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졸 업 발 표

 

우주31(2024)년의 늦가을은 유난히 더디게 갔다. 시월이 다 가도록 사무실 창밖의 나무들은 잎을 반도 떨구지 못하였고 하늘은 날마다 낮게 가라앉은 잿빛이였다. 나는 그무렵 밤이 이슥하도록 사장실에 남아 다음해 편성안을 짜는 일이 많았다. 콤퓨터 팬 도는 소리와 이따금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말고는 사무실은 고요하였다.

책상우에는 성원들의 다음달 방송표며 음악회 견적서며 하는것들이 쌓여있었다. 회사가 커질수록 내가 직접 들여다봐야 할 서류도 함께 불어났다. 나는 이따금 그 서류더미를 보다가 정작 사람의 속사정은 서류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는것을 새삼 깨닫군하였다.

바로 앞장에서 나는 딸들이 하나 둘 저마다의 방송을 붙들고 자라나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 자라남에는 늘 밝은 쪽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자라난다는것은 필경 어디선가 아프기도 하고 지치기도 한다는 뜻이니 그해 가을 우리 회사가 마주한 일도 그런 성장통 가운데 하나였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뒤에 오는 이야기들을 다 겪고 나서 돌이켜보면 그해 겨울은 회사 력사에서 가장 슬픈 철로 기억된다. 이 장에 이야기할 몇가지 일들이 다 그해에 몰려 일어났으니 사람들이 후날 이 시기를 두고 《가장 슬픈 장》이라 이름붙인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사람은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그날이 무슨 날이였는지를 아는 법이다.

칸나는 그무렵 성원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밝은 사람이였다. 나는 이태 전 어느 인터뷰에서 그를 두고 《항상 밝은 모습과 열정을 보여주는 친구》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지어낸 말이 아니였다. 방송을 켜면 웃음소리부터 먼저 나오는 성원이였고 대화창은 그가 나타나면 금세 환해졌다.

그러나 사람의속은 겉모양대로 다 비치지 않는 법이다. 나는 대표라는 자리에 앉은 뒤로 그것을 몇번이고 새로 배웠다. 웃는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그 사람이 스스로 입을 열기 전에는 아무도 알수 없는것이다.

칸나동지가 나를 찾아온것은 시월 하순의 어느 저녁이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갔다하는 궂은 날씨였고 저녁이 되니 창밖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우에 길게 번져 보였다. 미기가 사장실 문을 열고 《칸나가 잠깐 뵙고 싶다고 합니다》하고 알려왔다. 나는 하던 일을 밀쳐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부터 심상치 않다는것을 미기의 표정에서 짐작할수 있었다.

칸나동지는 사장실 쏘파에 앉아 두손을 무릎우에 가지런히 모으고있었다. 방송에서 늘 보던 그 밝은 얼굴이 아니였다. 조명을 켜지 않아 방안이 어둑하였는데 나는 굳이 불을 켜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는 밝은 불빛보다 침묵이 먼저 필요하다는것을 나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있었다.

한참 말이 없던 칸나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았다. 그 한마디의 무게를 짐작하지 못할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칸나동지는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이윽고 대답하였다.

《요즘 병원에 다녀요. 약도 먹고 있고요. 근데 그거때문만은 아니예요. 그냥, 이제 좀 쉬고싶어졌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무슨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회사를 차린 뒤로 숱한 결정을 내려왔지만 사람을 붙잡는 일과 놓아주는 일 가운데 어느쪽이 더 어려운지는 그날까지도 가늠하지 못하고있었다.

《혹시 나때문에, 회사때문에 그런거면 말해줘. 다 들어줄게.》

칸나동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회사는 저한테 늘 잘해줬어요. 그냥 제가 지금 좀, 힘이 다 빠진것 같아요.》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아도 늦지 않다고 말하였다. 급하게 정할 일이 아니니 천천히 정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칸나동지는 고개를 젓고는 이미 오래 생각한 일이라고, 더 미루면 자기가 더 힘들것 같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회사를 세울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면 성원의 뜻을 억지로 꺾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이 바닥에서 사람을 물건처럼 붙들어매는 회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것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어느해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칸나동지가 처음 스텔라이브에 들어온것은 회사가 아직 자리를 다 잡지 못하였던 시절이였다. 그때만 해도 사무실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고 나는 신인 하나하나의 목소리며 그림체를 붙들고 밤새 회의를 하던 처지였다.

