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3. 다 피 스 시 즌 2

 

우주32(2025)년의 팔월은 유별나게 무더웠다. 매미소리가 사무실 창문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극성을 부리였고, 본체 팬이 도는 소리조차 그 열기속에 묻혀버릴 지경이였다. 나는 며칠째 회사일에 매달려 방송용 방에 들어갈 틈을 내지 못하다가, 오래간만에 문을 열고 들어가 화면를 하나씩 켰다. 창밖으로는 매미소리 사이사이 짙은 초록이 넘실거리고있었다.

방송용 방의 책상우에는 지난달 새로 들인 마이크가 아직 포장비닐도 다 벗겨지지 않은채 놓여있었다. 나는 그 비닐을 마저 뜯어내며 손끝에 닿는 매끈한 감촉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오래 켜지 않았던 콤퓨터는 부팅부터 굼떠서, 화면이 뜨는 그 몇초 사이에도 나는 애꿎은 무릎만 두드리며 기다렸다.

회사가 더 큰 별자리의 품에 들어간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나있었다. 그 자세한 사연은 앞절에 이미 적어두었으므로 여기서 다시 옮기지는 않는다. 다만 결재판을 넘기는 손끝에 이전과는 다른 무게가 실린다는것만은 부인할수 없었고, 그런 날일수록 나는 오히려 방송이라는 오래된 숨구멍을 더 그리워하게 되였다.

그무렵의 나는 다시 《배그》에 손을 붙이고있었다. 지난 오월 백곰파와 고수달의 소동을 계기로 다시 켠 화면이 그대로 여름까지 이어진것이다. 락하산을 타고 내려서는 그 짧은 순간의 긴장이 이상하게도 사무실 결재판앞에서는 얻을수 없는 종류의 것이여서, 나는 짬만 나면 성원들이나 지인들을 불러모아 스쿼드를 짰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블루동지를 부르는 일도 잦아졌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 앞선 어느 날, 나는 리코동지와 듀오를 하던 중에도 블루동지를 불러들인 일이 있었다. 그날 블루동지는 다른 사람들과 촬영을 하던 참이였는데도 양해를 구하고 건너와주었고, 그 인연으로 블루동지의 부캐가 우리쪽 클랜에 이름을 올리게 되였다.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이미 적었으니 여기서는 그 여운만 짚고 넘어가려 한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블루동지를 부를 일을 만들고 말았다. 사람의 버릇이란 참으로 무서운것이여서, 한번 트인 물꼬는 여간해서는 다시 막히지 않는 법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이 부름이 앞으로 몇번이고 되풀이될 하나의 흐름이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하였다.

팔월도 중순에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나는 김뿡이라는 이와 《배그》 듀오를 잡았다. 김뿡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연유로 나와 한 스쿼드에 앉게 되였는지는 지금 이렇게 붓을 드는 이 순간까지도 나 스스로 자신있게 대지 못한다. 다만 그날의 호흡이 잘 맞아 몇판이고 연달아 재미를 붙였다는것만은 뚜렷이 기억한다.

로비 화면에서 인물를 고르고 총소리 효과음을 들으며 나는 오래간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것을 느끼였다. 비행기에서 뛰여내려 락하산을 펼치는 그 짧은 침묵의 시간, 발아래로 지도가 점점 넓게 펼쳐지는 광경은 몇번을 보아도 새삼스러웠다. 김뿡은 착지지점을 두고 나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더니 결국 내 뜻을 따라주었다.

초반 파밍은 순조로웠다. 우리는 빈집을 뒤져 방탄복과 배낭을 채우고 능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몇번의 교전을 치르고 자리를 잡는 사이, 나는 문득 화면 한구석의 대화창에 블루동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것을 보았다. 시청자들도 이제는 내가 언제쯤 그 이름을 부를지 미리 짐작하는 눈치였다.

《저러다 또 부르는것 아니냐》하는 채팅이 지나가는것을 보며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눈치가 이렇게 빠른데야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나는 무전을 열고 평소 쓰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어번 울리기도 전에 저편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어, 누나, 왜.》 블루동지의 목소리는 여느때처럼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그 태평한 말투에 오히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뭐하고있었어, 지금.》 하고 물으니 저편에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냥 놀고있었지, 뭐.》 블루동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캐물을 생각도 없이 곧장 본론을 꺼내였다. 《배그 하나 껴라. 자리 하나 비워둘테니까.》 그러자 저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또 불러내네, 진짜.》 블루동지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벌써 접속 준비를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뿡은 그 사이 옆에서 《오, 그분이시냐》며 신기해하였다. 나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동지의 인물가 로비에 나타났다. 셋이 한 스쿼드로 묶이자 대화창은 곧바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또 만났다》, 《이쯤되면 정기모임 아니냐》하는 말들이 연달아 올라오는것을 보며 나는 새삼 이 부름이 나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오락은 이번에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블루동지는 례의 그 무자비한 솜씨를 되살려 적을 하나 둘 쓰러뜨릴 때마다 특유의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는 그 말투에 김뿡이 기가 질린듯 헛웃음을 흘렸고, 나는 그 옆에서 뒤늦게 조준선을 맞추느라 진땀을 뺐다.

