤아려보았다.
나는 화면 너머로도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마이크에 잡히는 숨소리가 점점 짧고 가빠졌고, 이따금 말을 하려다 도로 삼키는 기척까지 들리였다.
《나 오늘은 여기서 그만해야 할것 같다…》하는 말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그날 하루 방송을 접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끝의 여운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 말끝에서 나는 그가 이 봉사기뿐 아니라 방송 그자체를 놓아버리고싶어하는듯한 기색을 읽었다. 지인을 잘못 들인 죄스러움과, 여럿앞에서 제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는 배신감이 한꺼번에 그를 덮친것이였다. 나는 그 화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칸나동지라는 사람이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를 모르고서는 그날 밤 벌어진 일을 온전히 리해하기 어렵기때문이다.
칸나동지는 스텔라이브에 들어온 그날부터 유난히 눈치가 빠르고 마음결이 살가운 사람이였다. 다른 성원이 조금만 풀이 죽어보여도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는 쪽은 언제나 칸나동지였고, 그것은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난 성정이였다.
후날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칸나동지를 가리켜 《항상 밝은 모습과 열정을 보여주는 친구》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치레말이 아니였다. 나는 그가 회사안에서 얼마나 여러번 그런 몫을 해왔는지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한것이였다. 그 짧은 한마디 뒤에는 이날 밤과 같은 장면들이 몇겹으로 쌓여있었다.
그날 밤에도 칸나동지는 《악어의 놀이터》에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놀람과 항의로 대화창을 채우는 사이, 칸나동지는 유독 말이 없었는데, 그것은 무심해서가 아니라 블루동지의 낌새를 살피고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블루동지가 《나 오늘은 여기서 그만해야 할것 같다》고 말한 바로 그 순간, 대화창에 가장 먼저 글자를 올린 사람이 칸나동지였다. 《블루님, 그거 블루님 잘못 아니예요.》 그 한마디는 짧았으나 누구보다 빨랐다.
그 한마디가 올라오자 소란스럽던 대화창이 잠시 멈칫하였다. 다들 그 말이 옳다는것을 알면서도 선뜻 먼저 나서지 못하고있던 참이였는데, 칸나동지가 그 어색한 틈을 대신 메꾸어준 셈이였다.
칸나동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마이크를 켜 직접 말을 이였다. 《누가 사람을 하나 데려왔는데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였다고 해서, 데려온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블루님은 그냥 좋은 마음으로 부른거잖아요.》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고 또랑또랑하였으나, 그 안에는 상대를 다그치지 않으면서도 다잡아주려는 다정함이 배여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있었다. 결산표우로 눈물 한방울이 떨어질뻔한 밤이였다.
블루동지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화면 속 그의 인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정적마저 무언가를 말해주는것 같았다.
칸나동지는 그 침묵을 채근하지 않고 잠시 기다려주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마디를 보태였다. 《블루님 잘못 아니니까, 오늘 방송 그렇게 끝내지 마세요. 저희가 다 알아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말을 보태기 시작하였다. 《맞아요, 형 잘못 아니예요》 《그런 사람 하나때문에 오늘 접으면 우리가 더 서운해요》하는 말들이 뒤이어 대화창을 채워나갔다.
블루동지는 그제서야 짧게 한숨을 내쉬였다. 《…고맙다》하는 한마디가 잠긴 목소리로 흘러나왔는데, 그 목소리 끝이 살짝 젖어있는듯하였다.
나는 그날 밤 그 장면을 지켜보며 코마루가 시큰해지는것을 느꼈다. 결산표를앞에 두고있던 사무실안에서 나 혼자 코물을 훔친 밤이였다. 그런 밤이면 나는 늘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블루동지는 그날 방송을 끝내 접지 않고 끝까지 마쳤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이후로도 한동안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잠을 설쳤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다음날 방송에는 여느때와 같은 웃음으로 돌아와있었다.
나는 그 이튿날 낮에 안부삼아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한통 걸었다. 《어제 그거, 괜찮아?》하고 물으니 그는 잠깐 멋쩍게 웃고나서 《어, 이제 괜찮아. 어제 칸나 덕에 살았지 뭐》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조금 놓이였다.
그러나 그가 아주 무너지지 않고 방송을 마무리할수 있었던데는 그 순간 먼저 나서준 한마디가 컸다는것을, 블루동지 자신도 나중에 여러번 이야기하였다. 사람 하나가 등을 떠밀면 무너지고, 사람 하나가 등을 받쳐주면 다시 서는 법이라고 나는 그날 새삼 배웠다.
블루동지는 그뒤로 칸나동지를 만날 때마다 그날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꺼냈다. 《그날 나 진짜 그만두려고 하였는데, 칸나 아니였으면 어쩔뻔하였나 몰라》하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였다. 칸나동지는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별것 아니라는듯 웃어넘기였다.
