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K A N N A 》
우주31(2024)년의 정월은 유난히 추웠다. 사무실 창밖으로 밤늦은 거리의 가로등이 얼어붙은듯 하얗게 서있었고 콤퓨터의 팬 돌아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책상우에는 마시다 만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고 벽걸이 시계바늘은 자정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고있었다. 나는 그날도 야근을 하며 화면 한켠에 띄워놓은 표 예매 페지를 몇번이고 새로고침하고있었다.
이런 밤이면 나는 늘 지난 일을 되짚어보게 된다. 한해 남짓 전 처음 회사를 차렸을 때에는 성원 몇명에 콤퓨터 몇대가 살림의 전부였다. 사무실도 좁아서 회의랍시고 모이면 무릎이 서로 닿을 지경이였고, 겨울이면 난방비를 아끼느라 담요를 두르고 회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회사가 이제는 극장의 좌석수를 세고 매진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였으니 세월이란 참으로 력사적인 것이다.
바로 그날 자정, 칸나동지의 첫 단독 음악회 《KANNA》의 표가 발매되기로 되여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남아 미기와 함께 화면을 지켜보았다. 미기는 내 오른팔이라 부를만한 직원으로, 이런 큰일앞에서는 나보다 더 긴장하는 성미였다. 《사장님, 진짜 다 팔릴가요.》 미기가 마우스를 쥔 손을 가만히 떨며 물었다.
《안 팔리면 우리가 다 사지 뭐.》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하였다. 농담으로 한 말이였으나 속으로는 나도 가슴이 뛰였다. 스텔라이브가 세워진 이래 성원 한사람의 이름을 걸고 큰 극장을 통째로 빌려 무대를 올리는것은 이번이 처음이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이 음악회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서 칸나동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먼저 말하지 않을수 없다.
칸나동지는 스스로를 두고 오랜 세월 바다밑에 잠겨있던 용궁의 황녀라고 소개하곤 하였다. 방송안에서는 늘 흥이 높고 애교가 많아 보였지만 정작 방송 밖에서는 낯을 가리는 성미여서 새로운 사람앞에서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흥을 마음대로 조절할줄 아는 재주가 있어 방송을 이끄는 솜씨가 여느 성원 못지않았다.
그런데 이 음악회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더 앞선 어느 봄날부터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주30(2023)년 5월의 일이다. 그때 칸나동지는 《악어의 놀이터》라는 봉사기안에서, 그러니까 《마인크래프트》 화면속에서 저 혼자 단독 음악회라는것을 벌린적이 있었다. 극장도 없고 조명도 없고 오직 콤퓨터 화면속의 각진 무대뿐이였다.
그러나 그날 화면앞에는 스무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함께 노래를 들었다. 나는 그 방송을 사무실 소파에 앉아 끝까지 지켜보았다. 화면 속 조약한 큐브 무대우에서 칸나동지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도 눈굽이 뜨거워졌다. 《저것을 진짜 무대에서 하면 어떻게 될가.》 그날 밤 나는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이였을뿐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였다. 회사 살림도 넉넉지 않았을 때라 큰 극장을 빌린다는것은 감히 입밖에 내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김에 그보다 더 앞선 일도 함께 적어두어야겠다. 칸나동지가 지금의 이름을 얻기 전, 유메퍼센트라는 곳에서 활동을 마쳐가던무렵 방송을 그만두려 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사정을 나는 자세히 다 알지 못하나, 마음이 몹시 지쳐있었다는 것만은 곁에서도 느낄수 있었다.
그때 나는 유니동지와 함께 칸나동지를 붙잡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였는지 하나하나 다 옮기지는 못하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여기서 그만두기에는 아직 보여줄것이 너무 많이 남았다는 말이였다. 다른 회사에서도 데려가겠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나 칸나동지는 결국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오는 길을 택하였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설득이 이 모든 일의 첫 단추였던 셈이다. 씨앗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부터 자란다. 그때 만약 그 대화가 없었더라면 《KANNA》라는 무대도, 이 절 자체도 세상에 없었을것이니 이야기란 참으로 앞뒤가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법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는 사이 칸나동지의 노래는 늘어갔다. 5월의 《마인크래프트》 무대에 이어 그해 여름에는 첫 음반 《ADDICT!ON》이 나왔고 가을에는 보카듀오라는 노래잔치에 나가 《색채》라는 곡을 냈으며 겨울 문턱에는 두번째 음반 《최종화》를 내놓았다.
