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 T A R T R A I L
우주32(2025)년 십일월이 저물어갈무렵, 회사 지하 련습실에는 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창밖은 이미 어둡고 초겨울 바람이 유리창을 잉잉 울리였으나, 안쪽에서는 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소리와 발구름소리가 그칠줄을 몰랐다. 나는 그무렵 저녁마다 련습실 유리문 너머로 성원들의 그림자를 지켜보는것이 하나의 일과가 되였다. 콤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와 반주소리가 뒤섞인 그 늦은 밤의 풍경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어느 새벽에는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성원을 담요로 덮어주고 조용히 불을 끄고 나온 일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해 겨울, 우리는 회사를 차린 뒤로 처음 있는 일을 앞두고 있었다. 1기부터 3기에 이르기까지, 데뷰한 시기도 다르고 얼굴을 익힌 정도도 저마다 다른 아홉에서 열명에 이르는 성원 전원이 한 무대에 나란히 서는 일이였다. 지금까지는 두엇씩, 많아야 네댓씩 짝을 지어 합방을 하거나 소규모 행사에 나서는것이 고작이였다. 회사가 커질수록 이렇게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은 오히려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 귀한 날이 되여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유니로부터 후야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시간에 이 회사의 문을 두드린 얼굴들이 모두 한 무대우에 서야 하였다. 나는 그 기획안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반가움보다 먼저 아득함이 앞섰던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무대 하나에 열명 남짓한 사람의 동선과 호흡을 맞춘다는것은, 말로는 쉬워도 막상 해보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였기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한참 앞선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회사를 처음 차렸을무렵, 우리에게는 무대라고 부를만한것이 따로 없었다. 좁은 방 한칸에 마이크 하나와 웹카메라 하나를 놓고, 시청자 몇십명앞에서 인사를 하는것이 그 시절 우리가 가진 무대의 전부였다. 후원 알림신호 한번에 온 방이 떠들썩하게 웃던 시절이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이보다 더할수 없다.
그때 누가 나에게 몇해 뒤 만명 가까운 관중이 들어찰 전시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나란히 노래를 부르게 된다고 말하였더라면, 나는 아마 실없는 소리 말라며 웃어넘기였을것이다. 그러나 세월이라는것은 사람의 짐작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 나아가는 법이다. 좁은 방에서 시작된 우리의 걸음이 어느새 이렇게 멀리까지 와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 겨울 련습실 유리문앞에 설 때마다 새삼 실감하곤 하였다.
축전의 이름은 일찌감치 《STAR TRAIL》로 정해졌다. 별들이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하나의 자리로 모여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였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 회사가 지나온 세월을 그대로 옮겨놓은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다른 빛을 내던 이들이, 마침내 하나의 자리로 모여드는 밤이 될 참이였다.
노래는 모두 서른한곡이 준비되였다. 그 가운데 세곡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신곡이였다. 《Twinkle》과 《히로인이 되고싶어》, 그리고 축전의 이름을 그대로 딴 《STAR TRAIL》이 그것이였다. 세곡 모두 안무가 새로 짜여진 곡들이라, 련습실의 밤은 자연히 길어질수밖에 없었다.
신곡의 안무를 맞추는 련습실 풍경은 매일이 소란스러웠다. 히나동지는 동작 하나를 열번 스무번 되풀이하면서도 좀처럼 성에 차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마시로동지는 그 옆에서 박자를 세여주며 손뼉을 쳐주었다. 유니동지는 거울앞에서 자기 동작을 몇번이고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서군하였다.
《사장님, 이 동작 진짜 서른한곡중에 제일 어려운것 같아요.》 히나동지가 땀을 훔치며 그렇게 하소연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서른한곡 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처럼 말하네. 그래도 이게 제일 이쁘게 나오는 동작이니 조금만 더 해보자.》
유니동지는 련습이 끝날 때마다 다른 성원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운을 북돋았다. 《우리 이번에 진짜 력사에 남는 무대 만드는것이예요, 다들 힘내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그리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리제동지는 련습실 한켠에서 대본과 진행순서를 몇번이고 되짚어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무대뒤에서 흐트러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성정이 참으로 든든하다고 느끼였다.
타비동지는 시월의 소동 이후로 몸짓 하나하나에 더 마음을 쓰는 눈치였다. 무대 동선을 짤 때에도 손짓 하나를 몇번이고 다시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짠하면서도 대견스러웠다.
