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브 레 이 브 업 무 협 약

 

우주31(2024)년(2024년) 오월 초순, 사무실 창가에는 볕이 유난히 밝게 들이비치였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공기가 완전히 풀리여, 창문을 반쯤 열어두면 어디선가 라일락 향내까지 실려들어왔다. 콤퓨터 팬이 돌아가는 낮은 소리와 함께, 나는 그날도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 화면 화면을 켜놓고 앉아있었다.

그무렵 사무실 분위기는 그 어느때보다도 들떠있었다. 바로 한달 앞서 치른 칸나동지의 단독 음악회 《KANNA》가 순식간에 좌석이 매진되는 성과를 거둔 뒤였으므로, 회사 안 어디를 가나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있었다. 성원들도 직원들도 저마다 다음은 또 무엇을 해볼가 하는 부픈 기대에 차 있었다.

나 역시 그 흥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다만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아있다보니, 흥분한 마음 한켠으로는 늘 다음 걸음을 헤아리는 버릇이 붙어있었다. 음악회 하나로 이만큼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면, 이제 회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국내를 넘어선 어딘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무렵 자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오전, 미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손에는 판형콤퓨터 하나를 들고있었는데,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이였다. 《사장님, 이거 한번 보셔야 할것 같아요.》

나는 콤퓨터에서 눈을 떼고 미기가 내미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어로 쓰인 전자우편 한통이 화면 가득 떠있었고, 발신인란에는 《브레이브 그룹》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듣는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었다. 《브레이브 그룹? 어디서 온거야?》

미기는 판형콤퓨터를 넘겨받으며 차분히 설명을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여러 버추얼 그룹들을 산하에 두고있는 회사라고 해요. 3D 모델 제작이랑 기술 지원 쪽으로는 꽤 이름이 있나봐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제야 화면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전자우편의 내용인즉, 양측이 3D 내용물 제작 방면에서 서로 협력할 뜻이 있는지를 묻는것이였다. 나는 처음에는 여느 협업 제안서와 다를것 없으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하였다. 이런 종류의 제의는 그전에도 드물지 않게 들어오군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기는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 회사, 규모가 꽤 커요. 산하에 걸린 그룹만 해도 여럿이고, 일본쪽에서는 알아주는 곳이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이 전자우편을 조금 다른 눈으로 다시 보게 되였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브레이브 그룹에 관한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 읽었다. 화면에 뜬 여러 소개페지들을 넘겨보며, 저편의 회사가 3D 기술과 모션 캡처 방면에서 오래 쌓아온 요령를 가지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 회사가 그동안 애를 먹어온 대목이 바로 그 3D 방면이였으므로, 나는 그 자료들을 읽어내려가며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움직이는것을 느끼였다.

그런데 이 협약을 말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이야 이렇게 다른 나라 회사로부터 먼저 손을 내미는 전자우편을 받는 처지가 되였지만, 우리 회사가 처음부터 이런 형편이였던것은 결코 아니였다.

회사를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 나는 원하는만큼의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하여 몇번이고 회사를 접어야 하는 갈림길앞에 서보았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였고, 다음달 월세를 어떻게 마련할지조차 캄캄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할수 있는 일이라는 점 하나에 매달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시청자들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도 마음을 나눌수 있다는 그 신비로움이, 나로서는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붙든 가장 큰 힘이였다.

그 시절 나는 다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잘할수 있고 좋아하는것을 할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말은 결코 입에 발린 다짐이 아니라, 그때 우리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배짱이였다.

나는 또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기술보다 노하우가 더 중요하다.》 자본도 설비도 넉넉지 않던 그 시절, 우리에게 남은것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고닦은 요령 하나뿐이였기때문이다.

그무렵 나는 유니동지를 두고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밝게 웃으며 포기하지 않는 친구》라고 이야기한 일이 있었고, 칸나동지에 대해서는 《항상 밝은 모습과 열정을 보여주는 친구》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런 성원들이 곁에 있었기에, 나는 그 캄캄하던 시절에도 완전히 주저앉지 않을수 있었다.