겨울로 접어들며 11월에는 《유튜브》 화면에서 3차원 모습으로 다시 태여났다. 이제껏 편편한 화면속에서만 움직이던 모습이 립체로 살아 움직이는것을 보며 성원들도 저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무렵부터 회사안에서는 슬며시 음악회 이야기가 다시 오가기 시작하였다.
그해 12월 2일, 칸나동지의 생일 방송이 있었다. 대화창에는 축하의 글이 쉴새없이 올라오고있었고 후원 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케잌 모양의 그림문자가 화면 가득 흘러내렸다.
방송 말미에 나는 칸나동지 곁에 조용히 다가앉았다. 미리 준비한 말을 꺼내기 전에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화면 저편의 시청자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조용해졌다. 《내년 정월에, 진짜 극장 잡아서 콘서트 한번 해보자.》
칸나동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짜요? 진짜 진짜요?》 《그래, 진짜.》 《으아 사장님... 저 지금 이 설정 유지가 안돼요, 그냥 울어도 돼요?》
용궁의 황녀라는 설정을 지니고있으면서도 그 순간만은 그냥 스물몇살 청년의 얼굴로 돌아가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화면 저편 대화창도 온통 눈물 그림문자로 뒤덮였다. 그날 대화창에는 다음 음악회를 예고하는 자막이 함께 떠올랐고 후원 문구들 사이사이 《드디여》, 《기다렸다》는 말들이 쉴새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로부터 두달이 채 못되는 동안 회사의 모든 일손이 그 준비에 매달렸다. 극장 대관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미기는 계약서를 몇번이고 다시 읽으며 오탈자를 확인하였다. 회의 자리에서는 예산 이야기가 자주 오갔는데, 큰 극장 둘을 동시에 빌리는 값이 만만치 않아 우리끼리 몇번이나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였다.
《이거 되겠습니까, 사장님.》 회계를 맡은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하였다. 《안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그 말에 회의실 안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 배포가 어디서 나왔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과 부산광복점, 두 자리를 동시에 잡았다. 온라인으로도 볼수 있도록 《비욘드 라이브》에 중계를 걸었으니 이는 서울 한 도시의 일이 아니라 온 나라의 사변이 되는 셈이였다. 좌석수는 일반석으로 천오백사십구석.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였으나 그때 우리에게는 그 수 하나하나가 감히 넘볼수 없는 큰 산처럼 느껴졌다.
표 발매를 앞두고 나는 잠을 설쳤다. 성원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혹시 자리가 남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번갈아 밀려왔다. 회사를 세운 뒤로 이렇게 큰 판돈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정각이 되자 화면의 수건반이 바뀌였다. 나는 새로고침 단추를 눌렀다. 화면이 몇번 깜빡이더니 이내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매진이였다. 다시 눌러도 매진, 또 눌러도 매진이였다.
《사장님 이거 5초예요, 5초!》 미기가 옆에서 시계를 보며 소리쳤다. 발매를 시작한지 5초안에 일반석이 동이 났다는 소식이 곧 이곳저곳에서 확인되였다. 나는 그 수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후날 사람들은 이 사변을 두고 《스텔라이브 최초의 매진 신화》라 부르게 되지만 그날 밤 사무실에 있던 우리는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일 겨를도 없이 그저 서로 얼싸안고 방바닥을 구를뿐이였다.
나는 그길로 칸나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받아졌다. 《동지, 5초만에 다 팔렸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말이 없더니 이윽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 이거 꿈 아니지요?》
《꿈 아니야. 눈 떠도 그대로일거야.》 《반갑꼬리 하러 나가야 하는데 목이 메여서 반갑꼬리도 안 나와요.》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큰 사변을앞에 두고도 저 특유의 인사말버릇부터 걱정하는것이 칸나동지다웠다.