시부키동지와 리코동지는 련습이 끝난 뒤에도 남아서 서로의 화음을 맞추어보곤 하였다. 린동지와 나나동지는 그 옆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동작을 흉내내며 지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나는 그 련습실을 오가며 이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것을 새삼 깨달았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다른 몸짓을 가진 이들을 하나의 무대우에 모아 엮어내는 일은, 노래 하나를 잘 부르는것과는 또 다른 재간을 요구하는 일이였다.
그렇게 삼주 남짓한 준비기간이 눈코뜰새없이 지나갔다. 신곡 세곡의 안무가 겨우 손에 익을무렵, 축전의 날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섣달 스무날이 밝았다.
그날 오후, 무대 뒤편 조정실에는 진작부터 긴장이 감돌고있었다. 여러대의 화면앞에 나란히 앉은 기술진은 송출상태와 음향수치를 몇번이고 다시 점검하였다. 카메라 여러대가 무대 곳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가운데 몇대는 오로지 《치지직》 생방송만을 위한것이였다. 나는 무대 옆 통로에 서서 그 화면들을 지켜보며 손에 땀이 배는것을 느끼였다.
저녁 끼니로는 성원들도 기술진도 모두 곽밥으로 때웠다. 무대 뒤 좁은 통로에 나란히 앉아 곽밥을 먹는 성원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화려한 무대 뒤에는 늘 이런 소박한 풍경이 있다는것을 새삼 느끼였다.
그보다 이른 아침, 관중이 들어차기 전의 전시장은 텅 비여있었다. 나는 그 넓은 빈자리를 혼자 걸어보며, 몇시간 뒤 이 자리를 가득 메울 사람들의 얼굴을 미리 그려보려 애를 썼다. 음향점검을 위해 빈 좌석을 향해 홀로 노래를 부르던 성원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는데, 그 소리가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묘하게 든든하였다.
개막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속에서 관중석의 함성이 먼저 밀려들었고, 뒤이여 무대우로 성원들이 하나둘 걸어나가는 그림자가 드러났다. 나는 그 순간 무대 옆에서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일제히 켜지는 순간, 전시장을 가득 메운 함성이 무대 뒤편까지 밀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원 전원이 한 무대우에 나란히 선 모습을 실제로 보는것은 나 역시 그날이 처음이였다.
첫곡이 시작되자 전시장 바닥까지 흔들리는듯한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나는 무대 옆에서 진행표를 손에 쥔채로 한곡 한곡이 넘어갈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것을 느끼였다.
관중석을 내다보니 저마다 다른 빛갈의 응원봉이 물결처럼 출렁이고있었다. 어느 구역은 온통 노란빛으로, 또 어느 구역은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어있었는데, 그 빛갈들이 노래가 넘어갈 때마다 물결치듯 자리를 바꾸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이 넓은 자리를 채운 사람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마음에 품은 별을 하나씩 들고 온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전에 흐른 몇곡의 옛노래에서는 관중석이 아예 한목소리가 되여 후렴구를 따라불렀다. 나는 무대 옆에서 그 합창소리를 들으며, 이 노래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하루하루에 스며들어있었는지를 새삼 헤아리게 되였다.
몇곡이 지나고 첫 신곡 《Twinkle》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관중석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처음 듣는 곡에도 관중은 금세 몸을 흔들며 호응하였고, 무대우의 성원들도 그 반응에 한결 힘을 얻은듯 표정이 밝아졌다.
이어진 《히로인이 되고싶어》에서는 무대 전체가 한바탕 흥겨운 놀이판으로 변하였다. 나는 그 곡의 경쾌한 가락에 맞추어 무대 옆에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고있었다.
그리고 축전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STAR TRAIL》이 울려퍼졌을 때, 나는 무대 옆에 선채로 잠시 말을 잃었다. 성원 하나하나가 자기 몫의 빛을 내면서도 결국 하나의 노래로 어우러지는 그 모습이, 마치 이 곡의 제목 그대로 별들의 궤적처럼 느껴지였다.
무대 중반, 이 자리를 함께한 손님 후야가 무대우로 올라섰다. 낯선 무대에 처음 서는 이답게 몸짓에 긴장이 배여있었으나, 성원들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이내 제 몫의 흥을 찾아갔다.
