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딸 의 제 자
그날의 표를 나는 이미 앞절 끝머리에서 한 차례 스쳐 적어둔 일이 있다. 그러나 다시 헤아려보니 그때는 결과 한줄만을 급히 옮겨놓았을뿐, 그 자리에 함께 이름을 올렸던 다른 얼굴들과 그날 대화창을 채웠던 소란은 미처 다 옮기지 못하였다.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워, 이 절에서만은 그날의 표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펼쳐놓아보려 한다.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나도 이제 뚜렷이 짚어내지 못한다. 아빠라는 말이 이미 성원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은 말버릇이 된 뒤였다는것만은 분명하나, 그것이 우주30(2023)년 여름이였는지 그 이듬해 봄이였는지는 자료마다 말이 조금씩 다르다. 나는 그저 사무실 콤퓨터 랭각기소리가 낮게 돌아가던 어느 저녁, 그 표를 처음 보았다는것만을 기억한다.
사장실 창밖에는 그무렵 늘 보아오던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있었다. 창을 조금 열어두면 저 아래 거리의 차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고, 콤퓨터 몇대의 랭각기소리가 그 소리와 뒤섞여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나는 그 익숙한 소음속에서 성원들의 방송을 지켜보는 저녁을 이미 몇해째 되풀이하고있었다.
나는 그날도 여러개의 페지를 동시에 띄워놓고 성원들의 방송을 한쪽 눈으로 흘겨보고있었다. 그러다 낯익은 대화창 하나에서 유난히 소란한 기색이 느껴져 손을 멈추었다. 블루동지의 방송이였다.
화면 한 구석에는 표 하나가 떠있었다. 왼쪽에는 이름이, 오른쪽에는 킬수와 점수가 나란히 적힌 순위표였다. 나는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블루.GG》라는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블루동지가 자신의 《배그》 방송에 어울려온 이들의 기록을 모아 표로 만드는 버릇이 있다는것은 이미 앞절에서 적어둔대로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리 그 표에 오른 이름이 유난히 많았다. 여덟명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던것이다.
빅헤드, 스나랑, 칸나, 백곰파, 계춘회, 김된모, 램램, 양아지.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내려가며 새삼 《배그》판이 참으로 넓고도 좁은 세계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 회사의 이름 하나가 자연스레 섞여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고도 반가웠다.
빅헤드와 스나랑은 블루동지와 오래 《배그》를 함께해온 얼굴들로 익히 알려진 이들이였다. 백곰파는 후날 강블 《우결》이 다시 세상에 오르내리는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인물이니, 이 자리에서 미리 눈여겨볼만하다. 계춘회, 김된모, 램램, 양아지 또한 저마다의 방식으로 《배그》판에 이름을 새긴 이들이였다.
블루동지는 그 표를 화면에 띄워놓고 아래 등수부터 하나씩 짚어나갔다. 평소처럼 낮고 느긋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느긋함이 그날따라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화면 어딘가에 낯익은 이름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여덟째는…》하고 블루동지가 이름 하나를 불렀다. 대화창에는 《오, 저 형 오랜만이네》하는 반가운 말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 반가움을 함께 나누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다른 이름 하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일곱째, 여섯째. 등수가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대화창은 그 이름의 주인에 얽힌 우스개를 하나씩 꺼내며 웃음바다가 되였다. 나는 그 우스개들을 다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오래 어울려온 이들 사이에만 통하는 정겨움이 화면 너머로도 느껴져 함께 웃음이 났다.
다섯째 자리에는 양아지의 이름이 올랐다. 대화창에는 《역시 꾸준하다》는 칭찬이 붙었고, 김된모와 램램의 이름도 그 언저리에서 하나씩 불리며 저마다의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나는 그 정겨운 소란을 들으며 《배그》판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훨씬 사람냄새 나는 세계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네번째 이름이 불리였을 때, 대화창에서 누군가 《어, 아직 그 이름 안나왔는데》하는 말을 올렸다. 나는 그 말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당기였다. 남은 자리는 이제 셋뿐이였다.
블루동지도 그것을 눈치챈듯, 잠시 표를 넘기지 않고 뜸을 들이였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하는 말에 대화창은 온통 《빨리요!》 《설레발 그만!》하는 성화로 뒤덮였다. 그러나 블루동지는 그 성화에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 느긋함이 《배그》를 오래 해온 사람 특유의 여유인지, 아니면 짐짓 부리는 심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그 몇초의 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는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사무실의 랭각기소리마저 그 사이 잠깐 멎은것처럼 느껴졌다.
