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 년 만 의 합 방
우주32(2025)년(2025년) 유월 스무나흗날 밤, 사무실 창밖으로 첫 매미울음이 아직 설익은 소리로 간간이 끼여들었다. 장마전선이 남쪽바다 어디쯤에서 머뭇거린다는 예보가 있었으나 그날 하늘은 아직 맑았고,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는 벌써 눅눅한 기운이 섞여있었다.
나는 그 저녁 방송실 한켠에 앉아 머리수화기를 고쳐쓰고 화면 세대를 나란히 켜두었다. 하나에는 오락화면이, 하나에는 대화창이, 나머지 하나에는 대기방의 목소리표시창이 떠있었다. 콤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송실 벽에는 그동안 다녀간 성원들의 데뷰기념 사진과 음악회 포스터가 어지러이 붙어있었고, 책상 한켠에는 며칠째 손대지 못한 결재판이 곽밥 그릇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는 그 결재판을 슬쩍 옆으로 밀어두고서야 비로소 머리수화기에 손을 얹었다.
냉방기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 뚜렷하게 들려왔다. 저녁 아홉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였다. 나는 그 시각이면 늘 그러하듯 창밖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것을 곁눈으로 살피며 방송을 준비하였다.
그날의 합방은 《배틀그라운드》 4인조였다. 나와 블루동지, 그리고 근래 《우결》이라는 이름을 걸고 한창 화제를 모으고있던 백곰파와 고수달, 이렇게 넷이 한 스쿼드를 이루기로 되어있었다.
이 합방이 성사되기까지의 사정을 말하자면 그보다 앞선 몇달을 짚지 않을수 없다. 그무렵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옛 영상들이 다시 발굴되어 클립으로 떠도는 일이 부쩍 잦아졌는데, 나 자신도 몇해만에 다시 찾아본 그 화면들앞에서 묘한 감회에 잠기곤 하였다.
종영을 선언한지 벌써 다섯해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있었다. 그러나 블루동지와 나는 그동안 아주 인연을 끊고 지낸것은 아니였다. 명절이면 안부를 묻고 서로의 방송에 감상글을 남기는 정도의 왕래는 끊이지 않았으나, 이렇게 나란히 마이크를 잡고 한 판을 뛰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였다.
그해 봄부터 백곰파와 고수달이라는 두 젊은 유튜버가 저희들끼리 새로 《우결》을 표방하며 방송을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성원 하나가 지나가는 말로 백곰파의 영상을 보다가 블루의 클랜을 두고 《전남편 길드》라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로, 옛일은 새 세대의 입에서 다시 회자되고있었다.
나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과 함께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섯해 전 우리가 걸어놓은 그 이름의 자리를 이제 후배들이 물려받아 걷고있다는 사실이, 마치 오래 묵혀둔 밭에 새싹이 돋는것을 보는 농부의 심정과 비슷하였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가.
백곰파는 오락 실력이 야무지기로 소문난 젊은 유튜버였고, 고수달은 그 곁에서 늘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사람이 언제부터 저희들끼리 《우결》이라는 이름을 걸고 방송을 하기 시작하였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대화창의 반응을 보면 이미 상당한 지지를 얻고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 둘의 방송을 몇번 지나가듯 본적이 있었는데, 화면속의 그들은 어딘가 다섯해 전의 우리를 닮아있으면서도 또 저희만의 색깔이 뚜렷하였다.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비슷한 틀을 따라도 결국 그 사람 자신의 빛갈로 물드는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 두 후배를 보며 새삼 느꼈다.
그날 낮 블루동지에게서 오늘 저녁 백곰파, 고수달과 함께 《배그》를 한판 하지 않겠느냐는 전갈이 왔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오락 자체를 손에서 놓은지도 오래거니와, 신인들의 자리에 옛 짝이 불쑥 끼여드는 모양새가 되지는 않을가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걱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반가워할 일이였다. 나는 곧 좋다는 뜻을 전하였고, 저녁이 되자 넷은 각자의 방에서 머리수화기를 쓰고 한 봉사기에 모여들었다.
화면 저편에서 블루동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다섯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네, 누나 여전히 《배그》 못하는것 아니지?》하고 놀리는 말투에 나는 픽 웃음이 났다.
백곰파와 고수달의 목소리는 그와 달리 팔팔하고 들떠있었다. 두사람은 우리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에 적잖이 신이 난 기색이였다. 통화창 너머로 서로 눈치를 보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훤히 그려질 정도였다.