관중석에서는 후야동지의 등장에 또 한번 커다란 함성이 일었다. 나는 무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우리 회사 밖의 얼굴을 이 자리에 함께 세운것이 옳은 결정이였음을 새삼 느끼였다.
그런데 그 곡이 끝날 즈음, 사회를 보던 성원이 문득 무대 옆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나를 불러세웠다. 《저기 사장님 와계신데, 한마디만 해주고 가세요!》 나는 그 말에 그만 얼음이 되고말았다.
나는 원래 무대에 설 사람이 아니였다. 그런데도 관중석에서는 벌써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나는 마지못해 마이크를 건네받아 무대 한켠으로 걸어나갔다.
막상 마이크를 쥐고나니 머리속이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분,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겨우 그 한마디를 더듬더듬 마치고 나니 관중석에서 정겨운 웃음과 박수가 터지였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서둘러 무대뒤로 물러났다. 기술진 하나가 웃으며 《사장님, 방송에서는 그렇게 말씀 잘하시더니 무대에만 서면 왜 그러세요》하고 놀렸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아넘길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연이 절반쯤 흘렀을무렵, 뜻하지 않은 소동이 벌어졌다. 무대 뒤편 전원장치에 몰린 멀티탭 하나에서 문제가 생긴것이였다. 조정실 화면 몇대가 순식간에 꺼지고, 송출 담당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였다.
《사장님, 송출이 끊기였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관중석의 함성은 여전하였지만, 화면 저편 대화창은 그 순간부터 새까맣게 멈추어있었다.
나는 곧바로 조정실로 뛰여들어갔다. 기술진은 이미 예비 전원선을 끌어오며 진땀을 흘리고있었고, 나는 우선 무대우의 성원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일렀다. 관중석의 흥을 깨지 않는것이 먼저였다.
《현장은 문제없다. 온라인만 끊긴거니까 진행은 그대로 가자.》 나는 그렇게 지시를 내리며 무대감독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대우의 성원들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채 다음곡을 이어갔고, 전시장안의 함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십분 남짓한 시간이 나에게는 한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기술진은 새 멀티탭을 련결하고 배선을 다시 잡느라 손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조정실 한켠에 서서 화면이 다시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몇번이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화면 한구석에 대화창 글자가 다시 흘러오르기 시작하였을 때, 조정실안에서는 낮은 탄성이 새여나왔다. 십분 동안 자리를 지켰던 시청자들이 되돌아오는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어깨의 힘을 풀수 있었다.
대화창이 다시 살아나자마자 후원 알림신호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하였다. 《끊겨도 안 나갔음》, 《별일 없이 잘 끝나라》 하는 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짧은 글줄들을 읽으며 뭉클함에 목이 메였다.
나는 후날 이 십분을 두고 성원들앞에서 짐짓 엄숙하게 《우리 회사 력사상 가장 아슬아슬하였던 십분》이라 이름 붙이곤 하였다. 시월의 그 소동을 두고 붙였던 이름과 나란히, 그해에는 그렇게 두개의 력사적인 십분과 오전이 나란히 새겨지게 되였다.
다시 무대로 돌아오면, 공연은 애초에 예정하였던 세시간을 훌쩍 넘어서고있었다. 진행표우에는 분명히 세시간짜리 순서가 적혀있었으나, 곡과 곡 사이 관중과 주고받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시간표는 점점 무색해져갔다.
나는 무대 옆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세시간이면 넉넉하다고 큰소리를 쳤던 나 자신을, 나는 그날 밤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반성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이날 공연은 예정한 세시간을 훌쩍 넘긴 세시간 사십분 남짓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었다. 나는 그 진행표를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며, 관중도 성원들도 그 누구 하나 시간이 아깝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무대우에서는 그사이 여러 성원들의 몫이 저마다의 빛갈로 지나갔다. 그 자리에 칸나동지는 없었다. 그가 있었더라면 저 자리에서 어떤 빛을 냈을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갔으나, 나는 이내 눈앞의 무대로 생각을 돌리였다.
유니동지는 노래 사이사이 마이크를 잡고 관중에게 말을 건네였다. 《오늘 여기 서있는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근데 진짜 좋아요!》 그 말에 관중석에서는 웃음섞인 박수가 터지였다.
시부키동지가 한곡을 끝내고 숨을 고르는 사이, 옆에 있던 리코동지가 장난스레 부채질을 해주는 몸짓을 취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석에서도 정겨운 웃음이 새여나왔다.