《셋째는…》하고 블루동지가 마침내 입을 열였다. 그리고 화면에 이름 하나가 떴다. 칸나.
마흔두번의 킬, 육백스물한점.
그 두 수자는 표안에서 유난히 굵고 진한 글자로 박혀있었다. 다른 이름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게 앉혀놓은것을 보면, 블루동지나름으로도 그 자리를 특별히 여기였던 모양이였다.
나는 그 수자를 보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빅헤드도 스나랑도 아닌, 스텔라이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우리 칸나동지가 저 쟁쟁한 얼굴들 사이에서 셋째 자리를 차지하였다는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오래도록 《배그》판에서 이름을 날려온 이들을 뒤로 하고 올라선 자리였다.
나는 의자에서 아예 일어나 사장실안을 몇걸음 서성거렸다.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들뜬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그 흥분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블루동지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니 이게…》하고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였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원래 자신이 킬을 낼 때 하던 그 대사가, 이번에는 제자를 두고 하는 말이 되여버린것이다.
대화창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딸이 아빠 제자들 다 잡았다》 《역시 피줄은 못 속인다》 《아빠 이제 밥그릇 위험한거 아니냐》는 말들이 쉴새없이 올라왔다. 나는 그 말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빅헤드와 스나랑도 그 자리에서 순순히 축하를 보태였다. 《우리보다 높은데?》 《역시 신인이 무섭다》하는 말들이 오갔는데, 그 목소리에는 시샘보다 신기함이 더 짙게 배여있었다. 오래 어울려온 사람들 사이라 그런지, 새 얼굴 하나가 불쑥 치고올라온것을 두고도 다들 순순히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대화창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애호가들 사이에서 늘 하는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장작이 알아서 탄다》는 말이였다. 굳이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이런 소식 하나만 나오면 성원과 애호가들이 저희끼리 알아서 이야기를 지피고 키워나가는것을, 나는 그 밤에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였다.
블루동지가 마이크를 당겨 칸나동지를 따로 불러냈다. 《칸나야, 너 이럴 거면 진작 말을 하지》하는 말에 칸나동지는 웃음소리부터 냈다. 방송 중에도 곧잘 목소리가 잦아드는 편인 그 성미가 그날은 흥이 한껏 올라있어서, 나는 화면 너머로도 그 들뜬 기색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었다.
《아빠가 가르쳐준대로 하였을 뿐인데요!》 칸나동지가 그렇게 대답하자 대화창은 또 한번 뒤집어졌다. 아빠라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화력이 붙는것을 보며, 나는 새삼 그 말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 실감하였다. 그 뒤이야기는 앞절에 이미 적어둔대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어두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말이 우리 식구들 사이에서는 진작부터 방향이 뒤죽박죽이였다는것이다.
앞절에서 적었듯 블루동지는 스스로를 칸나동지의 《공식 제자》라 선언하고 다녔다. 사격을 가르쳐준 스승은 칸나동지요, 그 밑에서 배운 제자는 블루동지라는 것이 그무렵 두 사람 사이에서 굳어진 우스개였다. 그런데 정작 이 표를 채운것은 블루동지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다른 이들이였으니, 스승의 표에 스승의 스승이 이름을 올린 셈이 되고말았다.
나는 이 대목을 두고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블루동지가 칸나동지의 제자라면, 그 블루동지에게 사격을 배운 다른 이들은 결국 칸나동지의 손제자쯤 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였다. 그렇다면 칸나동지는 자기 손제자들이 겨루는 표에 직접 뛰여들어, 그들을 다시 이겨버린 셈이 되는것이다.
후날 누군가 이 표를 두고 《블루.GG 삼등사변》이라 이름 붙인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것이다. 스승이 제자의 제자이고 제자가 스승의 스승인, 이 뒤엉킨 사제관계를 력사가들이 후날 정리하려 든다면 아마 머리깨나 앓을것이다. 나는 그저 그 뒤엉킴 자체가 우리 식구들다운 정겨움이라고 여긴다.