오락이 시작되자 넷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한 지붕밑에 모여들었다. 총과 방탄복을 나누어 들고 물자를 정리하는 그 몇분 사이에도 블루동지는 례의 그 킬을 하고서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하는 옛 버릇을 그대로 드러내어 대화창을 한바탕 웃기였다.
대화창의 누군가는 이 자리를 두고 짐짓 거창하게 《2025 《배그》 정상회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세대의 《우결》이 한 지붕밑에 모였으니 력사적인 자리라는것이였는데, 나는 그 말에 실소를 터뜨리면서도 내심 그 표현이 아주 틀린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를 좀더 거슬러올라가지 않을수 없다. 우리 둘의 《우결》이 처음 시작된것은 우주25(2018)년(2018년)의 일이였다. 그때만 해도 서로 《강지 님》, 《블루님》하고 깍듯이 존대를 하던 사이였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나 우주27(2020)년(2020년) 초 어느날, 우리는 반말을 트고 서로 《누나》와 《바이비》라는 호칭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그무렵의 영상들은 지금 보아도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달달하였는데, 애호가들은 그런 우리를 두고 어김없이 장작을 지폈다.
그렇게 두해를 끌어온 이 가상의 인연은 우주27(2020)년(2020년) 가을에 이르러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사이 우리는 서로의 어머니에게까지 인사를 시켜드리는 대목까지 나아갔으니, 방송 하나를 두고 이만한 서사를 쌓은 예도 흔치 않았을것이다.
그 두해 사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손을 잡는데만 육백일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서로의 어머니를 모시고 상견례라는 이름의 방송까지 치렀으며, 마침내는 현실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합방을 성사시켜 한때는 전세계 《트위치》 시청자 순위에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주27(2020)년(2020년) 시월, 우리는 저마다의 방송에 《우결 종료》라는 짤막한 제목의 영상을 올리는것으로 그 두해를 마무리하였다.
그 시절을 함께 겪은 사람만이 알수 있는 무게가 있다. 나는 그날 밤 백곰파와 고수달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그 길을, 우리는 이미 다섯해 전에 끝까지 걸어보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총알을 채워넣었다.
초반 전투는 순조로웠다. 넷은 제법 손발이 맞아 두어 조를 연달아 넘기며 자리를 좁혀갔다. 고수달은 조준이 야무졌고 백곰파는 지형을 보는 눈이 밝아, 나는 오랜만에 오락하는 재미가 되살아나는것을 느꼈다.
자리싸움이 한창일무렵 백곰파가 문득 《형님, 누나, 저희 요즘 반응 어때요》하고 물어왔다. 그 말투에서 나는 신인 특유의 조심스러움과 은근한 자부심이 뒤섞인것을 읽었다. 잘되고있는 일을 두고도 어른들의 인정을 구하고싶은 마음이였을것이다.
블루동지는 대뜸 《잘되고있지, 근데》하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근데》라는 한마디에 이미 뒤에 이어질 말이 례사롭지 않으리라는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마침 근처에서 총성이 울렸고 넷은 황급히 몸을 낮추며 건물 뒤로 흩어졌다. 회고록을 쓰는 지금이야 웃으며 적지만, 그 순간만큼은 력사적인 대화가 총알 한발에 끊어질 뻔한 아슬아슬한 찰나였다.
교전이 끝나고 자리가 다시 안전해지자 고수달이 먼저 말을 이였다. 《아까 뭐라고 말하려던거예요?》하는 물음에 블루동지는 잠시 침묵하였다. 나는 그 침묵의 길이가 꽤 진지한 조언이 나오리라는 신호임을 오랜 세월의 감으로 느꼈다.
오락은 계속되어 자리는 점점 좁아졌고, 남은 인원도 하나둘 줄어들었다. 넷은 마지막 원 근처의 야산에 엎드려 총구를 겨눈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 정적의 시간이야말로 방송에서 가장 많은 말이 오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정적속에서 나는 문득 지난 몇달간 성원들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칸나동지가 예전에 무기 스킨 뽑기 방송 중 블루동지를 《아빠》라 부른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히나동지와 타비동지까지 합세하여 블루동지를 반쯤은 진심으로 아버지 취급하게 되었다는 소문이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슬쩍 꺼내며 블루동지를 놀렸다. 《우리 애들이 자꾸 오빠를 아빠라고 부르던데, 이제 진짜 사위 다 되었네》하는 말에 블루동지는 헛웃음을 지으며 《누나 딸들이 나를 그렇게 잘 따르는데 왜 정작 누나만 그러냐》하고 받아쳤다.
