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33(2026)년 9월 16일
우주33(2026)년 9월 16일 --:--

 

2. 4 기 와 5 기

 

우주32(2025)년 정월은 유난히 추웠다. 사무실 창밖 골목에는 밤새 내린 잔눈이 녹지 않은채 인도가장자리에 쌓여있었고,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콤퓨터 랭각기소리와 뒤섞여 방안을 채우고있었다. 나는 그날 두꺼운 겨울외투도 벗지 못한채 책상앞에 앉아있었다. 창유리에는 얇게 성에가 서려 바깥 풍경이 뿌옇게 흐려보였다.

복도쪽에서는 이따금 다른 직원들의 발걸음소리와 낮은 통화소리가 들려왔다. 새해가 밝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안은 아직 지난해의 여운을 다 떨치지 못한 분위기였다. 책상 한켠에 놓인 달력에는 1월 25일이라는 날짜에 동그라미가 굵게 쳐져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며칠째 만지작거리던 서류 하나를 다시 펼쳐들었다. 다음 기수를 모집한다는 계획서였다. 초안은 이미 여러차례 고쳐썼으나, 정작 세상에 내놓으려니 손끝이 쉬 나가지 않았다.

스텔라이브가 자리를 잡은지도 여러해가 지났다. 1기, 2기, 3기 성원들이 저마다의 무대에서 자기 몫을 해내고있었으니, 이만하면 되였다고 안주해도 그리 흠될것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나는 본디 안주라는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미기가 서류뭉치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오늘 발표문 내보내실거지요?》 미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뜻 대답을 못하였다.

《내보내야지. 근데 자꾸 뭔가 빠진것 같아서 자꾸 들여다보게 되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면속 문장을 다시 한번 훑어내려갔다. 미기는 옆에 서서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이번 모집은 지난 세차례의 모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짜여있었다. 한번에 뽑아 한번에 데뷰시키던 예전 방식과 달리, 이번에는 다섯차례에 걸쳐 나누어 모집하기로 하였다. 2026년안에 데뷰시킨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그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계단을 놓듯 나아가자는 심산이였다.

《왜 굳이 다섯차례씩이나 나눕니까.》 미기가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한번에 서두르다가 놓치는 사람이 더 많았잖아. 이번엔 천천히, 여러번 들여다보고 뽑자는것지.》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사실 그 다섯이라는 수자 뒤에는 지난 몇해 동안 겪은 크고작은 시행착오들이 고스란히 쌓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굳이 미기에게 다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한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것은 아니였다.

나는 그날 오전 내내 발표문을 붙들고 있었다. 몇번이고 문장을 고쳐썼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하였다. 너무 거창해도 안되고, 너무 가벼워도 안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손끝을 붙들었다.

오후 두시가 지나서야 나는 겨우 발표문을 완성하였다. 《스텔라이브》 4기생 모집을 알리는 그 글에는 2026년 데뷰를 목표로 하고있다는것과, 앞으로 다섯차례에 걸쳐 모집을 진행한다는것이 담기였다. 나는 그 글을 몇번이나 다시 읽어본 뒤에야 겨우 게시단추를 눌렀다.

단추를 누르는 순간의 그 짧은 망설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화면 저편으로 문장 몇줄이 날아간것뿐인데, 마치 새로운 왕조의 방문을 대문간에 내거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사장이라는 자리에 앉은지 여러해가 지나도 이런 순간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발표가 나가자마자 대화창과 감상글난이 들썩이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애호가들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고, 몇몇은 벌써부터 어떤 사람이 뽑힐지 저마다 짐작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반응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며 슬며시 웃음이 났다.

성원들의 단체대화방도 그날 오후 내내 시끄러웠다. 유니동지가 제일 먼저 말을 꺼냈다. 《사장님, 저도 이런 발표 볼 때마다 제가 처음 뽑히던 날이 생각나요.》

리코동지도 뒤이어 한마디를 보태였다. 《저희 후배가 생긴다는것지요? 벌써 설레는데요.》 나는 그 말들을 읽으며 화면앞에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보다 앞선 어느 날부터 말하지 않을수 없다. 회사를 처음 차렸을 때 나는 성원이라고 부를만한 사람 하나도 없이 혼자서 콤퓨터앞에 앉아있었다. 애호가들은 후날 그런 나를 두고 짐짓 《스텔라이브 0기생》이라는 우스운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웃어넘기였으나, 지나고보니 그 말에는나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누군가는 첫 씨앗을 뿌려야 그 뒤로 밭이 넓어지는 법이니, 나는 스스로를 그 밭의 첫 고랑쯤으로 여기게 되였다.