칸나동지는 데뷰초부터 밝았다. 방송사고가 나도 웃어넘기고 시청자수가 적어도 풀이 죽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때 이 친구는 오래 갈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지로 칸나동지는 회사의 첫 세대 성원 가운데서도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축에 들었다.

회사가 아직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칸나동지는 새벽까지 방송을 하고도 이튿날 회의에 제일 먼저 나와앉아있는 성원이였다. 나는 그 부지런함을 볼 때마다 이 회사가 그래도 헛되이 세워진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얻군하였다. 합동방송이 있는 날이면 곽밥을 넉넉히 싸와 남의 몫까지 나눠주던것도 칸나동지였다. 그런 사람이 이제 그만하겠다고 하니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그해 여름부터 칸나동지의 방송 회수가 조금씩 줄어들고있었다는것을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때는 그저 개인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넘기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 다 전조였던 셈이다. 사람은 무너지기 얼마 전부터 이미 조금씩 무너지고있다는것을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야기를 다시 그 저녁으로 돌린다. 나는 칸나동지에게 언제쯤 발표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칸나동지는 12월초쯤이면 좋겠다고 하였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너무 오래 끌지 않고 정리하고싶다는 뜻이였다.

《마지막으로 콘서트 한번 하고싶어요. 팬분들한테 제대로 인사하고싶어서요.》

나는 그러라고 하였다. 회사가 해줄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대관이며 무대장치며 필요한것은 무엇이든 말하라고 하였더니 칸나동지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그날밤 나는 사장실에 혼자 남아 칸나동지가 돌아간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미기를 비롯한 몇몇 실무자들만 조용히 불러 사정을 알렸다. 이런 일일수록 정보가 새나가지 않게 하는것이 도리어 당사자를 지키는 길이라는것을 나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있었다.

실무자들과는 음악회 대관과 남은 방송 일정을 어떻게 정리할지를 두고 며칠동안 조용히 의논하였다. 누구는 발표 시점을 조금 더 늦추자고 하였고 누구는 하루라도 빨리 알리는게 낫다고 하였다. 결국 칸나동지 본인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12월초라는 날짜를 그대로 두었다.

성원들은 나를 두고 우스개삼아 《엄마》라 불렀다. 나 스스로는 그 말을 처음엔 손사래치며 부정하였으나 그날만은 그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1월 4일 밤, 칸나동지는 자신의 《엑스》(트위터) 계정에 짧은 글을 올렸다. 12월 2일부로 졸업한다는 공지였다. 나는 이미 알고있던 사실인데도 그 글자가 실지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보니 가슴이 새삼 철렁 내려앉았다.

미기가 사장실 문을 두드리며 《사장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하고 알려왔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팬 모임터는 삽시에 들끓었다. 놀람과 서운함과 걱정이 뒤섞인 글들이 끝없이 올라왔고 몇몇 인터네트신문도 소식을 그대로 실어날랐다.

회사 공식 페지에도 관련 소식을 알리는 글이 함께 올라갔다. 나는 그 글을 몇번이나 다시 읽으며 혹시라도 성급한 표현이 없는지 살폈다. 이런 글은 한번 나가면 다시 주워담을수 없다는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있었다.

그날밤부터 이런저런 추측이 나돌았다. 다른 회사로 옮기는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고 계약을 어기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결혼한다는 말도 있었고 심지어 어디가 아프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나는 그 소문들을 보면서 력사에 남을만한 일에는 반드시 별별 억측이 따라붙는 법이라는것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마치 한 나라의 정변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도는것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웃어넘기기에는 칸나동지가 받을 상처가 걱정스러웠다.

이튿날 나는 다시 칸나동지와 통화하였다. 방송에서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말할래요. 이상한 소문 그대로 두면 더 힘드니까요.》

나는 알겠다고 하였다. 다만 무리해서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하고싶은 말만 하고 나머지는 그냥 넘겨도 된다고 덧붙였다.