나는 그무렵 사람을 여럿 만나보았지만, 밖에서 손을 내미는 협력의 손길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대개는 우리 쪽에서 먼저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하며 자리를 청해야 하였고, 그나마도 절반 이상은 대답조차 듣지 못한채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런 시절을 지나온 처지에서 보면, 일본의 어느 회사가 먼저 우리를 찾아 전자우편을 보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남다른 감회에 젖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는 우리쪽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가 되였다는 사실이, 그 며칠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다시 그 오월로 돌아가서, 나는 미기와 함께 브레이브측에 회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언어가 서로 다른 처지이니만큼, 우리는 회신 문구 하나를 놓고도 몇번이나 다시 고쳐썼다. 혹시라도 뜻이 잘못 전달되여 오해가 생기지나 않을가, 그 걱정이 컸기때문이다.

며칠 뒤, 저편에서 화상통화로 자리를 마련하자는 답이 왔다.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회의실 한켠에 놓인 카메라와 마이크를 몇번이고 점검하였다. 화면 저편에 앉을 사람들에게 우리 회사가 허술하게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화상통화가 열리던 날, 회의실 화면 너머로 일본어와 조선어가 번갈아 오갔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였으므로 말 한마디마다 시차가 생기였고, 그 짧은 틈새마다 나는 상대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였다. 다행히도 화면 저편의 담당자는 시종 부드러운 낯빛으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대체로 3D 내용물 제작을 두고 서로의 기술과 경험을 나누어보자는 쪽이였다. 저편은 우리 회사의 성원들이 쌓아온 애호가층과 방송 요령에 관심을 보였고, 우리는 저편이 지닌 3D 제작 기술과 설비에 눈이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것이야말로 서로 아쉬운 대목을 채워줄수 있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마친 뒤 미기는 회의실 문을 나서며 나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분위기 나쁘지 않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진지한것 같은데.》

그로부터 몇주동안 양측 실무일군 사이에서는 문서를 주고받는 일이 이어졌다. 협약서라는것이 원래 그런 물건인지, 문구 하나하나를 두고 이쪽저쪽에서 고쳐달라는 요청이 오갔다. 나는 그 서류더미를앞에 놓고, 이것이 우리 회사가 맺는 첫 국제 업무협약이라는 사실에 새삼 무게를 느끼였다.

미기는 그 기간 내내 서류 검토며 일정 조율이며 자잘한 실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미기야말로 내 오른팔이라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미기가 없었으면 이 협약,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미기는 그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협약의 세부조항을 다듬어가는 사이, 나는 이 협약이 단순한 종이 한장짜리 인사치레로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3D 내용물라는것이 말은 쉬워도, 실제로 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을 립체로 옮기는 일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였다. 나는 그 기술을 우리 힘만으로 쌓아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지, 협약서를 읽어내려가며 자꾸 헤아려보게 되였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3D 내용물라고 해야 몇 안되는 특별 방송에서 잠깐씩 선보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카메라앞에서 성원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고스란히 옮겨담으려면 값비싼 모션 캡처 장비와 그것을 다룰줄 아는 손이 함께 있어야 하였는데, 우리에게는 그 둘 다 넉넉하지 못하였다.

브레이브측은 바로 그 대목에서 오래 쌓아온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나는 그 경험을 우리가 나누어받을수 있다면, 성원들이 화면안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웃고 뛰놀수 있게 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였다.

그무렵 회사안에서도 이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유니동지는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물었다. 《사장님, 일본 회사랑 뭐 하신다면서요? 저희도 3D로 볼수 있어요?》 나는 웃으며 아직은 이야기가 오가는 단계라고, 성급하게 기대하지는 말라고 대답하였다.

칸나동지 역시 음악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소식을 전해듣고 눈을 반짝이였다. 《오오, 이러다 저희 3D 모델도 더 좋아지는것 아니예요?》 나는 그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성원들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더 안겨줄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몇차례의 조율을 거쳐, 마침내 협약서의 문구가 양측 모두에게서 확정되였다. 나는 그 최종본을 받아든 날, 화면에 뜬 문서를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혹시라도 빠뜨린 대목은 없는지, 나로서는 도장을 찍기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몫이였다.

우주31(2024)년(2024년) 오월 열나흗날, 우리는 마침내 그 업무협약을 정식으로 맺었다. 정확히 어느 자리에서 도장을 찍었는지는 이제 와서 기억이 다소 흐릿하나, 그날의 공기만은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다. 사무실안에는 평소와 달리 팽팽한 긴장과 함께 은근한 들뜸이 뒤섞여 감돌고있었다.

