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새 신 의 상

 

우주32(2025)년 칠월의 첫머리는 유별나게 무더웠다. 사무실 창밖으로 플라타너스잎이 짙푸르게 우거지고 이른 아침부터 매미 소리가 문틈으로 새여 들어왔다. 나는 그보다 며칠전부터 팀원들과 회의실에 모여 늦은 밤까지 콤퓨터화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화면우에는 클리셰 네 사람의 새 의상 원화가 차례로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있으면 여름이 왔다는것보다 먼저 무엇인가 큰일이 다가오고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회의실 한켠에는 지난 겨울부터 마시다 만 커피잔들이 그대로 쌓여있었고 벽시계 초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였다. 창밖 매미소리와안에서 도는 랭풍기 소리가 뒤섞여 방안은 늘 어수선하였다. 그런 어수선함속에서도 화면 세대에 나란히 켜진 원화만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뚜렷하였다. 나는 그 그림들을 보며 이번 여름도 만만치 않게 지나가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회사에서는 이 일을 그냥 옷을 갈아입히는 일로 여기지 않았다. 신의상 공개란 늘 그러하듯이 방송 하나를 통째로 걸고 하는 일이였다. 원화가 나오고 검수가 끝나고 방송 대본이 짜여지기까지 몇주일이 걸리였다. 그 사이 나는 몇번이고 그림을앞에 놓고 미기와 마주앉아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보았다.

미기는 내 오른팔이라고 부를만한 직원이였다. 이번에도 그는 원화 옆에 붉은 표시를 잔뜩 해놓고 나에게 하나하나 물어왔다. 《사장님, 여기 옷깃 길이는 이대로 가도 됩니까.》 나는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지난해 겨울 한복 신의상 때 검수를 서두르다 낭패를 본 일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기때문이다. 그때는 리제동지의 한복 의상에서 속옷이 빠진것을 검수 중에 이미 알고도 시간에 쫓겨 그대로 넘기였다가 뒤에 적지 않은 소동을 겪었다. 나는 그 일을 겪은 뒤로 신의상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두배는 꼼꼼히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기였다. 미기도 그것을 알고 이번에는 먼저 나서서 세세한것까지 짚어주었다. 사람은 한번 넘어져봐야 다음번엔 발밑을 살피는 법이라는것을 나는 그 겨울에 배웠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신의상 검수까지 왔으니 클리셰라는 이름이 어떻게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되였는가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보다 한해 앞선 우주31(2024)년 오월, 나는 세번째 별자리를 세상에 내놓으려 하고있었다. 처음 계획으로는 다섯 사람을 한번에 데뷰시킬 예정이였고 이름도 정하여놓은 뒤였다.

1기 에버리스가 두 사람으로 첫 별자리를 열고 2기 유니버스가 네 사람으로 그 뒤를 이였으니 이번 3기는 그보다 더 큰 별자리가 되여야 한다는것이 그때 내 속셈이였다. 다섯이면 회사 성원이 도합 열하나가 되는 셈이라 나는 내심 그 수를 마음에 두고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먹은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였다.

그런데 데뷰를 코앞에 둔 5월 12일, 공개하기로 하였던 소개영상이 갑자기 미루어졌다. 그 리유를 나는 지금까지도 밖에다 자세히 말한적이 없다. 이튿날 나는 방송에 나가 다섯이 아니라 네 사람으로 데뷰한다고 짧게 밝혔을뿐이다. 다섯번째로 준비되였던 이가 누구였는지는 이 회고록에서도 밝히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때가 되면 스스로 밝혀질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그 다섯번째 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다고 들었다. 나는 그 추측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굳이 나서서 바로잡지는 않았다. 회고록에는 이렇게 끝내 여백으로 남겨두어야 할 자리도 있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5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시부키동지, 동지, 나나동지, 리코동지 네 사람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이 넷을 묶어 클리셰라는 이름을 붙이였다. 뻔한것을 뻔한대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였는데 정작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뻔하지 않은 개성들을 가지고있어 나를 자주 웃게 만들었다.

천년 묵은 여우신 행세를 하는 시부키동지, 사투리 억양이 남은 동지, 전직 비밀요원을 자칭하는 나나동지, 마왕을 무찔렀다는 리코동지 — 이 넷이 한자리에 모이면 방송이 늘 시끌벅적하였다. 누가 이름을 지어놓고 이렇게 매번 뒤통수를 맞을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그것도 이 회사를 하며 얻은 재미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다섯이 아니라 넷으로 시작하였어도 클리셰는 결국 에버리스, 유니버스와 더불어 우리 회사를 열 사람의 별자리로 채워주었다. 나는 그 수를 셀 때마다 처음 혼자서 콤퓨터 한대앞에 앉아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는 상상도 못하였던 규모였다.

