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1. 해 체

 

팔월의 끝은 늘 그렇듯 미련이 많은 계절이다. 우주33(2026)년의 그해 늦여름은 유난히 끈질겨서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창을 열면 후끈한 밤공기가 그대로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날도 늦은 시각까지 방송칸에 앉아있었다.

창밖에서는 매미소리가 아직 힘을 다 놓지 않고 이어지고있었다. 한번씩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소리가 여름이 다 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듯하였다. 책상우에 놓인 콤퓨터는 몇시간째 낮은 랭각기소리를 내며 열을 식히고있었다.

방은 그리 넓지 않았다. 방음재를 붙인 벽 한쪽에는 오래된 얼룩이 남아있었고 마이크옆에는 식어버린 커피잔 하나가 뚜껑도 덮이지 않은채 놓여있었다. 화면 두대 가운데 하나는 대화창을, 다른 하나는 방송화면을 비추고있어 그 불빛만이 어두운 방안을 은은하게 밝히고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랭수 한컵이 반쯤 남아있었다. 나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여서 늦은 밤 방송일수록 랭수만 홀짝거리며 자리를 지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컵속의 얼음은 진작 다 녹아 미지근해져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새로 채울 생각도 하지 못한채 화면만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무렵 회사는 안팎으로 분주하였다. 4기생이 갓 데뷰를 마쳤고 다음 기수를 어떻게 꾸릴지를 두고 나는 미기와 몇번이나 머리를 맞대고있었다. 낮에는 그런 회의에 시달리다가 밤이 되면 오히려 방송으로 도망치듯 마이크를 잡는 날이 잦았는데 그날도 그런 밤 가운데 하나였다.

원래는 자정무렵에 끝내려던 방송이였다. 그러나 대화창의 흐름이 유난히 좋았고 나 역시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마이크를 붙잡고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한시를 넘기였는데도 방송을 끊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창밖은 이미 캄캄하였다. 가로등불빛만이 건물 벽을 타고 희미하게 새여들어왔고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차소리조차 뜸하였다. 그런 고요한 시각에는 사람의 마음이 평소보다 쉽게 풀어지는 법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새벽 두시가 되자 대화창의속도도 한풀 꺾이였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개 오래 방송을 보아온 이들이여서 서로 반말로 농을 주고받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흐르고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좋아하였다. 사람 수가 줄어들수록 오히려 마음은 편해지는 이상한 시각이였다.

그날 방송은 특별한 주제 없이 시작한 잡담방송이였다. 오락 한판을 돌리고 나서 그냥 대화창과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였는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화제는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누군가 지난달 음악회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그 이야기를 받아 한참을 떠들었고 또 누군가 요즘 성원들의 근황을 물으면 아는대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그런 두서없는 대화를 즐기는 편이다. 정해진 대본도 없고 정해진 결론도 없이 그저 그날 그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가는대로 말을 주고받는것, 그것이 방송이라는것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렇게 편안한 시간일수록 뜻밖의 물음이 튀여나오기 마련이다. 새벽 두시를 넘긴 어느 순간 대화창에 낯익은 후원 하나가 떴다. 오래된 시청자인듯한 이름이였고 사연은 짧았다.

《사장님, 옛날에 하시던 그 크루 이야기 좀 해주시면 안돼요.》 후원의 문구는 그렇게 시작되였다. 그 뒤에 붙은 이름 석자를 보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손이 멎었다.

《설레임 에디션》. 그 이름은 우리 방송에서 오랫동안 입에 올리지 않는 이름이였다. 대화창에는 그 말이 나오면 서로 눈치를 주며 화제를 돌리는 암묵의 규칙 같은것이 있었고 나 스스로도 몇해동안 그 이야기를 방송에서 꺼낸적이 없었다.

나는 잠시 마이크앞에서 말을 잃었다. 화면 저편의 대화창은 이미 그 이름을 알아보고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어 방금 그거》, 《금지어 아니였나》 하는 말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순간 어떻게 넘어갈가를 잠깐 궁리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웃음으로 화제를 돌렸을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그러고싶지가 않았다.