회의 탁자우에는 그날을 위하여 정갈하게 마련한 협약서 두벌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한쪽은 조선어로, 다른 한쪽은 일본어로 쓰인 같은 내용의 문서였는데, 나는 그 두 문서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혹시라도 토 하나, 글자 하나가 어긋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부터 옷매무새를 몇번이고 다시 살피였다. 회사를 대표하여 나서는 자리이니만큼, 사소한것 하나까지 소홀히 하고싶지 않았기때문이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사장님, 넥타이 그정도면 충분해요. 자꾸 만지시면 더 삐뚤어져요.》

협약서에 서명을 남기는 순간, 나는 짐짓 이것이 무슨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이라도 되는 양 마음속으로 자못 엄숙한 기분을 느끼였다. 후날 이 대목을 적으며 나 혼자 웃음이 나는데, 그날의 나는 정말이지 만년필 뚜껑을 여는 손끝에까지 온 정신을 쏟아붓고있었다.

문서를 다 살핀 뒤에는 서로 만년필을 건네고 받는 순서가 이어졌다. 나는 상대편이 내미는 만년필을 받아쥐며, 이런 사소한 절차 하나에도 이 자리의 무게가 실려있음을 새삼 느끼였다.

미기는 그런 나를 곁에서 지켜보며 애써 웃음을 참는 기색이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의 내가 마치 무슨 나라의 사절이라도 된듯한 표정을 짓고있었다고 하여, 한동안 그 이야기가 사무실안에서 우스개거리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서명이 끝난 문서를 두 손으로 받쳐들었을 때, 나는 이 종이 한장이 앞으로 우리 회사의 걸음을 얼마나 멀리까지 데려다줄지 가늠조차 할수 없었다. 다만 그 순간만은 오래 가물었던 논에 비 한줄기 떨어지는듯한 후련함을 느끼였다는것만은 분명히 말할수 있다.

협약이 맺어진 소식은 그날로 사내 대화창을 통해 성원들에게 알려졌다. 히나동지는 곧바로 반응을 보이였다. 《오오 축하드려요 사장님! 이제 저희도 일본 진출인가요?》 나는 그 성급한 물음에 웃음을 터뜨리며, 아직은 그렇게 큰 걸음이 아니라고, 우선은 기술을 나누는 자리일뿐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서명이 끝난 협약서를 다시 한번 펼쳐보았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있었고, 낮동안 열어두었던 창문으로는 초여름 저녁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들어왔다.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이 협약 하나로 얼마나 많은것이 달라질지 잠시 헤아려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의 나는 이 협약이 후날 얼마나 큰 사변으로 이어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저 3D 내용물라는 한가지 기술을 나누어보자는 정도의 약속으로만 여기였을뿐, 그 이상의 그림은 그리지 못하였던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협약이 맺어진 뒤로 우리는 저편과 실무 차원의 협업을 하나씩 이어나갔다. 3D 모델 제작을 두고 저편의 기술진과 우리 쪽 실무일군이 자료를 주고받는 일이 잦아졌고, 때로는 서로의 방식을 배우기 위하여 화상으로 회의를 여는 일도 되풀이되였다.

나는 그 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바심이 나기도 하였다. 우리 성원들이 시청자앞에서 더 나은 모습으로 설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두르고싶은것이,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사람의 어쩔수 없는 성미였다.

미기는 그 협업이 진행되는 동안 종종 나에게 진행상황을 보고해주었다. 《오늘은 저쪽에서 캡처 장비 관련 자료를 보내왔어요.》 나는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치 먼길 떠난 자식에게서 편지를 받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협업이 이어지던 어느날, 나는 문득 이 모든것이 시작된 그 오월의 전자우편 한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미기가 판형콤퓨터를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던 그 짧은 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협업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사람의 인연이라는것도, 회사의 인연이라는것도 결국은 이렇게 작은 문 하나를 두드리는 소리에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앞으로도 이런 작은 문 두드림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하였다.

그해 여름과 가을을 지나며 협업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그 사이사이 저편 담당자들과 몇차례 더 화상으로 얼굴을 마주하였는데, 처음의 서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만큼 가까워져있었다.

언제인가 저편 담당자 하나가 화면 너머로 우리 회사의 음악회 클립을 보았다며 감탄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모이는줄 몰랐습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것을 느끼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짐짓 력사적인 사변을 이룬듯한 우스운 자부심이였다.