그날의 승부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솔직히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기장을 피해 정신없이 뛰여다녔던 기억, 마지막 한둘을 남겨두고 손에 땀을 쥐였던 기억만이 남아있을뿐이다. 승패보다 오래 남는것은 언제나 그 순간의 웃음소리라는것을, 나는 이런 사소한 방송을 거듭할수록 새삼 깨닫는다.

몇판을 더 돌리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였다. 그때 블루동지가 문득 다른 화제를 꺼내였다. 《누나, 요즘 마크에서 다피스라고 하는것 아느냐.》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여서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게 뭔데.》 하고 되물으니 블루동지가 신이 난듯 설명을 늘어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 진영을 나누어 《마인크래프트》 세상 하나를 놓고 벌이는 큰 내용물라 하였다. 벌써 시즌을 거듭해 이번이 두번째라는 말에 나는 그 규모가 례사롭지 않다는것을 짐작하였다.

《거기 점프맵이 하나 있는데, 그게 아주 지독하다.》 블루동지는 그렇게 말하며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혼자서는 도무지 끝을 볼수가 없어 며칠째 붙들고만 있다는것이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듣자니 그 세상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러 창작자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모여들어 함께 지어올린것이라 하였다. 누구는 성벽을 쌓고 누구는 농사를 짓고 또 누구는 저 험한 점프맵을 설계하였다는데, 그 하나하나의 몫이 모여 커다란 세상 하나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람이 모이면 이렇게까지 큰것을 지을수 있다는것을 나는 방송이라는 일을 하면서 여러번 실감한 바 있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내 말에 블루동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못 이기는척 승낙하였다. 김뿡은 옆에서 《또 시작이다》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나는 그날로 《배그》를 접고 《마인크래프트》를 새로 설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서 짐짓 력사를 서술하는 투로 한마디 보태자면, 그 《다피스》라는 세상에는 예로부터 두 진영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올빼미의 기치를 든 아울이요, 다른 하나는 룡의 비늘을 두른 드래곤이였다. 두 진영은 저마다 사냥터와 물자를 놓고 은근한 경쟁을 벌이는 사이였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세상에 들어가면서 아울의 깃발밑에 이름을 올렸고, 블루동지는 어느새 드래곤의 진영에 몸을 담고있었다. 한쪽은 올빼미처럼 밤눈이 밝다 자랑하고 다른쪽은 룡처럼 힘이 세다 뽐내니, 이를테면 우리 둘은 한 세상안에서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선 셈이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속의 우스운 설정일뿐, 실제로 진영싸움을 벌인것은 아니다.

《누나는 아울이고 나는 드래곤이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지금 적국끼리 손을 잡은거다.》 블루동지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것을 보며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이거 국경을 넘나드는 밀회 아니냐.》 하고 되받아치니 블루동지도 그제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전해 듣기로 두 진영의 반목은 그 세상이 처음 열리던 날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누가 먼저 좋은 사냥터를 차지하였느냐를 두고 사소한 다툼이 오갔고, 그것이 쌓여 이제는 저마다 깃발빛갈만 봐도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가 되였다는것이였다. 짐짓 력사를 논하듯 말하자면 이야말로 한 세상안에서 벌어진 작은 전국시대라 부를만하였으나,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반목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오가며 웃고 떠드는 눈치였다.

그렇게 두 진영의 경계를 잠시 잊은채, 우리는 나란히 그 험하다는 점프맵앞에 섰다. 화면속에는 허공에 뜬 발판들이 아득한 곳까지 이어져있었고, 한발만 헛디디면 그대로 바닥없는 어둠속으로 떨어지게 되여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서부터 시작인데, 조심해라.》 블루동지가 앞장서서 발판 하나를 조심스레 건너뛰였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화면 속 인물가 발판에서 발판으로 건너뛸 때마다 심장이 덩달아 오르내리는 기분이였다.