그날 밤 성원들이 모여있는 단체대화방에도 매진 소식이 삽시에 퍼졌다. 유니동지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그림문자를 스무개도 넘게 연달아 보냈고, 다른 성원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얹으며 밤늦도록 대화방이 시끌시끌하였다. 나는 그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 회사가 그래도 식구답게 굴러가고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표가 매진된 뒤로 극장측과의 협의, 무대 세트 설계, 음향 점검 등 크고작은 일들이 줄을 이였다. 나는 매일 밤 회의를 마치고 나서야 집으로 향하였다. 어떤 날은 회의가 길어져 회사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였다.
예행련습이 시작된 것은 정월 중순께였다. 극장 무대 뒤편에 마련된 좁은 대기실에서 칸나동지는 몇번이고 같은 소절을 되풀이하여 불렀다. 목이 쉬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부르기를 청하였다. 《다시.》 그 한마디가 그 며칠 동안 대기실에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이였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성미가 그렇게 노래 한 구절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발성 지도를 맡은 이가 이제 그만하자고 말려도 칸나동지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유니동지도 짬을 내여 예행련습장을 찾아왔는데, 두 사람은 유메퍼센트 시절부터 함께해온 사이인지라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인지 아는듯하였다.
《떨려?》 유니동지가 묻자 칸나동지는 고개를 저었다가 이내 다시 끄덕이였다. 《떨리는데... 안 떨리는척 하는 련습도 같이 하고있어.》 그 대답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 음악회가 잘 되리라는 예감이 조용히 들었다. 큰 판을 벌였다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이 웃음 하나가 나를 더 안심시켰다.
정월 스무이레날, 마침내 《KANNA》의 막이 올랐다. 극장 로비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굿즈를 파는 자리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섰고 저마다 손에 응원봉과 부채를 들고있었다. 부산광복점 쪽에서도 같은 시각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있다는 전갈이 전화로 넘어왔다.
나는 무대 뒤편 대기실 문틈으로 그 광경을 잠시 내다보았다. 칸나동지는 거울앞에 앉아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것이 보였으나 낯빛만은 애써 밝았다. 《떨려도 웃고 나가는것이야.》 내가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자 칸나동지는 거울속의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는 객석 맨 뒤줄에 자리를 잡았다. 큰 화면우로 칸나가 떠오르는 순간, 극장안이 일제히 함성으로 뒤덮였다. 나는 그 함성속에서 문득 5월의 《마인크래프트》 화면앞을 지키던 몇몇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홉곡의 노래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최종화》가 흐를 때에는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색채》가 흐를 때에는 다시 함성이 터졌다. 첫 음반 《ADDICT!ON》이 나올 때에는 객석 여기저기서 응원봉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3차원 모형과 배경 화면, 조명이 어우러진 무대는 참으로 화려하였다. 뒤에 들으니 이 부분을 두고 관람객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만한 무대를 이렇게 짧은 준비기간에 세운것 자체가 력사에 남을 일이라고까지 말하였다니 짐짓 과장인줄 알면서도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튿날 회사로 들어온 여러 후기와 소식들을 나는 하나하나 찾아 읽었다. 배경 화면과 음향, 3차원 모형에 대한 칭찬이 유독 많았고 개중에는 다른 회사의 방송 관계자가 직접 찾아와 무대 뒤편 설비를 보고갔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어깨가 으쓱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런닝타임 일흔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였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짧지 않았다. 나는 무대우에서 노래하는 칸나동지를 보며 그 봄날 《마인크래프트》 화면 속 작은 큐브 무대를 다시금 떠올렸다. 《저것을 진짜 무대에서 하면 어떻게 될가.》 그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있는 셈이였다.