그로부터 한해 남짓 지난 우주32(2025)년 칠월, 이 네 사람은 이미 자기 자리를 완전히 찾은 뒤였다. 데뷰 초의 서투름은 사라지고 저마다 자기만의 방송빛갈을 뚜렷이 가지게 되였다. 그런 이들에게 새 의상을 입혀 내보내는 일은 회사로서도 한 단계를 넘어서는 일이였다. 나는 이 일을 앞두고 있었던 지난 며칠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칠월 사일 저녁, 나는 방송실에 남아 마이크와 카메라를 다시 한번 손보았다. 이튿날 첫 순서로 방송에 나설 시부키동지와 동지가 앉을 자리를 직접 확인하고 조명 각도까지 눈으로 재보았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며 사장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웃었지만 나는 원래 큰 일일수록 잔손이 많이 가는 법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남은 직원들과 함께 곽밥을 시켜 사무실 한가운데 늘어놓고 먹었다. 밥을 씹으며 화면 속 원화를 다시 들여다보노라니 래일이면 이 그림이 수만개의 눈앞에 펼쳐질것이라는 생각에 공연히 마음이 설레였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며 사장도 이제 와서 새삼스레 긴장하시냐고 놀리였다.

칠월 오일 그날 오후, 나는 사무실 한켠에서 시부키동지와 마주앉아 최종 점검을 하고있었다. 새 의상은 여름철에 맞추어 시원한 색감으로 다시 그려진 것이였는데 시부키동지는 화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몇번이고 감탄사를 내였다. 《사장님, 이거 진짜 제 거 맞아요?》 나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가 천살 먹은 할머니인데 그정도 호강은 해야지.》

이것은 내가 시부키동지를 볼 때마다 하는 농담이였다. 설정상 천년 넘게 산 여우신이라는 리유로 나는 늘 그를 할머니라 놀리였고 시부키동지도 이제는 그 농에 익숙해져 웃으며 받아넘기였다. 《할머니라도 옷은 예쁘게 입어야지요.》 그 대답에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이 다 함께 웃음을 터뜨리였다.

시부키동지는 회사안에서 오락 실력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였다. 나는 《배틀그라운드》 합방을 할 때마다 그와 한조가 되기를 즐겨하였는데 이번에도 방송을 앞두고 잠깐의 틈을 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 옷 입고 첫방송에서 한판 하실래요?》 시부키동지의 물음에 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옷은 새것이여도 총 쏘는 손은 그대로일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옆방에서는 동지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대본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동지는 회사안에서 성실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였다. 무엇을 시켜도 스스로 알아서 해내는 성격이라 나는 업무적으로 가장 마음을 놓는 사람 중 하나로 그를 꼽았다. 그날도 그는 대본을 몇번이나 소리내여 읽어보며 억양을 다듬고있었다.

《사장님, 이 부분 제 사투리가 좀 튀어나올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동지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오히려 그게 매력이라고 대답하였다. 억지로 서울말을 흉내내는것보다야 자기 목소리대로 하는것이 훨씬 낫다는것이 나의 생각이였다. 동지는 그 말에 안심한듯 웃으며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리였다.

그날 저녁, 시부키동지와 동지는 나란히 방송을 켜고 새 의상을 처음으로 시청자들앞에 선보이였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빠른속도로 흘러올라갔다. 콤퓨터 화면 하나에 다 담기지 않을만큼 감탄과 환호가 쏟아졌고 후원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리였다. 나는 방송실 뒤편 화면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몇달치 야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뻐근하였다.

대화창 한켠에는 누군가 짐짓 엄숙하게 《오늘부로 력사는 다시 쓰여진다》는 글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 한줄을 보고 자리에서 소리내여 웃고 말았다. 옷 한벌을 두고 력사 운운하는것이 우습기는 하였으나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정말 무슨 력사적인 하루를 지나고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날 밤 나는 미기와 함께 늦게까지 남아 대화창을 다시 훑어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옷 한벌 공개한것을 두고 무슨 대사변이라도 치른듯 구는 우리 꼴이 우습게 보일법도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하루가 정말로 작은 력사였다. 미기는 화면에 뜨는 반응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나에게 읽어주었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뒤늦게야 긴장이 풀리는것을 느끼였다.