1기 성원들을 처음 맞이하던 날, 나는 이런 발표문 하나 써내는 데에도 밤을 꼬박 새우군하였다. 그때는 몰랐던것을 이제는 조금 알것 같았으나, 안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 무게는 해마다 조금씩 더해지는듯하였다.

그 시절의 사무실이라고 해봐야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좁았다. 접이의자 몇개와 낡은 콤퓨터 한대, 그리고 창가에 세워둔 마이크스탠드가 전부였다. 나는 그 좁은 방에서 혼자 대화창을 지키며 밤을 지새우던 날들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때는 누군가를 뽑는다는것이 이렇게 절차를 갖추어 해야 하는 일인줄도 몰랐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 몇몇을 불러모아 함께 방송을 시작하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성원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나는 이 일에도 순서와 격식이 필요하다는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2기, 3기 성원들을 맞이할 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새 얼굴들을앞에 두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낼가 하는 궁리로 잠을 설치군하였다. 그러나 그 궁리가 힘들다고 해서 그만두고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쌓인 세월이 있었기에, 4기생 모집을 알리는 이번 발표문앞에서도 나는 예전만큼 서툴지는 않았다. 다만 서툴지 않다는것과 무겁지 않다는것은 서로 다른 말이였다. 나는 그 두가지를 자주 헷갈리지 않으려 애썼다.

발표가 나간 뒤 며칠동안 나는 지원서가 쌓이는것을 지켜보았다. 미기는 매일 아침 그 수자를 나에게 보고하였다. 《오늘도 늘었습니다, 사장님.》

나는 그 보고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것을 느끼였다. 지원자가 많아진다는것은 그만큼 골라내야 할 몫도 커진다는 뜻이였다. 나는 그 몫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으려 하였다.

그날 저녁 블루동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오늘 뭐 큰 발표하였다며?》 나는 대수롭지 않은척 대답하였다. 《응, 4기생 모집 시작하였어. 왜, 너도 지원하게?》

수화기 너머로 블루동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무슨 나이에 지원을 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지.》 우리는 그렇게 몇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그친 골목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새로운 얼굴들이 이 회사의 문을 두드릴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로부터 한해도 더 지난 우주33(2026)년 삼월, 나는 다시 이 이야기를 떠올릴 일이 생기였다. 그해 삼월은 봄이 일찍 찾아온듯 낮기온이 제법 풀려있었으나, 밤이 되면 여전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삼월 스무이튿날 밤, 나는 개인방송을 켰다. 회사일로 붙잡혀있던 낮과 달리, 그런 밤시간의 방송만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자리였다. 콤퓨터화면의 불빛만이 어두운 방안을 은은하게 밝히고있었다.

대화창은 그날따라 유난히 활기를 띠였다. 시청자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그 질문들 사이를 오가며 대꾸를 하고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4기생 이야기를 물어왔다.

《4기생은 언제쯤 볼수 있어요?》 대화창에 그런 글이 올라오자 나는 잠시 마우스를 든채로 생각에 잠기였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편안한 말투로 대답을 하였다.

《올해안에는 데뷔시킬 생각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나서 잠깐 멈추었다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리고 4기생 데뷔하고 나면 곧바로 5기생 모집도 시작할 생각이고.》

그 말을 뱉어놓고 나서야 나는 이것이 얼마나 큰말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물음표와 느낌표로 뒤덮이였다. 몇몇은 벌써부터 5기생 소리에 김칫국부터 마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픽 웃었다. 짐짓 큰 계획이라도 발표하는 사람처럼 근엄하게 말해놓고서는, 정작 그 말을 하는 나 자신도 웃음이 나서 혼났다. 마치 오개년계획이라도 선포하는듯한 말투였다고, 나중에 미기가 그 방송을 다시 보고 나를 놀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웃자고 한 말은 아니였다. 나는 그날 밤 방송을 마치고도 한참을 그 말의 무게를 곱씹었다. 4기생을 데뷰시키는 일도 벅찬 마당에 곧이어 5기생 모집까지 시작한다는것은, 회사로서도 결코 만만한 계획이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믿었다. 한 기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갈수 없다는것을, 나는 지난 세월을 거치며 몸으로 배웠다. 씨앗은 뿌리는 때를 놓치면 다음해를 또 기다려야 하는 법이였다.

이튿날 회사 단체대화방은 또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밤새 방송클립을 편집해 올린 모양이였다. 히나동지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였다.