마시로동지와 히나동지는 나란히 선 순서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작을 맞추었다. 몇주간 밤늦도록 되풀이하던 그 련습이 헛되지 않았음을, 나는 무대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리제동지는 진행 사이사이 침착한 목소리로 다음 순서를 안내하며 자리를 지켰다. 대본을 손에 쥔채 몇번이고 되뇌던 그 모습이, 실제 무대우에서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빛을 발하였다.
린동지와 나나동지는 이중창 순서에서 서로 눈을 맞추며 화음을 쌓아올렸다. 두 목소리가 겹쳐지는 순간마다 관중석에서는 낮은 탄성이 새여나왔다.
타비동지는 자신의 순서에서 몇번이고 련습하였던 손동작을 조심스레, 그러나 자신있게 펼쳐보였다. 나는 그 손끝을 무대 옆에서 지켜보며, 이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를 헤아리고도 남았다.
후야동지는 낯선 무대임에도 어느새 제집처럼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고있었다. 함께 무대를 나눈 성원들도 그런 후야동지를 향해 진심어린 손뼉을 보내주었다.
나는 무대 옆에서 그 모든 순서를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이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문을 열고 이 회사에 들어와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였다. 아홉 갈래, 열 갈래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이 오늘 하나의 궤적으로 모여든것이였다.
후날 어느 매체는 이날의 공연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K-버추얼 IP가 오프라인 무대에서도 수익을 만들어낼수 있다는것을 보여준 사례.》 나는 이 기사를 며칠 뒤 사무실 화면으로 읽으며, 짐짓 엄숙한 얼굴을 하고 성원들앞에서 그 문장을 소리내여 읽어준 일이 있다.
《우리가 력사적 사례가 되였단다.》 나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고, 성원들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웃자고 한 말이였지만, 나는 그 문장속에 담긴 뜻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것을 마음 한구석에 새겨두었다. 수치와 평가로 남는것도 값지지만, 나에게는 그날 관중석을 채웠던 얼굴들 하나하나가 그보다 더 무거운 값어치로 남아있다.
여담이지만, 그날 우리가 무대에 오른 곳이 정확히 몇번 전시장이였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자료마다 말이 엇갈린다. 아홉번홀이라는 기록도 있고 열번홀이라는 기록도 있으니, 정작 그 자리에 서있었던 나조차 지금 와서는 어느 쪽이 맞는지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얼굴들과, 무대우에서 나란히 빛나던 얼굴들만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력사라는것이 본디 자잘한 수자보다 그 순간의 공기로 더 오래 남는 법인가보다.
서른한곡째 순서가 가까워질수록 관중석의 함성도, 무대우의 열기도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듯하였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보다 더 큰 보람이 또 있을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다.
나는 무대 옆에 선채로 문득 몇해전 좁은 방에서 마이크 하나를 놓고 인사를 건네던 그 시절을 떠올리였다. 그때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 사이에는 실로 아득한 거리가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 거리를 만든것은 어느 하루의 요행이 아니라, 밤늦도록 이어진 련습실의 불빛과, 시월의 소동을 딛고 일어선 다짐과, 이날 십분의 위기를 함께 넘긴 손끝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것이였다. 나는 그 사실을 무대 옆에서 새삼 되새기였다.
예정된 순서의 마지막곡이 가까워지자, 나는 무대감독의 신호를 기다리며 진행표의 마지막 줄에 손끝을 올려놓았다. 서른한번째 곡의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관중석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가 되여 몸을 흔들고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무대 옆에서 지켜보며, 오늘 하루만큼은 이 회사가 걸어온 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것을 온몸으로 실감하였다.
마지막곡의 가락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나는 무대 옆에서 성원들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저마다 다른 시절에 이 회사의 문을 두드렸던 얼굴들이, 오늘만은 하나의 빛으로 나란히 서있었다.
노래가 끝나갈무렵, 나는 이 하루를 무슨 말로 마무리지어야 할지 오래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땅한 말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고, 다만 가슴 한켠이 뻐근하게 차오르는것만을 느끼였다.
마지막 음이 잦아들고 무대우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짧은 정적 사이로, 전시장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함성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그 함성이 무엇을 향해 커져가고있었는지는, 이 회고록의 다음 자리에서 마저 적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