나는 객석에 앉아 혼자 그 생각을 하며 몰래 눈굽을 닦았다. 옆자리에 앉았던 미기도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것을 나는 못 본체하였다. 마지막곡이 끝나고 앙콜을 청하는 소리가 극장을 가득 채웠을 때에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저 좋은 일로만 마무리 지을수는 없다. 회고록이란 좋은 일만 골라 적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는 화면이 자주 얼어붙어 불편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화창에는 《화면이 안 넘어간다》, 《소리가 끊긴다》는 글들이 이어졌다. 극장안에서 노래를 듣던 우리는 그때까지도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비욘드 라이브》라는 중계 방식 자체가 그때로서는 우리 회사에 처음 있는 시도였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화면을 그대로 인터네트로 실어나르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회선이 여러갈래로 나뉘다보니 곳곳에서 화면이 멎었다. 게다가 상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버린 사정도 있어 온라인으로 지켜보던 이들 가운데 몇은 못내 아쉬움을 표하였다.
극장안에서는 손뼉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나 화면 밖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던 셈이다. 나는 그날 밤 회사로 돌아와 접수된 문의와 불만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미기는 옆에서 종이에 목록을 적어가며 무엇을 고쳐야 할지 정리하였다. 밤이 깊도록 그 목록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칸나동지가 그 소식을 전해듣고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 배여있었다. 《저때문에 온라인으로 보던 사람들이 많이 속상해하였다면서요.》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하였다. 《네 노래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 회선이 모자랐던거야. 그건 우리가 고쳐야 할 몫이다.》 그 말에 칸나동지는 한참 말이 없다가 알겠다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사장님, 재상영 한번 더 하면 어떨가요.》 미기의 그 한마디에 우리는 곧바로 움직였다. 사흘이 지나도록 극장측과 협의를 계속하였고 회선을 늘리는 방법도 함께 찾았다.
결국 2월 3일, 온라인 재상영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방송 설비를 다시 점검하고 회선을 늘려 첫날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씻어내려 하였다. 재상영이 끝난 뒤 대화창의 반응은 한결 나아져있었고 그제야 나도 마음을 놓았다.
이 일을 겪으며 나는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무대우의 화려함 뒤에는 언제나 무대 밖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매진의 환호와 버벅이는 화면에 대한 불만은 같은 하루안에 나란히 있었으니, 세상일이란 원래 이렇게 기쁨과 아쉬움이 한몸으로 붙어다니는 법인가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5초는 그저 표가 빨리 팔렸다는 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5초안에는 지난 일년 동안 칸나동지가 흘린 땀과, 봄날의 작은 화면 속 무대에서 시작된 씨앗과, 유메퍼센트 시절 마음을 다잡던 그 밤의 대화와, 밤을 새워가며 대관 계약서를 검토하던 미기의 손길이 모두 담겨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칸나동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반갑꼬리도 제대로 못하겠다던 그 목소리가 회사의 력사에 새겨진 첫 단독 무대의 시작이였다.
이 절을 쓰느라 오래된 자료함을 뒤적이다가 그날 공연을 찍은 록화영상을 다시 한번 틀어보았다. 화면 속 조명은 여전히 화려하였고 관객석의 함성도 그대로였으나, 그 뒤편에서 진땀을 흘리던 우리들의 모습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함께 적어두는 것이 이 회고록이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텔라이브라는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올린 큰 무대였던만큼 이 음악회는 뒤에 이어질 여러 무대들의 첫 계단이 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그때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 알지 못하였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수 있다. 그해 정월의 매진 사변과 그 뒤에 이어진 크고작은 소동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스텔라이브도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작은 회사가 걸어온 짧은 력사에서 이 무대는 그만큼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극장을 나서던 밤, 나는 칸나동지의 손을 잡고 짧게 말하였다. 《수고하였다.》 칸나동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눈에 아직 무대 조명의 여운이 남아 반짝이고있었다. 극장 밖 찬 바람이 뺨을 스쳐도 그 순간만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이렇게 적어놓고보니 지금도 그 겨울 극장 로비의 찬 공기와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5초 만에 사라진 좌석수와, 그보다 훨씬 긴 나날의 준비와, 화면 너머에서 애태우던 사람들의 마음이 한데 뒤섞여 그날의 무대를 이루었다.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밤이 있다면 바로 그런 밤일것이다. 나는 이 절을 적으며 그때의 5초를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