11월 5일, 칸나동지는 여느때처럼 방송을 켰다. 나는 사장실 화면로 그 방송을 지켜보았다. 대화창은 평소보다 갑절은 더 빠르게 올라가고있었다.

칸나동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하나씩 짚어나갔다. 타사로 옮기는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계약을 어긴 일도 없다고 하였다. 대학에 가는것도 결혼하는것도 큰병이 있는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였다.

《사실 요즘 정신과 치료를 받고있어요. 우울증약이랑 수면제도 먹고있고요. 근데 이게 졸업하는 제일 큰 리유는 아니예요.》

대화창이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내 걱정하는 말들로 가득찼다. 나는 화면앞에서 두손을 꽉 쥐고있었다. 그 한마디를 결정하기까지 칸나동지가 혼자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지 짐작이 갔다.

방송이 끝난 뒤 팬 모임터의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어제까지 이런저런 억측을 내놓던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같이 미안하다는 말과 응원한다는 말을 남기였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것이 이렇게도 빨리 돌아설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면서도 고마웠다.

나는 그 순간 칸나동지가 참으로 큰 용기를 냈다고 생각하였다. 남앞에서 웃는 얼굴을 지켜온 사람이 정작 제 속을 열어보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나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칸나동지가 졸업을 결심한 참된 리유를 다 알지 못한다. 본인이 밝힌 그대로 여러 사정이 뒤섞여있었을것이고 그 가운데 어느것이 결정적이였는지는 아마 본인조차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정신과 치료라는것을 예전과 다르게 보게 되였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 마음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것인데 그동안 나는 그것을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처럼 여겨왔다. 칸나동지가 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담담히 말하는것을 본 뒤로 나는 다른 성원들에게도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더 자주 이르게 되였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회사 명의로 낼 립장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몇번이고 썼다 지우기를 되풀이하였다. 성원 하나를 떠나보내는 글을 쓰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회사를 차린 뒤로 사업계획서도 쓰고 투자자에게 보낼 편지도 썼지만 그날밤처럼 한 문장을 두고 이렇게 오래 붙들려있은 적은 없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국서라도 되는 양 무겁게 느껴졌다.

미기가 곁에서 초안을 몇번 읽어보고는 너무 담담해도 안되고 너무 슬퍼보여도 안된다고 조언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 사람 하나를 떠나보내는 글에도 이렇게 따질것이 많은가 싶어서였다.

결국 나는 이렇게 썼다. 《그동안 보내주신 따뜻한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것이 본인의 뜻을 존중한 결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짧은 글이였지만 그 안에 담고싶은 마음은 짧지 않았다.

이 일은 스텔라이브가 세워진 뒤로 처음 겪는 졸업이였다. 성원을 들이는 일에는 그동안 리력이 쌓였지만 성원을 떠나보내는 일에는 아무런 본보기도 없었다. 처음 하는 일앞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린다는것을 나는 그때 다시 배웠다.

그날 이후 몇주동안 사무실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유니동지와 히나동지를 비롯한 다른 성원들도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누구는 회의 도중에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성원들은 저마다 칸나동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였다. 어떤 이는 편지를 썼고 어떤 이는 합방을 청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 회사가 그동안 헛되이 자라온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니동지는 회의가 끝난 뒤 나를 따로 붙들고 《엄마, 이제 자주 못보는것이예요》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어깨만 두드려주었다. 히나동지는 평소답지 않게 말수가 줄어들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마음이 어떠한지를 더 잘 보여주었다.

12월 2일, 칸나동지의 마지막 방송이 열렸다. 이름은 《The finale》였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마지막이라는 말이 이렇게 담담하게 들릴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날은 초겨울치고는 드물게 맑은 날이였다. 나는 아침부터 사무실에 나와 방송 점검을 함께 살폈다. 스튜디오안은 여느 방송날보다 사람이 많았다. 조명담당도 음향담당도 다들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

칸나동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출근하였는데 그 웃음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대기실 책상우에는 다른 성원들이 몰래 놓고 간 꽃과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칸나동지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몇번이고 눈물을 훔쳤다.

방송 시작전 대기실에서 칸나동지가 나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사장님, 그동안 감사하였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하였다.