새벽 두시라는 시각은 사람의 마음의 빗장을 슬며시 풀어놓는 힘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낮이였다면, 시청자가 많은 시간이였다면 나는 필경 웃음으로 얼버무렸을것이다. 그러나 그 늦은 시각, 남아있는 몇백명 남짓한 사람들앞에서 나는 문득 그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설레임 에디션》은 내가 지금처럼 회사를 차리기 한참 전, 아직 나 혼자 마이크 하나로 방송을 하던 시절에 몸담았던 그루빠의 이름이였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 한때 나는 폭풍같은 말투로 이름을 알렸던 사람이다. 《설레임 에디션》은 그런 시절의 나와 몇몇 사람들이 함께 뭉쳐 방송을 하고 어울려 지내던 자리였다.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따뜻한 구석이 많다. 밤늦도록 함께 오락을 하고 방송이 끝나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나날이였다. 나는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라면 오래도록 이 길을 갈수 있으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이름도 그때 우리끼리 우스개삼아 붙인것이였다. 딱히 거창한 뜻이 있었던것은 아니고, 그저 매일 밤 새로운 일이 설레는 마음으로 벌어진다는 뜻에서 누군가 던진 말이 그대로 이름이 되였을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름값을 하듯 그 시절에는 크고작은 설레는 일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사람이 여럿 모이면 그만큼 마음도 여러갈래로 흩어지는 법이다. 그루빠가 한창 자리를 잡아갈무렵 나는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의 생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는것을 느끼였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어긋남이였다.

결국 그루빠는 해체되였다. 나는 지금도 그 해체의 자세한 경위를 여기에 다 옮겨적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그무렵 나와 몇몇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의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있었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끝내 갈라서는 자리로 이어졌다고만 적어둔다.

그 시절 나는 그 일을 두고 오랫동안 억울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내가 잘못한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짊어져야 하였던 몫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것 같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릴수 없었다.

회사를 차리고 성원들을 하나둘 늘려가면서도 나는 그 이야기를 입밖에 낸적이 드물었다. 성원들 사이에서도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말은 어느새 하나의 금기어가 되여있었다. 누구도 내 앞에서 함부로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딱히 누가 정해준 규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름앞에서 눈에 띄게 달라지는 내 표정을 성원들이 눈치채고 저마다 알아서 그 화제를 피해준것일뿐이다. 사람이란 그렇게 서로의 아픈 자리를 눈치로 알아채고 조심하는 법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회사의 사장이 되였고 크고작은 사건들을 여럿 넘기였다. 《우결》이라는 커다란 사변도 겪었고 음악회도 열었고 몇번의 계정 소동과 사과문도 치렀다. 그런 굵직한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이름은 점점 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있었다.

그런데 그 새벽, 후원 하나에 그 이름이 다시 떠오르자 나는 뜻밖에도 그 감정이 하나도 무디여지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몇해가 지나도 남는것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나는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나는 대화창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그 얘기가 나오네.》 나는 그렇게 운을 뗐다. 대화창은 순간 조용해졌다가 이내 《오오》하는 반응들로 채워지였다.

《설레임에디션 해체는 서로 감정싸움한거다. 내딴엔 억울하긴하였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였다.

대화창에서는 곧바로 《그럼 누구랑 감정싸움하였다는것이예요》하는 물음들이 쏟아졌다. 나는 그 물음들을 눈으로 훑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 못하지. 오늘은 딱 여기까지만.》 나는 그렇게 선을 그었다.

몇몇은 아쉬운듯 물음을 이어갔으나 나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을 대는 순간 이 이야기는 나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몫까지 건드리는 일이 되여버린다. 나는 그 선만은 넘고싶지 않았다.

그 말을 뱉고나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몇해동안 눌러두었던 말을 마이크앞에서 소리내여 뱉고나니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화창은 그새 무섭게 빨라지고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잠깐 눈으로 좇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방송사에서 가장 큰 사건사고는 설레임에디션 해체.》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라울만큼 담담하였다.