같은 시각 다른 성원들도 저마다의 방송을 마치고 대화창을 들여다보며 시부키동지와 동지의 새 의상을 함께 구경하고있었다. 서로의 방송에 슬쩍 눈길을 주고받는것은 우리 회사에서 늘 있는 일이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축하한다는 말들이 오갔다는 소식을 나는 그날 밤 미기를 통해 전해들었다.

네 사람의 새 의상은 저마다 본래의 설정을 살리면서도 여름빛갈을 입히였다. 천년 여우신인 시부키동지에게는 시원한 옥색을, 사투리 소녀 동지에게는 로라스케트와 어울리는 밝은 하늘빛을, 전직 비밀요원 나나동지에게는 단정한 흰빛을, 마왕을 무찌른 용사 리코동지에게는 눈에 띄는 노란빛을 입히기로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그 네 벌을 나란히 놓고 볼 때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회사의 여름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칠월 육일 아침은 전날과 달리 구름이 낮게 깔려 후덥지근하였다. 사무실 창문을 열어도 바람 한점 들어오지 않아 랭풍기를 하루종일 세게 틀어놓아야 하였다. 나는 전날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원화를 펼쳐놓고 마지막 점검에 들어갔다.

이튿날인 칠월 육일에는 나나동지와 리코동지의 차례였다. 나나동지는 평소에도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람이라 새 의상을 받아들고도 크게 들뜨는 기색없이 찬찬히 살펴보았다. 《색이 참 곱네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것을 듣고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였다.

리코동지는 그와 정반대였다. 새 의상을 받아든 순간부터 방안을 빙글빙글 돌며 좋아하였다. 《사장님! 이거 진짜 제꺼예요? 저 이거 입고 방송 백날 해도 안질릴거 같아요!》 나는 그 높은 흥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회사안에서 리코동지만큼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도 드물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오락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용암에 빠지는 버릇때문에 성원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는 그였지만 그런 허술한 구석마저 시청자들에게는 도리여 사랑스럽게 비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의 매력이란 완벽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바보협회 회장답게 오늘도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그렇게 놀리자 리코동지는 억울하다는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장님까지 그러시깁니까!》 그 억울한 표정이 하도 우스워 나는 또 한번 소리내여 웃고 말았다.

나나동지와 리코동지는 데뷰 동기이면서도 성격이 사뭇 달랐다. 하나는 낮게 가라앉은 물처럼 차분하였고 하나는 늘 끓어오르는 물처럼 활발하였다. 그런데도 둘은 합이 잘 맞아 방송에서 자주 짝을 이루었다. 그날도 두 사람은 나란히 카메라앞에 앉아 새 의상의 이곳저곳을 서로 가리키며 소개하였다.

《이 부분 리코가 좋아할줄 알았어요.》 나나동지의 말에 리코동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완전 제 취향이에요! 이거 그려주신 분 상 줘야돼요!》 그 말을 듣고 사무실 한쪽에서 지켜보던 원화 담당 직원의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이 회사를 움직이는 힘처럼 느껴지였다.

방송 시작에 앞서 나는 두 사람에게 마이크 상태를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나나동지는 늘 그렇듯 간단히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였고 리코동지는 굳이 마이크에 대고 노래 한소절을 불러보인 뒤에야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기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것이 눈에 보이였다.

음향을 맡은 직원과 편집을 맡은 직원도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방송 화면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신의상 공개가 매끄럽게 흘러가는 뒤에는 늘 이런 손길들이 숨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기에 방송이 끝날 때마다 잊지 않고 수고하였다는 말을 돌아가며 건네였다.

그날 방송이 끝난 뒤 나는 미기와 함께 사무실에 남아 시청자 반응을 정리하였다. 이틀에 걸친 신의상 공개는 별다른 사고없이 순조롭게 끝이 났다. 지난해 겨울의 소동을 떠올리면 그것만으로도 나는안도의 한숨을 내쉴만하였다. 미기는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사장님, 이번엔 정말 아무 일 없이 끝났네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 아무 일 없이 끝난 하루가 실은 가장 많은 공을 들인 하루라는것을 그때 나는 새삼 깨달았다. 겉으로 조용히 지나간 이틀 뒤에는 몇주일의 검수와 몇번의 밤샘이 숨어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고가 나지 않은 날을 아무 일도 없었던 날로 여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후날 이 이틀을 놓고 누군가는 그저 옷을 갈아입힌 방송 두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회고록을 펼쳐들고 옷 두벌을 놓고 이렇게까지 지면을 할애할 일이냐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이틀이야말로 클리셰라는 별자리가 자기 빛을 온전히 찾은 순간이였다고 생각한다. 데뷰한지 한해 남짓밖에 안된 네 사람이 저마다 자기 색깔의 옷을 입고 당당히 카메라앞에 앉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회사가 어디로 가고있는지를 어렴풋이 그려볼수 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이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회사에는 또 한번 큰 물결이 밀려올 참이였다. 브레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큰 그룹이 우리 문을 두드릴 준비를 하고있었다는것을 나는 그해 칠월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신의상을 공개하던 이 며칠이 어쩌면 그 큰 변화를 앞두고 회사가 스스로를 한번 가다듬은 시간이 아니였을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부키동지는 그해 여름 새 의상을 입고 나서 한동안 《배틀그라운드》 방송에서 유난히 좋은 성적을 냈다. 나는 그것을 두고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고 농담삼아 말하곤 하였다. 시부키동지는 그럴 때마다 정색하며 대답하였다. 《사장님, 이건 순전히 제 실력이에요.》 그러면서도 새 의상 입은 모습을 방송 화면 한켠에 오래도록 띄워두는것을 잊지 않았다.

