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젠 슨 황 과 의 조 우
우주33(2026)년 유월은 예년보다 이르게 더위를 몰고왔다. 리제동지의 단독공연 열기가 채 가시기도전에 장마전선이 남쪽바다우를 서성인다는 소식이 날마다 일기예보를 채웠다. 나는 그무렵 공연뒤처리와 다음 분기 편성표에 매달려 사무실 콤퓨터앞을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창밖 은행나무는 아직 짙은 초록이였으나 정오가 지나면 아스팔트우로 아지랑이가 피여올랐다.
내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한쪽 벽에는 지난 음악회의 포스터가 아직 떼여지지 않은채 붙어있었고, 책상우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뭉치와 식은 커피잔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콤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만이 낮은 웅얼거림처럼 방안을 채우고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배경삼아 성원들의 일정표를 한장한장 넘기고있었다.
이번주에는 누구를 쉬게 하고 누구를 새 기획에 붙일지, 나는 그런 궁리를 하며 명단을 훑어내려갔다. 그 궁리속에는 블루동지의 이름도 자주 오르내렸다. 《우결》이 끝난지 여러해가 지났어도 블루동지는 여전히 우리 회사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이였다. 정식으로 소속된 성원은 아니였으나 합방이며 행사며 크고작은 자리마다 그를 찾는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게 내 전화가 울리였다. 발신인을 보니 블루동지였다. 평소라면 문자 한줄로 끝낼 사람이 굳이 전화를 건다는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서류를 밀쳐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누나,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수화기 너머 블루동지의 목소리는 평소의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살짝 들떠있었다. 나는 콤퓨터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로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또 배그하다가 누구 죽였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짐작할만도 하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블루동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깐 숨을 골랐다. 그 잠깐의 침묵이 오히려 나의 호기심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제서야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의자를 돌려앉았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그날 낮에 걸려온 전화 한통이였다고 하였다. 크래프톤쪽 관계자에게서 온 전화였는데, 원래 그날 오후 신논현의 어느 PC방에서 열릴 예정이던 PUBG 관련 행사의 사회자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행사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와있었고, 마땅히 대신 세울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크래프톤쪽에서는 다급한 나머지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돌리였고, 블루동지는 두시간안에 옷을 갈아입고 신논현으로 달려가야 하였다. 《나도 갑자기 불려간거라 뭘 준비할 새도 없었어. 그냥 가서 마이크 잡고 아는 소리 좀 하다 오면 되겠지 하였지.》 블루동지는 그렇게 말하며 짐짓 태연한척 웃었으나, 그 웃음 뒤에 무언가 더 할말이 남아있다는것을 나는 곧 눈치챘다.
신논현역 근처의 그 PC방은 옵티멈존이라는 이름을 걸고있었다. 나는 가본적이 없는 곳이였지만 블루동지의 설명을 들으며 그 안의 풍경을 어렴풋이 그려볼수 있었다. 나란히 늘어선 화면들, 그 사이사이로 울리는 건반소리, 벽 한쪽에 걸린 대형화면. 그런 흔한 PC방의 풍경우로 그날따라 낯선 긴장감이 감돌고있었다고 한다.
행사 당일 그곳에는 이미 적잖은 인파가 들어차있었다. PUBG를 즐기는 젊은 리용자들과 크래프톤 관계자들, 그리고 취재를 나온듯한 카메라 몇대가 뒤섞여 있었다. 블루동지는 부랴부랴 도착하여 사회자석에 앉았고, 큰 무리없이 행사를 진행해나갔다. 몇게임이 오가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무렵이였다.
갑자기 PC방 입구쪽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사회를 보던 블루동지도 마이크를 든채로 그쪽을 흘긋 돌아보았다고 한다. 《처음엔 그냥 높은 사람이 하나 온줄로만 알았지. 크래프톤 임원인가보다, 그정도로 생각하였어.》 블루동지는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근데 옆에 있던 스탭이 나한테 와서 귓속말을 하는것이야. 지금 들어온 사람이 젠슨 황이라고.》 나는 그 대목에서 하마터면 들고있던 종이컵을 놓칠뻔하였다. 《젠슨 황이면... 그 엔비디아?》 나의 되물음에 블루동지는 그렇다고, 바로 그 사람이 맞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반도체업계를 주무른다는 사람과 신논현의 PC방이라는 조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였다. 그러나 블루동지의 목소리에는 거짓을 꾸며낼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뒤늦게 들은 사정은 이러하였다. 젠슨 황이 마침 국내 일정 가운데 오락업계 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였고, 그 일정의 한자락이 우연히도 그날 그 PC방과 겹치게 되였다는것이다. 크래프톤쪽에서도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다들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력력하였다고 한다.