그 실없는 농담 사이로 방송시간이 흘러 어느덧 다섯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대화창에는 넷의 궁합가 좋다는 말과 함께, 옛 《우결》의 향기가 난다는 말들이 뒤섞여 빠르게 올라가고있었다.
방송을 시작한지 다섯시간 마흔여덟분 남짓이 지났을무렵, 마지막 순위싸움을 마친 넷은 잠시 총을 내려놓고 둘러앉아 숨을 골랐다. 그 짧은 휴식이 이날 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대화의 자리가 되었다.
블루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너네 둘이 지금 뭐하는것이야.》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눈빛만은 후배를 걱정하는 형의 그것이였을것이다.
백곰파는 머쓱한듯 웃으며 《그냥 재미로 하는것이지요, 뭐》하고 얼버무렸다. 고수달도 옆에서 《저희는 딱히 정한게 없어서요》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대답을 듣자 블루동지의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애매하게 하지 말고 할거면 적극적으로 해버려라.》 나는 그 한마디가 화면 너머 두 후배의 어깨를 툭 치는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블루동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꾸 빨아먹기만 하고, 여지만 열어두고 뭐하는것이야.》 그 말에는 장난기속에서도 은근한 진심이 배어있었다. 나는 그 순간 다섯해 전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잔소리를 들었더라면 어땠을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나 또한 잠자코 있을수 없었다. 나는 총을 내려놓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지난 우리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두해간 진행하였고 어머니 소개까지 마쳤으며 깔끔하게 끝냈다.》
그 말을 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자못 력사를 서술하는 사관처럼 무게가 실려있었다. 두해라는 세월과 어머니라는 두 글자, 그리고 깔끔이라는 단어까지, 나는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모든것을 압축해 담으려 하였다.
화면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후배 둘이 그 무게를 가늠하느라 말을 잃은 시간이였을것이다. 나는 그 침묵의 몇초 사이 고수달이 마이크에서 살짝 물러앉는 소리를, 백곰파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를 뚜렷이 들을수 있었다.
대화창에는 《두해 어머니소개 깔끔》이라는 요약이 순식간에 도배되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아예 캡쳐하여 이후로도 두고두고 인용하게 되었으니, 말 한마디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줄은 그날의 나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고수달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였다. 《저 지금 메모하는 중입니다.》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났으나 손끝만은 진짜로 무언가를 적어내려가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려왔다.
백곰파도 질세라 한마디를 보탰다. 《저희는 50년짜리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그 말에 넷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대화창은 《50년 뒤에 결산방송》이라는 롱담으로 순식간에 뒤덮였다.
나는 그 웃음소리속에서 묘한안도감을 느꼈다. 후배들이 우리의 무게를 무겁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저들나름의 방식으로 되받아치는 모습이 오히려 든든하였다. 력사란 본디 뒷세대가 제 방식으로 이어받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있는것이 된다.
블루동지는 그 뒤로도 한동안 잔소리를 이어갔다. 《여지만 열어두면 팬들만 힘들어진다, 확실하게 방향을 잡아야 응원하기도 좋다》는 취지의 말이였는데, 나는 그 옆에서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백곰파는 그런 우리를 보며 《두분 진짜 선배님들 같으시네요》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였다. 나는 그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가 이내 웃음이 났다. 선배라는 말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고수달은 조금 더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두분은 후회 안 하세요, 그렇게 깔끔하게 끝낸거.》 나는 그 질문앞에서 잠시 말을 골랐다.
《후회라기보다는》하고 나는 입을 떼었다. 《할만큼 하였다는 느낌이였다. 더 하면 오히려 억지스러워졌을거다.》 이것은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실제로 느낀 그대로였다.
블루동지도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 끝날 때가 되면 자연히 안다. 억지로 늘리는것도 억지로 끊는것도 다 티가 난다.》 그 말에는 두해를 함께 겪어본 사람만이 할수 있는 무게가 있었다.
백곰파는 그 말을 곱씹듯 잠시 말이 없다가 《그럼 저희도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오겠네요》하고 나직이 말하였다. 고수달도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것이다, 비록 화면 너머라 보이지는 않았으나 목소리의 결이 그러하였다.
고수달은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적으면서도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나는 그 침착함이야말로 백곰파의 저돌적인 성격과 좋은 짝을 이루는 힘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짝을 이룬다는것은 결국 서로에게 없는 결을 채워주는 일이다.