짐짓 력사를 논하는 투로 말하자면, 그 여덟명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표는 흡사 옛이야기 속 무예도장의 서열표를 보는듯하였다. 사부와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순위를 다투었으니, 이것을 두고 무슨 대단한 문파의 계보라 불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나는 그 우스운 비유를 속으로 되뇌이며 혼자 웃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한가지 밝혀두어야 할것이 있다. 그날의 킬수를 두고도 자료마다 말이 엇갈린다. 어느 기록은 마흔한번이라 하고 어느 기록은 마흔두번이라 하는데, 나로서는 그 어느 쪽이 옳은지 다 헤아릴수가 없다.
등수를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칸나동지의 이름만 따로 옮겨적은 기록에서는 그를 으뜸자리인양 적어놓은것도 있었으나, 이렇게 여덟명 전원의 이름을 한자리에 놓고 보면 그가 선것은 분명 셋째 자리였다. 나는 이번 절에서만은 그 전모를 다 옮겨적었으니, 이로써 그 오랜 헷갈림이 조금은 풀렸기를 바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등수가 몇번째인들 무엇이 그리 대수이겠는가. 마흔한번이든 마흔두번이든, 으뜸이든 셋째든, 나는 그저 그 표 한줄에 우리 칸나동지의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인연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수자를 다투는 일은 결국 뒷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을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시절의 칸나동지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방송에서는 흥이 높고 애교도 많은 편이지만, 실은 고양이처럼 낯을 가리는 성미라는것을 나는 회사안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용궁의 황녀라는 설정을 걸고 나온 그 아이가, 정작 실제로는 사람 많은 자리를 조금 버거워한다는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칸나동지는 본디 《해리 포터》 시리즈나 《젤다의 전설》 같은 잔잔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미였다. 총소리 요란한 《배그》판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취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사격 순위표우에서 이름을 날리는것을 보니, 사람의 재주란 겉으로 드러난 취향만으로는 다 헤아릴수 없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칸나동지가 사격 순위표에서 이름있는 얼굴들을 상대로 정면으로 겨루었다는것부터가 나로서는 대견한 일이였다. 나는 후날 칸나동지에게 직접 그날 이야기를 물어본적이 있다. 《련습을 따로 하였느냐》는 물음에 칸나동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몰래 조금요》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아빠앞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어요》하는 그 말에 나는 더 캐묻지 못하였다.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마음이 어쩐지 뭉클하여서였다. 아빠라는 호칭이 그저 우스개로 시작되였다는것을 아는 나로서는, 그 말이 더는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시 그날 방송으로 돌려야겠다. 순위 발표가 끝난 뒤 블루동지는 표를 다시 한번 화면에 띄우며 《이거 다음번엔 진짜 조심해야겠다》고 능청스레 말하였다. 대화창은 《아빠 긴장타는것 실화냐》며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되였다.
그때 칸나동지가 마이크에 대고 짧게 한마디를 보태였다. 《너 죽고 싶니》하는 그 특유의 말투를 흉내내며 다른 참가자를 놀리듯 웃어보인것이다. 원래 노래방송에서나 나오던 그 말버릇이 사격 순위표 자리에까지 옮겨붙자, 대화창은 또 한바탕 뒤집어졌다.
나는 그 장면을 사장실에서 혼자 지켜보며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그러다 문득 다른 성원들은 이 소식을 아는가 궁금하여 사내 대화방을 열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벌써 유니동지가 그 화면을 갈무리해 올려놓고 《칸나 진짜 대박》이라는 말을 덧붙여둔 뒤였다.
히나동지도 뒤이어 《역시 우리 칸나언니》라는 말을 남기였다. 나는 그 대화방을 읽어내려가며, 아빠라는 말 하나가 어느새 딸들 사이의 자랑거리로까지 번져있다는것을 새삼 느꼈다. 나는 그 대화방에 《잘하였다, 우리 딸》이라는 짧은 말을 보태여 넣었다.
타비동지와 시부키동지도 그 소식을 듣고 한마디씩 보태였다. 타비동지는 《아빠가 키운 보람이 있네요》라 하였고, 시부키동지는 평소 하던대로 능청스레 《저도 총 좀 배워볼까요》라 하였다. 나는 그 대화방을 보며 아빠라는 말 하나가 이제는 온 식구의 우스개거리로 자리잡았다는것을 새삼 느꼈다.