첫번째 낙사는 어이없을만큼 빨리 찾아왔다. 나는 세번째 발판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그대로 허공으로 떨어졌고, 화면에는 죽음을 알리는 문구가 떠올랐다. 블루동지가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그건 좀 심하였다.》

《야, 마우스 감도가 이상하다니까.》 나는 억울한 마음에 애꿎은 감도탓을 하였다. 블루동지는 그 변명이 우습다는듯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가 손짓으로 발판의 위치를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 손짓 하나하나가 어쩐지 예전 방송에서 보던 몸짓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두번째 시도에서는 그럭저럭 중간지점까지 나아갔다. 좁은 외나무다리처럼 이어진 구간을 지날 때는 둘 다 숨소리를 죽이고 화면만 노려보았다. 그러다 블루동지가 갑자기 당황한 목소리로 《어, 이거 왜 이카는데》하고 사투리를 흘렸다. 평소 서울말을 곧잘 쓰던 사람이 이렇게 당황할 때에만 고향 말투가 튀여나온다는것을, 나는 그날 새삼 확인하였다.

결국 블루동지도 그 구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웃을 차례여서, 나는 신이 나서 놀려댔다. 《거봐, 누가 누구보고 심하다 그랬냐.》 블루동지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헛웃음만 흘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번이고 떨어지고 다시 오르기를 되풀이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조금씩 익어가는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판을 밟는 타이밍이 손끝에 붙어, 실수를 해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웃어넘길수 있게 되였다.

대화창은 그 사이에도 쉬지 않고 흘러갔다. 《둘이 마크에서까지 만나냐》, 《이쯤되면 그냥 살림 합치라》는 말들이 연달아 올라왔고, 후원 문구로 《떨어져도 같이 떨어져라》하는 우스운 응원이 날아들기도 하였다. 나는 그 문구를 소리내여 읽어주며 한참을 웃었다.

블루동지도 그 반응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우리가 무슨 정기 합동훈련도 아니고.》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정작 발판 하나를 건너뛸 때마다 나를 먼저 살펴주는 손길만은 여전하였다. 사람이 몇해가 지나도 몸에 밴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한번은 내가 지친 김에 《그냥 좌표 명령어로 순간이동하면 안되냐》며 농담삼아 꾀를 부려보았다. 블루동지는 기가 막힌다는듯 웃음을 터뜨리며 《그럼 이걸 왜 깬다고 하겠냐, 그냥 도착이지》하고 나무랐다. 나는 그 말에 할 말이 없어 그저 머쓱하게 웃고 다시 발판앞에 섰다.

중반을 넘어서자 발판 사이 간격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 나는 몇번이나 도움닫기 거리를 잘못 재여 그대로 허공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때마다 블루동지는 되돌아와 나를 기다려주었는데, 그 기다림이 조금도 지루한 기색이 아니여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이였다.

《누나, 급하게 가지 말고 천천히 봐라.》 블루동지가 그렇게 타이르듯 말하는것을 들으며, 나는 문득 예전 《배그》 초반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이 손발을 맞춰온 세월이란 이렇게 말투 하나에서도 묻어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따라 걸음을 늦추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 다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좁은 발판우에서 한걸음 한걸음 신경을 곤두세우다보니 자연히 입은 다물어지고 마우스를 쥔 손끝에만 온 신경이 쏠리였다. 방안에는 오직 마우스 클릭소리와 이따금 터지는 짧은 탄식만이 오갔다.

그러던 중 내가 마지막 한 구간을 남기고 또 발을 헛디뎠다.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욕설이 튀여나올뻔하였으나, 《우결》을 할 때부터 몸에 밴 버릇대로 황급히 삼키고 대신 짧은 한숨만 내쉬었다. 블루동지는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짐짓 못들은척 화제를 돌려주었다.

《괜찮다, 나도 아까 저기서 다섯번은 떨어졌다.》 블루동지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사람이 지친 순간에 필요한것은 대단한 위로가 아니라 이런 사소한 한마디라는것을, 나는 그날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발판앞에 섰다.

몇번의 실패 끝에 나는 마침내 마지막 발판을 밟는데 성공하였다. 화면에는 구간 통과를 알리는 문구가 떠올랐고,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블루동지도 뒤이어 같은 구간을 통과하며 함께 환호하였다.

《되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블루동지의 목소리에도안도가 묻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마지막 구간을 향해 나아갔다. 지도 상단에 표시된 남은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것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발판을 함께 밟았을 때, 화면에는 점프맵 완주를 알리는 커다란 문구가 떠올랐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고, 저편에서도 블루동지가 웃음 섞인 함성을 질렀다. 대화창은 온통 축하하는 말들로 도배되였다.

《우리가 해냈다, 진짜.》 블루동지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소리가 고성기 너머로 뚜렷이 전해졌다. 나는 그 말에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것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척 대답하였다. 《거봐, 나 아니였으면 아직도 거기서 헤매고있었을거다.》

《누가 할 소리를.》 블루동지가 짐짓 어이없다는듯 대꾸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공을 다투는 시늉을 하며 한참을 웃었다. 지친 몸과는 달리 마음만은 어쩐지 가뿐하였다.