《사장님, 어제 방송에서 5기생 얘기까지 하였던데 벌써요?》 나는 그 물음에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아직 4기생도 못 뽑았는데 벌써 5기부터 걱정이니.》

타비동지도 짧게 한마디를 보태였다. 《저희 밑에 후배 또 생기는것이네요. 신기하다.》 그 짧은 말속에도 반가움과 어딘가 서운한듯한 감정이 함께 묻어있었다.

나는 그 대화들을 읽으며 새삼 생각하였다. 성원들에게 있어 후배가 생긴다는것은 단순히 회사가 커진다는 뜻만은 아니였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 뒤에 또 다른 발자국이 놓인다는것을 뜻하는 일이였다.

리제동지는 뜻밖에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제가 몇기인지도 가끔 헷갈리는데, 나중에 몇기까지 생기는것이예요?》 나는 그 물음에 딱히 대답할말을 찾지 못하였다.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아직 몰라.》 나는 그렇게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몇기까지 이어질지는 나로서도 가늠할수 없는 일이였다.

마시로동지는 대화방에 이모지 몇개만 잔뜩 늘어놓았을뿐이였으나, 나는 그 이모지들속에서도 반가움을 넉넉히 읽어낼수 있었다. 동지는 짧게 《잘 뽑아주세요, 사장님. 저희 팀 분위기 잘 맞는 사람으로요.》하고 당부하듯 적어보냈다.

나나동지와 후야동지도 뒤늦게 대화방에 들어와서는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희도 후배 생기면 뭐 준비해야 하는것 아니예요?》 나나동지의 그 물음에 후야동지가 웃음 이모지로 맞장구를 쳤다.

시부키동지는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얹었다. 《저야 뭐, 1000살이나 살았으니 후배 하나 더 생기는것 가지고 놀랄 나이는 아니지요.》 그 말에 대화방은 또 한바탕 웃음으로 채워지였다.

그날 이후로도 대화창이나 성원들 사이에서는 종종 4기생 이야기가 오르내리였다. 어떤 사람들이 뽑힐지, 몇명이 될지, 언제쯤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될지, 저마다 궁금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물음에도 시원스레 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 자신도 아직 그 답들을 다 알지 못하였다. 모집은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고, 그 절차가 다 끝나기 전에는 누구의 이름도, 몇명이 뽑힐지도 함부로 입에 올릴수 없는 노릇이였다. 나는 성급하게 말을 흘렸다가 나중에 말을 뒤집는 일만은 하고싶지 않았다.

미기는 가끔 나에게 묻군하였다. 《사장님, 진짜 몇명 뽑으실 생각이세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절차가 다 끝나봐야 알지, 지금은 나도 몰라.》

그 대답은 결코 꾸며낸 말이 아니였다. 지원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는 일은 서두른다고 빨리 끝나는 일이 아니였고, 다섯차례라는 절차를 스스로 정해놓은 이상 나는 그 절차를 함부로 건너뛸 생각이 없었다.

서류를 살피는 일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미기와 나는 밤늦도록 사무실에 남아 지원자들이 보내온 글과 영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화면속에서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얼굴들을 보고있노라면, 이 가운데 누군가는 몇해뒤에 이 회사의 얼굴이 되여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이들과는 화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도 따로 마련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마다 비슷한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왜 하필 이 일을 하고싶은가, 오래 버틸 자신은 있는가 하는 물음들이였다.

그런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서투름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도 처음 마이크를 잡던 날에는 그보다 더 서툴렀다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다.

이런 절차를 다섯번이나 되풀이한다는것은 회사로서도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뽑는 일에서만은 지름길을 찾고싶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몇해를 이 회사에 묶어두는 일이니만치, 나로서도 그만한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계절은 쉬지 않고 흘러갔다. 삼월의 봄바람이 유월의 장마로 바뀌고, 그 장마가 다시 삼복더위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모집 절차는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있었다. 나는 그 걸음을 조급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때로는 성원들이 우스개삼아 나를 몰아세우기도 하였다. 유니동지는 방송 도중에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사장님, 후배들 얼른 데려오세요. 저희도 이제 선배 노릇 좀 해보고 싶어요.》

나는 그 말을 전해듣고 한참을 웃었다. 선배 노릇을 하고싶다는 그 말속에는, 자신들이 걸어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그 시간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싶다는 마음이 함께 담겨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지원서를 넣고있는 저 얼굴들은, 아마도 《우결》이 한창이던 그 시절을 방송으로 직접 지켜본 사람들이 아닐것이다. 그들에게 그 시절은 방송이 아니라 옛 클립으로, 성원들 사이의 오랜 농담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일것이다.