그러나 그 협업의 나날이 언제나 순조롭기만 하였던것은 아니다. 언어도 다르고 방식도 다른 두 회사가 함께 일을 한다는것은, 아무리 협약서에 좋은 문구를 담아두었다한들 매 순간이 새로운 시행착오의 련속이였다.

나는 그 시행착오들을 겪을 때마다 이 협약을 맺던 그 오월의 다짐을 다시 떠올리군 하였다. 서로 아쉬운 대목을 채워주자고 시작한 일이니만큼, 답답한 순간이 와도 조급하게 등을 돌리지는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였다.

그렇게 한해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사이, 나는 이 협약이 우리 회사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뿌리를 내려가고있다는것을 느끼였다. 처음 전자우편 한통으로 시작된 인연이, 이제는 실무일군 사이의 익숙한 왕래로 자리를 잡아가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 협업이 그렇게 조용히 뿌리를 내려가던 사이, 나로서는 미처 짐작하지 못한 큰 걸음이 저만치서 준비되고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있지만, 그 오월의 나는 정말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일년하고도 두달 남짓 지난 우주32(2025)년(2025년) 칠월, 이 협약은 마침내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지는 큰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 도장을 찍던 순간의 나에게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미리 들려주었더라면, 나는 아마 만년필을 쥔 손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 뒤의 사변을 자세히 늘어놓지는 않으려 한다. 그것은 마땅히 후날의 장에서 따로 다루어야 할 이야기이며, 지금 이 절에서는 그저 그 작은 약속 하나가 얼마나 멀리까지 이어졌는가를 되새기는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그 인수합병이 정확히 어떤 셈속에서 이루어졌는지, 그 자리에서 오간 진짜 셈들이 무엇이였는지는 나 역시 지금도 다 알지 못한다. 회사의 살림이라는것이 사장 혼자 다 헤아릴수 있는것도 아니려니와, 그런 자세한 대목까지 이 회고록에 옮기는것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다만 분명한것은, 우주31(2024)년 오월의 그 협약이 없었더라면 우주32(2025)년 칠월의 그 큰 걸음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후날 어떤 나무로 자라날지는, 그 씨앗을 심는 사람조차 다 헤아리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이따금 그 오월의 사무실 풍경을 떠올려본다. 창문으로 라일락 향내가 실려들어오던 그 아침, 미기가 판형콤퓨터를 들고 들어와 《사장님, 이거 한번 보셔야 할것 같아요》하고 건네던 그 목소리를. 그 평범하기 짝이 없던 아침이, 돌이켜보면 우리 회사의 커다란 갈림길 가운데 하나였던것이다.

세상일이라는것이 원래 그런 모양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력사의 큰 물줄기로 이어지는 사변도, 그 당시에는 그저 전자우편함에 도착한 낯선 이름의 전자우편 한통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 리치를 이 협약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나 혼자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그날 넥타이를 몇번이고 고쳐매던 나의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무슨 국경을 넘나드는 대사라도 된듯한 착각에 빠져있었던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런 우스운 착각조차도, 그 시절의 나에게는 더없이 진지한 순간이였다.

회사가 자란다는것은 이렇게, 크고작은 약속들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일이였다. 음악회 하나로 국내에서 자리를 다졌다면, 이 협약 하나로는 국경 너머로 첫걸음을 떼여본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첫걸음이 서투르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였음을 굳이 감추지 않으려 한다. 무엇 하나 확신할수 없는 처지에서 낯선 회사와 손을 맞잡는다는것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결코 가벼운 결정은 아니였다.

그러나 그 서투른 걸음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지금 이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을것이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주31(2024)년 오월의 그 오후를, 그 판형콤퓨터 화면 속 낯선 전자우편 한통을 두고두고 고맙게 기억하려 한다.

그해에는 이 협약 말고도 회사 안팎에서 크고작은 변화들이 잇달아 찾아왔다. 그 하나하나를 이 자리에서 다 헤아릴수는 없으나, 뒤에 오는 절들에서 그 변화들을 하나씩 풀어놓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이 봄날의 약속 하나만을 갈무리해두려 한다.

이 절을 마치며 나는 다시 한번 그날의 사무실 창밖을 떠올려본다. 초여름으로 접어들던 그 볕과 바람, 그리고 그 볕아래에서 낯선 이름 하나를 처음 마주하였던 나 자신의 얼굴을. 그때는 몰랐으나, 그 얼굴은 이미 다음 굽이를 향해 조용히 걸음을 떼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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