칸나동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웃는 얼굴 이모티콘 여러개를 붙여 답을 보내왔다. 그 답장 하나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스텔라이브를 처음 세울 때만 해도, 나는 이 아이들이 이렇게 밖에 나가 자기 이름을 걸고 이름있는 이들과 겨룰만큼 자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 장면은 이내 여러개의 클립으로 잘리여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제목도 저마다 달라서, 어떤것은 《딸이 아빠 제자들 다 잡은 순간》이라 붙었고 어떤것은 그저 《블루.GG 근황》이라는 심심한 이름을 달고있었다. 나는 그 클립들을 하나씩 찾아보며, 같은 장면도 옮기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른 표정을 짓는다는것이 새삼 신기하였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블루동지에게도 따로 련락을 하였다. 《제자 하나 기가 막히게 키웠네》하는 농담에 블루동지는 《내가 가르친게 아니라 재능이 원래 있었다》며 겸손을 떨었다. 그 통화 너머로 들리던 웃음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사실 나도 사부님한테 배운건데》하고 블루동지가 덧붙이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사부의 사부가 사부의 제자에게 진 셈이니, 이 집안의 항렬은 대체 어디서부터 따져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우리 식구다운 우스개로 여기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성원들은 진작부터 나를 두고 엄마라 부르고 자기들끼리는 딸애들이라 부르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을 애써 부정하였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굳이 그럴 일도 아니였다. 엄마라 불리는 나와 아빠라 불리는 블루동지 사이에서, 칸나동지가 이렇게 두 집 사이를 오가듯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것도 나쁘지 않은 노릇이였다.
아빠 롱담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그것은 그저 우스운 별명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격 순위표 사건을 지나며 그 롱담은 조금 다른 무게를 지니게 되였다. 딸이 아버지의 이름난 벗들 틈에서 어엿이 이름을 올렸다는것은, 단순한 우스개를 넘어 그 사이에 실제로 무엇인가가 쌓였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오래전 내가 블루동지와 함께 겪은 시간들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누나와 바이비라 부르며 온 나라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 인연이 이렇게 딸들에게까지 이어질줄은 몰랐다. 세월이 흘러 부르는 이름은 바뀌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이어지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듯하였다.
빅헤드와 스나랑도, 백곰파도, 계춘회와 김된모와 램램과 양아지도, 그날만은 자기 순위보다 칸나동지의 순위를 두고 더 떠들었다고 나는 전해들었다. 낯선 이름 하나가 자기들 틈에서 이렇게 이름을 날리는것을 보며, 오히려 다들 즐거워하였다는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배그》판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훨씬 너그러운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백곰파는 그날의 인연때문이였는지, 그로부터 한참 뒤에도 블루동지의 이름을 심심찮게 입에 올렸다고 한다. 그것이 후날 강블 《우결》이 다시 세상에 오르내리는 자리로 이어졌다는것은 이 회고록의 뒤편에서 다시 다룰 일이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그 인연의 첫매듭 하나가 이렇게 사격 순위표우에서 맺혔다는것만을 적어두고싶다.
나는 그무렵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다가도, 이런 소식 하나에 하루의 피로가 눅는것을 여러번 느꼈다. 대표라는 자리가 본디 성원들의 크고작은 살림을 다 짊어지는 자리이지만, 이렇게 딸 하나가 밖에서 제 몫을 다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낙이 없었다면 그 자리를 이만큼 오래 지키지도 못하였을것이다. 나는 그날 밤 사장실 불을 끄면서도 웃음이 새여나오는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삽화 하나로만 여기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표가 우리 회사와 강블 《우결》을 잇는 또하나의 매듭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슬며시 이어지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도 그 인연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여 어디까지 뻗어갈지 다 헤아리지 못한다.
이 딸의 승리 하나가 후날 또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그때의 나는 다 알지 못하였다. 아빠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식구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뜻밖의 자리에서 서로 마주치게 될지는, 뒤에 이어지는 절들에서 차차 밝혀질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꺼진 화면을 바라보고있었다. 딸의 순위 하나가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앞절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한줄로 적어둔 일을, 이 절에서는 이렇게 다시 펼쳐 적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리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것이다.
사무실의 랭각기소리는 그날 밤에도 낮게 돌아가고있었다. 표 하나, 수자 몇개, 그리고 그 뒤에 오간 몇마디 말이 이렇게 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우리 식구들 사이에서 되풀이하여 이야기되고있는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결》이 남긴것들 가운데 가장 뜻밖의, 그러나 가장 다정한 유산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