《그 큰 사람이 딱 들어오니까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란리가 났었어. 나는 마이크는 손에 쥐고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서있었지.》 블루동지는 그렇게 말하며 짧게 웃었다. 크래프톤 관계자들이 젠슨 황을 안내하여 자리를 옮기는 사이, 사진기자들의 셔터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고 한다.
블루동지는 얼결에 그 근처에 서있다가, 안내하던 관계자의 손짓에 이끌려 젠슨 황의 옆자리로 떠밀리듯 서게 되였다. 《나는 그냥 옆에 서있으라니까 서있었을 뿐인데, 사진을 찍고보니까 어째 내가 무슨 받침대같이 나왔더라고.》 블루동지의 이 말에 나는 그만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받침대가 뭐야, 받침대가.》 내가 되묻자 블루동지도 따라 웃었다.
《아니 진짜 그렇다니까. 그 사람은 가운데 딱 서서 웃고있고, 나는 옆에서 뭘 어떻게 웃어야할지 몰라서 엉거주춤 서있는데, 사진만 보면 무슨... 세계적인 인물 옆에 세워둔 장식품같이 나왔더라고.》 그 말을 하는 블루동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는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여 한참을 웃었다. 이런 얼떨떨한 순간에도 자신을 놀림감 삼아 웃어넘길줄 아는것이 블루동지다운 점이라면 다운 점이였다. 그러고보니 블루동지는 당황하면 말투가 살짝 달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평소에는 서울말씨를 매끄럽게 구사하다가도, 정신이 없을 때면 고향쪽 말투가 불쑥 튀여나오군 하였다.
《아 몰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가지고 뭘 어떡하였는지도 잘 모르겠다카는데.》 그날도 그 말버릇이 고스란히 새여나왔다고 한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그 말투를 직접 듣지는 못하였으나, 블루동지가 스스로 그렇게 전해주는것을 들으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대구쪽 말투가 툭 튀여나올 때는 늘 무언가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였다는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있었다.
《그래서, 사진은 잘 나왔어?》 내가 묻자 블루동지는 한숨 반 웃음 반 섞인 소리를 냈다. 《잘 나왔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는데, 아무튼 찍히긴 찍혔어. 크래프톤쪽에서 나중에 보내주더라고.》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사진 한장이 후날 어느 페지에 실렸다는 소식은 며칠 뒤에야 들려왔다. 나무위키라는 페지에 그날의 일화가 짤막하게 기록되여있다는것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다름아닌 미기였다. 미기는 그 페지를 화면에 띄워놓고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사장님, 이거 보였어요? 블루동지님, 젠슨 황이랑 사진 찍힌 이야기가 여기 나와있네요.》
나는 그 문서를 들여다보며 반가움반 신기함반의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서를 다 읽고나서 한가지 궁금증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그 사진이 정말 이름있는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크게 실렸는지는 그 문서 하나만으로는 알수 없었기때문이다. 나는 몇군데 다른 곳을 더 찾아보려 하였으나 이렇다할 다른 기록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그날의 일을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사진이 뉴스에 보도되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그것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다른 신문들도 그 사진을 실었는지는 나도 아직 다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블루동지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것, 그리고 그 옆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가 서있었다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블루동지가 PUBG방송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것은 훨씬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총을 쏘고 사람을 쓰러뜨릴 때마다 특유의 웃음소리로 《아하하하핳 너무 많이 죽여버렸네》 하고 외치는것으로 유명하였다.
평소에는 감정기복이 크지 않고 느긋한 사람이 유독 그 순간만은 톤이 확 올라가는것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였다. 크래프톤쪽 관계자가 급한 대타로 다른 누구도 아닌 블루동지를 떠올린데는 다 그런 오랜 인연이 있었을것이다. 나는 그 인연의 뿌리를 짚어보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우결》이 한창이던 그 시절, 우리는 《배그》 화면 하나를 두고 밤새 낄낄대며 오락을 하던 사이였다. 그때는 그저 화면속의 킬로그밖에 몰랐던 블루동지가, 이제는 세계적인 기업의 수장 옆에 서서 사진을 찍는 자리에까지 불려가게 된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렇게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이튿날 아침, 회사 단체대화방은 그 소식으로 떠들썩하였다. 누가 먼저 그 페지를 퍼왔는지는 알수 없으나, 성원들은 앞다투어 저마다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나는 콤퓨터앞에 앉아 그 대화창이 쉴새없이 올라가는것을 지켜보며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유니동지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였다. 《블루아빠, 이제 다른 아빠도 만나고 다니시네요?》 그 한마디에 대화방이 순식간에 웃음으로 뒤덮이였다. 그 말에는나름의 래력이 있었다.