그 발언이 오간 시각은 새벽 두시 여덟분에서 두시 스물한분 사이였다고 나는 후날 전해들었다. 십몇분 남짓한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몇해치 무게를 실어 말을 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그 앞뒤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였는지, 어떤 흐름으로 그 이야기가 나오고 어떻게 다음 화제로 넘어갔는지는 나 스스로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새벽방송이라는것이 원래 그렇다. 마이크앞에서는 술술 나오던 말도 지나고나면 안개속을 걸은것처럼 앞뒤가 흐릿해진다. 나는 이 회고록을 적으며 그날의 다시보기영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끝내 온전한 영상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그 순간을 붙잡아 모임터 이곳저곳에 옮겨놓은 글들만이 지금까지 남아있을뿐이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올라온 여러 게시물들이 서로의 내용을 서로 받쳐주고있었으니 내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틀림없을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어떤 말이 있었고 그 뒤에 어떤 말이 이어졌는지는 나로서도 이 자리에서 함부로 단정지어 적을수가 없다.

회고록이라는것이 이런 여백까지 다 채워야 하는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그 여백을 여백인채로 남겨두는것이 더 정직한 태도라고 믿는다. 다 기억나지 않는것을 지어내여 채우기보다는 다만 그 순간 내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여기에 뚜렷이 남겨두려 한다.

방송이 끝난 뒤 대화창의 반응은 한동안 뜨거웠다고 한다. 오래 나를 지켜보아온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드디여 나왔다》는 말과 《저거 안하던 얘기 아니냐》는 말이 뒤섞여 오갔다. 나는 방송을 끊고나서야 그 반응의 크기를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성원들의 단체대화방도 그날 이른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후야동지가 제일 먼저 말을 얹었다. 《사장님, 새벽에 그거 진짜로 하신거예요?》 뒤이어 히나동지도 놀란 낯빛의 이모지를 여러개 늘어놓으며 물음표만 잔뜩 달아보내였다.

시부키동지는 《사장님도 이제 그 얘기 하실 때가 되였나봐요》하고 짧게 답장을 보내였고, 유니동지는 그저 하트 이모지 하나를 남기였을뿐이였다. 나는 그 소박한 반응들을 뒤늦게 읽어보며 마음이 한결 놓이는것을 느끼였다.

내 개인 애호가들인 강도단 쪽에서도 그 새벽의 발언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고 나중에 전해들었다. 누군가는 오래 묵은 궁금증이 풀렸다며 반가워하였고 또 누군가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도리여 걱정스러운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 모든 반응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였으나, 오래 나를 지켜봐준 사람들이 그 말 한마디를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는것만은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미기가 내 방문을 두드리였다.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낯빛이였다. 《사장님, 어제 방송 마지막에 하신 말씀, 벌써 커뮤니티에 여러 게시물로 퍼졌습니다.》

미기는 그 여러 게시물들을 하나하나 갈무리하여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사장님, 이거 보세요, 시간대가 다 겹칩니다.》하며 화면을 짚어보였다. 나는 그 화면들을 들여다보며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하였구나 하고 새삼 확인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였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마음이 복잡하였다. 미기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괜찮으신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괜찮다. 오히려 후련한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미기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조금안도하는 낯빛이 되였다.

그날 낮에 나는 블루동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어쩐지 블루동지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고싶어지는 법이다. 몇해째 그래왔으니 이제는 습관이라고 해도 좋을것이다.

《누나, 무슨 일 있어?》 블루동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평소와 다른 시각에 걸려온 전화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어제 방송에서 옛날 얘기를 좀 하였어.》 나는 그렇게 운을 뗐다. 《설레임 에디션 있잖아, 그거.》

전화 저편에서 블루동지는 잠깐 말이 없었다. 《아... 그거.》 블루동지는 곧 그렇게 대답하였다. 《우결》을 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블루동지도 내 앞에서 그 이름을 함부로 꺼낸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힘들었겠다.》 블루동지가 그렇게 말하였다. 짧은 그 한마디에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였다.