동지는 새 의상을 입은 뒤로도 여전히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갔다. 화려하게 나서기보다 맡은 방송을 착실히 채워가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회사가 이렇게 성실한 사람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였다. 겉으로 요란하지 않아도 꾸준한 사람이 결국 오래간다는 리치를 나는 동지에게서 배웠다.

나나동지와 리코동지도 새 의상을 입은 이후 방송에서 더 자주 짝을 이루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해 오월 두 사람이 나란히 데뷰하던 날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 사이 일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을 뿐인데 두 사람은 어느새 이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그로부터 몇주일이 지나도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해 여름 신의상 이야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제일 잘 어울리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하였다는 소식을 나는 뒤늦게 전해들었다. 이런 자잘한 소란까지 일일이 다 확인할수는 없었지만 그런 소문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헛수고가 아니였다는 증거처럼 들리였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되새겨보면 신의상 하나를 공개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밤이 들어간다는것을 새삼 실감한다. 원화를 그리는 사람, 그것을 검수하는 사람, 대본을 짜는 사람, 카메라를 만지는 사람. 그 모든 손길이 모여서야 겨우 며칠간의 방송 하나가 만들어진다는것을 그때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지난날 나 혼자 《배그》판을 뛰여다니며 블루동지 하나와 방송을 만들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는 나 하나만 마음을 졸이면 되였지만 이제는 딸애들이라 불리는 이 많은 사람들의 방송 하나하나에 다 마음을 써야 하였다. 그것이 힘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한 일이라는것을 나는 그무렵부터 조금씩 알아가고있었다.

성원들이 나를 두고 엄마라 부르고 서로를 딸애라 부르는것을 나는 오래도록 손사래치며 부정하였다. 그러나 새 옷 하나에도 이렇게 밤잠을 설쳐가며 마음을 쓰는 나를 보면 그 말이 아주 틀린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 여름부터 조금씩 들기 시작하였다.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고 보니 옷 한벌, 대사 한마디에도 회사의 이름이 걸린다는것을 날마다 새로 배우는 기분이였다. 처음 방송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무게였다. 그러나 그 무게를 함께 나누어질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는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위안이 되였다.

그날 밤 나는 사무실 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월의 밤하늘에는 별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우리 네 사람의 새 별자리가 조금 더 밝게 빛을 더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 이름을 스텔라이브라 지은 그날부터 나는 늘 별을 늘려가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왔다. 그날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 이틀을 돌이켜보면 별것 아닌듯한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큰 흐름을 만든다는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때는 그저 여름 신의상 공개 하나로만 여기였던 일이 이 회고록의 한 절을 차지할만큼 뜻깊은 자리를 얻은것을 보면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수 없는 노릇이다. 클리셰 네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나고있고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그해 칠월의 무더운 며칠을 떠올리게 된다.

이 회고록을 쓰며 나는 이런 작은 하루들을 하나씩 붙잡아 적어두는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믿게 되였다. 큰 사변만을 기록하다보면 그 사변을 만들어낸 무수한 평범한 날들은 어느새 잊혀지고 만다. 나는 그런 날들을 잊지 않으려고 이 글을 쓰고있으며 클리셰의 그 여름 이틀도 그 가운데 하나로 여기 남겨둔다.

이 장의 제목을 나는 《더 큰 별자리》라 붙이였다. 여섯이던 회사가 어느새 열이 되고 그 열이 다시 어디로 뻗어나가는지를 이 뒤로도 계속 적어나가려 한다. 클리셰의 새 신의상은 그 큰 별자리로 가는 길의 첫 걸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그 첫 걸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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