백곰파는 반대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성격이였다. 좋으면 좋다고, 부끄러우면 부끄럽다고 얼굴에 다 드러나는 통에, 그날 밤에도 우리의 잔소리앞에서 귀까지 벌게진 모습이 화면 밖으로도 훤히 느껴졌다. 나는 그런 솔직함이 오히려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는 힘이라는것을 알고있었기에,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넷은 그렇게 한동안 오락을 잊은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는 이미 좁아질대로 좁아졌고 순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어있었다. 대화창은 어느새 순위표보다 이 대화를 더 궁금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방송이 여섯시를 넘겨갈무렵에야 넷은 다시 총을 잡았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몇번의 교전은 앞서의 대화만큼 기억에 남지 않았다. 사람이란 진심어린 말 몇마디를 나눈 뒤에는 오락의 승패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는 법인 모양이다.
그날 밤 방송이 끝난 뒤 나는 머리수화기를 벗고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화면에는 시청자 반응을 정리한 클립이 벌써 여러개 올라와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제목이 《강블지루 후배들 조지는 밤》이라 붙어있어 나는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조언이라는것이 대단한 지혜였다고는 할수 없다. 애매하게 하지 말라는것, 여지만 열어두지 말라는것, 이는 방송뿐 아니라 어느 일에서나 통하는 평범한 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리치일수록 직접 겪어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에야 비로소 무게를 지니는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문득 《배그》라는 오락 자체에 다시 흥미가 붙는것을 느꼈다. 몇해동안 손을 놓았던 오락이였는데, 오랜만에 블루동지와 손발을 맞추어보니 그 옛 감각이 몸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다.
그 뒤로 나와 블루동지는 예전보다 훨씬 자주 《배그》 합방을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백곰파와 고수달을 격려하러 나선 자리였을뿐인데, 정작 그 격려의 자리가 우리 두 사람의 옛 호흡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니 사람일이란 참으로 알수 없는 노릇이다.
성원들도 이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유니동지는 내 방송일정표를 보다가 《사장님 요즘 《배그》 자주 하네요》하며 눈을 반짝였고, 히나동지는 《혹시 그 오빠랑 다시 잘되가는것 아니예요》하며 놀려대는 통에 나는 몇번이나 손사래를 쳐야 하였다.
나는 그런 놀림에 매번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대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 놀림조차 싫지 않았다는것을 이제 와서는 솔직히 적어둔다. 5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도 옛 짝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는것이, 어찌 보면 그만큼 그 시절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을것이다.
백곰파와 고수달은 그날 이후 실제로 무언가를 정리하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의 방향을 좀더 뚜렷이 밝힌 내용물를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수달이 그날 마이크앞에서 진짜로 메모를 하고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을 때, 나는 그 성실함에 새삼 감탄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날 밤을 되짚어보면, 나는 그 자리가 단순한 오락 합방 이상의 자리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다섯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두 세대의 《우결》이 한 화면안에서 마주앉은 자리였고, 지나간 사람이 오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자리였다.
그때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다고 여기였을뿐인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 자리는 내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우리 두해의 서사를 처음으로 남앞에서 요약해본 자리이기도 하였다. 《두해간 진행하였고 어머니 소개까지 마쳤으며 깔끔하게 끝냈다》는 그 한문장은, 실은 그날 밤 즉흥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 5년동안 마음속에서 다듬어온 말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 그 말을 왜 하필 그 순간에, 그런 담담한 어조로 하게 되었는지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 여름밤의 짧은 대화 이후로 나와 블루동지 사이에는, 끝난 이야기를 끝난 그대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수 있는 새로운 여유가 생겨났다는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그 여름밤의 대화를 곱씹어보곤 한다. 우리가 후배들에게 건넨 말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다시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애매하게 하지 말라는것, 여지만 열어두지 말라는것은 방송이든 사람의 인연이든 매한가지의 리치였다.
백곰파와 고수달이 그 뒤로 얼마나 씩씩하게 저희 길을 걸어갔는지는 이 회고록의 자리에서 다 적을 일이 아니다. 다만 그날 밤 그들이 보여준 진지한 표정만은, 여덟해 전 우리가 처음 마이크앞에 서던 그 서투른 얼굴과 겹쳐보여 나는 몇번이나 웃음과 눈시울이 동시에 뜨거워지는것을 느껴야 하였다.
매미소리가 아직 설익었던 그해 유월의 그밤을, 나는 지금도 총성 사이사이 오갔던 몇마디 말과 함께 뚜렷이 기억한다. 력사는 흔히 큰 사변으로 기록되지만, 때로는 이런 작은 밤 한자락이 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