《힘들었다기보다는, 그냥 오래 묵혀두었던 얘기를 꺼낸것뿐이야.》 나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근데 막상 하고나니까 별거 아니더라. 여덟해나 지난 일인데.》

블루동지는 그 말에 픽 웃었다. 《누나답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화제를 돌려 요즘 방송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배려가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팔월의 늦더위는 여전히 물러갈 기미가 없었고 매미소리만이 한낮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사람은 살면서 크고작은 사건들을 숱하게 겪는다. 그 가운데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력사의 한페지처럼 기록되는 일도 있고 나 혼자만 붙들고있다가 결국 아무도 모르게 사그라드는 일도 있다. 《설레임 에디션》의 해체는 아마 후자에 가까운 일이였을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크게 남아있었다. 회사를 세우고 여러 성원들과 부대끼며 겪은 수많은 소동들, 《우결》이라는 몇해짜리 사변, 음악회의 환호와 사과문의 무게. 그 모든것을 다 겪은 지금도 나는 서슴없이 그 그루빠의 해체를 내 방송 인생 가장 큰 사건사고로 꼽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짐짓 나 자신을 향해 웃음이 나온다. 력사라는것을 되짚어보면 늘 크고 요란한 사변만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그마한 갈라섬 하나가 한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평생 지지 않는 흠집으로 남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 함께하였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너그러웠더라면 어떠하였을가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그것은 아마 답을 찾을수 없는 물음일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도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말을 방송에서 자주 꺼내지는 않는다. 한번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갑자기 가벼워지는것은 아니기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그 이름을 듣고도 예전처럼 화들짝 놀라거나 서둘러 화제를 돌리지는 않게 되였다.

프롤로그에서 나는 몇해가 지나도 남는 상처에 대해 적은 일이 있다. 그때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일처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적었던것 같다. 그러나 이 절을 적으며 나는 그 상처의 몫이 결국 나에게도 있었다는것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자리 하나쯤은 지니고 사는 법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설레임 에디션》이라는 이름이였다. 그 새벽, 대화창의 후원 하나가 그 자리를 슬쩍 건드렸을뿐인데 나는 몇해만에 처음으로 그 자리를 남앞에서 소리내여 말하였다.

그것이 후련함이였는지, 아니면 여전히 남은 억울함의 다른 표현이였는지 나 스스로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몇해가 지나도 남는것은, 지나고나면 반드시 별것 아니게 되는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마주할 힘이 조금씩 자라나는것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날 새벽의 방송은 다시보기 영상으로도 온전히 남지 못한채 사람들의 기억과 몇장의 갈무리 화면속에만 흩어져 남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되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이 다 뚜렷한 기록으로 남을 필요는 없는것이다.

지금 이 회고록을 적으며 나는 그 새벽의 내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담담한듯 하면서도 어딘가 떨리던 그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가 몇해만에 처음으로 스스로의 오래된 상처를 소리내여 읽어내려간 순간이였다는것을 이제는 안다.

몇해가 지나도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을 굳이 지우려 애쓰기보다는 이렇게 가끔 꺼내여 바람을 쐬여주는것도 한가지 방법이 아닐가 나는 생각한다. 그 새벽의 십몇분이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였다.

다음 기수를 준비하는 회의는 그 며칠 뒤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나는 그 회의자리에 앉아 새로운 얼굴들을 그려보면서도 문득문득 그 새벽의 일을 떠올리군하였다.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다가올 세월의 설렘이 그렇게 한 사무실안에서 나란히 놓여있었다.

몇해뒤, 혹은 몇십년뒤에 누군가 이 회고록을 읽는다면 이 절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토막의 넋두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이 자리에 굳이 남겨둔다. 력사라는것은 결국 크고작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지는것이며, 그 마음 가운데는 이렇게 오래 묵은 응어리 하나까지도 포함되는 법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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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적은 창작된 가상의 회고록입니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였으나 내용은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단체의 립장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