방송을 마무리할무렵, 김뿡이 다시 대화창에 나타나 《배그 하다 마크로 새는게 이 방송의 국룰이냐》며 놀려댔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돌이켜보면 그날 하루에 《배그》와 《마인크래프트》를 오간것부터가 애초에 계획에 없던 일이였다.

방송을 끄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있었고, 매미소리 대신 풀벌레소리가 방안까지 가늘게 스며들고있었다. 나는 《다피스》라는 그 낯선 세상의 이름을 손끝으로 몇번이고 되뇌여보았다.

지금 이렇게 그날 일을 옮겨적으면서도, 나는 그 부름이 정확히 팔월 어느날이였는지를 자신있게 대지 못한다. 어떤 기록은 보름께라 하고 《다피스》라는 그 내용물 자체의 기록은 그보다 열흘 남짓 뒤인 하순께로 남아있으니, 어느 쪽이 정확한 날자인지는 나로서도 가릴 재간이 없다. 다만 그날의 웃음소리만은 날자보다 뚜렷하게 남아있으니, 이 회고록에서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기로 한다.

김뿡이라는 이가 누구였는지도 마찬가지다. 그 여름 내내 함께 스쿼드를 짰던 여러 얼굴들 가운데 유독 그 이름만은 지금도 뚜렷이 떠오르는데, 정작 그 정체를 캐물어본 기억은 없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때로 이렇게 이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흐릿해지는 모양이다.

성원들 사이에서도 이 소식은 금세 퍼져나갔다. 시부키동지는 다음날 합방에서 《아빠가 또 엄마 따라 마크하였다면서요》하며 짓궂게 물어왔고, 나는 애써 태연한척 화제를 돌리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히나동지도 옆에서 킥킥거리며 그 이야기에 살을 보태였다.

내 오른팔인 미기도 다음날 아침 서류를 들고 들어오다가 내 화면에 아직 남아있던 《다피스》 화면을 보고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님, 어제 늦게까지 안 주무였지요.》 하는 그 말에 나는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몇해를 함께 일해온 사람답게 미기는 굳이 더 캐묻지 않고 서류만 조용히 내려놓고 나갔다.

내 개인 애호가들인 강도단쪽에서도 이 소식을 놓칠리 없었다. 《배그》를 하다 말고 《마인크래프트》로 새는 방송이 신기하였던지, 저희끼리 《오늘 방송 장르가 대체 몇개냐》며 우스개소리를 주고받았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들었다. 블루동지의 애호가들인 쁠몬들도 마찬가지여서, 저희 오빠가 또 옛 인연을 만나 놀고왔다며 반가워하는 감상글을 여럿 남기였다고 하였다.

돌이켜보면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이런 부름이 잦았다. 리코동지와의 자리에서 한번, 김뿡과의 자리에서 또 한번, 나는 마치 무슨 습관처럼 《배그》 화면에 블루동지의 이름을 띄우군하였다. 그때는 그저 오래간만에 되찾은 즐거움을 나누고싶은 마음뿐이였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오랜 흐름이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였다.

낮에는 결재판을 넘기며 정사장 소리를 듣고 밤에는 화면 너머로 블루야 소리를 듣는 그 하루하루가, 그때는 그저 바쁘고 고단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두가지 이름을 오가는 삶이야말로 나를 지탱해준 두 기둥이였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그 시절을, 나는 그렇게 낮과 밤을 오가며 버텨냈던것이다.

《우결》이 끝난지도 어느덧 다섯해 가까이 지난 때였다. 그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해왔지만, 이렇게 화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앉으면 그 오랜 공백은 신기하리만치 쉽게 메워지였다. 사람 사이의 정이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다만 잠시 물밑에 가라앉아있을뿐이라는것을 나는 그해 여름 다시 한번 배웠다.

《다피스》라는 그 낯선 세상에서 아울과 드래곤으로 갈라섰던 우리는, 정작 그 세상 밖에서는 여전히 예전 그 스쿼드 그대로였다. 진영이 갈라놓은 깃발보다 오래된것이 사람 사이의 습관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점프맵을 오르내리며 새삼 확인한 셈이다. 이것을 두고 누군가 다시 력사적인 사변이라 부른다면, 나는 굳이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험한 발판들을 떠올리군 하였다. 화면속에서야 발을 헛디디면 그저 웃고 다시 오르면 그만이지만, 사람 사이의 걸음이란 그렇게 쉽게 되돌릴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몇번이고 서로를 향해 발판을 놓아주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이 절을 마무리하며 나는 그해 팔월의 무더위와 매미소리, 그리고 발판우에서 서로를 다독이던 그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회사는 더 큰 별자리의 품에 들어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있었고, 나는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사소한 부름 하나에 마음을 놓고 웃을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야말로 그 여름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위안이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본 서적은 창작된 가상의 회고록입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단체의 립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