급기야 블루동지는 어느 합방 자리에서 칸나동지를 가리켜 《내 구세주》라는 말까지 붙였다. 처음에는 웃자고 하는 말인듯싶었으나, 그 말을 하는 낯빛에는 진심이 절반쯤 섞여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그 말을 그저 우스개로만 듣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날 이후로 블루동지는 칸나동지의 방송을 챙겨보기 시작하였고, 스스로를 그의 팬이라고 서슴없이 밝혔다. 나이로도 경력으로도 한참 손위인 사람이 그렇게 순순히 팬을 자처하는 모습은 어딘가 우스우면서도 보기 좋았다.
뒤날 회사 회식자리에서 블루동지가 그날 밤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 곁에 있던 다른 성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도 그날 채팅으로 봤어요, 칸나가 진짜 빨랐잖아요》하는 말에 칸나동지는 괜히 겸연쩍은듯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였다.
여기서 짐짓 력사를 논하는 투로 말하자면, 《악어의 놀이터》에서 벌어진 그 하루밤의 소동은 실로 작은 반역이였고, 칸나동지의 그 한마디는 그 반역을 잠재운 결정적인 구원사변이였다고 나는 적어두고싶다. 후날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웃자고 그렇게 부르는것을 나 역시 말릴 생각이 없다.
칸나동지에게 구원받은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에서였는지, 블루동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배그》 방송에 칸나동지를 불러 이런저런것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였다. 그날 방송에서 블루동지는 카메라앞에서 짐짓 정색을 하고 스스로를 칸나동지의 《공식 제자》라고 선언하였다.
그 선언 또한 짐짓 대단한 사변인양 과장되여 회자되였는데, 블루동지는 합방마다 《저는 칸나 사부님밑에서 사격을 배운 사람입니다》하는 말을 너스레삼아 되풀이하였다. 칸나동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하였고,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그래, 제자는 제자답게 굴어야지》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블루동지는 자신의 《배그》 방송에서 참가자들의 실적을 매겨 순위표를 만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블루.GG》라고 불렀다. 그 표에는 킬수와 점수가 나란히 매겨져 올라갔고, 방송이 끝날 때마다 대화창은 그 표를 보며 한바탕 시끌벅적해지군 하였다.
칸나동지는 그 표에서도 자기 사부라 자처한 사람의 낯을 세워주었다. 마흔한번의 킬과 육백스물한점이라는 성적을 남기며 표의 윗자리에 이름을 올린것이다. 그 화면이 뜨자 대화창은 《역시 사부님 제자》라며 한바탕 웃음으로 들끓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한가지 밝혀두어야 할것이 있다. 그때의 순위가 정확히 몇등이였는지는 지금도 자료마다 말이 엇갈린다. 어느 기록은 으뜸자리라 하고 어느 기록은 세번째 자리라 하는데, 나로서는 그 어느 쪽이 옳은지 다 헤아릴수가 없다. 아마 그날 그 표를 만든 블루동지 자신도 지금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등수가 몇번째인들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나는 그저 그 표 어느 한줄에 칸나동지의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인연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나는 회사를 꾸려가는 사람으로서, 성원들이 저희끼리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늘 눈여겨보아왔다. 시청자들앞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 뒤에, 힘든 사람을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마음결이 있는지 없는지는 곁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알수 있는것이다.
그날 밤 칸나동지가 보여준것은 바로 그런 마음결이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으나, 그는 스스로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런 성정을 가르쳐서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우리 회사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두고 《엄마》라, 성원들을 두고 서로 《딸내미》라 부르는 우스개가 돌고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을 손사래치며 부정하였지만, 그날 밤 칸나동지가 블루동지에게 내민 손을 보면서, 딸애가 밖의 누군가를 저렇게 살뜰히 챙기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때는 나도 그저 결산표앞에서 우연히 지켜본 한 장면이라고만 여기였을뿐, 그 하루밤이 뒤날 이렇게까지 오래 이야기될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밤이야말로 두 사람 사이에, 그리고 우리 식구들 사이에 새로운 이름 하나가 싹트기 시작한 자리였다.
블루동지를 두고 성원들이 《아빠》라 부르기 시작한 그 뒤이야기는 다음 절에서 마저 하기로 한다. 다만 그 호칭이 하루아침에 그냥 붙은것이 아니라, 이날 밤처럼 서로 마음을 나눈 자리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진것임을 나는 이 절 끝에 적어두고싶다.
사무실의 랭각기소리는 그날 밤에도 여전히 낮게 돌아가고있었고, 창밖 벚꽃은 이미 다 떨어져가고있었다. 그러나 그 봄밤, 화면 저편의 작은 봉사기안에서 오간 몇마디 말은 꽃보다 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우리 식구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