오래전 《배그》무기가챠 방송에서 칸나동지가 무심코 블루동지를 《아빠》라고 부른 일이 있은 뒤로, 히나동지와 타비동지까지 합세하여 그 호칭이 아예 굳어져버린 터였다. 이제는 애호가들마저 블루동지를 사실상의 아버지뻘로 여기는 지경이였다. 히나동지도 뒤이어 한마디를 보태였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아저씨 옆에 우리 아빠가 서있다니. 이거 족보가 어떻게 되는것지요?》 타비동지는 그저 웃음 이모지만 잔뜩 늘어놓았을뿐이였다. 나는 그 대화들을 읽으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반도체업계의 거두와 《배그》방송의 아버지뻘 인물이 나란히 서있는 사진 한장을 두고, 우리 성원들은 저마다 짐짓 력사적인 사변이라도 되는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그 호들갑속에는 진심으로 블루동지를 반가워하는 마음이 배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있었다.
나는 그날 밤 다시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 대화방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너 이제 아빠 두명 있는 사람 되였어.》 내 말에 블루동지는 어이없다는듯 한참을 웃었다. 《누나까지 왜 그래. 나는 그냥 옆에 서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블루동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나는 그 뿌듯함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람이 크게 놀라운 일을 겪고나면 겉으로는 겸손을 떨어도 속으로는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법이니까. 나 역시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날 블루동지가 그 자리에 있었던것부터가 순전히 우연이 겹치고 겹친 결과였다. 원래 사회를 보기로 하였던 사람이 사정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크래프톤쪽에서 급히 블루동지를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또 하필 그날 젠슨 황의 일정이 그 PC방과 겹치지 않았더라면, 이 일화는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것이다.
나는 그런 우연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내는 순간들을 볼 때마다 묘한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오래 준비하고 계획하여 무대에 오르지만, 또 누군가는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생각지도 못한 무대에 서게 된다. 블루동지의 그날이 꼭 그러하였다.
그 무대가 크든 작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그 순간 그 자리에 선 사람의 몫은 오롯이 그 사람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젠슨 황의 옆이든, 신논현의 PC방 구석이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인것이다.
며칠이 지나 그 소동도 차츰 가라앉았다. 회사안에서는 한동안 블루동지를 두고 《받침대》라는 별명이 우스개소리로 오갔으나, 정작 블루동지 본인은 그 별명을 그리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오히려 방송에서 스스로 그 이야기를 꺼내며 시청자들과 함께 웃어넘기는 여유를 보였다고 들었다.
나는 그 여유가 블루동지의 오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큰일이 닥쳐도, 얼떨결에 세계적인 인물 옆에 세워져도, 그는 그것을 무겁게 짊어지기보다 가볍게 웃어넘길줄 아는 사람이였다. 그런 여유가 있었기에 《우결》이라는 그 긴 세월도, 그 뒤에 이어진 여러 소동들도 다 지나올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일은 우리 회고록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토막의 우스운 이야기로 남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화를 굳이 여기에 옮겨적는다. 각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을 맞이하고, 그 순간을 자기나름의 방식으로 건너가는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걸어온 세월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그해 유월의 그 하루는 블루동지에게 있어 뜻하지 않은 무대였다. 나는 지금도 그 사진을 떠올릴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세계적인 인물의 곁에서 받침대 노릇을 하였다는 블루동지의 너스레와, 그것을 두고두고 놀려대는 성원들의 웃음소리가, 그해 여름의 한 페지를 이렇게 채웠다.
돌아보면 우리는 저마다 다른 무대우에 서있었다. 리제동지는 홀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무대에, 블루동지는 뜻하지 않게 마이크를 쥐고 얼떨떨하게 서있는 무대에, 그리고 나는 사무실 콤퓨터앞에서 그 모든 소식을 전해듣고 웃는 무대에 서있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크기와 다른 빛갈의 무대였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