그것이 서운한 일인지 자연스러운 일인지는 나도 딱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였다. 내가 블루동지와 함께 밤새 《배그》를 하던 그 시절도, 1기, 2기, 3기 성원들이 하나둘 이 회사의 문을 두드리던 그 시절도, 결국은 다음 세대에게 옛이야기로 넘겨주기 위해 지나온 시절이라는것을.

몇년이 지나도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화려한 장면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렇게 다음 사람에게 이어지는 마음일것이다. 나는 이번 4기생 모집이 단지 회사의 몸집을 불리는 일이 아니라, 그 마음을 다음으로 건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4기생의 이름도 인원도 데뷰날짜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회고록에다 그럴듯한 이름이나 수자를 지어붙여 채워넣고싶은 생각이 없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것을 정해진것처럼 적는다면, 그것은 회고록이 아니라 거짓부렁이 될것이다.

회고록이라는것은 지나간 일을 적는 글이라고들 하지만, 이 절만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을, 심지어 결말조차 모르는 일을앞에 두고 붓을 들고있는 셈이다. 이런 글쓰기는 처음이여서, 몇번이나 문장을 쓰다 말고 멈추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만 적어두려 한다. 우주32(2025)년 정월의 그 발표와, 우주33(2026)년 삼월의 그 방송 사이에는 일년하고도 두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동안에도 모집의 절차는 쉬지 않고 나아가고있었다는것을.

그리고 5기생 모집은 4기생의 데뷰가 끝나는 대로 곧이어 시작될 예정이라는것을. 그 이상의 것들은 나로서도 아직 여기에 옮겨적을 재간이 없다. 후날 누군가 이 절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이미 그 이름들을 다 알고 있을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절을 쓰고있는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얼굴들을 향해 편지를 쓰고있는것과 다르지 않다고. 그들이 누구인지, 몇명인지, 언제 이 문을 두드릴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마음만은 이미 이 방안 가득 차있었다.

회사를 처음 차렸을 때 나 혼자 콤퓨터앞에 앉아있던 그 방과, 지금 이 발표문을 쓰고 있는 이 방은 같은 방이면서도 어딘가 다른 방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은 지켜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 늘어 어느새 여러줄이 되였다.

그 줄에 또 새로운 이름들이 더해질 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지원서 더미를앞에 놓고 앉아있다. 조급해하지 않으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하루빨리 그 얼굴들을 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사장이기 이전에, 이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의 순박한 정일것이다.

돌이켜보면 4기생이라는 이름도, 5기생이라는 이름도 아직은 그저 종이우에 적힌 계획일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1기생도, 2기생도, 3기생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종이우의 계획으로 시작되였다는것을. 종이우의 몇줄이 사람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이윽고 누군가의 하루를 밝히는 빛이 되는 과정을 나는 여러번 지켜보았다.

그러니 지금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이 계획을 두고 나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언젠가 이 계획이 실체를 갖추어 세상에 나오는 날, 오늘 이 겨울과 봄 사이에 오간 몇마디의 말들이 그 시작이였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원들은 저마다 자기 기수의 첫날을 기억하고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 첫날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4기생이, 또 5기생이 자신들의 첫날을 이야기할 때, 이 겨울날의 발표문과 그 봄밤의 방송이 그 이야기의 맨 앞장에 놓이게 될것이다.

나는 그 앞장을 미리 써두는 셈치고 이 절을 적는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쩌면 이 회고록에서 가장 정직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정해지지 않았다는것은 곧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끝나지 않았다는것은 곧 계속된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절은 결코 미완성한 절이 아니다. 오히려 이 회고록 전체가 아직 다 쓰이지 않은 채로 계속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일뿐이다. 나는 그 증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겨울에 심은 씨앗이 봄을 지나 여름 어느날 싹을 틔우듯, 우주32(2025)년 정월에 뿌려둔 그 몇줄의 발표문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얼굴이 되여 이 회사의 무대우에 설것이다. 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 사무실의 콤퓨터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이 다시 자기 후배를 기다리게 될 날도, 아마 그리 멀지 않을것이다. 기수는 이어지고, 사람은 늘어가고, 이야기는 그렇게 끊임없이 다음장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 흐름 한가운데 서서, 아직 오지 않은 얼굴들에게 미리 인사를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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