《네가 더 고생하였지.》

칸나동지는 그 말에 또 웃었다. 나는 그날 그 웃음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것이다.

방송이 시작되자 대화창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찼다. 나는 사장실에서 화면를 켜놓고 시청자수가 올라가는것을 지켜보았다. 수자는 쉬지않고 치솟았다.

그날 동시 시청자수는 최고 8만 8450명에 이르렀다. 회사를 차린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한곳을 바라본 일은 없었다. 나는 그 수자를 보며 력사에 남을 회전이라는것은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후날 다른 성원들의 음악회가 이 수자를 넘어설 때마다 나는 어쩐지 칸나동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는데 그것이 무슨 심보인지는 나 자신도 다 설명하지 못하겠다.

칸나동지는 그동안 불러온 노래들을 하나씩 다시 불렀다. 중간중간 애호가들이 남긴 사연을 읽으며 웃다가 울다가 하였다. 무대 한켠에는 지난 몇해의 방송 장면들을 모은 영상이 흘러나왔고 그것을 보던 대기실의 성원들도 함께 눈물을 훔쳤다.

후원창에는 그날따라 유난히 긴 사연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몇해를 함께한 시청자라는 이, 처음 방송을 보고 힘을 얻었다는 이, 그저 고맙다는 말만 짧게 남기는 이까지 저마다 다른 사연이였지만 마음만은 한가지였다. 나는 그 창을 넘겨보다가 이것이야말로 회사가 쌓아온 진짜 재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사장실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콤퓨터화면 하나에 이렇게 많은것이 담길수 있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새삼스러웠다. 웃음도 눈물도 지난 몇해의 시간도 그 작은 화면 하나에 다 들어있었다.

방송이 끝나갈무렵 칸나동지는 애호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였다. 그동안 사랑해주어 고맙다는 말과 이제는 다른 자리에서 잘 지내겠다는 말이였다. 그날 오간 말 한마디한마디를 다 옮기기는 어렵지만 그 뜻만은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방송화면이 꺼지자 사무실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화면앞에 앉은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콤퓨터 팬 도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로 갔다. 칸나동지는 화장을 다 지우지 않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눈이 붉게 부어있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앉았다.

《수고하였어.》

칸나동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방송에서 보던 웃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결정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하고싶지 않다. 본인이 밝힌대로 치료를 받고있었던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였을것이다. 사람 하나가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사정이 있는 법이다.

회사는 그때도 지금도 립장이 같다. 본인의 뜻을 존중한다는것, 그 한마디에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의 전부가 담겨있었다.

스텔라이브의 짧지 않은 력사에서 이날은 첫 졸업으로 기록된다. 하나가 처음 있으면 그 다음은 늘 조금 쉬워지는 법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 첫번째가 유독 아팠던것은 처음이라 서툴렀기때문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칸나동지였기때문이다.

후날 다른 성원의 졸업을 겪을 때에도 나는 이날을 자주 떠올리게 되였다. 그때마다 슬픔의 크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칸나동지가 남긴 자국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수 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성원들과 계약을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이 일을 떠올린다. 붙잡아서 남길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있는 동안 잘해주고 떠날 때 곱게 보내는것, 그것이 대표로서 내가 할수 있는 전부라는것을 그해 겨울에 배웠다.

그뒤로 회사는 성원들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일에 더 마음을 쓰게 되였다.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을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무리한 방송 일정은 미리 줄이도록 하였다. 칸나동지가 남기고 간 자리가 헛되지 않도록 하자는것이 그때 실무자들과 다짐한 뜻이였다.

성원들이 나를 《엄마》라 부르고 서로를 《딸내미들》이라 부르는 그 우스운 말이 그해 겨울만은 조금도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자식을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였다.

그때는 그저 슬프기만 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슬픔속에는 고마움도 함께 있었다는것을 안다. 한 사람이 자기 뜻대로 시작하고 자기 뜻대로 끝맺을수 있었다는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애써 지켜온것이였다.

칸나동지를 떠나보낸 그해 겨울은 회사에도 나에게도 잊을수 없는 한철로 남았다. 그리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사변을 준비해야 하였으니, 그것은 뒤에 다시 이야기할 나의 생일과 새 얼굴에 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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